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

이 시대의 시네마 천국, 광주 극장

형람서원 2006. 5. 3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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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시네마 천국, 광주 극장
 

얼마 전, 여행의 끝에 친구가 있는 광주에 들렀었다.

 

여행의 끝무렵인지라 하루를 왠종일 빈둥거리다가 이러느니 영화나 보자, 등짝에 붙어버린 방구들을 힘들게 떨쳐내고 거리로 나섰다.

 

광주시내에는 영화관이 무쟈게 많다.  물론, 서울에도 발에 채이는게 영화관이지만 도심 면적 대비로 본다면 이곳은 진짜루 발에 채인다.  블럭마다 하나씩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영화관들이 대부분 멀티플렉스로 바뀐데다 메이저급의 CGV와 메가박스까지 합세하며 그 경쟁이 전쟁을 방불케한다고 한다.

 

기존 영화관들은 각종 통신사,금융사 카드의 할인서비스는 물론, 얼마전부턴 교통카드를 가져와도 할인을 해준다나?

광주시민 중 교통카드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니까 광주시민이기만 하면 다 해주겠다는 거다.  메이저사에 맞서기 위한 자구책이 눈물겹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아귀다툼 한복판에서 홀로 초연히 느린 행보를 이어가는 곳이 있으니,

 

이름하야 광주극장~!

 

멀티플렉스로 바꿨으면 십수개의 상영관이 들어섰음직 싶은 넓은 부지의 건물엔 단 하나의 대형 스크린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보통 종일 1가지 영화만 상영하거나 아님 2가지 영화를 번갈아 바꿔가며 상영한다.

당연케도(?) 이곳에서 최신 개봉작을 관람할 순 없다.  주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등의 저예산영화들이 상영된다.  그것도 '순회'란 문구를 붙여 타도시를 돌고 난 필름으로 말이다.

팜플렛이나 포스터까지도 타극장 것들을 그대로 갖다 쓰기 땜에 써 있는 개봉날짜가 틀릴 뿐더러 '하이퍼텍 다나' 같은 문구도 버젓히 붙어있었다.

 

이곳엔 카드 할인서비스 따윈 없다.  자신들도 해주고 싶지만 카드회사들이 이곳과 제휴맺으려 하질 않아 어쩔 수 없단다.  관람료도 삼성과 비씨 이외엔 카드지불이 안된다.

 

극장에 들어서면 입구의 매표소 직원 한 명 이외엔 별다른 관리인을 만나 볼 수 없다.

영화표 1장 끊고 들어가 몇 편을 보다 나와도 누구 하나 신경쓰는 사람 없다. 그래서 보통들 영화표 한 장으로 들어와 2편 씩 보곤 한다지만 이곳을 몇 번 찾다보면 어느사이 양심이 자율조정되어 작정하고 그러는 일은 없어진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곳에서 스스로 자율조정해야 하는 것이 또하나 있는데 바로 상영관 내에서의 온도 조절이다.
극장이 오래되다보니 냉,난방 시설은 가동되질 않는다.  여름에야 극장안이 워낙 서늘해서 상관없지만 겨울엔 코끝이 얼어붙게 춥다고 한다.

그래서 추운 사람은 알아서 챙겨들고 들어가 덮어쓰라고, 입구에는 담요가 쌓여 있다. 이렇듯, 이 극장은 관객에게 '자율'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율이라 해봤자 고등학교때, 전혀 자율이 아니었던 '자율학습'을 경험한 게 다였던 나로서는 이런 시스템이 여간 낯선게 아니었다.
 

 

 

광주 동구 충장로5가 62번지 / Tel.062-224-5858

 

 

약도를 올려놓으려 광주극장에서 제공한 지도를 찾아보곤 웃음이 나왔다.

마치, '우리 말고도 사방에 깔린게 극장이니 못 찾겠으면 딴 데가서 봐라.."라고  말하는 듯 보이는 안내지도라니, 큭!

현대식 극장들에 둘러 싸인, 지도 속 광주극장의 모습이다.

 

                                                      광주 극장의 모습.
                               (앞에서 자꾸 알짱거리면 면상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
이라 협박을 해도 아랑곳 안했다. 몹.쓸.것~!)

 

극장 전면에는 1992년부터 10년간 이곳에서 간판을 그렸던 박태규씨의 작품인 [송환]과 [거북이도 난다]가 각각 걸려 있다. 현재 생태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광주 마지막 간판쟁이,박태규씨는 지금도 좋은 작품이 있을 경우 자청해서 간판을 그려 선사하고, 극장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몇년이고 이렇듯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다.

실사 프린팅따위로 상영영화를 홍보하느니 차라리 '역사'를 걸겠다는 이 극장의 고집이 엿보인다. 박태규씨에 관한 기사

 

극장 앞 주차금지 경고문.

 

극장엔 당연(?) 지하주차장 따윈 없다.  주차는 꽤 떨어져 있는 화니백화점을 이용해야 하며 것두 무료는 아니고 3시간까지 50% 할인해 주는 거다.

 

이 날 본 영화, [오늘의 사건사고]

 

[go]와 [세상의 중심에서...]를 만들었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영화다.

사건과 사건들이 모여 이뤄진 어느 평범한 하루에 대한 이야기가 줄거리이다.  [조제,호랑이...]의 사토시와 치즈루가 나온다.

이 영화를 보려고 광주극장엘 간 게 아니라 광주극장을 가려고 이 영화를 선택한 거였지만 진짜, 참 돈 아까운 영화였다.

이사오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이 탄탄한 소설에 편승했음을 인지한 때문인지 나름, 드라마틱한 소재에서 벗어나 보려 시도한 듯 보였으나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 꼴이 되지 않았나 싶다.

5시쯤 도착한지라 영화 시작전까지 극장 안을 구경했다.

 

예전 영사기와 예전의 간판 그림들.

                                영자의 전성시대 간판그림 옆에 커트 코베인의 일생을
                                담은 [last days]의 포스터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예전 극장 선전 포스터.

1960년대 쓰던 의자와 지금 현재 쓰는 (하지만 이것도 90년대 의자다..) 의자와의 비교 전시.

화장실로 가는 복도에 걸려 있던, 극장 역사를 설명한 사진들.

 

일제 강점기 말이었던 1935년, 광주 갑부 최선진에 의해 개관한 광주극장은  1200객석을 갖은, 당대 조선 제1의 극장이었다. 당시엔 영사기술의 교본조차 제대로 없었기에 영사기술자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후에 화재로 건물이 거의 전소되어 1968년 다시 재건립한 것이 지금 현 극장의 원형이 되었다.

 

 

 

1955년의 간판실 전경.
당시 간판쟁이들은 교통표지판을 그려주기도 했다.

극장의 기도.

 

1960년도까지 기도는 극장경영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지역의 어깨들로 구성된 이들은 표받는 일부터 극장 내 질서 유지가 주업무였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예전 드라마[은실이]에서의 빨간양말 양정팔이 생각났다. [야인시대]의 이혁재가 맡았던 김무옥도 이 극장 기도 출신이었다고 한다.

 

입구에 걸려있던 관람자 준수사항.

 

'안녕질서'니 '질서문란의 언사'니 하는 문구나 '아니된다'라는 문장 끝맺음이 이채롭다. 극장을 대충 구경한 후, 좀 이르게 상영관에 입장했다. 전편인 [린다 린다 린다]가 상영중이었다.  그저 그런 뻔한 일본영화였다. 배두나가 고등학생으로 나오기엔 이젠 너무 나이들어 보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항시 느끼는 거지만, 일본 여배우들의 과장된 감정표현은 당췌 적응이 안된다.

 

상영관 내의 모습.

 

[린다...]가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에 상영관 내부를 구경했다.

스크린의 크기가 엄청히 큰 데다가 높이가 높아서 2층의 객석 위치가 영화를 보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1층에선 스크린을 올려다봐야 한다.

그래서인지 매표소에선 2층의 객석 우선으로 표를 팔았다.  매회 관객이 거의 없는지라 아무곳에서나 앉으면 된다.

 

2층의 앞쪽 객석은 모두 커플석이다.

 

'극'이라 써 있던 좌석.

2층에서 내려다 본, 텅 비어있던 1층 객석들.
무쟈게 높았다. 고소공포증이 도져 카메라를 누를때 손이 떨렸다는.

 

2층의 사이드 석(나름의 박스석).
옆에서 봐도 밑이 아찔해 보이는 지라 저기에 앉으려는 사람은 없었다.

 

호떡과 담요.

 

담요를 뒤집어 쓰고 밖에서 사 온 호떡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별 생각없이 사 온 호떡이었으나 왠지 이곳에선 팝콘보단 이런 걸 먹어줘야 이런 고전스러움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날 본 영화는 별로였다.

하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후회는 전혀 들지 않았다.  어쩐지 나에겐 이 극장의 체험 자체가 장편의 시대물 블럭버스터 한편을 보고 나온 느낌이었다.

 

문뜩, 영화[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TV시대에 밀려 파라디소 극장이 폭파되는 날, 무너지는 건물을 보며 그시대의 추억으로 만감에 젖는 예전 사람들과 잔해 속을 누비며 환호성을 지르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교차된다.

 

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한번씩은 이 말을 한다고 한다.

 

"이러고도 어떻게 운영되는지 몰라."

 

아마 광주극장도 곧 있을 미래엔 사라지거나 변모를 꾀할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은 서서히 잊혀져 갈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번영을 꿈꾸는 도심 속에서 변함없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직까지는, 광주의 映畵史이며 동시에 현 우리 영화계를 반추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네오리얼리즘이란 생각이 든다.

 

 

- 이 글은 여행미디어 노매드의 <금주의 트래블로그>에 뽑힌 글입니다. 좋은 글을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 필자인 BoDA님의 허가를 득하여 노매드 블로그에 올린 후 다음에 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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