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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광주역<하> 도로 끝 위치 '철도 전성시대' 자부심

형람서원 2008. 8. 19.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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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하>
도로 끝 위치 '철도 전성시대' 자부심
   
  ▲ 현재의 광주역 주변 전경.  ⓒ광주광역시  
1914년 호남선 철도가 완전 개통됐을 무렵, 광주는 명색이 전남 도청소재지라고는 하지만 교통에 있어서는 산간벽지나 다름없었다. 열차는 광주 시내에서 30여리 떨어진 송정리만을 스치듯 지나갔고,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늘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 시내까지 들어와야 했다.

당시 송정리역에서 시내까지 오는 교통수단은 넷이었다. 자동차와 마차, 그리고 인력거를 타는 것이었고, 그럴만한 돈이 없으면 부모님이 주신 두 다리를 써서 걷는 것 뿐이었다.

시간은 마차로 1시간, 인력거로 1시간 반이 걸렸다. 가장 빨랐던 자동차의 경우에 20분이 걸려 요즘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차비가 만만치 않았다. 편도요금이 75전이었다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치 급료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나마 1910년대 말까지 이렇게 송정리를 오가는 자동차는 두서너 대 뿐이었다.

이런 불편함을 철도로 풀어보려고 1913년 광주경편철도회사가 설립됐다. 한남수 등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설립에 참여했던 이 회사는 철도 부설권을 따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정작 철도를 놓는 일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 뒤 다시 광주에 오주(五州)경편철도란 이름으로 새로운 회사가 설립됐고, 이것이 훗날 남조선철도회사로 이름을 바꿔 철도를 놓기에 이르렀다.

경편(輕便)철도란 협궤철도를 부르던 말이었다. 젓가락처럼 나란히 놓인 두 가닥의 레일 간격이 1.432미터인 지금의 표준궤보다 좁은 철도를 말했다. 1910년대까지 경부·경의·경원 그리고 호남선이 놓이고 나서 20년대에는 이런 협궤철도의 부설이 크게 유행했었다.

호남선 주변에서만 이리(오늘날의 익산)와 전주 사이를 잇는 전북철도, 학교역과 함평읍 사이에 있었던 함평철도가 모두 이런 경편철도였다. 공사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과 당시 철도 붐을 일으키려던 총독부의 계산이 맞물려 생긴 결과였다.

1922년 7월에 개통된 광주~송정리간 철도가 협궤철도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설사 그렇다 했더라도 아주 이른 시기에 표준궤로 바뀌었던 것 같다.

한편, 광주~송정리간 철길 가운데 일부 구간은 오늘날 그 흔적을 더듬기 어렵다. 대략 송정리역에서 옛 운암역까지는 지금과 같은 노선을 사용했지만 운암역에서 광주구역에 이르는 구간은 도시계획으로 그 형체가 거의 지워졌다. 다만, 광주구역 근처 대인광장에서 봤을 때 수창로의 바른편으로 놓인 좁다란 길을 따라 무등경기장 앞 신운교 쪽으로 직선을 그으면 지금의 광주~송정리 간 철도와 만나게 되는데 이 선이 바로 1969년 7월까지 꼬박 47년간 열차들이 드나들던 옛 철길 자리다.

우여곡절 끝에 놓인 철길만큼이나 정거장 건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초창기인 1920년대 광주역 건물은 지붕 처마 끝으로 가대기 같은 차양들이 둘러 처진 목조건물이었다. 1929년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이 충돌했던 당시의 정거장도 이런 모습이었다.

그 뒤 30년대 중반, 역전 광장 쪽으로 삼각형의 박공면이 한껏 강조된 목조건물로 바뀌었다. 비슷한 시기에 '과선교(跨線橋)'란 이름으로 역 구내에 길이 40미터짜리 구름다리가 놓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역 건물 시절에 수많은 남녀가 만주와 남태평양으로 죽음의 길을 떠났고, 또 그네들의 귀국 없는 해방을 맞이하기도 했다.

회한이 많았던 탓인지 역 건물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여름에 파괴됐다. 국군이 물러난 며칠 뒤에 연합군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복 뒤에도 오랫동안 앙상한 뼈대만 남은 대합실을 대충 판자로 둘러막아 사용해 오다가 1961년에야 지금 동부소방서로 쓰고 있는 것처럼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다. 당시 유행하던 건축양식에 맞춰, 수직으로 된 칸막이 기둥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모습을 띄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거장의 위치도 조금 옮겨졌다. 원래 광주구역은 오늘날 동부소방서가 들어선 자리보다 조금 오른쪽, 다시 말해 소방서와 옛 대인동파출소 사이, 현재 구성로란 도로가 뚫고 지나가는 자리에 있었다. 이 때문에 멀리 목포나 송정리 쪽에서 들어와 광주대교를 건너오면 그 도로 끝에 딱 버티고 선 건물, 또 그렇게 보이도록 배치된 건물이 광주구역이었다.

지금이야 철도는 도로교통에 떠밀려난 느낌을 준다. 그래도 오랫동안 모든 교통의 제왕 같은 구실을 했던 게 사실이다. 광주구역의 원래 위치는 그와 같은 철도 전성시대의 자부심을 잘 드러내 보여준 셈이었다. (본 기사는 '광주드림'사의 제공에 의해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

조광철 <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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