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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대비한 개혁교회 상(像) - 김영규 목사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합신 3회 동문/ 제13회 교직자 기도회, 97. 04. 21
21세기에는 정치 사회적으로 세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보고 이 세기 말에 대축제를 계획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이런 축제는 미래가 물론 불확실해도 조그만 낙관적인 요소들을 조금 가장해서라도 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여 희망을 주고 21세기에는 평화가 오기를 바라자는 축제일 것이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런 축제에 앞서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깊은 통찰을 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한 미래과학의 발전
미국의 대표적 과학잡지인 Scientific American지에서 지난 해 9월에 잡지의 150년 기념으로 21세기의 핵심기술들에 대해서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정보기술, 교통, 의학, 기계, 재료공학, 에너지와 환경, 삶의 일반 등 모든 분야에서 그 핵심기술에 대한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다루었다. 놀라운 사실은 1895년 20세기 기술과학에 대한 예견적 토론에서 오늘날의 핵심기술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컴퓨터 영역에서 지능칩, 양자칩, 지성적인 소프트웨어 전 지각들과 힘들을 자극하는 컴퓨터 등을 예측하고 있다. 항공과 우주과학에 있어서 이온엔지의 개발에 들어가 태양계 폭발시의 가속을 낼 수 있을 것을 예측하고 있다. 우리 몸의 병든 기관들이나 조직들을 새로운 이식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공조직들과 실제적인 몸의 조직들을 연결하는 기술이 발달할 것인데, 이 기술은 특별 플라스틱 복합구조에 우리의 조직세포들을 증식시켜 실제적 몸의 조직들과 똑같이 만들어 버리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돼지의 몸에 인간 유전정보가 들어 있는 인간 체세포의 핵을 교체하여 인간과 같은 조직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인간의 몸에 이식시키는 특별히 스스로 자생하는 신물질이나 신 기계의 개발, 감각적 로버트, 지진아나 재난에서도 다리들이 유동적으로 자기회복이 될 수 있게 하고 항공기도 환경에 적응케 할 수 있게 하는(인간의 피부와 같이 기능하는) 지성적인 물질개발 등이 예측되고 있다. 기타 핵융합에너지에 대한 발전등 다른 과학기술들의 발전들도 예측되고 있다. 이 논의가 발표된 이후에도 인간복제까지 가능하게 된 유전공학의 기술이나 시간 유전자의 발견은 이제 과학기술에 의해서 인간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과학적 발전의 허구성과 문제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과학기술의 발전의 특이성과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컴퓨터 모든 기술의 발전의 방향은 인간과 같은 기능을 가진 컴퓨터 개발이 목표이다. 따라서 첨단으로 개발된 컴퓨터는 외부세계가 인간화되고 인간화된 것이 다시 외부세계로 되돌아가게 하는 매체역할이 극화되는 선에서 개발이 머물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복제와 독립적으로 인공적인 기관들이나 조직들이 유기적인 기관들이나 조직들과 전혀 똑같이 개발되는 선에서 머물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런 기술들은 급하게 일어나면 큰 재난들이 되기 때문에 시간조절이 잘 이루어지면서 차츰 차츰 개발될 것이다. 스스로 산출하는 물질들이 개발되는 것은 자연의 유기체들과 무기체들이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유기체 사이에 무기체들이 없어지는 환경이 되는 새로운 자연의 창조작업이다. 더구나 마이크로세계, 나노세계의 동작기계들이 개발됨에 따라서 미시세계도 사람이 조작하고 창조하는 식으로 점점 발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자연환경과 똑같은 조건들을 제거해도 계속적인 단조로움(continuous drudgery)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Robert W. Lucky의 지적대로 기술과학이나 공학이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했을 때, 그 과학은 분명히 실패해 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로 더 들어가서 물질의 근원에 가까이 갈수록 더 불확실해 지고 있다. 오늘날의 물질세계와 우주의 근원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양자역학의 발전에 따르면, 1973년에 가정된 관찰할 수 없고 정보상실 영역인 블랙홀(black holes)의 존재에 의해서 극단의 불확실성(an extra uncertainity or 'complementary' uncertainty)이 확증된 것이다. 아직 이론에 불과한 동전의 10-33하고 10-15이라는 핵의 영역에 있는 소립자세계에 대해서 더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하나의 도시 만한 입자가속기를 국제적으로 만들고 있으나, 그 세계에서의 소립자들이란 ‘덩어리’(mass)로 관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입자들은 표상하기 어려운 영역이고 묘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즉 회의주의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영역이다. 결국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믿었던 그 영역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회의주의와 허구가 과학이라는 매력적인 객관의 이름으로 지배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생명현상이 있는 미시세계에 들어가서 생명현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 미시세계에 사회현상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은 정보의 전달자나 받는 자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각각 자율적 행동자로서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런 무지의 세계를 덮어두고 나노세계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그냥 마이크로 세계에서 개체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기계처럼 조작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과학자의 문제점이다. 그런 것이 인간복제와 같은 그런 기술인데, 그것은 무지의 세계를 덮어두고 적당한 미시세계에서 모험과 조작에 의해서 인간화 작업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자연의 돌연변이가 아니라 인간의 조작에 의한 돌연변이들의 괴이한 세계에 파묻히는 것이 21세기의 사람들일 것이다. 추위에 잘 견디는 동물의 유전자를 옥수수의 씨의 유전자에 이식시킴으로 추위에서 싹이 보존이 되도록 하는 실험은 미래에 어떤 괴물을 탄생시킬지 모르는 행위이다. 결국 과학적 활동의 뿌리는 변치 않는다는 말이다.
과학의 인간화에 따른 신학적 비판가능성과 그 비판의 기독교적 책임
좀 더 원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거나 실험이나 모험이 결과에 앞선다는 그런 원리만이 상수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전체의 활동이 상수로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과학적 활동에서 인간화는 피할 수 없다. 처음에 자연에 대해서 인간화의 부산물이 문명과 문화이었기 때문에 다만 자연의 인간화가 이루어 졌지만, 이제는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자연화와 다시 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다른 혹성으로 인간이 가기 전에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만든 가상자연을 먼저 이루어 놓고 인간이 들어가는 우주계획이 이루어질 계획이다. 이렇게 인간이 다른 자연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환경보호는 이런 기류에 대한 제동작용을 할 뿐 그 기류를 역류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자연은 자연으로 가장하는 것일 뿐,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신비하고 중요한 상수로 남아 있는 이상, 그런 인간화 자체는 자연이 인간의 변수가 모두 상수로 남아 다른 자연에 규칙을 주고 있는 이상 인간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와 문명의 한계이다. 결국 21세기와 그 후 세기 모든 발전이란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근본에 있어서 변화가 없고 예측이 가능하다. 태초의 인간이나 21세기의 인간이나 근원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21세기에도 철학과 신학으로부터 과학일반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가 더 커질 것이다.
물론 철학도 그 비판작업에 어느 정도 역할분담을 할 것이다. 지향성에 의해서만 인간이 인식할 수 있고 처음 대상화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나, 인간의 인식은 그림이나 도식이 없이 어떤 표상이나 사고의 확대가 불가능하며 결국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다든지, 실존주의처럼 객체와 주체가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애매한 대상들(Dasein 혹은 Person)을 분석의 대상을 삼는다든지, 인식의 대상과 방법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비방법론주의, 모든 근본들은 수학적 공리와 그 체계와 같은 그런 정초(fondamentum inconcussum)가 없이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언어혼란, 언어와 같은 상징기능 자체의 도약적 성격에 의해서 제 과학자들의 ‘자신들’이 대상을 인간화 작업을 하기전과 그 과정에서 그리고 그 작업에 이미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으로부터 좀 더 강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 모든 과학적 발전이 인간중심이고 가장된 허구에 기초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비판할 책임이 있는 것은 그 신학 자신이 그런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대해서 기독교적 책임이 있는 것은 그 신학 자신이 그런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대해서 기독교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기계의식과 현대 물리학의 혁명사상들은 모두 신학 안에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그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현대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좌표(차원)개념, 현대적 힘(impetus)의 개념, 중력, 자연의 수학화 작업등은 후기 중세신학에서 고대 애굽사상이나 희랍사상을 반대하여 순수 어거스틴주의로 되돌아가는 정신에서 생긴 부산물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즉 성경적 보수주의의 정신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르네상스는 그런 중세 후기 사상을 이원론화하고 세속화하였다는 점에서, 보수주의가 자신이 해 놓은 결과들을 더 이상 다시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미 자동차(rota continue mobile)와 같은 최초의 자동기계의식이나 실험정신(scientia experimentalis)도 Petrus Peregrinus와 Roger Bacon의 산물이었고 그런 자동기계의 방식과 톱니의 개발은 후기 놀이기구와 음악에 사용되기 전에 이미 중세 후기 종치는 기술에 처음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보편수학화 정신도 원래 고대 애굽과 플라톤 사상일지라도, 그 정신이 자연과 같은 대상들을 설명하거나 덮는데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Robert Grosseteste와 Roger Bacon의 기본정신에 의해서 후기 중세에 발전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세속화되었을 뿐이다.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의 태동 시 유명한 논쟁(A. Einstein과 N. Bohr 사이의 주 논쟁)에서도 이 두 가지 정신만은 공통된 핵심내용으로서, 그 실험과 수학적 설명에 의해서 물리적 실재가 규명되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21세기의 모든 과학적 이론들은 이런 정신 아래 객관화될 것이다. 따라서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의 근본정신이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다면, 그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위기로서의 교육과 종교성
과학적 인간이 만들 21세기 세계상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인 교회의 자기무장 정신들을 소개하기 전에, 사회의 한국의 위기요소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대학제도의 발전은 칼 대제 때 자유학문들(artes liberales)이 신학의 준비단계로서 신학의 일반기둥들과 같다(Alcuinus, c. pp. 730-804)고 하여 신학과정에 의미 있는 자리를 줌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런 대학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대학의 세속화로 인하여 자유학문들이 신학과 분리됨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자유학문들이 독립되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독립되어 발전된 정신이 후에는 신학에 영향을 끼치고 교회로부터 교육의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고백하고 기초로 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정치 및 권징조례도 단순히 엄밀한 종교개혁의 산물만이 아니라 어떤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위기의식에서도 그 문서들이 발생하였다. 특별히 대소요리문답을 모두 우리의 평신도 교육의 기초로 내세웠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 대소요리문답의 작성은 두 가지 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해답으로 작성된 것이다.
첫째로, 교육 자체 혹은 특별한 교육정신을 강조하는 사회적 위기의식에 대한 대답이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선천적으로 참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얀 백지(tabula rasa)와 같아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형성시키고 교육을 통해서 사람의 됨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고가 유행하였을 때, 그것이 갖는 종교적 위기의식에서 대소요리문답이 작성이 되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를 태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데카르트는 그 당시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과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었고 John Locke도 갓 11살의 어릴 때이다. 그들의 사상들은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의 대표적인 산물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소요리문답이 발표되었어도 그런 부정적인 사회적 흐름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그렇게 의회운동의 하나로 발표되었어도,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인 급변 속에서 한 번도 교회 안에서나 사회 속에 적용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둘째로, 무지와 오류가 사탄의 왕국이 세워지는 기둥이 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대한 대답이다.
물론 그 때의 지식의 결여나 오류란 내적이고 구원적이며 마음의 지식에 대한 결여와 오류를 의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소요리문답의 작성은 참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교회가 지어야 할 의무로 여긴 정신에서 나온 산물이다.
결국 이런 사회적 변화요소들로 인한 교회의 위기를 해결하고 갱신하는 방법으로서 가정예배의 회복을 꾀하였고, 교육의 세속화에 대항한 그 가정예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의 열매가 바로 대소요리문답이었다. 오늘날 의회제도의 태동이 태동할 때, 신학자들의 총회가 있었고 그 총회의 결정이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특별한 의의는 자신의 독특한 원리에 의해서 세속정치와 사회로부터 독립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에 찬성하지 못한 입장들은 신대륙에서 실천하려고 했어도 어느 정도 긴 기간 동안 성공하였을 뿐이며 지금도 그 잔재를 남기고 유지하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실제 내용상 실패한 셈이다.
어떻든 상기 두 가지 위기의식들은 20세기에서나 21세기에서나 한국에서도 여전히 있을 수 있는 위기의식들이다. 역시 지금까지 그런 위기의식에 의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어 왔고 앞으로 계속 있을 것이다.
1) 위기로서 교육
한국의 경제발전의 지금의 침체현상은 지금의 인적자산으로서는 현 경제발전에 따른 창조적 기술능력의 한계에 도달하였고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대기업의 소비현상의 조장이나 중산층 이상의 소비현상을 탓하기 전에 이런 근본문제가 있고 중소기업을 육성한다고 해도 이 한계는 여전하다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 대책으로 교육개혁에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다. 여기에 교회에 당면한 대 사회적 문제가 있다. 더구나 21세기에 가면, 한국의 주변국가들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세계경제가 다른 중심지로 옮겨 발전된다면, 한국의 경제의 근본자원은 인재에 있을 것이고 그 역할이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인재를 창출하는 교육에 대한 강조점은 더 크고 국가의 중심과제가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교육위원회는 21세기를 위한 7차 교육개혁안을 발표했거나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 교육개혁안들은 현 사회 경제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여기에 교회가 당면한 대 사회적 과제가 있다. 즉 그런 교육 개혁안들은 윤리적 문제들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정직이란 인성은 미래정보사회나 산업사회에서 개인적 사회적 부가가치가 한층 더 커질 것이지만, 학교 교육이 그 인성을 기르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가정과 기타 사회 분위기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런 가정과 사회 분위기와 관련해서 분명히 설교와 교회 교육, 기독교 학교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런 정직한 사람들을 길러 내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설교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격에도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신앙의 요소에 있어서 감정을 강조하거나 인간론 중심으로 하면 오히려 정직한 사람과 신앙과 분리된 신앙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또한 교회가 행하는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도 교육의 방식과 정직한 사람의 배출과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 더 나아간다면, 교인들간의 자발적 교통이 갖는 성격에서 다양한 능력들을 가진 평신도들이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전반의 인성개발이나 사회의 윤리적 분위기,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에 있어서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춘기에 맞는 격변기에 이탈되고 상처받은 자들에게 회심의 기회를 주도록 하는 강한 프로그램들(금식기도, 철야기도 등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전체 국민정서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또한 찌든 학교생활에서 자유하고 안식하며 따뜻한 사랑의 교육을 교회 교육의 특성으로 삼아 사회의 분위기에 기여할 수 있다. 일반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교사의 역할은 대단하다. 물론 루터의 교육개혁처럼 군주를 회심시켜 기독교학교들을 세워 종교 및 사회개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종교 사회에서는 이런 방식이 사회 속에 고립되는 형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각 지교회에서 종교개혁자들로 양성하여 일반학교 생활과 교육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더 중요할 지 모른다. 역시 일반직장이나 직업전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위한 프로그램들과 그 다음 개혁주의 본질적인 신앙의 특성들을 점진적으로 소개함으로 성숙해 가도록 하는 그런 계속된 프로그램들이 개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프로그램들이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결과와 관련해서는 그 프로그램들 뒤에 있는 신학적 입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2) 위기로서 종교성
또한 무지와 오류에 관해서도 현 한국이나 일본의 사회가 갖고 있는 종교성에 큰 문제점이 있다. 아마 가장 큰 사회문제일 것이다. 하나의 좋은 예로 무궁화위성의 발사 직전에 그 위성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 그 모든 과학자들이 돼지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한국의 합리적 사고의 문제점이다. 그것은 한국 지성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최고의 지성인들이 부처 앞에 절하고 점들을 볼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한국의 사회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요소이다. 기독교에서 보면 그 종교성이 전도를 위한 기틀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다. 문제는 과학의 발전과 종교성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동양에서의 과학발전은 큰 위험성이 있다. 그런 위험성을 볼 때, 예를 들어 인간복제에 대한 법적 규제를 한다고 해도, 그 법들은 서양의 것과 다를 것이고, 역시 다른 과학적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술들도 동양에서 크게 발전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 종교성이나 법이 과학의 정신을 방해해 본 적이 없고 늘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거나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복제들이 공포되고 여론화하였을 때는 이미 인간복제에 대한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그 여론을 물어 본 것에 불과하고 그 기술이 배경으로 갖는 미시세계 혹은 나노세계의 과학기구들에 대한 경제효과들이 예측된 상태라면, 법이나 여론으로 그 길을 방해할 수 없고 다만 그 급속한 발전을 억제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종교성 때문에, 서양보다 더 그 인류의 위기와 재앙이 동양에서 먼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대 영국에서 그런 양복제로 처음 세계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떻든 이런 위기와 재앙은 제일 먼저 가정에 오고, 점점 더 대 사회문제화가 되었을 때, 법과 제도, 기구들에 걷잡을 수 없는 큰 변화를 줄 것이다. 그 기술은 법의 기초이고 살인과 같은 모든 범죄의 최종적인 기준들인 인간 존엄과 성 자체가 무너지게 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큰 문제들은 그 동안 주장해 왔던 신학적 핵심문제들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정신이 무르익음에 따라서 이런 문제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신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겠다. 다만 영국의 양 복제 실험의 의미는 무엇보다 더 우리 몸의 모든 체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정보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결합하면서 생긴 세포 속의 핵 안에 있는 그 유전정보와 같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분명히 증명하였다(그 실험이 거짓이 없다면)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상 어떤 부분 혹은 어떤 상태에서 이 핵 이식 기술을 이용하여 복제하든 중요하지 않다. 21세기의 언젠가는 그런 기술들은 전문영역에서 법과 국가통제로부터 벗어나 보통 평범한 여성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자기 몸에서 복제할 수 있는 그런 개인화 단계로 발전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때에 한국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미신정신이 가지고 있는 무지성과 종교성으로 인한 피해는 오늘날보다 더 훨씬 클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들을 짙게 가지고 있는 다른 교파들도 개혁주의 교회에 반하여 무지한 종교적 정신들과 연대하여 대립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오늘날 과학은 자신의 회의주의와 무지를 객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근본적인 것을 아무 것도 해결함이 없이, 자신의 회의주의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신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즉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전쟁과 기근과 재난을 통하여 인간에게 교훈하셨지만, 앞으로는 과학과 기술의 이런 자기가장에 의해서 속임을 받고 그로 인하여 스스로 재난에 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과학도 그런 속이는 종교성들과 연대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현금 가장 큰 위기는 거짓이 만연되어 있고 퇴폐가 사회의 힘으로 작용하고 거짓이 사회활동의 무기로 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런 위기는 그런 종교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및 교육의 전문화 현상은 인간의 종교성과 영적인 상황과 전혀 독립적인 것인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함께 연대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국 21세기 동안에도 영적인 긴장의 상황은 더 심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와 싸우는 것은 우리를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를 빼앗고 진리를 흐려 놓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마귀가 원래 우리로부터 진리를 빼앗을 수 없지만, 그렇게 위협하고 우리를 속이며 가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사회와 같이 운동을 하면 할수록 이런 핵심적인 것을 잃고 속아 허탈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싸우는 것이란 이런 위협과 가장과 속임과의 싸움이다. 이런 위협과 가장과 속임은 앞으로 더 심화되면 되었지, 결코 피할 수 없다.
21세기의 개혁교회의 무장정신들
따라서 21세기에 들어가서도 바른 교육의 요구와 종교문제로 인한 갈등은 더 심하여 질 수 있다. 역시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들도 이에 적응하는 다양한 양상들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에 들어가서, 그 때 개혁신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면, 이미 때는 늦어 이런 종교적 다원주의에 의한 고립과 세속적 교육으로 인한 피해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개혁된 교회의 정당한 자리와 뿌리를 쉽게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때 가서 우리의 신학, 우리의 헌법, 교회개혁을 찾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에 따라서 21세기를 맞이하는 교회와 모든 신자들이 직면할 상기의 문제들을 앞에 두고 기본 어떤 개혁주의 정신들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몇 가지 개혁주의의 독특한 교리들(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 언약의 통일성, Extra-Calvinisticum, 장로교 정치원리로서 교회의 열쇠는 성직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 자체에 있다는 것, 세속정치와 교회의 독립성, 주일성수와 예배의식 등)에 대해서 이미 개혁신보에 게재하였기 때문에, 다음에서 좀 더 나아가 좀 더 예리한 문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제기된 교회의 무장정신들은 특별히 남북이 통일되기 전이든 그 이후이든 관계없이 타당한 엄밀한 정신이다.
(1) 일반종교와 과학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칼빈의 정신과 같이 문화적 관조주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는 종교성이나 다른 종교들 및 과학에 대한 태도는 칼빈의 방식이 어느 정도 해결책이다. 일반계시에 대해서 화란의 신 칼빈주의 신학이나 다른 문화적 적극주의보다 칼빈 자신의 태도와 같은 문화적 관조주의가 더 좋을 것 같다. 이는 문화적 적극주의가 문화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고 그렇다고 문화적 방관주의나 문화적 관용주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을 계속(subdine) 계시하신다는 입장으로 그 관조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아는데 두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적 관조주의의 경우, 잘못된 것을 분명히 고백으로 표현하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관조하는 자는 전 삶을 통하여 마치 순례자, 나그네, 외인처럼 땅에서의 삶과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는 적극적으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로 나타나고, 소극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 곤비한 자, 순교자로서 살아 갈려는 태도가 거기에 나타난다. 동시에 사회의 변화와 소동에 특별히 민감하고 적극적이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관조주의자의 경우, 21세기 교회에서도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행위들을 무시하는 것이 죄라고 하든지, 하나님께 불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계속 연구될 과제가 될 것이다. 역시 20세기에서처럼 21세기에도 교회가 문화활동과 사회참여에 얼마나 적극적일 수 있느냐가 늘 문제가 될 것이다. 적극적 문화관에 있어서 신 칼빈주의는 너무 지나쳐 그리스도의 은총이 이방세계에도 있었다는 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확인되듯이 우리의 신접자들(무당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주장을 허용하거나 그에 대한 반박할 힘이 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캄펜신학을 대표하는 Klass Schilder가 하듯이 창세기 1장 28절을 특별히 문화명령(Cultuur-mandaat)으로 보고 그리스도인만이 그 문화명령을 실행할 수 있다고 하는 종말론적이고 폐쇄적 문화관을 가질 우려가 있다. 오히려 우리의 정통 장로교 개혁주의의 유산인 하나님의 뜻으로서 다양한 ‘도덕적 실정법’(moralis-positiva lex)에 의해서 적극적 문화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칼빈의 종교개혁적 원리인 율법의 제 3사용으로서 중생한 신자들도 율법을 경건과 바르게 사는 규범으로서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원리로서만이 아니다. 이 법은 즉 성경에 명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의 본성에 의해서 동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법으로서 따라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영원한 법으로서 요구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안식일이요 일주일의 첫 날인 주일(주님의 날)을 지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세속문화에도 그 법이 유효한 법을 가리킨다. 또한 십일조를 도덕적 실정법으로 사용하면, 세금뿐만 아니라, 서비스 사회의 보이지 않는 경제의 활력소로서 제도화될 수 있다. 안식년 제도는 고용제도와 실업문제, 휴가문화를 창출하는데 내적인 원리로서 사용될 수 있다. 일부일처제도 그런 법에 속한다.
새로운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사회를 기독교 문화화하는 기틀이다. 예를 들어 국가지도자나 위정자의 선거에 있어서, 입후보자의 자격요건으로서 자랄 때의 도덕적 청결함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요구함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운동으로서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분위기와 가정과 청소년 교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 예들 외에도 성경에 있는 여러 도덕윤리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2) 이미 개혁된 진리 즉 우리의 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지켜야 된다는 고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좀 더 많은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겨우 그 헌법이 유지되고 지켜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헌법은 교회 역사 속에서 짧게 간헐적으로 있었던 정통개혁주의를 회복하고 보존하려는 어떤 시대의 교회헌법보다 더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용을 포기하면, 우리 교회는 역사 속에 짧게 간헐적으로 존재하였다가 사라져 간 같은 한 예에 불과할 것이다. 겨우 10년 정도로 한국교회에 흔적을 남겼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 다음 이런 고백이 어느 지역, 혹은 어느 세대에 이어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신사참배의 거절이 순교의 피에 동참한 것이라면, 우리의 헌법을 지키는 것도 순교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우리의 개혁들은 하나님의 역사이었다. 우리 교회가 갖는 이런 순수성이 최근에 와서 내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와 있다. 우리의 개혁과정에 있어서 이상한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든 개혁교회와 합치자고 문을 열려 놓으면서, 우리의 고백과 헌법정신들은 더 개혁되었다는 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그 동안 수정된 것들을 다 버리고 순수한 17세기의 고백서로 회복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헌법에 의해서 카톨릭은 다시 적그리스도가 되었고, 1886-7년에 개정되어 근친결혼이 허용되었던 것이 우리 헌법에서 근친결혼금지로 바뀌고, 영국 종교개혁의 중요한 정신이 다시 회복된 것이다. 1902-3년에 개정된 유아로 죽은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에 포함시킨다든지, 혹은 중생되지 않는 자들의 선행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든지,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이에게 충분한 구원이었다 등의 비칼빈주의 교리를 배제시켰다. 그러나 다만 제 22장 4항, 제 23장 3항과 31장 2항은 1788년에 미국에서 수정되듯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집자체부터 의회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그 회의과정에서도 에라스투스주의와의 절충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회의 소집권을 위정자에게도 주어졌던 것이고 신앙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교회에 대한 간섭이 약간 열려 놓은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용어의 변경에 불과하지만, 치리회의 폐회개념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용어인 의장을 회장으로 바꾼다든지, 기존 한국장로교 헌법에서 삭제하였던 임원제도나 상임위원회의 성격에 대해서 아주 제한적이었던 우리의 헌법의 정신과 상관없이, 총회규칙이나 노회규칙을 따로 두어 수시로 개정됨으로 헌법의 정신이 실제적으로 효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지속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교권정치의 문을 열고 놓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뒤로 후퇴한 것이다. 인간론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은 교회정치가 법의 정신을 살리고자 하는 사회정치보다 부분적으로 분명히 후퇴하고 있다. 지금은 총회가 순수 치리회가 아니라 정책기관이 되고 있고 상임위원회들은 총회가 일임하지 않은 문제들까지도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그런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런 분위기로 유도되고 있다. 발전과 연합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유일한 우리의 헌법의 정신과 고백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원래 그리스도안에서 연합이 되어 있다. 우리가 소수의 사람으로 나와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개혁사상으로 무장된 헌법을 고백하게 되었다면, 그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내에서 칼빈의 정신에 가장 가깝고 가장 엄밀한 개혁주의가 된 것은 예배와 교회정치에서의 개혁에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 헌법은 역사적으로 심어지기 어려웠던 그 개혁정신이 어느 정도 순수하게 고백된 것이다. 이것을 지킬 수가 있다면 우리가 그 모든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셈이 된다. 활동과 조직에 있어서 헌법에 보증되지 않고 그 헌법이 지향하고 있는 단순하고 바른 교회정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만한 틀이나 정신들은 우리 가운데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나왔던 기존 교회의 모양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교회개혁은 그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개혁과정에서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장로교 헌법에 받았다는 것은 장로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모르나, 한국장로교회사 안에서의 새로운 개혁이었다. 그리고 총론은 17세기 엄밀한 종교개혁정신의 실제적인 내용을 고백한 유일한 증거이다. 15년도 못되어 최근 몇 년 사이에 헌법을 순수하게 유지하려고 해도 그것이 또 다른 개혁이 되어 버린 실정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이미 개혁에 후퇴한 이상, 앞으로 교회 위기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자신의 개혁이란 헌법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것과 같다. 즉 신임투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개혁이고, 바른 교회에 대한 개혁이 지방의식과 파벌의식을 타파하는 것이 자신의 개혁이요, 우리의 회개의 내용이다. 그런 자신의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른 고백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교단과의 화목과 합동이 있다면 이런 진리운동을 함께 하자고 우리가 초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교회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합동신학 대학원 대학도 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에 저해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존재와 그 발전이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더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좋으면 좋을수록 무조건 수용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고, 자신이나 주변의 원인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못 본 체 해서는 안 된다. 참된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헌법에 기초하여야 하고, 언제든지 진리는 동조자가 없고 공인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빛으로 남아 있도록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3) 개혁주의 핵심교리에 대한 실천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저항의 개념으로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ad resistendum)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면서 그 역사적 정신과 분위기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항상 개혁해야 한다는 분위기란 다음과 같은 예로 확인될 수 있다. 즉 장로교인이라는 한 이유 때문에 고난받고 순교한 한 농부의 순교적 고집에 대한 것인데, 그의 고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고집이었고 그리스도만이 왕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서 고백하는 자로서 고집이었다. 특별히 추밀고문관들이 자신에게 혁명의 죄목을 씌울 때, 혁명에 반대하면서, 복음을 듣는 것이 혁명이다(it was rebellion to hear the Gospel)고 증언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영적인 무기로서 혹은 저항의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주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저항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은 보다 큰 저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이다. 진리에 대한 고집 자체가 사회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한계를 정확하게 긋는 것도 진리자체를 만을 사랑한다는 선포인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메시지에 방해가 되는 어떤 과도함이나 가장이나 침묵을 배제하는 것이 그 진리를 사랑하고 지키는 행위이다. 말씀만을 선포하고 바른 성례집회의 고집이 미래에 어떤 상황에서는 오직 말씀에 의한 저항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리고 가족들도 나를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나를 버려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을 때(solus primo eram, me unum fuisse, Deum ipsum testor), 인간의 의지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되며,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오직 성경으로 홀로 서 있는 일에 다양한 종교개혁자들도 참여하였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길들이 우리의 길과 달랐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진 어떤 사람들은 카톨릭 안에 머물면서 종교개혁자들이 되지 못한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독특한 고백 안에서 저항하는 자로서, 그 안에서 오직 성경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정통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2)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창조와 섭리, 구원의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선 어려운 개혁적 차원은 유일한 주체라는 개념에 있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영감되었고 그 성경기자들은 성령의 기구(Spiritus sancti organa)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구원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거기에 인간의 것과 혼합된 것이 없다(nec quidquam humani habet admistum) 혹은 인간 자신의 어떤 것을 덧붙임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이는 죽을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quod ipso solo) 나왔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말씀이 기자의 말일지라도, 고유한 의미에서 그 저자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이가 없고(quae proprie loquendo, non alium habet authorem, quam Deum) 그 분의 소유로(quod est ipsius proprium) 남아 있다.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근거이다. 성경의 계시와 기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역사도 이런 성격이 있다. 인간도 일하고 마귀도 일하며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과 마귀의 역사와 차원적으로(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역사하신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인간과 마귀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떤 중립적인 의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자 하고 죄를 짓는 의지이다. 의지의 부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펠라기우스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구원이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의지의 역할에 맡겨짐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의 성취와 적용을 파괴시킨다. 이 점 때문에 도르트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를 강하게 정죄 하였다. 하나님밖에 이미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 타락의 시작이요 형벌이라는 것이 강조될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섭리와 역사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고 같은 분이라는 강조는 개혁주의자들의 독특한 길에 있어서 아직 제한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Die ?konomische Einheit des trinitarischen Gottes)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Die einheitliche ?konomie des trinitarischen Gottes)이란 삼위일체론의 근본성격을 도입할 때는 다르다. 아타나시우스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로부터 구원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을 믿는 것이다. 교리사적으로 이런 면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배워 왔다면, 한국 교회에서 오순절 논쟁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삼위일체 변증이 있게 되었고 이런 변증이 결국 삼위일체 교리의 성립의 배경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개념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구약의 통일성은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을 의미한다. 역시 신구약 사이의 차이가 말로 할 수 없는 은혜의 과잉으로 말미암은(propter inaestimabilem gratiae affluentiam) 판명성의 차이로 구분(Evangelim respectu dilucidae manifestationis tantummodo ab ea(Lege differe, Institutio 1559, Ⅱ ⅳ 4)된다면, 이 판명성의 차이는 삼위일체 계시의 판명성의 차이와 같다. 이에 따라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해석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점진성을 판명성의 차이로 해석해야 한고 어떤 판명한 계시의 말씀이 어떤 시대에 계시되었든 처음으로 소급하여 적용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얻게 된다. 이런 당위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지 않으면, 칼빈이 말하였던 무신론자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지거나 인간론이나 논리적 개념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상기의 독특한 이해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이 다시 발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칸트가 지적한 신에 대해서 선험적 가상에 빠진다는 지적을 여기에서만 피할 수 있다. 또한 성만찬의 집례 시에도 Christus totum은 하늘에 계시고 Christus totus가 편재한다면, 그 임재가 또한 성령의 임재와 분리됨이 없고 그러나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으로 임재의 성격도 조금도 약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성부로부터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성격에 그 살아 계신 유일한 주체성을 발견한다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피할 수 있다.
3)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예정론에 두어야 한다.
과거의 이신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신칭의 핵심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의 방식에 있다. 즉 그 방식은 사회적 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가치기준들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영원한 구원의 핵심이 인간론 중심으로 바뀌어지고 거기에 강조가 있게 되었다. 사회적 계층을 지나치게 상대함으로 일시적으로 재세례파 교인들처럼 무정부주의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역시 루터주의가 교회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이신칭의에 있지 않고 성만찬 교리와 개혁과정의 타협(예를 들어 십자가에 대한 이해, 교회의 독립성 등에서)에 있다.
그러나 예정론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 하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극히 겸손케 한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주고,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이신칭의론보다 훨씬 더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과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요구하고 선교에 있어서도 인간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고 선교지에서도 한 사람의 구원이 없더라도 선교에 대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정신을 제공해 준다.
특별히 교회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강조하는 것만큼, 또한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에 대한 눈을 가짐으로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인간론으로 빠지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개혁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교회의 부패는 인간론(인척관계, 지방색, 학연 등)이 강한 끈이 되어 장기간 성도의 교제들이 이루어 질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 교회에 시간과 공간이나 계층을 초월한 보편의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운동으로 참된 보편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진리 때문에 고립되거나 화합과 합동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할 사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처음 썼을 때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까지 예정론 안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 안에서 예정론이 다루어져야 된다는 칼빈의 신학적 발전을 오해한 것이다. 따라서 중생만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 강조하고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사역을 포기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루터주의 신학이나 아르미니우스신학에 가까운 것이다. 성화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할은 이미 언급한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의 일반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열심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탄과 모든 활동에 방해됨이 없이 그리고 인간의 책임성이 결코 배제되지 않는 목적과 방식에 있어서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4) 은혜언약의 핵심사상이 구체적인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서 쯔빙글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의 개념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 선과 긍휼, 진리와 생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 삶이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굶주리고 배고픈 자가 그로부터 은혜를 받아 그 받은 은혜를 다시 그 원천의 영광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복된 삶의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을 아는데 두고 처음과 끝을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에 두었다. 이런 원리는 개혁주의의 삶의 중요한 유산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혜언약의 내용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지혜와 선과 진리와 가장 좋은 선물이 된다는 점에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핵심적 내용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고 성령에 의해서 확증과 보증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중심기둥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삶의 중심이나 요구도 우리가 받은 은사나 은혜에 있어서는 안되고,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선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지혜와 우리의 유일한 부로서 남아 있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과의 관계가 이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이시라고 하는 사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맺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론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주의하고 엄밀한 개혁파 순교적 고백을 포기하도록 하는 니고데모파를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죽고 사라져도 진리만은 남도록 해야 한다. 마귀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진리를 뺏으면 되고 어떤 방법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빼앗는 순간에 그의 일은 다 끝났다. 힘과 폭력이 그의 주된 무기가 아니라 가장과 망각과 무지가 그의 더 큰 무기이다. 그는 진리를 먼저 삶에서 빼앗아 가고 진리를 포기하도록 양심을 설득한다. 21세기를 위해서 교회가 새롭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 가장 오래되고, 거짓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인 하나님의 말씀에 더 확고히 서는 것이 준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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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민 으아아아~~~ 질린다. 질려요~~ 도대체 공부를 얼마만큼 해야 이렇게 홍수같이 지식을 쏟아낼 수 있는지... 11.12 21:11
신재원 저는 (불가능하다할지라도) 과학과 성경을 둘다 정확히 이해한다면 둘 사이의 출동은 없다고 확신하지만... 필자의 지적대로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과학적 활동에서의 인간화]에서 찾을 수가 있겠군요.. 암튼.. 필자의 무지막지한 지적 포스가 느껴지는 글이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1.13 20:18
남상수 아주 칼빈주의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칼빈주의의 세계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는 만큼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적인 문제인 것이지요. 어째든 바른 종교에서 시작해서 피코와 팸토의 세계까지 말씀의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며 종교를 논하는 논자의 필설이 매우 흥미로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경외심 이상의 호기심이 되어 사색일변도로 말씀을 다루게 된다면 개혁주의의 정신을 벗어나게 되겠지요. 논자의 주장과 같이 적정과 절도의 원칙이 늘 필요합니다. 오직 말씀, 오직 성경입니다. 11.13 23:49
김영규 목사, 남포교회,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합신 3회 동문/ 제13회 교직자 기도회, 97. 04. 21
21세기에는 정치 사회적으로 세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보고 이 세기 말에 대축제를 계획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이런 축제는 미래가 물론 불확실해도 조그만 낙관적인 요소들을 조금 가장해서라도 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여 희망을 주고 21세기에는 평화가 오기를 바라자는 축제일 것이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런 축제에 앞서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깊은 통찰을 할 필요가 있다.
불확실한 미래과학의 발전
미국의 대표적 과학잡지인 Scientific American지에서 지난 해 9월에 잡지의 150년 기념으로 21세기의 핵심기술들에 대해서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정보기술, 교통, 의학, 기계, 재료공학, 에너지와 환경, 삶의 일반 등 모든 분야에서 그 핵심기술에 대한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다루었다. 놀라운 사실은 1895년 20세기 기술과학에 대한 예견적 토론에서 오늘날의 핵심기술들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컴퓨터 영역에서 지능칩, 양자칩, 지성적인 소프트웨어 전 지각들과 힘들을 자극하는 컴퓨터 등을 예측하고 있다. 항공과 우주과학에 있어서 이온엔지의 개발에 들어가 태양계 폭발시의 가속을 낼 수 있을 것을 예측하고 있다. 우리 몸의 병든 기관들이나 조직들을 새로운 이식방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공조직들과 실제적인 몸의 조직들을 연결하는 기술이 발달할 것인데, 이 기술은 특별 플라스틱 복합구조에 우리의 조직세포들을 증식시켜 실제적 몸의 조직들과 똑같이 만들어 버리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은 돼지의 몸에 인간 유전정보가 들어 있는 인간 체세포의 핵을 교체하여 인간과 같은 조직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인간의 몸에 이식시키는 특별히 스스로 자생하는 신물질이나 신 기계의 개발, 감각적 로버트, 지진아나 재난에서도 다리들이 유동적으로 자기회복이 될 수 있게 하고 항공기도 환경에 적응케 할 수 있게 하는(인간의 피부와 같이 기능하는) 지성적인 물질개발 등이 예측되고 있다. 기타 핵융합에너지에 대한 발전등 다른 과학기술들의 발전들도 예측되고 있다. 이 논의가 발표된 이후에도 인간복제까지 가능하게 된 유전공학의 기술이나 시간 유전자의 발견은 이제 과학기술에 의해서 인간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과학적 발전의 허구성과 문제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과학기술의 발전의 특이성과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컴퓨터 모든 기술의 발전의 방향은 인간과 같은 기능을 가진 컴퓨터 개발이 목표이다. 따라서 첨단으로 개발된 컴퓨터는 외부세계가 인간화되고 인간화된 것이 다시 외부세계로 되돌아가게 하는 매체역할이 극화되는 선에서 개발이 머물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복제와 독립적으로 인공적인 기관들이나 조직들이 유기적인 기관들이나 조직들과 전혀 똑같이 개발되는 선에서 머물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런 기술들은 급하게 일어나면 큰 재난들이 되기 때문에 시간조절이 잘 이루어지면서 차츰 차츰 개발될 것이다. 스스로 산출하는 물질들이 개발되는 것은 자연의 유기체들과 무기체들이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유기체 사이에 무기체들이 없어지는 환경이 되는 새로운 자연의 창조작업이다. 더구나 마이크로세계, 나노세계의 동작기계들이 개발됨에 따라서 미시세계도 사람이 조작하고 창조하는 식으로 점점 발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자연환경과 똑같은 조건들을 제거해도 계속적인 단조로움(continuous drudgery)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Robert W. Lucky의 지적대로 기술과학이나 공학이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했을 때, 그 과학은 분명히 실패해 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립자의 세계로 더 들어가서 물질의 근원에 가까이 갈수록 더 불확실해 지고 있다. 오늘날의 물질세계와 우주의 근원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양자역학의 발전에 따르면, 1973년에 가정된 관찰할 수 없고 정보상실 영역인 블랙홀(black holes)의 존재에 의해서 극단의 불확실성(an extra uncertainity or 'complementary' uncertainty)이 확증된 것이다. 아직 이론에 불과한 동전의 10-33하고 10-15이라는 핵의 영역에 있는 소립자세계에 대해서 더 자세히 그리고 정확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하나의 도시 만한 입자가속기를 국제적으로 만들고 있으나, 그 세계에서의 소립자들이란 ‘덩어리’(mass)로 관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입자들은 표상하기 어려운 영역이고 묘사할 수 없는 영역이다. 즉 회의주의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영역이다. 결국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믿었던 그 영역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회의주의와 허구가 과학이라는 매력적인 객관의 이름으로 지배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생명현상이 있는 미시세계에 들어가서 생명현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그 미시세계에 사회현상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은 정보의 전달자나 받는 자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각각 자율적 행동자로서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런 무지의 세계를 덮어두고 나노세계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그냥 마이크로 세계에서 개체의 독립성을 무시하고 기계처럼 조작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과학자의 문제점이다. 그런 것이 인간복제와 같은 그런 기술인데, 그것은 무지의 세계를 덮어두고 적당한 미시세계에서 모험과 조작에 의해서 인간화 작업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자연의 돌연변이가 아니라 인간의 조작에 의한 돌연변이들의 괴이한 세계에 파묻히는 것이 21세기의 사람들일 것이다. 추위에 잘 견디는 동물의 유전자를 옥수수의 씨의 유전자에 이식시킴으로 추위에서 싹이 보존이 되도록 하는 실험은 미래에 어떤 괴물을 탄생시킬지 모르는 행위이다. 결국 과학적 활동의 뿌리는 변치 않는다는 말이다.
과학의 인간화에 따른 신학적 비판가능성과 그 비판의 기독교적 책임
좀 더 원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거나 실험이나 모험이 결과에 앞선다는 그런 원리만이 상수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전체의 활동이 상수로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과학적 활동에서 인간화는 피할 수 없다. 처음에 자연에 대해서 인간화의 부산물이 문명과 문화이었기 때문에 다만 자연의 인간화가 이루어 졌지만, 이제는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자연화와 다시 인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 다른 혹성으로 인간이 가기 전에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만든 가상자연을 먼저 이루어 놓고 인간이 들어가는 우주계획이 이루어질 계획이다. 이렇게 인간이 다른 자연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환경보호는 이런 기류에 대한 제동작용을 할 뿐 그 기류를 역류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자연은 자연으로 가장하는 것일 뿐, 그것은 인간이 하나의 신비하고 중요한 상수로 남아 있는 이상, 그런 인간화 자체는 자연이 인간의 변수가 모두 상수로 남아 다른 자연에 규칙을 주고 있는 이상 인간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와 문명의 한계이다. 결국 21세기와 그 후 세기 모든 발전이란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근본에 있어서 변화가 없고 예측이 가능하다. 태초의 인간이나 21세기의 인간이나 근원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21세기에도 철학과 신학으로부터 과학일반을 비판할 수 있는 자리가 더 커질 것이다.
물론 철학도 그 비판작업에 어느 정도 역할분담을 할 것이다. 지향성에 의해서만 인간이 인식할 수 있고 처음 대상화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나, 인간의 인식은 그림이나 도식이 없이 어떤 표상이나 사고의 확대가 불가능하며 결국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다든지, 실존주의처럼 객체와 주체가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애매한 대상들(Dasein 혹은 Person)을 분석의 대상을 삼는다든지, 인식의 대상과 방법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비방법론주의, 모든 근본들은 수학적 공리와 그 체계와 같은 그런 정초(fondamentum inconcussum)가 없이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언어혼란, 언어와 같은 상징기능 자체의 도약적 성격에 의해서 제 과학자들의 ‘자신들’이 대상을 인간화 작업을 하기전과 그 과정에서 그리고 그 작업에 이미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으로부터 좀 더 강한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 모든 과학적 발전이 인간중심이고 가장된 허구에 기초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비판할 책임이 있는 것은 그 신학 자신이 그런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대해서 기독교적 책임이 있는 것은 그 신학 자신이 그런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대해서 기독교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기계의식과 현대 물리학의 혁명사상들은 모두 신학 안에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그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현대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좌표(차원)개념, 현대적 힘(impetus)의 개념, 중력, 자연의 수학화 작업등은 후기 중세신학에서 고대 애굽사상이나 희랍사상을 반대하여 순수 어거스틴주의로 되돌아가는 정신에서 생긴 부산물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즉 성경적 보수주의의 정신에서 생겼다는 점이다. 르네상스는 그런 중세 후기 사상을 이원론화하고 세속화하였다는 점에서, 보수주의가 자신이 해 놓은 결과들을 더 이상 다시 담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미 자동차(rota continue mobile)와 같은 최초의 자동기계의식이나 실험정신(scientia experimentalis)도 Petrus Peregrinus와 Roger Bacon의 산물이었고 그런 자동기계의 방식과 톱니의 개발은 후기 놀이기구와 음악에 사용되기 전에 이미 중세 후기 종치는 기술에 처음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보편수학화 정신도 원래 고대 애굽과 플라톤 사상일지라도, 그 정신이 자연과 같은 대상들을 설명하거나 덮는데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Robert Grosseteste와 Roger Bacon의 기본정신에 의해서 후기 중세에 발전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세속화되었을 뿐이다. 현대 물리학(양자역학)의 태동 시 유명한 논쟁(A. Einstein과 N. Bohr 사이의 주 논쟁)에서도 이 두 가지 정신만은 공통된 핵심내용으로서, 그 실험과 수학적 설명에 의해서 물리적 실재가 규명되어야 하는 싸움이었다. 21세기의 모든 과학적 이론들은 이런 정신 아래 객관화될 것이다. 따라서 현대과학과 기술의 발전의 근본정신이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다면, 그에 대한 기독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위기로서의 교육과 종교성
과학적 인간이 만들 21세기 세계상에 대한 비판적인 대안인 교회의 자기무장 정신들을 소개하기 전에, 사회의 한국의 위기요소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대학제도의 발전은 칼 대제 때 자유학문들(artes liberales)이 신학의 준비단계로서 신학의 일반기둥들과 같다(Alcuinus, c. pp. 730-804)고 하여 신학과정에 의미 있는 자리를 줌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그런 대학제도의 발전에 있어서 대학의 세속화로 인하여 자유학문들이 신학과 분리됨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자유학문들이 독립되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독립되어 발전된 정신이 후에는 신학에 영향을 끼치고 교회로부터 교육의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교회가 고백하고 기초로 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정치 및 권징조례도 단순히 엄밀한 종교개혁의 산물만이 아니라 어떤 교육적 그리고 사회적 위기의식에서도 그 문서들이 발생하였다. 특별히 대소요리문답을 모두 우리의 평신도 교육의 기초로 내세웠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당시 대소요리문답의 작성은 두 가지 대 사회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해답으로 작성된 것이다.
첫째로, 교육 자체 혹은 특별한 교육정신을 강조하는 사회적 위기의식에 대한 대답이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선천적으로 참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얀 백지(tabula rasa)와 같아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형성시키고 교육을 통해서 사람의 됨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고가 유행하였을 때, 그것이 갖는 종교적 위기의식에서 대소요리문답이 작성이 되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시대를 태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데카르트는 그 당시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과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었고 John Locke도 갓 11살의 어릴 때이다. 그들의 사상들은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의 대표적인 산물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소요리문답이 발표되었어도 그런 부정적인 사회적 흐름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그렇게 의회운동의 하나로 발표되었어도,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인 급변 속에서 한 번도 교회 안에서나 사회 속에 적용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둘째로, 무지와 오류가 사탄의 왕국이 세워지는 기둥이 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 대한 대답이다.
물론 그 때의 지식의 결여나 오류란 내적이고 구원적이며 마음의 지식에 대한 결여와 오류를 의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소요리문답의 작성은 참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교회가 지어야 할 의무로 여긴 정신에서 나온 산물이다.
결국 이런 사회적 변화요소들로 인한 교회의 위기를 해결하고 갱신하는 방법으로서 가정예배의 회복을 꾀하였고, 교육의 세속화에 대항한 그 가정예배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의 열매가 바로 대소요리문답이었다. 오늘날 의회제도의 태동이 태동할 때, 신학자들의 총회가 있었고 그 총회의 결정이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특별한 의의는 자신의 독특한 원리에 의해서 세속정치와 사회로부터 독립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에 찬성하지 못한 입장들은 신대륙에서 실천하려고 했어도 어느 정도 긴 기간 동안 성공하였을 뿐이며 지금도 그 잔재를 남기고 유지하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실제 내용상 실패한 셈이다.
어떻든 상기 두 가지 위기의식들은 20세기에서나 21세기에서나 한국에서도 여전히 있을 수 있는 위기의식들이다. 역시 지금까지 그런 위기의식에 의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어 왔고 앞으로 계속 있을 것이다.
1) 위기로서 교육
한국의 경제발전의 지금의 침체현상은 지금의 인적자산으로서는 현 경제발전에 따른 창조적 기술능력의 한계에 도달하였고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대기업의 소비현상의 조장이나 중산층 이상의 소비현상을 탓하기 전에 이런 근본문제가 있고 중소기업을 육성한다고 해도 이 한계는 여전하다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 대책으로 교육개혁에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방법이 없다. 여기에 교회에 당면한 대 사회적 문제가 있다. 더구나 21세기에 가면, 한국의 주변국가들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세계경제가 다른 중심지로 옮겨 발전된다면, 한국의 경제의 근본자원은 인재에 있을 것이고 그 역할이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인재를 창출하는 교육에 대한 강조점은 더 크고 국가의 중심과제가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교육위원회는 21세기를 위한 7차 교육개혁안을 발표했거나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 교육개혁안들은 현 사회 경제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여기에 교회가 당면한 대 사회적 과제가 있다. 즉 그런 교육 개혁안들은 윤리적 문제들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정직이란 인성은 미래정보사회나 산업사회에서 개인적 사회적 부가가치가 한층 더 커질 것이지만, 학교 교육이 그 인성을 기르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가정과 기타 사회 분위기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런 가정과 사회 분위기와 관련해서 분명히 설교와 교회 교육, 기독교 학교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런 정직한 사람들을 길러 내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설교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성격에도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신앙의 요소에 있어서 감정을 강조하거나 인간론 중심으로 하면 오히려 정직한 사람과 신앙과 분리된 신앙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또한 교회가 행하는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도 교육의 방식과 정직한 사람의 배출과의 관계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 더 나아간다면, 교인들간의 자발적 교통이 갖는 성격에서 다양한 능력들을 가진 평신도들이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전반의 인성개발이나 사회의 윤리적 분위기,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에 있어서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춘기에 맞는 격변기에 이탈되고 상처받은 자들에게 회심의 기회를 주도록 하는 강한 프로그램들(금식기도, 철야기도 등의 기도생활)을 통하여 전체 국민정서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 또한 찌든 학교생활에서 자유하고 안식하며 따뜻한 사랑의 교육을 교회 교육의 특성으로 삼아 사회의 분위기에 기여할 수 있다. 일반학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의 교사의 역할은 대단하다. 물론 루터의 교육개혁처럼 군주를 회심시켜 기독교학교들을 세워 종교 및 사회개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종교 사회에서는 이런 방식이 사회 속에 고립되는 형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각 지교회에서 종교개혁자들로 양성하여 일반학교 생활과 교육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더 중요할 지 모른다. 역시 일반직장이나 직업전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위한 프로그램들과 그 다음 개혁주의 본질적인 신앙의 특성들을 점진적으로 소개함으로 성숙해 가도록 하는 그런 계속된 프로그램들이 개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프로그램들이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과 결과와 관련해서는 그 프로그램들 뒤에 있는 신학적 입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2) 위기로서 종교성
또한 무지와 오류에 관해서도 현 한국이나 일본의 사회가 갖고 있는 종교성에 큰 문제점이 있다. 아마 가장 큰 사회문제일 것이다. 하나의 좋은 예로 무궁화위성의 발사 직전에 그 위성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 그 모든 과학자들이 돼지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한국의 합리적 사고의 문제점이다. 그것은 한국 지성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최고의 지성인들이 부처 앞에 절하고 점들을 볼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한국의 사회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요소이다. 기독교에서 보면 그 종교성이 전도를 위한 기틀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다. 문제는 과학의 발전과 종교성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동양에서의 과학발전은 큰 위험성이 있다. 그런 위험성을 볼 때, 예를 들어 인간복제에 대한 법적 규제를 한다고 해도, 그 법들은 서양의 것과 다를 것이고, 역시 다른 과학적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그 기술들도 동양에서 크게 발전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 종교성이나 법이 과학의 정신을 방해해 본 적이 없고 늘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거나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복제들이 공포되고 여론화하였을 때는 이미 인간복제에 대한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그 여론을 물어 본 것에 불과하고 그 기술이 배경으로 갖는 미시세계 혹은 나노세계의 과학기구들에 대한 경제효과들이 예측된 상태라면, 법이나 여론으로 그 길을 방해할 수 없고 다만 그 급속한 발전을 억제할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종교성 때문에, 서양보다 더 그 인류의 위기와 재앙이 동양에서 먼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현대 영국에서 그런 양복제로 처음 세계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떻든 이런 위기와 재앙은 제일 먼저 가정에 오고, 점점 더 대 사회문제화가 되었을 때, 법과 제도, 기구들에 걷잡을 수 없는 큰 변화를 줄 것이다. 그 기술은 법의 기초이고 살인과 같은 모든 범죄의 최종적인 기준들인 인간 존엄과 성 자체가 무너지게 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큰 문제들은 그 동안 주장해 왔던 신학적 핵심문제들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정신이 무르익음에 따라서 이런 문제점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신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겠다. 다만 영국의 양 복제 실험의 의미는 무엇보다 더 우리 몸의 모든 체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정보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결합하면서 생긴 세포 속의 핵 안에 있는 그 유전정보와 같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분명히 증명하였다(그 실험이 거짓이 없다면)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상 어떤 부분 혹은 어떤 상태에서 이 핵 이식 기술을 이용하여 복제하든 중요하지 않다. 21세기의 언젠가는 그런 기술들은 전문영역에서 법과 국가통제로부터 벗어나 보통 평범한 여성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자기 몸에서 복제할 수 있는 그런 개인화 단계로 발전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때에 한국사람들의 우상숭배와 미신정신이 가지고 있는 무지성과 종교성으로 인한 피해는 오늘날보다 더 훨씬 클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들을 짙게 가지고 있는 다른 교파들도 개혁주의 교회에 반하여 무지한 종교적 정신들과 연대하여 대립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오늘날 과학은 자신의 회의주의와 무지를 객관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은 근본적인 것을 아무 것도 해결함이 없이, 자신의 회의주의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신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즉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전쟁과 기근과 재난을 통하여 인간에게 교훈하셨지만, 앞으로는 과학과 기술의 이런 자기가장에 의해서 속임을 받고 그로 인하여 스스로 재난에 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과학도 그런 속이는 종교성들과 연대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현금 가장 큰 위기는 거짓이 만연되어 있고 퇴폐가 사회의 힘으로 작용하고 거짓이 사회활동의 무기로 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런 위기는 그런 종교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 및 교육의 전문화 현상은 인간의 종교성과 영적인 상황과 전혀 독립적인 것인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함께 연대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국 21세기 동안에도 영적인 긴장의 상황은 더 심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와 싸우는 것은 우리를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를 빼앗고 진리를 흐려 놓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마귀가 원래 우리로부터 진리를 빼앗을 수 없지만, 그렇게 위협하고 우리를 속이며 가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사회와 같이 운동을 하면 할수록 이런 핵심적인 것을 잃고 속아 허탈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싸우는 것이란 이런 위협과 가장과 속임과의 싸움이다. 이런 위협과 가장과 속임은 앞으로 더 심화되면 되었지, 결코 피할 수 없다.
21세기의 개혁교회의 무장정신들
따라서 21세기에 들어가서도 바른 교육의 요구와 종교문제로 인한 갈등은 더 심하여 질 수 있다. 역시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들도 이에 적응하는 다양한 양상들이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에 들어가서, 그 때 개혁신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면, 이미 때는 늦어 이런 종교적 다원주의에 의한 고립과 세속적 교육으로 인한 피해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개혁된 교회의 정당한 자리와 뿌리를 쉽게 잃어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때 가서 우리의 신학, 우리의 헌법, 교회개혁을 찾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에 따라서 21세기를 맞이하는 교회와 모든 신자들이 직면할 상기의 문제들을 앞에 두고 기본 어떤 개혁주의 정신들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몇 가지 개혁주의의 독특한 교리들(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 언약의 통일성, Extra-Calvinisticum, 장로교 정치원리로서 교회의 열쇠는 성직자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 자체에 있다는 것, 세속정치와 교회의 독립성, 주일성수와 예배의식 등)에 대해서 이미 개혁신보에 게재하였기 때문에, 다음에서 좀 더 나아가 좀 더 예리한 문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제기된 교회의 무장정신들은 특별히 남북이 통일되기 전이든 그 이후이든 관계없이 타당한 엄밀한 정신이다.
(1) 일반종교와 과학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칼빈의 정신과 같이 문화적 관조주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있는 종교성이나 다른 종교들 및 과학에 대한 태도는 칼빈의 방식이 어느 정도 해결책이다. 일반계시에 대해서 화란의 신 칼빈주의 신학이나 다른 문화적 적극주의보다 칼빈 자신의 태도와 같은 문화적 관조주의가 더 좋을 것 같다. 이는 문화적 적극주의가 문화를 파괴하지 않도록 하고 그렇다고 문화적 방관주의나 문화적 관용주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을 계속(subdine) 계시하신다는 입장으로 그 관조하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아는데 두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적 관조주의의 경우, 잘못된 것을 분명히 고백으로 표현하나, 그것을 바꾸거나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로부터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관조하는 자는 전 삶을 통하여 마치 순례자, 나그네, 외인처럼 땅에서의 삶과 문화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는 적극적으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로 나타나고, 소극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 곤비한 자, 순교자로서 살아 갈려는 태도가 거기에 나타난다. 동시에 사회의 변화와 소동에 특별히 민감하고 적극적이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관조주의자의 경우, 21세기 교회에서도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행위들을 무시하는 것이 죄라고 하든지, 하나님께 불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계속 연구될 과제가 될 것이다. 역시 20세기에서처럼 21세기에도 교회가 문화활동과 사회참여에 얼마나 적극적일 수 있느냐가 늘 문제가 될 것이다. 적극적 문화관에 있어서 신 칼빈주의는 너무 지나쳐 그리스도의 은총이 이방세계에도 있었다는 식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국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확인되듯이 우리의 신접자들(무당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주장을 허용하거나 그에 대한 반박할 힘이 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캄펜신학을 대표하는 Klass Schilder가 하듯이 창세기 1장 28절을 특별히 문화명령(Cultuur-mandaat)으로 보고 그리스도인만이 그 문화명령을 실행할 수 있다고 하는 종말론적이고 폐쇄적 문화관을 가질 우려가 있다. 오히려 우리의 정통 장로교 개혁주의의 유산인 하나님의 뜻으로서 다양한 ‘도덕적 실정법’(moralis-positiva lex)에 의해서 적극적 문화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칼빈의 종교개혁적 원리인 율법의 제 3사용으로서 중생한 신자들도 율법을 경건과 바르게 사는 규범으로서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원리로서만이 아니다. 이 법은 즉 성경에 명하였지만, 모든 사람들의 본성에 의해서 동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법으로서 따라서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영원한 법으로서 요구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안식일이요 일주일의 첫 날인 주일(주님의 날)을 지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타당한 것으로 세속문화에도 그 법이 유효한 법을 가리킨다. 또한 십일조를 도덕적 실정법으로 사용하면, 세금뿐만 아니라, 서비스 사회의 보이지 않는 경제의 활력소로서 제도화될 수 있다. 안식년 제도는 고용제도와 실업문제, 휴가문화를 창출하는데 내적인 원리로서 사용될 수 있다. 일부일처제도 그런 법에 속한다.
새로운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사회를 기독교 문화화하는 기틀이다. 예를 들어 국가지도자나 위정자의 선거에 있어서, 입후보자의 자격요건으로서 자랄 때의 도덕적 청결함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요구함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운동으로서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 분위기와 가정과 청소년 교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 예들 외에도 성경에 있는 여러 도덕윤리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2) 이미 개혁된 진리 즉 우리의 헌법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지켜야 된다는 고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좀 더 많은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겨우 그 헌법이 유지되고 지켜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헌법은 교회 역사 속에서 짧게 간헐적으로 있었던 정통개혁주의를 회복하고 보존하려는 어떤 시대의 교회헌법보다 더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용을 포기하면, 우리 교회는 역사 속에 짧게 간헐적으로 존재하였다가 사라져 간 같은 한 예에 불과할 것이다. 겨우 10년 정도로 한국교회에 흔적을 남겼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 다음 이런 고백이 어느 지역, 혹은 어느 세대에 이어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신사참배의 거절이 순교의 피에 동참한 것이라면, 우리의 헌법을 지키는 것도 순교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우리의 개혁들은 하나님의 역사이었다. 우리 교회가 갖는 이런 순수성이 최근에 와서 내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와 있다. 우리의 개혁과정에 있어서 이상한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든 개혁교회와 합치자고 문을 열려 놓으면서, 우리의 고백과 헌법정신들은 더 개혁되었다는 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그 동안 수정된 것들을 다 버리고 순수한 17세기의 고백서로 회복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헌법에 의해서 카톨릭은 다시 적그리스도가 되었고, 1886-7년에 개정되어 근친결혼이 허용되었던 것이 우리 헌법에서 근친결혼금지로 바뀌고, 영국 종교개혁의 중요한 정신이 다시 회복된 것이다. 1902-3년에 개정된 유아로 죽은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에 포함시킨다든지, 혹은 중생되지 않는 자들의 선행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든지,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이에게 충분한 구원이었다 등의 비칼빈주의 교리를 배제시켰다. 그러나 다만 제 22장 4항, 제 23장 3항과 31장 2항은 1788년에 미국에서 수정되듯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집자체부터 의회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그 회의과정에서도 에라스투스주의와의 절충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회의 소집권을 위정자에게도 주어졌던 것이고 신앙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교회에 대한 간섭이 약간 열려 놓은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용어의 변경에 불과하지만, 치리회의 폐회개념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용어인 의장을 회장으로 바꾼다든지, 기존 한국장로교 헌법에서 삭제하였던 임원제도나 상임위원회의 성격에 대해서 아주 제한적이었던 우리의 헌법의 정신과 상관없이, 총회규칙이나 노회규칙을 따로 두어 수시로 개정됨으로 헌법의 정신이 실제적으로 효력을 잃어버린 상태로 지속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교권정치의 문을 열고 놓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뒤로 후퇴한 것이다. 인간론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은 교회정치가 법의 정신을 살리고자 하는 사회정치보다 부분적으로 분명히 후퇴하고 있다. 지금은 총회가 순수 치리회가 아니라 정책기관이 되고 있고 상임위원회들은 총회가 일임하지 않은 문제들까지도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그런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런 분위기로 유도되고 있다. 발전과 연합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유일한 우리의 헌법의 정신과 고백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원래 그리스도안에서 연합이 되어 있다. 우리가 소수의 사람으로 나와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개혁사상으로 무장된 헌법을 고백하게 되었다면, 그것 자체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내에서 칼빈의 정신에 가장 가깝고 가장 엄밀한 개혁주의가 된 것은 예배와 교회정치에서의 개혁에 있었다. 그 중에서 우리 헌법은 역사적으로 심어지기 어려웠던 그 개혁정신이 어느 정도 순수하게 고백된 것이다. 이것을 지킬 수가 있다면 우리가 그 모든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셈이 된다. 활동과 조직에 있어서 헌법에 보증되지 않고 그 헌법이 지향하고 있는 단순하고 바른 교회정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만한 틀이나 정신들은 우리 가운데 과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나왔던 기존 교회의 모양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교회개혁은 그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개혁과정에서 대소요리문답을 우리의 장로교 헌법에 받았다는 것은 장로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모르나, 한국장로교회사 안에서의 새로운 개혁이었다. 그리고 총론은 17세기 엄밀한 종교개혁정신의 실제적인 내용을 고백한 유일한 증거이다. 15년도 못되어 최근 몇 년 사이에 헌법을 순수하게 유지하려고 해도 그것이 또 다른 개혁이 되어 버린 실정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이미 개혁에 후퇴한 이상, 앞으로 교회 위기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자신의 개혁이란 헌법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것과 같다. 즉 신임투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개혁이고, 바른 교회에 대한 개혁이 지방의식과 파벌의식을 타파하는 것이 자신의 개혁이요, 우리의 회개의 내용이다. 그런 자신의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른 고백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교단과의 화목과 합동이 있다면 이런 진리운동을 함께 하자고 우리가 초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교회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합동신학 대학원 대학도 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에 저해되는 모든 것을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존재와 그 발전이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더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좋으면 좋을수록 무조건 수용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고, 자신이나 주변의 원인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못 본 체 해서는 안 된다. 참된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의 헌법에 기초하여야 하고, 언제든지 진리는 동조자가 없고 공인이 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빛으로 남아 있도록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3) 개혁주의 핵심교리에 대한 실천적 의미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 저항의 개념으로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ad resistendum)
개혁주의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면서 그 역사적 정신과 분위기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항상 개혁해야 한다는 분위기란 다음과 같은 예로 확인될 수 있다. 즉 장로교인이라는 한 이유 때문에 고난받고 순교한 한 농부의 순교적 고집에 대한 것인데, 그의 고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고집이었고 그리스도만이 왕으로서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서 고백하는 자로서 고집이었다. 특별히 추밀고문관들이 자신에게 혁명의 죄목을 씌울 때, 혁명에 반대하면서, 복음을 듣는 것이 혁명이다(it was rebellion to hear the Gospel)고 증언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영적인 무기로서 혹은 저항의 무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주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저항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은 보다 큰 저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운동이다. 진리에 대한 고집 자체가 사회로 하여금 진리를 추구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한계를 정확하게 긋는 것도 진리자체를 만을 사랑한다는 선포인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메시지에 방해가 되는 어떤 과도함이나 가장이나 침묵을 배제하는 것이 그 진리를 사랑하고 지키는 행위이다. 말씀만을 선포하고 바른 성례집회의 고집이 미래에 어떤 상황에서는 오직 말씀에 의한 저항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버리고 진리 때문에 친구들도 나를 버리고 가족들도 나를 버리며 가까운 신앙의 동지들도 나를 버려 진리 때문에 홀로 서 있고 하나님만이 그 증인으로 있을 때(solus primo eram, me unum fuisse, Deum ipsum testor), 인간의 의지로 홀로 서 있어서는 안되며, 오직 성경을 가지고 그 성경과 함께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오직 성경으로 홀로 서 있는 일에 다양한 종교개혁자들도 참여하였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길들이 우리의 길과 달랐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진 어떤 사람들은 카톨릭 안에 머물면서 종교개혁자들이 되지 못한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독특한 고백 안에서 저항하는 자로서, 그 안에서 오직 성경으로 생각하며 말하는 자로서 홀로 서 있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정통개혁주의 신학으로 무장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
2)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창조와 섭리, 구원의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선 어려운 개혁적 차원은 유일한 주체라는 개념에 있다.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영감되었고 그 성경기자들은 성령의 기구(Spiritus sancti organa)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구원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거기에 인간의 것과 혼합된 것이 없다(nec quidquam humani habet admistum) 혹은 인간 자신의 어떤 것을 덧붙임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다. 이는 죽을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quod ipso solo) 나왔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말씀이 기자의 말일지라도, 고유한 의미에서 그 저자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이가 없고(quae proprie loquendo, non alium habet authorem, quam Deum) 그 분의 소유로(quod est ipsius proprium) 남아 있다.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근거이다. 성경의 계시와 기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역사도 이런 성격이 있다. 인간도 일하고 마귀도 일하며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과 마귀의 역사와 차원적으로(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르게 역사하신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다고 인간과 마귀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떤 중립적인 의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를 짓고자 하고 죄를 짓는 의지이다. 의지의 부패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펠라기우스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처럼 구원이 시대와 상관없이 인간의지의 역할에 맡겨짐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의 성취와 적용을 파괴시킨다. 이 점 때문에 도르트회의에서 아르미니우스를 강하게 정죄 하였다. 하나님밖에 이미 자기 자신을 향한다는 것이 타락의 시작이요 형벌이라는 것이 강조될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섭리와 역사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이고 같은 분이라는 강조는 개혁주의자들의 독특한 길에 있어서 아직 제한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Die ?konomische Einheit des trinitarischen Gottes)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Die einheitliche ?konomie des trinitarischen Gottes)이란 삼위일체론의 근본성격을 도입할 때는 다르다. 아타나시우스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로부터 구원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적 경륜을 믿는 것이다. 교리사적으로 이런 면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배워 왔다면, 한국 교회에서 오순절 논쟁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신구약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삼위일체 변증이 있게 되었고 이런 변증이 결국 삼위일체 교리의 성립의 배경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개념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구약의 통일성은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통일성을 의미한다. 역시 신구약 사이의 차이가 말로 할 수 없는 은혜의 과잉으로 말미암은(propter inaestimabilem gratiae affluentiam) 판명성의 차이로 구분(Evangelim respectu dilucidae manifestationis tantummodo ab ea(Lege differe, Institutio 1559, Ⅱ ⅳ 4)된다면, 이 판명성의 차이는 삼위일체 계시의 판명성의 차이와 같다. 이에 따라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해석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점진성을 판명성의 차이로 해석해야 한고 어떤 판명한 계시의 말씀이 어떤 시대에 계시되었든 처음으로 소급하여 적용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얻게 된다. 이런 당위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지 않으면, 칼빈이 말하였던 무신론자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의 주제로 다루어지거나 인간론이나 논리적 개념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상기의 독특한 이해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성이 다시 발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칸트가 지적한 신에 대해서 선험적 가상에 빠진다는 지적을 여기에서만 피할 수 있다. 또한 성만찬의 집례 시에도 Christus totum은 하늘에 계시고 Christus totus가 편재한다면, 그 임재가 또한 성령의 임재와 분리됨이 없고 그러나 삼위일체가 한 하나님으로 임재의 성격도 조금도 약해져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성부로부터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성격에 그 살아 계신 유일한 주체성을 발견한다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피할 수 있다.
3) 교회의 통일성, 구원의 성취와 그 서정의 뿌리를 예정론에 두어야 한다.
과거의 이신칭의론이 종교 사회적 부패들을 제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신칭의 핵심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의 방식에 있다. 즉 그 방식은 사회적 계층들을 상대화하였고 각 개인의 가치를 크게 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가치기준들을 변경시켰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영원한 구원의 핵심이 인간론 중심으로 바뀌어지고 거기에 강조가 있게 되었다. 사회적 계층을 지나치게 상대함으로 일시적으로 재세례파 교인들처럼 무정부주의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역시 루터주의가 교회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이신칭의에 있지 않고 성만찬 교리와 개혁과정의 타협(예를 들어 십자가에 대한 이해, 교회의 독립성 등에서)에 있다.
그러나 예정론에 구원이 기초하면,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 때문에, 전적인 은혜로 인한 감사의 생활을 하게 하고 인간론 중심에서 벗어나 자신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극히 겸손케 한다. 그런 구원론은 성도에게 견인과 강한 인내를 가져다주고, 정치 사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이신칭의론보다 훨씬 더 엄밀하게 비판할 수 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 대한 사랑과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한 신뢰를 요구하고 선교에 있어서도 인간론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고 선교지에서도 한 사람의 구원이 없더라도 선교에 대한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인내하며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정신을 제공해 준다.
특별히 교회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강조하는 것만큼, 또한 하나님만 아시는 교회에 대한 눈을 가짐으로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인간론으로 빠지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개혁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교회의 부패는 인간론(인척관계, 지방색, 학연 등)이 강한 끈이 되어 장기간 성도의 교제들이 이루어 질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보이지 않는 교회에 시간과 공간이나 계층을 초월한 보편의 교회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운동으로 참된 보편의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진리 때문에 고립되거나 화합과 합동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조할 사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처음 썼을 때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르기까지 엄밀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구원의 서정까지 예정론 안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 안에서 예정론이 다루어져야 된다는 칼빈의 신학적 발전을 오해한 것이다. 따라서 중생만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 강조하고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전적사역을 포기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루터주의 신학이나 아르미니우스신학에 가까운 것이다. 성화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할은 이미 언급한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의 일반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열심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탄과 모든 활동에 방해됨이 없이 그리고 인간의 책임성이 결코 배제되지 않는 목적과 방식에 있어서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4) 은혜언약의 핵심사상이 구체적인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서 쯔빙글리의 최고선(summum bonum)의 개념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지혜와 의, 선과 긍휼, 진리와 생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전 삶이 하나의 예배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굶주리고 배고픈 자가 그로부터 은혜를 받아 그 받은 은혜를 다시 그 원천의 영광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에서, 복된 삶의 궁극적 목적도 하나님을 아는데 두고 처음과 끝을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에 두었다. 이런 원리는 개혁주의의 삶의 중요한 유산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은혜언약의 내용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지혜와 선과 진리와 가장 좋은 선물이 된다는 점에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핵심적 내용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고 성령에 의해서 확증과 보증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이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와 미래의 중심기둥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삶의 중심이나 요구도 우리가 받은 은사나 은혜에 있어서는 안되고, 하나님 자신이 최고의 선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지혜와 우리의 유일한 부로서 남아 있도록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과의 관계가 이런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이시라고 하는 사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맺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론 중심으로 생각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주의하고 엄밀한 개혁파 순교적 고백을 포기하도록 하는 니고데모파를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죽고 사라져도 진리만은 남도록 해야 한다. 마귀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진리를 뺏으면 되고 어떤 방법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빼앗는 순간에 그의 일은 다 끝났다. 힘과 폭력이 그의 주된 무기가 아니라 가장과 망각과 무지가 그의 더 큰 무기이다. 그는 진리를 먼저 삶에서 빼앗아 가고 진리를 포기하도록 양심을 설득한다. 21세기를 위해서 교회가 새롭게 준비할 필요가 없다. 가장 오래되고, 거짓에 대한 가장 큰 증거인 하나님의 말씀에 더 확고히 서는 것이 준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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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민 으아아아~~~ 질린다. 질려요~~ 도대체 공부를 얼마만큼 해야 이렇게 홍수같이 지식을 쏟아낼 수 있는지... 11.12 21:11
신재원 저는 (불가능하다할지라도) 과학과 성경을 둘다 정확히 이해한다면 둘 사이의 출동은 없다고 확신하지만... 필자의 지적대로 근본적인 문제는 [모든 과학적 활동에서의 인간화]에서 찾을 수가 있겠군요.. 암튼.. 필자의 무지막지한 지적 포스가 느껴지는 글이였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1.13 20:18
남상수 아주 칼빈주의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칼빈주의의 세계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는 만큼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적인 문제인 것이지요. 어째든 바른 종교에서 시작해서 피코와 팸토의 세계까지 말씀의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며 종교를 논하는 논자의 필설이 매우 흥미로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경외심 이상의 호기심이 되어 사색일변도로 말씀을 다루게 된다면 개혁주의의 정신을 벗어나게 되겠지요. 논자의 주장과 같이 적정과 절도의 원칙이 늘 필요합니다. 오직 말씀, 오직 성경입니다. 11.13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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