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매일성경, 07년 09월 01일] 사도행전 1:1-14.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형람서원 2007. 9. 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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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07년 09월 01일] 사도행전 1:1-14.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제목: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내용: 사도행전 도입(2권 헌사)과 승천 전(40일)의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제자들.

     [칼빈 주석의 주요 강조점] 첫째,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둘째,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셔서 내려오시지 않으신다. 넷째, 제자들은 어리석고 헛된 상상을 금지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섯째, 기다림 공동체는 기도하며 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1-2절)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며 승천하기 전 까지 기록.

  (1) 칼빈은 행하시며 가르치시며(to do and to teach)를 순서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것은 양자가 순서적인 것이 아니라 동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임무는 가르침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시는 자 그의 백성의 구속주, 하나님 나라의 회복자 그리고 영원한 지복의 창시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총화(the sum of the gospel).

  (2) 복음은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만을 취급합니다. 칼빈은 예수님의 18년 동안의 생애에 대한 침묵은 구원의 본질로 보지 않고, 3년의 행위와 가르침만을 구원의 본질로 제시합니다.

  (3) 칼빈은 성령으로 명하신 것을 “복음 전파”라고 이해합니다. 복음은 인간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며, 전 세계가 따르지 않으면 되지 않을 거룩한 명령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명령을 택하신(he had chosen) 사도들에게 하셨습니다.

  (5) 사도행전의 시작은 “승천하신 날까지”임으로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으며, 1장 10절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연결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5절) 하나님 나라의 일(3절) = 성령 세례를 받는 것(5절)

    요 6:29에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본 구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지 않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1) 칼빈에 의해서 제시되는 부활신앙이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않고는 복음의 일체의 권위가 상실되는 것(And that I may omit to speak of other discommodities that come by being ignorant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the gospel loseth his whole authority, unless we know and be also fully persuaded that Christ being alive, speaketh unto us from the heavens.)”입니다.

   (2) 칼빈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중생(regeneration)이며, 완성은 축복된 영생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는 “중생의 더 완전한 전진과 진보”로 제시합니다. 즉 새 생명의 탄생(중생)이며, 생명의 성장과 증진은 새 생명의 연속이며, 열매(알곡)는 영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은 중생의 진보입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아 성령 충만으로 나아감입니다.

   (3) 칼빈은 부활 이전 사도들에게 정규적인 임무(복음 전파)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으로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임무를 자제하도록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약속된 은혜를 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4) 복음의 전파는 시 2:3의 성취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5) 기다림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을 할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복종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다림의 강력을 “우리는 비록 지옥의 전체 군사가 일어나 우리를 대항해 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만을 신뢰한다.”고 한다는 확고한 부동의 신념을 갖아야 한다.” 제시합니다.

    (6)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직분입니다(ab officio Christi).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임하여 끝난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성령 세례는 사도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 또한 받아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교회, 일반적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 사역을 증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오순절과 같은 현상은 단회적입니다. 즉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는 단회적입니다.

     제자들은 요한에게 죄사함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칼빈은 그 세례를 “외부적 세례”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지 않음으로, 요한의 세례가 유효라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세례에서 교역자에 대한 필요 이상의 것을 부여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6-8절) 제자 = 이스라엘의 회복 vs 예수님 = 권능을 받아 증인이 되는 것

   6절) 칼빈은 제자들의 공통 관심(모였을 때에)이 이스라엘의 회복, 즉 세상 나라(부, 외부적 평화, 유사한 축복)에 대한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자신들이 싸우지도 않고 얻은 왕국이 목표입니다. 무너진 나라를 회복하는데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려는 것은 여전한 제자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회복이란 많은 피해로 파괴되고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것의 이새의 마른 그루터기에서 한 가지가 돋아나고, 또 처참하게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7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어리석고 헛된 호기심)에 대해 답해주지 않으시고 숨겨두시기를 원하십니다. 칼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계시에 만족해야 하며, 계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은 비합법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둘의 포용이 진정한 방법(true means)이며, 배움의 열망과 숨겨두시는 것을 원하심의 두 극단의 포용은 지혜와 절도를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배움의 열망에서 전문가적 소질을 개발할 것을 주문(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겨두신 사항)하며, 도를 넘어선 관심, 호기심은 절제해야 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일들을 우리들이 가로채는 일을 금하신다. 그런 일들 가운데는 우리의 생각과는 위배되고 우리 마음의 이해력을 초월한,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지배하려고 하시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우리가 미리 알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 하나님의 것을 침범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8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헛된 호기심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권능을 받음” 즉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제자들) 헛된 호기심이 발동할 때에는 나태와 불신을 낳게 합니다. 이 불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함으로 치료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끈기 있게 기다려 자신의 소명(called)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육적 이스라엘(육체적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를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분리의 장벽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잘못을 교정하고 있다고 제시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규정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의 성격은 승리를 위해서는 싸움이 필수적이며(딤후 2:6, 농부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일을 한다는 것은 최후의 상태에 대한 노력이 아니라, 수확을 얻을 방법(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 딤후 2:11), 하나님 나라1)로 가는 길(way)에 대해서 관심을 갖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고전 4:6)이십니다. 즉 제자들에게 현재는 회복에 관심을 두지 말고 싸움에 임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증인(싸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방식이 아닌 영적으로 지배하신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천년왕국 주장에 대해서 명백하게 배격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현세적 왕국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9-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the ascension of Christ

   승천 교리의 중요성: 칼빈은 그리스도의 승천의 유익을 기독교강요에서 제시하였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제시합니다. 칼빈은 자기의 반복적인 제시를 가급적 피하고 참고로 제시하는 것으로 하여 간략하게 하는 것이 주석의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한 자기의 관례를 깨고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승천 교리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one of the chiefest points of our faith)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Luke) 또한 누가복음 24:36-53절에 부활 후기와 승천에 대해서 제시하였지만, 사도행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와 유사한 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승천 교리의 확실성: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 높은 장소에서 올리어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의심한 여지가 없으며, 천사들도 나타나 증언(10절)하였습니다.

  승천 교리의 유용성: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살아서 계신 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게 됨으로 그리스도를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면 됩니다. 셋째, 구름, 연기 등의 가로막음으로 우리가 주제넘게 탐구하려는 욕망(호기심)을 억제하게 되었습니다.

    10절) 천사들은 사람의 형체로 나타났습니다. - 칼빈은 ‘두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흰 옷을 입었습니다. - 흰 옷은 특별한 구별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11절) 천사들의 책망은 사도들을 우둔한 자로 책망한다는 견해를 반대합니다. 혹 하늘을 쳐다본 그 행위로 책망한 것에도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육안으로 그리스도를 보려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 책망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둘째, 그가 곧 돌아올 것을 기대한 것에 대한 책망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배워야 될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즉 책망 받은 이유가 놀라움 때문이 아니라, 놀라운 일의 목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go into heaven(하늘로 가심, Jesus, which is taken up into heaven으로 올라가심)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갈망하지 않도록 함이며, 둘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위로의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성만찬에서 화체설의 로마교회(교황제도주의)를 비판함에 있어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몸의 하늘과 땅의 분리를 무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고유한 자리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하늘’로 올리우신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보좌에 계심을 천사가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는 것도 확실하며, 또한 하늘은 세계의 구조와 대치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하다는 것이다. 즉 하늘에 계시게 된다는 일은 이 세계의 밖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사들의 목적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탈피하기를 제시한다. 그것은 심판 날까지는 오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곧 돌아오시리라는 헛된 기대를 시정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바라는 일은 어리석고 그릇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헛된 사고가 로마교회의 성만찬 교리(그리스도의 몸이 초자연 방식, 기적의 방식으로 현존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금에 널리 유포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이해가 로마교회의 이해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날까지는 사람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바라는 마음을 우리에게 금지시키는 것”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편재를 거부하면서도, 다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채우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고 제시합니다. 채움의 방식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는 말씀 안에서 또는 성례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것을 나(칼빈)은 인정한다. 그래서 믿음으로써 그의 살과 피를 받는 자는 누구나 참으로 그리스도의 육체와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되지 않는다.” 칼빈은 이 진술이 교황주의자들과 명백히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비밀한 능력과 권세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he poureth into us, by the secret power of his Spirit, his force and strength). 즉 로마교회는 성례전이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칼빈은 말씀 안에서, 성례전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성령의 비밀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의 육체가 그(성례전)에 의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로마교회의 이해로 보고 거부합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묵상할 때에 육체적 임재, 신비적 임재를 거부 혹은 매우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신비적 경험을 하는 부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짓 영의 유혹을 물리칩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일편단심으로 육체적 욕망을 억제하는 일, 인내심을 갖게 함, 권태를 이기게 합니다. 칼빈은 부도덕한 사람들에게 기다림은 두려움과 불안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증과 능력이 됩니다.

   11절에서 예수께서는 오려지심(has been taken)과 가심(go)으로 두 분사가 쓰여 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려지셨지만(분사, 부정과거, 수동태), 내려오실 때에는 올라가신(분사, 현재, 중간태) 모습으로 내려오심(동사, 미래, 중간태)입니다. 즉 예수님의 상태는 오려지심이 완료된 상태이며, 또 미래에 본 그대로 다시 오심을 말씀합니다.


12-14절)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락방으로 돌아감.

   칼빈은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임이 옹색한 형편이지만, 불편에도 불구하고 갈라져서 기다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12절) 칼빈의 거리와 장소를 명확하게 기술함으로 이야기의 신빙성(credit unto the history)을 더해 준다고 제시합니다. ‘안식일에 알맞은 거리’는 약 3.2Km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이 법은 안식일 법이 아닌 것을 제시합니다. 칼빈은 이 법이 제사장들의 공동협의회에서 정해진 것으로 추측합니다.

    13절)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이 베드로 우월성을 제시하는 구절로 강조함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모친이 가장 나중에 기록되어 ‘여자들(14절)’ 보다 뒤에 있음을 지적하여 논리가 맞지 않는 교리를 비판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다음 가는 교회의 또 하나의 우두머리가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증명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사도들의 이름을 기록한 누가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배반했고 도망하였던 이탈자, 도망자들이 주님의 뜻에 의하여 다시 함께 모여져서 그들의 본래의 지위로 회복이 된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함”으로 제시합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배반자요 도망자인 제자들을 다시 세워주십니다.

    14절) 칼빈은 “여자들과”를 “아내들과”로 이해합니다. 그것이 결혼한 사도들이 아내와 떨어져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제시합니다. “그 여인들은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영웅적인 인내심과 견인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사도들의 성령의 능력을 기다림에 아내들이 없음을 상상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우들’은 친척을 가리킨다고 제시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씀. 기도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성령을 보내주시길 기다리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참 신앙이란 그것으로써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때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성도가 기도할 것은 “주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허락해 주시길 원하는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이 모범을 따라서 성도는 날마다 성령을 더해 주실 것을 하나님의 손에 간청해야 한다고 강조(to beg at God’s hands that he will increase in us his Holy Spirit: increase, (I say,) because before we can conceive any prayer we must needs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For as much as he is the only Master which teacheth us to pray aright, who doth not only give us utterance, (Romans 2:25,) but also governs our inward affections.)합니다.


   칼빈은 본 구절의 의거해서 진정한 기도(true prayer)에 대해서 첫째 끝까지 계속적인 기도와 둘째 한 마음으로 기도한 것으로 제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성령을 보내실 수 있었지만, 제자들의 마음 조리는 가운데 인내심 훈련을 위해 기간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급한 기도에 대해서 “해롭고 독한 질병”으로 혹평합니다. 이와 같은 모범은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후에도 기도의 훈련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일치 또한 계속된 교회의 미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참으로 모두가 형제가 되어야 하며 또는 형제로서의 합의가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매일성경] 


예수님(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택하신 사도들을 가르치십니다. 공생애에서는 행동하시며 가르치셨고, 천상에서는 성령으로 가르치십니다.

2.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명령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3. 제자들에게 기다림을 요구하십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지상에서 성령 세례를 주시지 않고, 천상의 주께서 성령 세례를 주십니다. 즉 보이지 않는 기간에도 약속을 의지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4. 제자들을 복권시켜 주십니다.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을 다시 모으셔서 회복시켜주십니다. 주께 택함을 받음의 신비와 보호하시는 신비를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주를 찬양합니다.

5. 주님께서는 천상에 올라가셨을 뿐만 아니라(천상주), 가심대로 다시 오십니다(재림주).


[나에게 주는 교훈]

1. 기도는 약속을 의지하여 약속의 성취를 기도하며, 끝까지 기도합니다.

2. 오직 성령을 기다림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합니다. 성령은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도 외에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더욱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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