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강
제 2 강에서는 “예수의 복음의 특질”에 한하여 논한다. 자료는 바울의 2-3 서신을 중요한 보고를 제외하고, 최초의 3복음서(공관복음)이다.
[요한복음의 문제] 4복음서는 역사적 재료로 사용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저자(요한)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초월한 필력으로 사건을 뒤바꿔 새로운 빛 가운데로 가져오고, 설교를 스스로 조직해서 상상적인 장면을 빌어서 고원한 사상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의 관념, 예수의 인격에 대해서 가치 있는 사료이다.
60년 전에(1899-1900년대 강의) D.F. 스투라우스는 공관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거의 제거하였지만, 60년간에 역사성은 회복되었다. 예수의 사후 20-30년 후에 저술된 작품들이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진술할 수 없으며, 언어 또한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아닌 희랍어이기 때문에 최초의 전승이 기록이 되지는 않는다.
제 4 복음서(요한복음)는 도미니안 황제 때에 어떤 희랍인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마가와 마태는 동일한 사료에 의해서 써졌지만, 제4복음서의 사료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예수의 수난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갈리리 지역에서 사역이 이루어졌지만, 3 복음서는 거의 예루살렘이 사역 지역으로 전혀 생소한 지역의 한계를 갖는다. 하르낙은 먼저 요한복음의 사료를 영감(靈感)과 이성으로 제외시킨다. 다음 단계로 공관복음서의 기적 문제를 다룬다.
[기적 기사에 대한 문제] 30년간 꾸준하게 거부되었던 기적 기사가 역사적인 사료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첫째, 복음서의 기적은 대부분 일상적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종교와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기적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러나 현재는 기적은 종교 문제에서 제외시킨다. 당시에는 자연인과를 알지 못함으로 기적이 일상화된 것이다.
둘째, 훌륭한 사람들의 기적이 보고되는 것은 그의 사후 오랜 세월 뒤에 일어나는 것도 있지만, 사후에 즉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셋째, 시간과 공간 사이에는 일어나는 사건은 운동의 일반적 법칙에 따르는 것,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과율의 파괴로서의 기적이란 있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높은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경험에서 느껴지는 기적을 객관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에서 이 영역이 구별하기는 어렵고, 종교가 존재하는 한 인과관계를 파괴하는 일은 계속해서 발생할 것(공상 혹은 비유적으로도)이다.
넷째, 인과관계는 파괴할 수 없다. 오늘 우리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대세계의 기적의 기사에 대해서 주의 깊은 판단이 요구된다. 지구가 일시 운행을 정지한다고 하고, 노새가 말을 한다든지, 해상의 폭풍이 한마디 말씀으로 잔잔하게 되었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믿을 수 없고 언젠가는 믿게 될 성질의 것도 아닌 것이다.
하르낙이 주장하는 기적에 관한 문제는 리츌이 주장한 인과율에 의한 사고를 정확하게 답습하고 있다.
[기적에 대한 분류] 제군들은 복음서의 기적에 대해서 정당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기적을 분류한다. ① 자연적인 인상 깊은 사건의 과대 평가에서 오는 기적 기사 ② 설화 또는 비유로부터 또는 내적 경험을 외계에다가 투사하는데서 오는 것 ③ 구약성서의 기사를 채우려는 흥미에서 발생된 것 ④ 예수의 정신력의 작용으로 놀랄만한 병의 치료 ⑤ 이해할 수 없는 것
이상의 논술의 결과 복음을 피하는 목적으로 복음서의 기적설화의 배후의 보루를 쌓고 자신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지적의 문제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에 비한다면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고, 인류는 무자비한 필연에 구하길 없이 매여 잇는가, 그렇지 않다면 만물을 지배하는 신, 그 자연을 강요하는 능력에 기원할 수 있는 그리고 그 능력을 체험하는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의 결정적인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생애의 최초의 30년의 역사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예수의 전기는 불가능한데 그것은 전 생애의 1,2년에 해당하는 자료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30년에 대해서]는 복음서를 통해서 추론할 수 있다. 먼저 예수는 랍비 학교에 다녔다고 보기 어렵다. 전문적인 신학의 교양이나 학자의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이에 반해 바울은 정식 율법학교(가말리엘)에서 수학하였다. 둘째, 유태교의 한 분파인 에센파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에센파는 극단적인 율법 준수와 성결을 주장했는데, 예수는 먹고 마셨고, 죄인들과 함께 하였다. 셋째, 만일 모든 사료가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의 공적 활동에 이르기까지 생활에는 격렬한 폭풍우와 위기, 과거와의 단절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넷째, 예수의 생활과 대화와는 희랍사상과의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종교 안에서 살았다. 종교는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두려움 가운데서 호흡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기독교의 본질] - 제 3 강 (0) | 2008.07.01 |
---|---|
희망의 신학이 아닌 절망의 신학으로서의 몰트만 신학-조창훈 (0) | 2008.06.27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조창훈 (0) | 2008.06.27 |
Jϋrgen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희망의 신학』-조창훈 (0) | 2008.06.27 |
[기독교의 본질]- 제 1 강 (0) | 2008.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