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ϋrgen Moltmann, Theologie der Hoffnung, 『희망의 신학』, 이신건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몰트만에게는 미래가 하나님이다.
p.22.
그리스도교는 단지 부록에서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종말론이요, 희망이며, 앞을 바라보는 전망이요, 앞으로 나아가는 행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현재의 타개와 변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신앙에는 오직 하나의 실제적인 문제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미래의 문제이다......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은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이나 세계 밖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예언들을 통해 알려진 “희망의 하나님”,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지니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우리 안이나 우리 위에 가질 수 없고, 처음부터 항상 오직 우리 앞에서만 존재하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이다. (p.23)이 하나님은 자신의 미래의 약속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시며, 그러기에 이 하나님을 우리는 ‘가질’ 수 없고 오로지 생활 가운데서 희망하면서 기다릴 수 있을 따름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에는 내용보다는 오직 희망만 중요하다.
p.24.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술들은 단지 그가 과거에 어떤 자였고 지금은 어떤 자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가 장차 어떤 자가 될 것이며 우리가 그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진술들을 함축한다. 그 모든 진술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다.”(골 1:27)는 것을 말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신앙은 내세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 땅만을 바라본다. 몰트만의 목표는 자유와 정의이다.
p.26.
신앙은 이 현실을 뛰어넘어 하늘나라나 유토피아를 바라보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의 다른 현실을 꿈꾸지 않는다......(p.27) 이 희망 가운데서 영혼은 탄식의 골짜기를 벗어나서 상상 속의 행복한 하늘나라로 날아가지 않으며, 이 땅과 결별하지도 않는다......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희망이 인식하는 것은 하늘의 영원이 아니라 그의 십자가가 (p.28)서 있는 이 땅의 미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은 그가 죽기까지 사랑한 바로 그 인류의 미래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십자가는 이 땅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땅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현실을 알고 현실을 고쳐야 한다. 그러나 몰트만에게는 현실을 고치는 프로그램은 없다. 현실 변혁 위해 투쟁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에 갈등하면서 미래를 희망한다. 삶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희망해야 한다.
p.28.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가 더 이상 주어진 현실을 참아내지 못하며, 그 현실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그것에 저항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상과의 불화를 의미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죄는 절망이며, 신앙은 희망이다. 가장 큰 죄는 희망 상실이다. 이 희망은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p.29.
일반적으로 죄의 기원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사실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죄의 한 측면일 따름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그런 교만의 다른 측면은 절망, 체념, 게으름과 비탄이다......그러므로 유혹은 거인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에 있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약함, 소심, 낙담에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미래가 하나님이다. 현재 삶이 현재이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시간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앞으로 되어질 현재가 하나님이다.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다. 좋아진 세계가 하나님이다.
현재가 영원이다. 현재 있는 것이 영원한 것임, 근세철학위에서 신학 전개 했다. 영원은 여기서다. 미래가 아니다. 신앙인은 현재적이니까 영원을 얻는다. 시간 밖의 미래가 아니다. 존재 자체는 영원이고 현재적 삶이다. 미래에서 좋아질 세계는 여기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미래 삶이 아니고 현재 삶이 영원 얻는 삶이다. 칸트 철학에서 시간을 넘어선 미래는 없다. 현대 신학에서 하나님이 시간 내로 들어오는 것은 없다. 공산주의나 몰트만이나 우리 손으로 창조구조 완전히 바꿈을 목표로 하는데 매력적으로 보인다.
p.38.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자기 자신과 사물에 완전히 전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곧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완전히 현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현재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야훼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현존과 나라를 약속하시고 미래의 전망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미래를 존재의 속성으로 지니시는’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 현재로부터 미래로 탈출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자유로부터 미래와 새로움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다......우리가 희망과 변화 가운데서 그분의 약속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때, 이 하나님은 현존하신다.
몰트만에 의하면, 지식을 추구하는 희망
p.41.
중세기에 캔터베리의 주교였던 안셀름은 지금까지 신학의 표준이 되어 온 명제를 제시하였다.(지식을 추구하는 신 -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 미 명제는 종말론에도 적용된다. 오늘날에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따르는 것이야말로 신학에 결정적 의미를 줄 것이다.(인식을 추구하는 희망 - 나는 알기 위해 바란다.)
몰트만에 의하면, 희망은 다른 내세가 아니며, 영적이지도 않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p.42.
종말론적 희망은 그런 희망을 다른 세상에 떠넘기지 않으며, 그 자신의 미래가 세상을 초월하고 순전히 영적인 본질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지식을 추구하는 희망 종말론의 출발점이다.
p.45.
‘지식을 추구하는 희망’은 종말론의 출발점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19세기 후반의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1차대전 후에는 주석뿐만 아니라 교의학분야에 까지도 연구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p.46.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메시지와 실존과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종말론이 중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현대 개신교 신학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19세기의 개신교 문화권 안에서 신학의 기초만이 아니라 교회와 경건, 신앙의 기초까지 뒤흔들어 놓은 지진과 같은 것이었다......(p.48)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이처럼 이상주의적인 것이라고 배척을 당하고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비판을 받던 종말론이 ‘변증법적 신학’의 창시자들에 의해 주석 분야만이 아니라 이제는 교의학 분야에서도 연구의 중심에 놓여졌다. 1922년에 발표된 칼 바르트의 <로마서> 제 2판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제창하고 있다. “전적으로, 완전히, 그리고 부단히 종말론이 아닌 그리스도교는 전적으로, 완전히, 그리고 부단히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몰트만에 의하면, 약속과 관련된 종말론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푸는 열쇠이다.
p.51.
약속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푸는 본질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파악하였다. 바르트와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으로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이 자존적으로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 통해 하나님이 된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으로 하나님이 된다. 이것은 행동주의이다. 몰트만은 바르트에게는 미래약속이 결여됨을 비판함(p.69)
p.67.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맥락 안에서 자기 계시의 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결합하였다. 삼위일체론은 자기 계시의 전개, 즉 ‘하나님의 말씀’ 사건의 주체, 술어와 대상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생겨난다. 하나님 자신이야말로 곧 계시하시는 자(아버지-역자 주), 계시사건(성령-역자 주)과 계시된 자(아들-역자 주)이다.
몰트만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비판한다.
p.69.
내재적 삼위일체론 이해는 항상 부활의 영인 성령의 역사적-종말론적 특징을 은폐할 위험에 빠진다.
몰트만이 분석한 불트만에 의하면, 계시는 주관성 이해이다. 또한 신앙의 결단이 계시이다. 계시 목표는 인간은 구원이다. 계시가 오므로 인간의 자기 이해가 확실해지며, 선포하면 자기 이해가 이루어진다. 자기 이해하면 그것이 계시가 된다. 계시는 자기 실존이해이다. 계시는 주관을 이해하는 것이다.
p.78.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자아실현 인간의 참된 자기 이해를 목표한다......(p.79) 만약 계시를 통해 그의 진정한 자아가 드러난다면,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신성도 역시 그에게 드러난다...... 계시는 세계관적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말을 건넨다.
설교는 그 자체로서 계시이다......“그렇다면 무엇이 계시되었는가? 만약 계시에 대한 질문이 교리에 대해 질문한다면, 아무것도 계시되지 않았다 … 하지만 만약 인간의 눈이 열려져 그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되고, 자기 자신을 다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이 계시된 것이다......(p.80)계시의 ‘순간’ 속에서 창조와 구원은 하나가 된다. 계시되는 내용은 계시가 일어나는 사건과 동일하다.
현대 신학은 예수는 단지 인간이다. 그리스도는 영으로서 영향력, 감화, 모본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예수가 부활하므로 그리스도 입증하나, 부활자가 미래에 있다. 예수와 그리스도는 모순이라 한다. 계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약속이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희망이다.
p.98.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부활한 예수의 이 동일성을 표명하고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칭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부활한 자의 미래를 미리 파악하는 것들이기도 하다......부활의 현현 속에서 예수는 바로 미래에 참으로 존재할 자로 인식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약속은 미래에 일어날 것을 앞당겨 말하는 것이다.
p.99.
계시는 현존하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특징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특징을 지니며, 그래서 종말론적 성격의 것이다......약속은 현존하는 현실과의 갈등 속에서 세계와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미래로 나아가는 그 자신의 과정을 열어 준다.
어니스트 블로흐는 물질은 열려있으며, 인간도 열려 있다고 한다. 본질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는 자기 손에 있다고 하였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견해를 따라 자기 견해를 전개한다. 또한 여기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약속사건이라 하므로 잘못된 견해를 피력한다. 즉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실재적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아직 약속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p.107.
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 사건의 종말론적 의미는 회상과 기대 가운데서 역사에 대한 감성을 일깨운다......그리스도의 부활의 약속 사건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과 역사를 함께 생각한다는 것은 세계나 역사로부터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계를 하나님과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역사로 증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낙담과 절망이 죄의 뿌리이다.
p.138.
낙담과 절망은 죄일 뿐만 아니라, 실로 죄의 뿌리이기도 하다.
몰트만에 의하면, 미래가 하나님이다.
p.158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구약성서의 하나님으로, 출애굽과 약속의 하나님으로, ‘미래를 존재의 속으로 지니시는’ 하나님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정통교리의 영원과 구속개념을 비판하며, 자기의 견해를 전개한다.
p.177.
지나가는 시대와 오고 있는 시대를 구분하는 고대의 묵시사상적 이원론은 오고 있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그리고 사라지는 것을 허무한 것으로 이해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으로 바뀌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늘로부터 구속을 받은 자들로 바뀌었다. 지나가는 시대의 백성은 이 세계에 대한 속한 자들로 바뀌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오직 약속의 종말론만이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다.
p.181.
오직 약속의 종말론만이 세계와 세계 속의 인간 실존의 신화적 환상적 이해 방식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이 세계의 시련과 모순, 불신앙을 참으로 진지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p.194.
현대의 논쟁은 ‘부활이 역사적으로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자주 지적되었다시피, 역사적인 것의 개념을 형성해 온 역사 경험들은 현대에 이르러 인간 중심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역사‘란 곧 인간의 역사를 의미하며, 역사의 본래적 주체는 형이상학적이고 가정적 의미에서 인간이다. 그렇다면 이런 전제 아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발언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며, 바로 그래서 ’역사적으로‘ 의미 없는 주장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이 실제로 없기 때문에 부활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질문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돌려야 한다.
p.195.
하지만 예수의 부활의 현실성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성서 본문을 통해 단지 역사적 실재와 대면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를 다르게 경험하고 다르게 해석하는 지평과도 대면한다......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의 현실성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되돌아가며, 역사적 질문이 출발점으로 삼는 역사의 근본 경험을 문제시한다......이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의 방향을 되돌려서 역사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로 하자.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오직 부활은 말뿐이다. 부활은 역사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불가능하다. 제자들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경험하고 부활한 자로 경험하는 것이 부활이다.
p.205.
그리스도의 부활도 역사적 전승과 역사적 재구성의 의심스러운 형태 안에서 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부활 신앙과 선포 안에서 그에게 하나의 현실로 다가온다. 이 현실은 인간의 실존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를 결단 앞에 세운다. 역사적, 객관적 연구 속에서는 부활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선포와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에게 매우 가까이, 그리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의 문제 안에서 반복할 수 있고 응답할 수 있는 실존의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이처럼 오늘 신앙의 설교를 직접 들음으로써만, 오늘 주님을 바라봄으로써만, 오늘의 구원을 주는 주님의 절대적인 명령에 오늘 순종함으로써만, 우리는 부활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된다. 부활의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케리그마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에 직면하여 우리는 더 이상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없다. 오히려 케리그마는 ‘우리가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예수를 부활한 자로 선포하는 설교는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움직여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현실’로 나타나도록 설교해야 한다......(p.206) 이처럼 ‘현실’을 실존과 관련된 사건으로, 혹은 ‘마음과 양심에’ 다가오는 사건으로 이해함으로써, 역사 이해의 새로운 방식이 생겨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증언되는 부활 사건은 결코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처음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확인은 ’부활 신앙은 역사적 질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신학적 확인과 일치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단지 부활했다는 선포를 듣고 믿음으로 부활자체가 의미있다.
p.207.
그렇다면 부활의 ‘현실’은 더 이상 예수에게 일어난 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증명 할 수 없지만 매순간마다 현존하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오늘’속에서 케리그마와 신앙의 현실과 일치한다. 부활 보고는 ‘보고’가 아니라 신앙으로 인도하는 설교가 되길 원한다는 사실과, 예수의 부활의 현실과 보편적인 선교적 선포는 서로 분리할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인식하게 되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 선포의 역사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된다. 그 대신에 인간 실존의 보편적, 역사적 문제의 틀 안에서 마음과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혹은 역사적인 자기 이해를 제공함으로ㅆ 이 선포의 정당성을 실존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오직 약속일 뿐이다. 부활은 종말론적이다.
p.210.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은 오직 약속의 상태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아직 자신의 시간을 앞두고 있고, ‘역사적 현상’으로서 오직 그의 미래와의 관련성 안에서만 파악되며, 이를 인식하는 자에게 역사적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를 알려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주도적인 질문 아래서 부활의 보고를 언제나 종말론적인 보고로도 읽어야 할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은 사명의식을 가질 때 역사적인 것이다.
p.223.
오직 우리 자신의 역사의식이 사명 의식으로 표출될 때, 비로소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일컬어 질 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은 영원전부터 현존하는 실재가 아니라 단지 십자가에서 발생되었다.
p.233.
여기서 ‘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열광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몰트만에 의하면, 부활한 자와 십자가에 달린자는 실재적으로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동일하다. 결국 말장난이다.
p.241.
오직 부활한 자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수수께끼와 같은 변증법적 동일성만이 원시 교회의 그리스도론과 예수의 메시지 자체의 연속성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복음 선포는 진리전달이 아니라,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할 뿐이다.
p.323.
복음 선포는 교리 속에서 지혜와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율법에 따른 인생의 도리와 그 변화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을 알리는 것, 이를 드러내는 것, 이를 천명하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상관없이 모두 의로운 자들로 인정하신다. 이런 자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해야 한다.
p.326.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하나님이다.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 있듯이,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였다......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과 세리와 사귐을 나누는 그의 은혜로운 행위 안에서 생생하게 드러나고,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안에서 동터오며,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건 안에서 효력을 발휘한다......그것은 죽은 자들,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다시 살리는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선포의 과정과 순서는 이방인들을 부르는 것,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 살아있는 희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은 허무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구원을 잃어버린 자들, 하나님이 없는 자들, 죽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창조적인 사건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정통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면서 복음을 선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몰트만이 성경과 정통 기독교를 왜곡하는 것이다.
p.327.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보충
몰트만에 의하면, 기독교는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데 종말론 상실하고 나니까 현실 안주하였다. 이것은 잘못이라 함. 헤겔 이전에는 본질은 과거에 있음. 헤겔은 본질은 현재에 있음, 몰트만은 본질은 미래에 있다. 그러나 이 미래는 우리가 이루는 미래이지, 주님의 오심이 아니다. 틸리히는 죽음은 비존재이다. 신은 존재, 용기, 희망이다. 신존재는 객관적 존재아니다. 신은 내존재 물음에 대한 답이다. 낙심한 자에게 용기이다. 근세의 이념은 자연과 자유의 관계에서 자유 극대화 위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 자연을 제약해야 한다. 몰트만의 이념은 사회와 자유의 관계에서 자유 극대화 위해 사회를 극복해야 한다. 사회를 제약해야 한다.
'기독교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Re:[기독교의 본질] - 제 3 강 (0) | 2008.07.01 |
---|---|
희망의 신학이 아닌 절망의 신학으로서의 몰트만 신학-조창훈 (0) | 2008.06.27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 조창훈 (0) | 2008.06.27 |
[기독교의 본질 ]- 제 2 강 (0) | 2008.06.19 |
[기독교의 본질]- 제 1 강 (0) | 2008.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