[대한성경] 야고보서 1장 신자는 역경에서 경건을 이룬다
1. 야고보서는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epistle of straw)’이라고 규정하면서 신학계에 이슈가 되었다. 야고보서는 이신칭의 교리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행위있는 구원을 주장하는 서신인가? 전혀 그럴 수 없다. 구원에서 두 원리가 존재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방편이다. 야고보서는 ‘훈련-권면과 경고’을 위한 서신으로 보면 좋겠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께서 쓴 서신이다(1절).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의 서신이 있다. 1세기 초엽의 교회 상황도 세속화된 지금과 별차이점을 보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본성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부패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야고보서는 부패와 부조리(배움과 실천의 부조화)가 발생한 교회를 훈련시키는 교범이다.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어떤 교회를 지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서신은 교회 이름을 지명했다. 그러나 모든 서신은 ‘공동회람’ 서신으로 모든 교회가 읽도록 기획되었다. 다만 교회 이름이 있고 없고 차이일 뿐이다.
2. 시험, 믿음의 시련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18세기 유럽 지성들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으로 ‘악 존재’에 대해서 철학적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을 전했다. 야고보의 답은 신자를 온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훈련으로 제시한다. 시련에서 신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4절) 구해야 한다(5절).
3. 구하는 방법(6절)은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 시련은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다.
4. 시험을 받을 때 신자의 자세(12-13절). 시험을 받을 때에 신자는 참고 견뎌야 한다(12절). 복있는 사람은 시련을 견디며 주께서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을 사모한다(12절). 그리고 시험을 받을 때에 이 시험이 하나님께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13절).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않고 시험하지도 않으신다(13절).
5. 그렇다면 시험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 욕심이다(14절). 시험의 원인은 인간의 욕심에 있다. 욕심(慾心)은 염려, 걱정, 두려움, 탐욕, 시기, 질투 등이다. 아담와 여자는 하나님과 동등되려는 욕심을 가져 사망에 이르렀다(15절). 시험을 받으면 자기 욕심을 제어하고 제거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기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불명하고, 시험을 주었다고 불평한다.
6.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17절, 참고 마 7:7-12).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그림자가 없으시다(17절). ‘그림자가 없다’는 야고보의 묘사는 매우 과학적이고 시적이다. 그림자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상대에 더 강한 빛이 발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가장 밝은 빛에게는 절대로 그림자가 없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출생했다. 진리의 말씀, 빛으로 신자를 낳았다(18절). 아버지에게서 나온 참 빛은 예수이시다(Deum de Deo, Lumen de Lumine, Deum verum de Deo vero, natum[genitum], non factum, consubstantialem Patri.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중) 참빛이신 예수께서(요 1장) 빛으로 신자를 나으셨다.
7. 순종은 속히 하고 성냄은 더디하라(19절). 육의 본성이 가장 쉽고 잘 나타나는 것이 성냄이다. 성냄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20절). 예수께서 성전 매매 현장에서 나타낸 분노도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이룬다. 가장 큰 인내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다.
8. 신자는 마음에 새겨진 말씀(the engrafted word)이 있다(21절). 고경태는 ‘마음의 할례’를 성령께서 ‘마음의 포피’를 잘라내는 방식으로 제시했다. ‘오직 믿음, sola fide’의 구도는 마음에 성령께서 새긴 율법의 말씀(렘 31:31)과 일치한다. 즉 야고보서는 은혜로 구원된 근거에서 영적 전쟁터(Spiritual Warfield)에 들어온 성도를 훈련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제시한 것이다.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성령의 탄식(롬 8장)으로 성도를 훈련시킨다. 그래서 더러운 것과 악을 버리고, 영혼을 구원할 진리를 온유하게 받는다. 훈련을 견디는 것도 큰 은혜이다. 훈련은 쉽게 받을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훈련을 통과하면 감당한 과제를 기쁘게 받고, 또 훈련 뒤에 있는 목표가 선명하면 훈련을 기쁘게 수납한다.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생명의 면류관을 밝히 볼 수 있도록 하신다(12절, 결정적 성화).
9. 야고보서의 명령.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한다(Just Do the Word, 22절).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22절).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이고, 말씀이 없는 증거이다. 말씀이 들어갔는데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구원할 말씀이 그 마음에 없다. 소는 아무리 진리를 들어도 밭을 갈지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牛耳讀經). 저급한 인간은 결국 짐승에게 비교를 받는다. 인간 중에는 밭을 가는 역할도 못하는 금수(禽獸)만도 못한 존재도 있다.
10. 모택동은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제시했는데, 우리말로는 ‘본보기, 시범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람이라고 했다(23절).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사람은 거울에 비춘 모습만 자기 얼굴로 생각한다(24절). 자기 얼굴은 자기 마음에 있고 상대방의 얼굴에서 빛난다.
율법(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25절)는 자기 얼굴을 항상 보는 복을 받는다. 자기 얼굴에 대한 확신은 자기 손에 들고 있는 거울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술에 있다.
11. 경건은 혀에 재갈을 물려 제어할 수 있는 것이다(26절). 통제하지 못하는 혀를 가진 사람에게 경건은 헛것이다. 즉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혀를 통제할 수 없다. 혀를 통제하지 않는 경건은 없다.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 과부, 환난 당하는 이웃을 온유하게 대하는 언어와 태도이다(27절). 고아, 과부, 약한 자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고, 그 아버지가 신자의 아버지이다. 형제에게 라가(바보)라고 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다. 살인을 일삼는 자, 계명을 범하는 자가 경건할 수 없다. 본성이 일어날 때 경건한 사람은 자기 혀에 잠금장치를 해서 자기 더러움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경계하고 훈련한다. 그래서 결국 마음에 더러움까지 모두 정결하게 하여 깨끗한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경건한 사람이 된다.
'형람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고경태의 성경 66 대략(다니엘까지 대략) (0) | 2017.05.08 |
---|---|
[스크랩] 한국에서신학하기 48강 창세기 7-8장 노아의 홍수 (0) | 2017.04.04 |
[스크랩] 레위기 27장 (0) | 2016.10.26 |
[스크랩] 레위기 26장 (0) | 2016.10.26 |
[스크랩] 레위기 25장 (0) | 2016.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