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믿음(fides)으로 신학함
믿음 = 계시 수납의 손
신학은 믿음으로 하고 자연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성취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이시며,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이므로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물을 탐구하는 방식인 지성(知性) 혹은 이성(理性)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근세철학에서는 이성으로도 보편 사물의 지식을 알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더욱 무한한 창조주 하나님을 이성으로 아는 것을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피조된 인간의 지성으로 탐구할 없는 절대 영역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신학의 대상의 하나님 존재와 본성은 인간의 이성으로 탐구하거나 수립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여 수납할 수 없다. 자연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계시를 도저히 합당한 것으로 받을 수 없다. 계시의 내용도 인간 이성의 자체 이해의 범위를 넘어가므로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아겸비로서 주시는 계시를 수납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으로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믿음으로 수납할 수 있다. 즉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신학하고 지성으로 신학 할 수가 없다. 믿음은 논증 없이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확실성을 얻게 해주고,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확실한 지식을 얻게 해준다. 따라서 믿음으로 신학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그 권위에 의거하여 믿음으로 신학하여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획득한다. 비록 믿음이 논증 없이 직접적으로 지식을 획득하지만, 영적이면서 이성의 기능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성의 영역에서 이미 역설(paradox)이 존재함으로 영에 대한 지식의 이성적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1. 믿음 = 신지식의 수납의 손
= 지식의 내적 원리(Principium cognosscendi internum)
하나님을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여, 그의 사역과 성품 그리고 구원경륜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고 확실하게 안다.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계시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은 구원이 창조주 자신의 역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임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심을 하나님 안에 구별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으며, 성경의 고백대로 한 하나님을 고백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결론에 도달한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피의 속죄사역을 근거로 실재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신학적 사고는 하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신학과 신앙의 괴리가 발생하기 쉽다. 즉 신앙 시작은 피의 속죄 제사에서 시작하고, 신학의 시작은 성육신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2. 믿음의 본성
믿음이 신지식의 획득의 길이다. 믿음이란 본래 논증없이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확실성을 얻는 영혼의 기능이다. 회의론자들은 세계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회의하며, 철학자들은 객관적 세계의 실재와 표상을 분리한다. 사물의 세계에서도 증명되고 논증됨으로 사물의 존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얻는다. 더욱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해서는 믿음으로만 바르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불트만은 전제가 가장 확실한 것으로 주장하여, 모든 사항을 해석학적 귀결로 전환시켰다.
믿음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밝히듯 어떤 구원론적 의미의 믿음이 아니고, 인간 의식에 가장 근본적인 영혼의 형식적 기능을 뜻한다. 영혼이 자기 확실성을 수립하는 기능이 믿음이다. 확실성을 얻을 때 논증 없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지식을 획득한다. 믿음이 사물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인식의 시발점이 된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의 관계 설정도 믿음에 근거한다.
3. 믿음의 발생
이 믿음의 작용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중생하므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받는다.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사실임을 받는 것은 역사적 믿음(fides historica)뿐으로 불신자의 믿음(fides irregenitorum)이다.
믿음은 중생(regeneratio)에서 시작한다. 중생의 작동 원인은 선포된 복음의 내용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testomi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받아드리며,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서 이루신 구원(salus)으로 확신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 믿음으로 신학한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한다.
4. 믿음의 요소
믿음은 믿음의 대상(fides, quae creaitur)과 사람의 주관적 결정(fides, qua creditur)로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다. 그 분을 성경이 선포하고 증거하는 복음 곧 하나님의 구원과 약속을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계시의 말씀을 진리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은 논증(demonstratio)되는 것이 아니라, 선포(testimonium)되고 증거된다.
이 믿음은 우리의 자연적 능력(facultas naturalis)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증거로 된다. 즉 중생하므로 믿음이 발생한다. 믿음에로의 결정이 성령의 증거로 이루어지지만 믿음의 내용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성령께서 하신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므로 무한자(infinitus)를 우리의 자연적 능력으로 받을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의 지각(sensus)을 여사 우리로 받아들이게 하신다. 성령의 증거를 받아드리는 것은 사물 지식처럼 받는 것이 아니고 진리로 승인하여 수납한다. 이 받아드림 또한 믿음의 작용이다. 우리는 유한자이므로 무한자를 수납할 수 없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로 받아들이게 역사하tu야 한다. 칼빈의 가르침처럼 성령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손 역할을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의 중생사역으로 발생하고 성령의 증거에 의해 활동한다.
믿음은 먼저 대상을 분명히 아는 지식(cognitio)을 전제한다(사 1:2-3, 요 10:1-6). 막연히 알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다. 그것은 추리와 논증에 의한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신앙의 대상을 아는 지식은 믿음에로 이름이 필연적 귀결이다.
이 믿음에 이름이 있어서 내 지성 혹은 나 자신의 전적인 승인(assensus)을 내포한다. 그 신앙 지식은 선포된 대로 전적으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 있어서 신앙 지식과 승인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신앙 대상을 승인하게 되면 그 대상을 전적으로 받아드리려 전폭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fiducia)에 이른다. 신뢰는 확신 가운데 신앙의 대상에게 자기를 내어 맡기는 것이다. fides에서 fiducia로
서 교수님의 진술을 보면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존재)과 사역이며, 사람의 주관적 결정(assensus)로 나뉜다. 이 대상과 주관적 결정 사이에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연결고리가 된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중생시키시고,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 무한자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작용하신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믿음(fides)이다. 이 믿음에서 믿음(fiducia)으로 나아간다(롬 1:17, 10:17) KJV, from faith to faith. NIV, by faith from first to last, Vul, ex fide in fidem.(사고를 더해야 함)
5. 믿음의 인식
신지시을 얻음에 있어서 믿음으로 그 지식을 갖는다. 그러나 그 지식 수납에 있어서 전적으로 믿음이 그 방식이지만 중생한 이생(ratio renata, ratio christiama)이 인식 작업을 한다. 즉 믿음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을 중생된 이성이 한다. 그러나 이 인식 작업은 자연 이성Iratio naturalis)의 경우처럼 논증과 증명에 근거하여 신앙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증거에 의해 신앙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해하게 하므로 받아드린다.(즉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종교이다. 작금 교회 안에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깨달음은 자기 자연적 능력의 산물이어서, 믿음이 아닌 자기 능력이다. 기독교 생활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선인과 악인이 공히 이생에서 고난을 받은 이유는 현세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선인이라고 할지라도 현세에 대한 욕망을 절대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성이 자기의 자연적 권리로서 계시의 내용을 수납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 이성은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한다. 계시의 권위에 순종함이 곧 믿음이다.
믿음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권위에 의해 수납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propter auctoritatem), 자기 가신성(autopistia, 자기명료성)을 갖기 때문에 우리로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구속 경륜을 믿게 한다. 이 자기가신성은 바로 성령의 증거와 같은 것을 뜻한다. 성령께서 성경의 원저자이시므로, 성경이 가신성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속에서 내적 증거를 하신다. 그리하여 성경의 증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한다. 이 받은 말씀은 믿음으로 신학한다. 신학의 방법은 믿음, 즉 성령의 내적 증거이다. 신학의 근원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며, 신학의 방법은 믿음, 계시의 수납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내적 증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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