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기독교강요

중보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형람서원 2007. 2. 2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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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조형욱 (총신대 대학원 조직신학 Th.M. 1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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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글

Ⅱ. 중보자 그리스도

 1.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성

 2. 중보자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3. 중보자 그리스도의 직분

 - 예언자

 - 왕

 - 중보자

 4. 중보자 그리스도의 속죄

Ⅲ. 마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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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 짧은 성경 구절 안에는 우리의 존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났음을 말한다.

왜 중보자가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중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먼저 ‘인류 전체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다’고 그의 글을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가장 밑바탕이 된다.

중보는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한다. 중보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기독교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는 다른 종교로부터 분리할 뿐 아니라, 이슬람교와도 유대교와도 분리시킨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하며,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한다.

이 글은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면서, 칼빈이 이에 대하여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그러기에 기독교 강요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매우 유익한 도구가 될 것이다.


Ⅱ. 중보자 그리스도


‘중보자’ 혹은 ‘중보’라는 단어는 익숙한 단어이다. 교회 공동체나 그 외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 단어가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사용 용례를 면밀하게 따져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는 무관하게 사용되는 때가 많다. 흔히 사용되는 ‘중보기도’라는 단어도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이 단어는 익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단어이다. ‘중보’ 혹은 ‘중보자’라는 단어를 성경과 상관없이 사용함으로 진정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허락된 은혜의 관계를 성경에 비취어보면, 중보를 떠나서 하나님은 저 고대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이 없고, 은혜를 받으리라는 희망을 주신 일도 없다. 예배에 대하여서도,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는 경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처음에 선민을 택하신 것도 중보의 은총에 의한 일이었고,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인도하심과 보호하심도 중보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다.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어떤 역할들을 하는지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러한 신성과 인성을 함께 소유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어떤 ‘직분’을 감당하셨는지 말할 수 있다. 그의 직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속죄’로 나아가게 된다.


1.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성


이 땅을 살았던 ‘예수’라는 인물이 과연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그리스도이시고, 동시에 ‘온전하신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교회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있었던 매우 큰 논쟁이었다.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한참 동안이나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여러 단체들이 생겨났었다. 또 이런 각기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문제로 인해서 교회 회의들이 열렸었고, 그 회의를 통해서 성경의 비췸 안에서 그릇된 신앙고백을 하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하였었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핵심이다. 교회 역사를 들여다보면 삼위일체에 대한 이단의 공격은 계속되었었고, 그래서 기독교 강요 1권에서도 13장의 21절부터 29절에 걸쳐 그들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의 삼위를 거부하는 표현은 아니다. 그래서 칼빈도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essence)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persons) 또는 세 위격(hypostases)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으로 언급하는 것은 단일하신 본질과 그 안에 있는 세 위격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하며 언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교회 역사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였던 일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가 온전한 하나님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어떤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매우 잘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말하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이유로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인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존재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보여주시는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다. 그의 계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며, 동시에 삼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칼빈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 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홀로 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three persons)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칼빈은 앞에 언급된 "위"(person)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person)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언급된 것과 같이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한 실재를 갖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해서 구별된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온전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그 실재가 같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위”(person)는 다르다.

이러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어거스틴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고 칼빈은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다.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는 성부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자이시지만, 그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칼빈의 이해였고, 또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2. 중보자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그렇다면, 이와 같이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동시에 사람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질문하여야 하고 성경적인 답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온전한 인간이었음에 대하여 알아가기 이전에, 온전한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가 왜 동시에 참된 인성을 지닌 사람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 말하면서 중보자와 관련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끼인 구름과 같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해 버렸기 때문에(참조, 사59:2),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면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땅의 어느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중보자의 임무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받도록 해서 사람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지옥의 상속자들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중보자의 또 다른 임무는 불복종으로 멸망한 사람이 시정책으로서 불복종을 복종으로 상쇄하며,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행하며,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었다. 이러한 중보자의 임무는 하나님으로서 만은 할 수 없으며, 동시에 사람으로서 만도 할 수 없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러기에 어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이 중보의 사역을 감당할 중보자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중보의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만 가능하다. 또한 성경은 그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취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초대교회 때부터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다. 요한1서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성경은 그리스도가 인성을 가지셨다는 무수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끼셨고, 우리와 동일하게 이 땅을 밟고 사셨다. 십자가형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다. 또한 그는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의심했던 마르키온파와 마니교도들, 또한 그 이후에 여러 사람들은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 안에서 성경이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는 완전히 사람이셨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보통 사람과 구별한다.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는 그리스도를 둘째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라고 표현한다. ‘사람’이라는 표현과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라는 표현은 서로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표현을 하면서, 그리스도가 사람이셨으나, 죄에 속하지 않은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다.

온전한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는, 완전히 사람이셨다. 그러나 그는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던 것이다.



3. 중보자 그리스도의 직분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하나님이 되시고, 동시에 사람이셨기에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으셨다. 그렇다면 그가 중보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

우리가 그의 역할에 대해 아는 것은 성부께서 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는지에 대해 아는 열쇠가 되며,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에 대해 아는 기초가 된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역할은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예언자와 왕, 그리고 제사장이다.



예언자


성경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적인 직책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 이전에 이미 여러 예언자들이 그들의 시대 속에서 활동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와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수평적인 위치를 갖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예언자들의 공통적인 임무는 교회가 기대를 잃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중보자가 오실 때까지 그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와 성경에 등장하는 일반적인 예언자들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대한 계시를 그러한 방법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와 같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전한 예언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 그리고 구속의 역사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온전한 하나님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계시하신다.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옛적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부분부분, 조각조각 나타내셨으나,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에는 ‘본체의 형상’이시며 ‘영광의 광채’이신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계시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전해지는 일이 이루어졌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으로 인하여서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가 되며, 그 지혜는 이 땅에 수도 없이 많은 여러 지혜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가장 존귀하고, 가장 본질적이며, 그러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고, 더 나아가서 다른 것들은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언급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든 예언들의 완성이며, 이 세상의 어떤 지혜와 지식으로 여겨지는 것과 비교 할 수 없는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역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사역이 없다면, 우리들은 우상을 숭배하듯이 자신의 뜻과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전혀 원치 않으시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또한 그것만이 그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이다.




성경은 또한 그리스도의 왕적인 직책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왕적인 직책이라 함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왕으로서의 주권, 즉 왕권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왕적인 주권은 두 가지로 언급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칼빈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문제를 말할 때에 먼저 그것은 영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할 것이다.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 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이 추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원성은 다니엘서에서 천사가 그리스도의 위격에 돌리며(단2:44),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백성의 구원에 올바르게 적용한다(눅1:33). 그러나 이 영원성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고찰하여야 한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교인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을 개인적인 면으로 언급할 때에, 그의 왕권이 영적인 것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왕권에 순종함으로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이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인한 이익은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경하는 풍부한 오락,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은 천상 생활에 있다.

또한 우리가 중보자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게 풍부히 주시며, 영적 원수들의 모든 공격 앞에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로 백성의 방위력을 강화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자 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왕권 아래 있는 우리는 어떤 삶의 모습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가?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세상의 모든 비난을 용감하게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낌없이 풍부한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함께 말한다. 하나는, 우리가 그의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승리를 할 것이며,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결단이 근본적인 힘이 되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힘이 되어서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 전혀 아님을 말한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왕권, 즉 다스림 아래 있는 그의 백성이기에 그의 주신 풍부한 은혜를 따라,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이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은혜와 왕 되심이 전제된다. 그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이렇게 개인적인 부분으로 적용되었다면, 이제는 교회 전체에 관해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앞에 언급되었듯이, 그의 왕 되심의 영원성은 개인적인 면과 교회공동체적인 면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말한다. 교회가 이 땅에서 여러 가지의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머리는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보호 하에서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왕이시고, 그가 교회의 머리시라는 사실은 악마가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고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그의 직분을 감당한다는 사실은,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왕직은 그의 백성된 우리에게 그 승리를 바라보며 나아가게 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영역에서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사장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세 번째 역할은 그가 중보자로서 우리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것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셨으며, 그와 동시에 스스로 제물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우리의 죄를 없게 하시려고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셨다. 그가 이러한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신다’는 의미는, 그가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시려 하신다는 의미를 갖는다.

원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하나님의 공의와 우리의 죄악됨으로 인해서 중보자가 없이는 화해되지 못하는 관계이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속죄가 사이에 들어와야 한다. 이것만이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이해할 때에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화해할 아무런 필요와 이유도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는 수평적인 화해가 전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죽은 자들이며, 하나님은 스스로 온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얻어지는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중보자를 통하여 우리와 화해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한량없이 큰 은혜인 것이다.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로 인하여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불결한 범과와 죄 때문에 길이 막혔던 그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중보자가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간구하는 것, 우리의 구원 모두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에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역할은 단지 기도 말미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에만 한정되며 그 이외의 영역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것들이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중보자 이외에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사람의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온전한 은혜를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또한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한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새로이 제물로 바치는 것도 가증스러운 것이다.




4. 중보자 그리스도의 속죄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직분과 그것으로 인한 역할을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신의 백성 삼으신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도, 길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속자의 유일성은 절대로 양보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가장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전제가 기본이 된 이후에야, 우리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의미와 그 구속이 이루어진 과정에 대하여 알아갈 수 있다.

구속자인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의 공의로움이 먼저 언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덮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고도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우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해방의 혜택을 경시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가 은혜임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죄악된 상태와 그로 인해 우리에게 선포된 죽음, 그리고 이 죽음을 선포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말해야만 한다.

이렇게 온전한 죽음 아래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이해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하신 이후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하셨다는 사실이다. 성경도 이것을 증거 한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는 우리의 공로나 자랑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구속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완성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심에는 어떤 부족한 요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 구원은 온전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기초를 이루셨고, 우리가 그 기초에 무엇을 쌓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구원의 입장권을 주셨고, 우리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그 구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구속을 위해 지불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 만들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이다. 그러기에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들에게 허락된 속죄는 완전하며, 주홍빛 같은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는 속죄이다.




Ⅲ. 마치는 글


중보자의 역할을 하셨던 그리스도 예수는 온전한 하나님이셨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한 실재셨고 동시에 성자 하나님의 위격을 가지시는 분이셨다. 그와 동시에 중보자 그리스도는 사람이셨다. 성경은 그의 인성에 대한 수 없이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 분이시기에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 제물이 될 수 있었으며,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만을 통해서이다. 그 이외의 다른 길과 방법은 우리에게 허락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의 중보 사역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또한 중보자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악된 우리가 감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사역 덕분이다.

더 나아가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어떤 부족한 면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전한 은혜이며, 온전한 속죄이다.

중보자 그리스도! 이것은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중보자 그리스도가 빠진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밝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과 신앙의 열심을 내고 헌신을 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로 인하여 시작된다.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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