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 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 요한의 출생
칼빈은 누가복음만이 “머리말이 있음”으로 독특성을 제시하며, 공관복음 주석의 시작 본문이 누가복음이다. 비록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에게 쓰여진 것이지만, 모두가 함께 읽어야 할 참된 교리(sound doctrine)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데오빌로가 “복음의 신실한 수호자”로서 힘써 이 교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1-4절) 헌사: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책을 헌정하여 복음을 확실하게 함,
(1-17절) 누가복음의 시작과 제사장 사가랴에게 임한 계시.
(1-4절)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책을 헌정하여 복음을 확실하게 함, (5-7절)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자녀가 없는 형편에, (8-17절) 사가랴의 차례에 성소에서 봉사할 때 주의 사자가 임하여 요한을 낳으며(나실인)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을 할 것을 계시하였다.
(18-25절) 사가랴의 의심과 엘리사벳의 임신
(18-23절) 주의 사자의 메시지를 의심한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 직무 수행을 마치고 귀가한다. (24-25절) 그 후로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5 개월 동안을 은둔하여 지낸다.
(26-38절) 마리아에게 임한 수태고지
세례 요한의 잉태를 고지한 가브리엘은 여섯 달에 예수의 잉태에 대해서 마리아에게 고지한다. 사가랴는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순종하여 침묵한다.
(39-56절) 두 여인의 만남과 찬미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가 3개월을 함께 거한다. 엘리사벳의 집에 방문할 때 6개월 된 복중의 요한이 반응하며(39-41절), 그녀는 성령이 충만하여 찬양을 한다(42-45절). 이에 마리아가 화답하여 찬양을 한다(46-55절).
(56-66절) 세례 요한의 출생: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
마리아가 돌아간 후(6+3=9개월)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는다. 사가랴는 계시를 받은 대로 “요한”으로 짓고, 입이 열리자 하나님을 찬송한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된다.
(67-80절) 사가랴의 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한다. 다윗의 집이 일어난다(69절). 그것을 위해서 예비하는 사역자이며(76절),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알게 하며(77절), 어두움에 빛을 비추는 사역을 하게 된다(78절).
(1-17절) 누가복음의 시작과 제사장 사가랴에게 임한 계시
(1-4절)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책을 헌정하여 복음을 확실하게 함, (5-7절)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자녀가 없는 형편에, (8-17절) 사가랴의 차례에 성소에서 봉사할 때 주의 사자가 임하여 요한을 낳으며(나실인)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을 할 것을 계시하였다.
(1-4절)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사실”(the things, 각 번역에서는 “일”로 번역함)대로 기록하시길 원하셨다. “사실”은 “peplhroforhme;nwn” 전혀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확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의 권위가 우선이고 성령의 내적 확증이 사건의 역사적 지식을 주도해야 한다.” 비록 사실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 사실을 확증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록은 구전(口傳)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록을 통해서 인간의 변덕스러움에 의해서 조작되지 않고, 후세에 안정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전하도록 하셨다. “이 세상의 무례가 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의도적으로 자기들 멋대로 애매하고 모호한 문제들을 출감함으로서 끝없는 변화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는 “붓을 든 사람이 많음(2절)”을 지적한다. 즉 당시의 많은 문서들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을 인정하는 것이며, 정당하지 않는 복음의 증거를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 당시에는 ‘니고데모의 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섭리로서 거룩과 위엄을 보여줄 글을 세워 주셨다.
누가는 사실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폈고”, 그리고 데오빌로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다(3절). parhkolouyhko;ti은 ‘철저히 조사하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철저한 조사인지 칼빈은 데모스데네스가 사용한 용례를 제시하며 철저함을 강조한다.
(5-8절) 칼빈은 누가가 요한에서부터 시작함이 “새벽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설명한다. 즉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자기가 깊이 살핀 것을 깊이 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특별하게 세례 요한이 일반 인간의 출생과는 조금 구별된 배경을 제시한다. 즉 그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며, 요한은 자신이 회개를 선포할 때부터 백성들에게 존경과 추종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5절에서 ‘헤롯’의 때에서부터 시작한다. 새벽 미명의 상태이다. 메시야의 나라는 유다 지파의 줄기에서 등장해야 한다. 그런데 미카비 일가들이 일어 설 때에 유다 지파는 거의 피지배층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헤롯이 통치할 때에는 유다 지파의 홀에 대한 희망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유다 지파의 왕권이 설립되었지만, 멸망되었고, 다시 수립되어야 한다. “다윗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것이 파괴되어도 그가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것이며, 이새의 뿌리에서 등장한 메시야 왕국의 통치는 영원할 것이다.” 즉 유다 지파의 몰락과 보이지 않는 메시아의 도래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기다리는 백성들은 새벽 미명에서도 소망을 갖고 있었다.
칼빈은 다윗 왕국의 재건에 대한 여명으로 “아비야 반열”에서부터 이해한다. 즉 다윗이 정비한 제사장 가문의 일정한 배열이 등장한 것이다. 엘르아살의 아들 아비야는 여덟 번째 반열이다. 그리고 아론 가문의 딸인 엘리사벳으로 제시하여 가문의 탁월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6절)이었다. 누가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의(義)라고 정의한다.
“계명과 규례(e]n pa;saiv tai#v e]ntolai#v kai' dikaiw;masin tou# kuri;ou, all the Lord'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법령) blamelessly)1)”는 “규례는 예배의 여러 의식과 관련되어,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성직의 수행에 관한 것”이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내면적인 실천을 앞세우는 사람), 모든 절차에 대한 실천 또한 성실히 수행했다는 것이다. 즉 율법 전체는 계명과 규례가 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계명과 규례에 충실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즉 죄 사함에 의한 값없이 주시는 화해와 매일 용서를 생활화한 것이다. 이러한 의의 전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죄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를 근거한다. 칼빈은 매우 신중하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의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착시킨다.2)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요한을 출생시키셨다(7절). 구약에서는 이삭, 삼손, 사무엘, 그리고 이사야의 아들이 특별한 방법 혹은 계시로 출생하였다. 마태복음에서 특별한 방식의 출생은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이다. 이러한 특별한 방법의 출생은 백성들에게 성육신을 믿도록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고후 11:2)3)이다.
(8-9절) 사가랴가 반열의 차례를 따라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주의 성소에는 혼자 들어가며(8절), 모든 백성들은 밖에서 기도하였다(9절). 칼빈은 한 사람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한 번에 제사장 한 사람’이라는 원칙으로 제시하며, “분향의 의미가 그 백성들의 기도의 향기가 오직 한 중보자의 희생을 통해서만 하늘에 상달됨”을 뜻한다고 하였다.
사가랴는 제사장 직무를 “하나님 앞에”(7절) 행하였다.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갖는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하려고 하나님 면전에 나서는 그러한 태도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사장을 앞세우지 않고는 하늘에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소명의 직무를 감당해야 한다.
(11-14절) 성소에 나타난 주의 사자(an angel of the Lord, a/ggelov kuri;ou)로 말미암아 놀람을 금치 못하는 사가랴에게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계시한다.
칼빈은 11절에 대한 주석을 하지 않았다. 먼저 ‘주의 사자’는 칼빈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영원한 성자에 대한 이해에서 주의 사자는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이 주석하지 않는 것은 19절에서 그가 ‘가브리엘’인 것을 지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에서 주의 사자와 구별되어, 신약에서 주의 사자는 가브리엘로 등장한다.
그리고 “향단 우편에 선” 주의 사자는 백성의 기도의 향기가 상달됨을 의미한다. 즉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들의 소망은 사가랴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사가랴는 주의 사자의 등장에 “놀라며 무서워”하였다(12절). 하나님의 임재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여, 인간의 교만을 꺽고 겸손하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진정한 체험은 하나님 앞에서 떨며 무서워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임재 체험은 황홀과 눈물과 감격인데 반해, 성경의 임재체험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 있는 겸손이다.
인간의 이러한 공포는 오직 하나님의 위로하심으로 해방될 수 있다(13절). 그리고 사가랴의 기도의 대한 응답을 선언된다. 사가랴는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가랴가 성소에서 자기 개인 기도를 했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정황으로 사가랴가 율례와 규례를 신실하게 지키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공적 사역에서 개인 기도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인 ei]shkou;syh 는 ‘제1부정과거 직설법의 형태’이다. 즉 과거에 행하여진 것을 의미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듣고 계셨었다는 것이다.
사가랴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 “요한”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다.
(14-17절) 요한에 대한 주의 천사의 계시: 모두가 기뻐함, 나실인의 규약, 예비케하는 사역으로 정리된다.
먼저 14절에서 요한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사가랴의 가정의 기쁨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넘쳐 흐르게 된다.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한 ‘큰 자’가 된다. 큰 자는 요한이 성취한 업적의 위대함이다. 그는 특별한 임무로서 위대하고 독특한 사역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여인이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마 11:11)이라고 하셨다. 요한은 나실인의 규약으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아야 한다. 요한은 나실인으로서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한은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 그래서 마리아의 태에 있는 예수를 만났을 때 요한은 반응을 보였다(눅 1:41). “충만”은 “성령의 은사의 풍성함에 대한 특이성과 독특성을 표현하려는 뜻”이다. 풍성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성령으로 충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16-17절)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오게 하는 것(16절)과 주를 위해 세운 백성을 예비하는 것(17절)이다. 칼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처럼, 로마 카톨릭이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회의 죄악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황무오설과 수권성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belief는 들음에서 생기지만, faith는 여호와의 내적 계시의 조명에 의해서 생긴다고 제시한다(한글번역). (that faith cometh by hearing, (Romans 10:17,) but that those only to whom the Lord inwardly reveals his arm (Isaiah 53:1; John 12:38) are so enlightened as to believe., ccel.org 번역) 칼빈은 들음에서 생기는 것과 주께서 내적으로 계시하는 사람들에게 조명해서 주시는 것을 구분한다.
17절)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에서 칼빈은 엘리야의 영이 요한의 몸에 들어왔다는 주장이 피타고라스의 주장과 동일하여 가치를 전혀 두지 않는다. 즉 엘리야가 탁월하게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야의 탁월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안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과 엘리야의 공통점으로 흩어진 백성들에게 일치된 믿음으로 모으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주는 것은 문자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조상들이 언약을 깨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다면 좋을 것이다. 메튜 헨리(Mattew Henry)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모두가 일치하는 것은 한 믿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의인의 슬기로 돌아오게 함”으로 제시한다. 지상의 최고의 지혜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창조주와 구속주를 믿는 것이다. 거스리는 자들은 불신자로서 자기 지혜로만 행동하는 악한 사람들이다. 즉 거스리는 자들이 하나님과 평화(화해), 그리고 사람과의 평화(화해)로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주를 위해 세운 백성을 예비하는 것”이다.
(18-25절) 사가랴의 의심과 엘리사벳의 임신
(18-23절) 주의 사자의 메시지를 의심한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 직무 수행을 마치고 귀가한다. (24-25절) 그 후로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5 개월 동안을 은둔하여 지낸다.
(18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사가랴는 항상 자녀를 위해서 기도했지만, 정녕 기도가 응답이 되었을 때에는 당황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자기의 처지에 대한 고백은 마치 아브라함의 항의와 유사하다. 그리고 사가랴는 “ti; gnw;somai tou#to e]gw',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How can I be sure of this?” 자신이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탄식을 한다. 이러한 의심은 마리아의 고백과는 비교된다.(1:34-45,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Pw#v e/stai tou#to, How will this be).
칼빈은 득남의 소식을 듣고 웃은 아브라함과 사라, 표적을 구한 기드온,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와 사가랴의 상태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기록된 문자로는 구별하기 어렵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구분하신다는 것이다. 사가랴가 자기의 약한 존재에 얽매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믿음이 없는 상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는 되지 않는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적용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임, 미래의 계획에 대한 지나친 번민 들을 사가랴의 의심과 비교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사탄의 간계와 수작에 넘어가는 것으로 제시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비록 나의 이성의 한계, 능력의 한계, 상황의 한계를 초월하지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19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칼빈은 가브리엘이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로 자신을 제시하여 심부름하는 직무를 감당하는 것을 제시한다. 즉 하나님의 종(Messenger)로서 직무를 수행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 복음 전도는 하늘에서 직접 이 땅에 전파되는 것이 아닌데, 이 복음 전도는 하늘의 천사들이 영원하신 성자의 구속을 찬양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가 가져온 율법으로 제시한다.
주의 사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는 표적을 받았다(20절). 개역개정에서는 “말 못하는 자”로 번역되었다. 칼빈은 이러한 현상을 “사가랴가 이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침묵 가운데 귀다아 듣고 있어야 했을 그가 반대로 항의하면서 그 침묵을 깨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면 신앙은 침묵을 지켜야하며, 응답으로 아멘으로 답해야 한다.” 사가랴의 부족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사가랴를 통해서 성취하게 된다. 아버지의 말씀은 인간의 약점이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인하여 양속을 성취하신다. 구약에서는 아하스 왕이 비록 구원의 약속을 거절하지만 구원됨을 볼 수 있다(사 7장).
사가랴는 기드온의 표적과 다르게 징벌적인 면이 있다. 그것이 칼빈이 지적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다른 면이다.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었지만 말씀에 대한 확신은 확실하게 심겨지게 된 것이다. 혹자는 벙어리 됨이 징벌 의미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으로서 벙어리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Alford)4). 그리고 귀까지 먼 것으로 제시함은 논리에 무리가 있는 추측까지 간 것이다. 징벌적 의미가 없다는 이해는 사가랴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아무리 사가랴에게 유익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가랴는 10개월 동안의 침묵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징벌적 의미가 있다.
성소 밖에서 사가랴를 기다리는 백성들은 지체되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21절). 당시의 성소에 들어간 제사장들은 속히 나와서 뒤의 순서를 진행하였다(탈무드, Lenski). 제사장이 성소에 나와서 축복의 선언(민수기 6:24-27)을 해야 예식이 끝나게 된다. 그런데 나온 제사장의 입은 닫혀 버렸다.
성소에서 나온 사가랴는 자신의 몸짓(형용(形容), making sing, gestures)으로 의사를 표현한다(22절). 백성들은 사가랴가 성소에서 이상을 본 것으로 생각하였다. 400년의 침묵을 깨고 여호와의 이상이 성전에 나타난 것이다. 비록 성전이 이방인이 건축한 헤롯 성전이었지만,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놀라우신 은혜로 이상을 보이신 것이다.
성소의 직무를 마친 사가랴는 집으로 귀환하였다(23절). 사가랴가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은 아내와 구별되어 성소에서 거하였다. 그래서 거룩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거룩한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생활의 양식을 바꾼 것이다. 로마 교회가 이것을 성직자의 독신 생활로 연결시키자, 칼빈은 사제들의 독주를 마심에 대해서 용인함을 비판한다. 반쪽만 지키는 것은 전체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겔 44:21). 칼빈은 당시의 제사장들이 중보자의 그림자 역할로서 백성들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었지만, 구원의 완성 후에는 진정한 중보자께서 세워지셨음으로 교회의 사역자와 목사와 전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복음과 율법의 구별에서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율법의 완성 시대이다.
(24-25절) 엘리사벳의 임신
엘리사벳은 수태하게 되었다(24절). 그리고 5 개월 동안 사실을 숨겨 두었다. 사가랴는 엘리사벳에게도 계시된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자발적으로 5 개월 동안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혹자들은 엘리사벳이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감추었다고 이해하기도 하였다(호크마 주석). 그러나 엘리사벳은 불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부착해 있었다(칼빈). 25절에서 ‘부끄러움을 없게 하심’은 오히려 임신됨이 자랑스러운 일이다. 늙은 엘리사벳이지만, 임신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엘리사벳은 이 비밀에 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기적을, 그것이 확실히 되기 전에 인간의 의해서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엘리사벳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돌아보신다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실 것을 믿었다(25절). 그녀의 전 생애에서 불임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고하심으로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식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다. 그래서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유업이며, 열매이며 상이 된다(시 127:3). 엘리사벳은 노년, 불임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 잉태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엘리사벳의 일생의 부끄러움은 가장 큰 기쁨이 되었다. 엘리사벳의 기다림의 결국은 아이의 잉태됨으로 모든 시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한나가 성전에서 응답의 확신으로 슬픈 기색이 사라진 것과 유사하다. 생산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하나님의 크신 복으로 변화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의 수치인 불임을 임신되게 하여 기쁨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은 현재 상태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이 실재화되어 기쁨이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란다.
(26-38절) 마리아에게 임한 수태고지
세례 요한의 잉태를 고지한 가브리엘은 여섯 달에 예수의 잉태에 대해서 마리아에게 고지한다. 사가랴는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고,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순종하여 침묵한다. (26-33절)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한 가브리엘, (34-38절) 마리아의 반응.
(26-27절) 마리아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있는 사람을 선택하셨다(26절).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서와 다르게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마태복음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있지만, 동방의 박사들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갈릴리와 목자들에게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구석진 나사렛 사람을 택하셨다. 최고의 소외된 지역 나사렛, 은둔의 여인인 동정녀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강한 예루살렘과 귀인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약혼한 처녀를 선택하셨다(27절). 칼빈은 오리겐이 사탄을 속이기 위해서 숨기기 위해서 약혼한 처녀를 택했다는 의견을 거부했다. 나사렛에서 동정녀에게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는 계시가 완성될 때 까지 드러나지 않은 것이었다.
“정혼한 처녀”에게 잉태된 것은 요셉이 다윗의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관례에 따라 마리아는 합법적으로 다윗 가문의 사람이 된 것이다.
(28-38절) 수태를 고지하는 가브리엘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
1차 대화에서는(28-29절) 천사의 은혜로운 인사와 이에 대한 마리아의 당혹감이 나타나며, 2차 대화(30-34절)에서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한 천사의 재확인과 마리아의 설명 요구가 뒤따른다. 그리고 3차 대화(35-38절)에서는 천사의 대답과 마리아의 순종을 보여준다.
KJV는 “Hail, thou that art highly favoured”로 번역하였다(28절). 가브리엘의 등장에 처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29절). 칼빈은 가브리엘이 은혜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받아드리도록 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엡 1:6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천사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덧붙여서 격려하였다. KJV에서는 “blessed art thou among women.”이 첨가되어 있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아베 마리아(Ave, Maria, Hail Mary, 안녕 마리아)'라고 기도의 인사에 대해서 부당성을 주장한다. 형식적으로 ‘아베마리아’를 외우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29절) “생각하매”를 한글 번역에서는 취했지만, 영역에서는 wondered(NIV), cast in her mind(KJV), kept pondering(NASB)으로 번역하였다. NASB만이 숙고한 것으로 번역하였다. 원어의 의미는 '별개의 논거(論據)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합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이며 반대할 의사가 없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리아는 놀람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말씀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된다. 칼빈은 이것에 대해서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그저 우리를 충격적으로 놀라게만 하는 것은 아니며, 둘째, 하나님의 섭리를 대할 때 경외와 존경(fear and reverence)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30절)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무서워 말라(Do not be afraid)”고 당부한다. 마리아는 놀랐지만, 바로 평정심을 찾았다(29절). 그런데 천사는 다시 무서워 말라고 당부한다. 그것은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다”는 것은 한역과 영역에 차이가 있다. 영역에서는 ‘have found’로 번역하였다. 원문의 ‘휴레스’가 ‘발견하다’는 것이 원문의 뜻이기 때문이다. 원문대로 직역한다면, “너는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발견했다.”고 된다. 칼빈은 “누가는 사람이 호의를 발견한 것에 대한 것이 히브리적 용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은혜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의미가 그녀가 찾은 가운데 발견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에게 값 없이 제공된 것이라는 것이다.5)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사야의 예언(사 7:14)에서는 “임마누엘”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로 인용하였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예수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다. Marcion과 Mani의 오류를 충분히 반격할 수 있다. 즉 예수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다. “율법 시대에는 그림자로만 드리웠던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완전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비유적으로 통했던 것이 그분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32-33절) 예수에 대한 예언. 예수는 (1)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아들이라 일컬음, (2) 다윗의 왕좌에 앉아 영원한 나라를 세운다.
32절) 예수님께서는 ‘큰 자(be great)’가 되신다. 세례 요한은 “주 앞에서 큰 자(15절)”가 된다. 세례 요한의 위대성은 예수의 위대성과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높으신 이의 아들(the Son of the Most High)’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히 1:5)6). 칼빈은 Servetus의 주장을 반격한다. “The future tense of the verb, he shall be called the Son of the Highest, is tortured by that filthy dog7) Servetus to prove that Christ is not the eternal Son of God, but began to be so considered, when he took upon him our flesh. This is an intolerable slander.”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을 때에 취함되었다고 고찰하였다. 칼빈은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해서 매우 격하게 거부한다.
예수는 다윗의 보좌를 재건하신다(32절). “그리스도의 왕좌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도록 하실 예정이었다.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집 안으로 모아 들이는 사람은 모두 참 이스라엘로 간주된다.” 영원한 통치를 하신다(33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후견인이 되어 영원한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34-38절) 가브리엘의 고지에 순종하는 마리아
마리아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가브리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말을 듣고 순종한다.
34절) 마리아는 처녀인 자기가 임신한다는 것에 대해서 놀람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지상적인 것을 초월해서 역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연적인 상태는 자연 상태가 고치지 못하며, 자연을 능가하는 것이 자연을 회복하게 된다. 무너진 다윗의 왕좌를 회복하는 것은 육신의 다윗의 혈통으로는 불가능하여, 영원하신 아들께서 등장하여야 한다. 그 길로 동정녀가 지목되었다.
처녀인 마리아게 질문하는 것은 “경건한 질문이요, 겸손한 질문이며, 경이에 가득찬 질문”이다. 마리아는 사가랴처럼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의 방법을 구하는 것이다.
35절) 가브리엘의 답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잉태의 방법이 성령으로 규정한다. “성령이 임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의미한다. 이 성령의 활동이 구름처럼 내려와 인간적 시야를 가리게 한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참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지만 타락한 본성의 오염은 전혀 취하지 않게 된다. 예수는 시작부터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순결하게 보존되어 자신이 거룩하게 됨으로 타인을 거룩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잉태 방법 자체에서 우리는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죄인들과 구별되게 따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6절)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잉태에 대한 소식을 전해준다. 본 절에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친족이다. 엘리사벳은 레위 지파이며 아론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아론 족속의 계통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혹자들은 레위인들이 다른 지파와도 혼인하는 경우가 있음으로 꼭 레위 지파라고 볼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엘리사벳이 율법과 규례를 준수한 가문이었다면, 마리아 또한 신실한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7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o=ti ou]k a]dunath;sei para' tw#j yew#j pa#n r[h#ma)” ‘말씀(r[h#ma)’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은 ‘행동’과 동일하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이 행치 않으시겠느냐'라는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의지)도 고려해야 한다.
38절)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고지에 대해서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말씀이 이루어지길 간구한다.
(39-56절) 두 여인의 만남과 찬미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가 3개월을 함께 거한다. 엘리사벳의 집에 방문할 때 6개월 된 복중의 요한이 반응하며(39-41절), 그녀는 성령이 충만하여 찬양을 한다(42-45절). 이에 마리아가 화답하여 찬양을 한다(46-55절).
39절)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소식을 듣고서 바로 일어나 유대에 살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갔다.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거주하였고, 엘리사벳은 유대의 한 동네에 거주하였다. 상당한 거리를 마리아는 떠난 것이다. 마리아가 바로 떠난 것은 은혜의 강력함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자기에게 있는 믿음과 은혜의 교류를 하기 위해서 가브리엘이 알려준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떠났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한 시간은 더욱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한 믿음의 백성의 교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선물이다. 믿음의 교제는 서로에게 큰 유익을 주게 된다. (40절)에서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문안(greeted)을 한다. 당시의 ‘문안(問安)’은 서로가 껴안는 형태의 인사였다.
(41절) 엘리사벳의 태 안에 있는 아이가 복중에서 뛰었고,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엘리사벳은 복중에서 뛰는 아이의 움직임에 대해서 성령의 은혜를 느꼈다. 즉 복중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로 말미암아, 산모인 엘리사벳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큰 소리로 찬양하였다(42-45절).
(42-45절) 엘리사벳의 찬가: 엘리사벳의 노래는 ‘마리아와 태에 있는 아이’에게 집중된다.
(42-43절)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아이에게 복(blessed)을 기원한다. 엘리사벳은 성령에 감동되어,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 수 있었다(44절). 칼빈은 마리아와 아이가 동일문장에 있음으로 동등 가치로 평가될 것을 우려한다. 비록 마리아에게 독생자를 잉태함으로 독특한 지위가 부여되기는 하지만, 최고의 축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43절)에서 칼빈은 엘리사벳의 ‘겸손’을 주장한다. 엘리사벳의 겸손은 어린 사람인 마리아를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겸손은 마리아를 높이면서도, 하나님께 누를 끼치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다.
“주의 어머니(the mother of my Lord, h[ mh;thr tou# kuri;ou)”에 대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양성의 통일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리아의 배 안에서 유한한 인간으로 태어난 그분은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다.”8) 칼빈은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그리스도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 네스토리오스)’와 ‘하나님의 어머니(떼오토코스, 교회 공용 호칭로 퀴릴로스가 주장)’에 대한 제시는 하지 않았다.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네스토리오스는 정죄되고, 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의 어머니’를 택하였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복되다고 다시 칭송을 한다(45절). 이러한 고백은 성령이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고백이다. 그리고 그녀는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진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인간의 이성과 방법에 메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간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엘리사벳의 찬가에서 “여자 중에 너(42절)”, “네 태중의 아이(42절)”
“주의 모친(43절)”
“믿는 여자(45절)”, “주(45절)”고 구별해본다.
즉 마리아는 여자 중에서 복된 여인이며, 주를 잉태한 여인이며, 믿는 여인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잉태된 사람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46-56절) 마리아의 찬가
칼빈은 마리아의 찬가(song of the holy virgin)를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비에 대한 감격적인 감사(46-48절), 둘째, 하나님의 능력과 판단에 대한 인정(49-53절), 셋째 약속된 구원이 확정되어 교회에 의해서 수행될 것이다(54-55절).”9)
(46절) (quch; mou to;n ku;rio;n)를 번역에서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한다”고 되지만, 칼빈은 “내 영혼이 깊은데서 찬양한다(My soul magnifieth the Lord)”고 번역하였다. ‘깊은’을 첨가해서 내면의 깊은 곳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영(靈)과 혼(魂)이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명료하게 구분한다면 영(spiritus)은 오성(understanding), 혼(soul, animus)은 감정이나 욕망의 자리를 표현하는데 사용한다고 제시한다.10)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영혼이 기뻐야 한다. 즉 기쁜 우리의 영혼에서 아름다운 우리의 언어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즉 마리아의 마음(soul, pneu#ma; mou)에서 기쁨이 넘칠 때에, 그녀의 마음(heart)이 하나님을 찬양했다(When the soul of Mary exults with joy, the heart breaks out in praising God.). 칼빈은 인간에게 가장 기쁜 상태가 하나님을 구주(救主, swth#ri; mou)라고 부를 때라고 제시한다(47절). ‘구주’라는 말은 과거에 한 번 건져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계속적인 구원의 주라는 뜻이 포함된다. 그래서 he is “the Author of eternal salvations”(Hebrews 5:9.)이다.
46-47절 사역(私譯): “내 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이 나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함은”
(48절) 마리아는 자신의 상태를 ‘비천’ 상태로 평가하고, 자신을 복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마리아의 비천한 상태를 고귀한 상태로 됨을 비교하였다.
NIV는 the humble state of his servant로 KJV는 the low estate of his handmaiden로 제시하였다. 즉 실제로 자기의 낮은 신분을 고백하는 것이며, 자기 낮은 신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커다란 겸손의 미덕이다. 그녀를 하나님께서 높이심으로 ‘모든 세대(만세, all generations)’에서 복이 있다고 칭송하게 되었다. 마리아가 만세에 칭송될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찬미하는 것이다. 나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자. 비천한 그녀를 높이신 하나님께 중점을 두는 것을 기억하자. 로마 교회가 이 구절에서 마리아를 높이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마리아를 높인 하나님을 제외시킴으로 마리아만 있는 근거가 상실된 본문의 의미일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로마 교회보다 오히려 더욱 마리아에게 영예를 돌린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기는 확실한 영예를 돌리지만, 로마 교회는 신빙성이 없는 큰 영예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49-50절) 능력, 거룩과 긍휼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One)께서 “큰 일들(great things, 복수)”을 행하셨다. 마리아는 전적으로 능력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다. 그래서 큰 일들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일인 성령으로 잉태됨까지 이르렀다.
마리아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49절)’으로 찬양한다. ‘거룩’은 모든 만물과 구별되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최고의 영예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긍휼하심이 풍성”하시다(50절). 하나님의 자비의 부요하심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도 불신자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위장하며, 허영과 오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으로 제시한다. 즉 “바위가 비를 맞는다고 해서 더 부드러워지지 않듯이, 불신자들이 약속된 의와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들 마음의 경직성 때문이다.” 그러나 택자에게 주신 복은 주의 긍휼하심이 대대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택자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세를 교육해야 한다.
(56-66절) 세례 요한의 출생: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
마리아가 돌아간 후(6+3=9개월)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는다. 사가랴는 계시를 받은 대로 “요한”으로 짓고, 입이 열리자 하나님을 찬송한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게 된다.
마리아는 석 달 동안 사가랴의 집에서 보낸다(56절).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엘리사벳의 믿음의 확증과 천사에 의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실현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이라고 제시한다.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는 마리아는 많은 격려와 위로를 받음았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지체가 되어야 한다.
엘리사벳은 기한이 되어 안전하게 아들을 낳았다(57절). 엘리사벳의 출산은 이웃과 친족들에게 기쁨을 주었다(눅 1:14의 성취).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에게 긍휼을 베푸심으로 모든 사람이 즐거움을 나누게 되었다.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심으로 오는 즐거움이 모든 사람들고 함께 나누어져야 한다. 엘리사벳이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많은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마 5:7). 모든 사람의 근심이 되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실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59-63절) 모든 사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한’이라 이름을 짓는 엘리사벳과 사가랴.
엘리사벳에게 나은 아이는 8일에 할례를 받고, 아버지인 사가랴가 이름을 짓는다(59절). 칼빈은 사가랴의 아버지의 이름을 ‘바가랴’로 추측한다. 즉 이름을 짓는 방법이 있어 누구나가 인정되는 이름을 되어야 한다. 번역이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라 하고자”는 바른 번역으로 보기 어렵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름이 동일한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사역(私譯) “그들이(이웃과 친족) 그 아버지 스가랴를 따라서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고 했다.” 그때 엘리사벳은 작명법에 의한 작명을 거부했다(60절). 그리고 엘리사벳은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주장했다. 주의 사자의 계시가 사가랴에게 임했지만, 엘리사벳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혜로운 사가랴가 작명법대로 지을 때에 자신이 방지할 길이 없음으로 엘리사벳에게 미리 글로서 알려 주어 계시대로 이름을 짓도록 하였을 것이다. 계시를 알지 못하는 친족들은 반대했고(61절), 사가랴에게 몸짓으로 말을 했을 때 서판으로 “요한”으로 결정하였다(63절). 사가랴는 10개월의 침묵 훈련의 단련 후 아무런 주저함 없이 이름을 ‘요한’이라고 기술하였다. 규례에 익숙하며 충실한 사가랴는 자기의 경험을 전혀 무시하고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하공 의지하여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64-66절)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가랴와 기이한 일이 유대에 퍼지게 되며 주의 역사를 기대하게 되었다.
(64절)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후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게 되었다. 사가랴는 말을 하게 될 때에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 놀라운 소식이 전파되었을 때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였다(65절). 사가랴가 주의 사자의 계시를 받을 때에 두려워했던 것처럼, 요한 출생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에 사람들도 두려워하였다. “하나님의 섭리를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며 신중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 소식은 모든 유대 산중에 퍼지게 되며(65절),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소식을 마음에 두었다(66절). 칼빈은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신중하게 생각하였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 놀라운 사건을 잊어 버렸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나중에 세례 요한의 기적을 본 후에 이 소식과 연결되어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을 인식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본다.
“주의 손이 함께 하심(66절)”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함께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67-80절) 사가랴의 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한다. 다윗의 집이 일어난다(69절). 그것을 위해서 예비하는 사역자이며(76절),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알게 하며(77절), 어두움에 빛을 비추는 사역을 하게 된다(78절).
(67-75절) 다윗의 집의 부활과 아브라함 언약의 부흥:
다윗 언약, 거룩한 언약, 아브라함 언약
67절)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하여 찬가를 불렀듯이(41절), 사가랴도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을 한다. 성령이 충만할 때에 찬양, 예언을 한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것인데,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의 아이를 만났을 때이며(41절), 사가랴는 주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이다(64절). 그는 10개월의 침묵 기간이 해소되어 언어 능력이 회복되었을 때에 놀라운 예언을 하는 성령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
68절) 사가랴는 찬양(Praise, Blessed)11)로 시작하지만, 속량(redeemed)으로 이스라엘이 시작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주(主)가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셨다(he has come, he hath visited)”. 죄악된 이스라엘에게 얼굴을 돌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얼굴을 돌리셔서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속량하여 주셨다. 사가랴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의 원인이 하나님께 돌아보심이라는 것이다.12)
69절) 하나님께서는 종 다윗의 집에 구원을 뿔을 일으키신다(시 132편 17절). 칼빈은 구원의 뿔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지만, 불신자에게는 소멸시키고 파괴하는 공포라고 주지시킨다. 즉 불신자가 믿는 자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구원의 뿔을 높이면 높일수록 불신자의 공포는 증가하게 될 것이다. 사가랴가 다윗을 표현할 때 “종 다윗”이라고 제시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며, 다윗의 왕국은 다윗과 같은 혹은 유사한 메시야 도래를 기대하지만, 사가랴의 예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 구원의 뿔은 다윗과 비교할 수 없는 주(主)이시다.
70절) 사가랴는 자신의 예언에 대한 동의로서 “거룩한 선지자”를 제시한다.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된 것이다(롬 1:2). 성경에서 약속된 구원의 뿔을 알고 동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읽는 것에 열심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잃었다고 제시한다.
71절) 구원은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로부터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억압에서 구속함을 받았다. 교회는 육적인 왕국에서 구속하여 영적인 나라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수립한다. 교회는 세상의 영에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도움을 제공해줄 수는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사방에 원수들이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택한 백성을 구속하여, 자유와 평안을 제공하신다.
72절)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며, “거룩한 언약” 즉 영원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성을 돌아보시는 하나님(68절)에 이어서 자비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백성에게 죄의 속죄가 계시되어 언약을 유지하도록 하였지만, 완전한 죄 속함은 없었다. 그러나 완전한 죄 사함이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발견되며,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의가 수립되었다.
73절) 이 언약의 시작이 아브라함이다. 칼빈은 “헬라어 원문에는 ‘~에게’라는 전치사가 없는데 이처럼 명사의 대격이 전치사 없이 쓰이는 경우는 허다하다.”고 하여 ‘아브라함에게’ 라는 이해의 정당성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언약을 잃어버리지만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
74절) 언약에 근거하여 원수의 손에서 구원받게 된다. 거룩한 언약은 영원한 언약으로 대비하고, 아브라함의 언약은 역사적 언약으로 대비해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75절) 백성을 구원하신 이유는 “성결과 의”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항상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그 실제적인 목적에 적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곧 백성을 부르심은 더러움이 아니라 성결로 부름이며, 우리의 값비싼 구속은 육신적 욕망이나 광란의 뒤범벅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위한 구속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심은 아들로서 순종을 아버지께 드리기 위함이다.” 성결과 의를 위한 훈련으로 하나님께 정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칼빈은 제시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겐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다.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두려움이 없다. 섬김에 어떤 이익 혹은 요구가 없는 전적으로 헌신하는 백성에게 두려움이 없다. 왕중 왕이신 하나님을 섬김으로 세상의 왕인 사단의 위협, 어둠의 공포에서 억압되는 두려움이 없다. 오직 주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주를 경배하며, 이웃을 사랑한다.
(76-80절)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
76) 사가랴는 자신의 아들에 “이 아이여(my child)” 대하여 예언을 한다. 사가랴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의해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자로서(눅 1:17, 말 8:28) 자신의 아들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에게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특별하게 지목한다. 요한의 사역은 “주 앞에” 서서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보다 “높으신 이의 선지자”로 한정하여 부른다. 요한의 첫 번째 사역은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77절) 요한의 두 번째 사역은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칼빈의 복음의 주제(the principal subject of the gospel)는 “구원, 즉 죄의 용서(the knowledge of salvation consists in the forgiveness of sins)”라고 제시한다. 죄의 용서는 죄책을 제거를 통한 의의 전가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주시지 않았다(행 4:12).
78절)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끝이 없는 자비하심은 어두움이 아무리 깊다할지라도 결국은 서광(曙光)이 비취게 된다. 말 4:2에서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는 “의의 태양”으로 부르짖었다. 흑암에 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빛을 발하신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서광으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79절) 요한의 세 번째 사역은 위로부터 임하는 해의 도래를 외치는 것이다(말 4:2).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이 요한은 그리스도를 기다린다(시 130:6). ‘어두움’은 ‘죽음’으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을 비취면 죽음의 그늘이 사라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이사야는 빛이 앞에 오고 있으니 교회를 향하여 일어나라(사 60:1)”고 명령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발을 평강으로 인도하신다.” “모든 행복과 탁월함의 최상의 완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the highest perfection of all excellence and happiness is to be found in Christ alone).” 칼빈은 ‘평강’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져온 밝힘에서 사람의 마음이 평화롭게 된다고 근거를 제시한다(for the illumination brought by Christ tends to pacify the minds of men.).
“사가랴는 자기의 어린 아이만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기 전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탁월한 예언을 할 수 있었다.(중략) 이러한 것은 사가랴 스스로 말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엘리사벳 또한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에 마리아와 태중의 아이를 칭송했다. 사가랴는 요한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찬양했다.
80절) 요한은 신체적으로 성장하며, 심령이 강해졌다. 요한 정상적인 사람과 같이 성장했다. 그리고 신체적 성장과 함께 영적으로도 튼튼하게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의 예는 사무엘, 예수님에 대해서 제시된다. 즉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요한은 빈 들에서 사역의 시기까지 숨어 있었다. 칼빈은 요한이 자신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성급히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혹자들은 이러한 광야 생활에 대해서 당시의 에세네파(Essenes)와 연관 지으려고 한다. 그들은 메시야 도래를 선포하며,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이 공통점을 갖지만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활동을 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요한과 예수를 연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민족적 구원을 시도했지만, 에센네파는 사회를 외면하고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지향했다. 즉 구원의 수단으로서 철저한 금욕 생활과 단절된 생활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쿰란(Qumran) 공동체와 세례 요한을 연결시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와 관련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는 없으며 또한 요한이 머물렀던 지역이 어느 곳인지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지 않다. 여하튼 그는 광야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사역을 준비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다(모세, 엘리야 등). 요한은 광야에서 외롭고 고독한 생활을 보낸 후에 회개의 복음을 외치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전파한다(3:2, Geldenhuys, Liefel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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