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석에 입각한 로마서성경공부 9강(로마서5:3-11)
1. 성도들에게도 환난이 있습니까?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연단-체험, 인격으로 번역됨. 스토아학파는 고통을 부인함.
성도들이 그들의 당하는 환난을 자랑한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그들이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거나, 역경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주는 아픔으로 인하여 고통을 비탄에 잠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만일 그들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아무런 인내도 그들이 당하는 환난에서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란 환난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환난을 만나게 되면, 대부분의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터뜨리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내면적인 순종-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불어 넣어진 것이다-과, 위로-이것은 바로 그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가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대신하게 되었을 때에는, 환난들은-완악한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는 이 환난들은 다만 분노와 불만만을 산출해 낼 뿐이다-인내를 낳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점층법을 써서 야고보가 다른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는 그가 말하기를,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약1:3)고 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다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그들을 조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연단’이라는 단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에 대해서 갖는 체험이다......야고보는 성경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라서, 환난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바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에 의하여 자기 종들을 시험하시고 시련을 겪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시련들이 흔히 시험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인내를 하게 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인내심을 바르게 향상시킬 수가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로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없이는 우리가 결코 살 수 없으리라는 장래에 대한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소망이 체험(연단)에서 나온다고 덧붙이고 있다.
2. 성도들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부은바 됨이니가 강조됨-주입됨.
우리는 환난에 의해서 자극을 받아 인내하게 되며, 인내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증거이다.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격려하여 소망을 품게 한다. 이는 아무리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 지쳐 탕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고 가장 풍성한 위로이며,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갈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는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재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시하고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실 때에는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재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대하실 때, 우리의 바로 그 재난들은 분명히 번영과 기쁨으로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부성애(바울은 이 점을 8장에서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를 인하여, 십자가의 모든 고난들을 뒤엎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 마음 속에 주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좋은 선물들이 인간들의 귀와 눈과 마음에게는 감취어져 있고, 성령만이 그 선물들을 나타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분사인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은 아주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너무도 풍성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렇듯 그 사랑이 우리 몸의 전체에 넘치도록 부은 바 된 까닭에, 그 사랑은 역경 중에서 우리의 슬픔을 달래주며, 달콤한 조미료처럼 우리의 환난에 감미로움을 더해 준다.
바울은 또한 말하기를, 어거스틴이 잘 지적한 대로, 우리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성령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신’, 즉 부여된 것이라고 하였다.
3. 우리가 어떠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6-7,10) 여기서 연약할 때라 함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6-8)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
연약할 때-경건치 않은 때-죄인되었을 때-원수되었을 때
연약할 때-로마교는 병든 상태로 해석, 그래서 자유의지는 그대로 존재한다 주장. 알미니안과 웨슬레는 선행은총으로 자유의지가 회복된다 주장. 그래서 “결단”을 강조함. 선행을 행할 수 있다 주장.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경의 통일성에 입각하여 해석할 때 죽은 상태로 해석함. 전적 부패로 인한 전적무능력주장.
어떤 주석가들은 ‘연약할 때’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처음 세상에 나타나시기 시작하던 시기를 뜻한다고 주장하며, ‘아직 연약한 사람들’이란 율법을 수학하던 자녀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본문의 말씀은 모든 기독교 신자를 가리키며, 여기에 언급된 때는 각 신자가 하나님께 화목되기 전의 시기이다. 우리 모두는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기 까지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연약한’ 자들이란 죄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는 곧 이어서 바울이 그들을 ‘경건치 않은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연약하다는 말을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할 때, 즉 우리가 전혀 무가치하고 하나님에 의해 귀여움 받기에는 부적합한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믿음은 경건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자비를 인간들에게서는 결코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10절.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때문이었다는 점을 우리가 깨닫는 것 말고는 달리 하나님의 값있는 긍휼(값있는은 “값없는”이 아닐까, 번역오류같음-조창훈견해) 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풀어진 은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이 죽으심이 하나님과의 우리의 화목의 시작이 되어, 그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속죄로 말미암아 전에는 우리를 적대시하던 것이 정당했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4.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받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또한 한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의 미래는 어떠합니까?(8-9)
구원의 4원인-형상인, 질료인, 도구인, 목적인
질료인-그리스도의 피
성도의 견인
예수님의 소극적 고난- 십자가에서 고난, 피흘리심
예수님의 적극적 고난- 율법의 적극적 준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사도바울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의 확신과 안전을 확립시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을 확증, 즉 선언하시는 것은, 그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사랑이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사랑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바 없이,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대로(요3:16) 그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죄인들’이라는 단어는 (다른 많은 구절들에서처럼)전적으로 부패하고 죄에 젖은 자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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