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성철 스님의 한시

형람서원 2006. 4. 20. 11:29
728x90
반응형
지난 94년 조계종정 성철스님이 입적했을 당시 한국사회는 늘 그랬듯이 부의 재분배가 중요 한 사회적 이슈였다. 때마침 성철스님의 입적은 죽음 자체만으로 큰 교훈을 주었다. 남은 것이 라고는 가사(승복) 한 벌과 식기용 목기 하나. 그는 그렇게 갔다. 사람들이 그 죽음의 외적 모습에서 의미를 찾고 있을 때 그가 입적 직전 남긴 한시(漢詩)는 또 한 번 관심을 끌었다.

{生平欺狂男女群(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였으니)
彌天罪業過須彌(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구나)
一輪吐紅掛 碧山(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어서 푸른 산에 걸렸다).}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스님, 아무것도 소유하기를 거부했던 스님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마지막 가는 길목에서 지은 시에 그 죄가 수미산(에베레스트산)보다 높아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했을까?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교리로 결론을 내리면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쉽사리 결론지을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필자는 당시 기독교 목사로서 이 시에 적지 않은 충격과 도전을 받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구도의 길, 인생을 마감해도 알 수 없는 진리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로 지냈던 생을 돌아볼 때 남는 회한, 그러기에 자신의 죽음 뒤에 돌아올 찬사를 예측하면서도 그것조차도 버거워 비워 버리고자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그 겸손의 모습이 도전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빌립보서 2:5-11은 이른바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의 근거구절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2장 7절의 "비어"라는 말에서 케노시스 기독론이 출발했다. 즉 케노(Keno)라는 말은 "비우다(make empty)", "명예를 없애다(no reputation)"라는 헬라어인데 자신을 비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 본체이면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된 예수님의 모습,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흉악범들에게나 적용되는 십자가 형벌조차도 감수했던 그 분, 그에게는 옷조차 식기조차 무덤조차 남길 것이 없었다. 그 분이 받아야 할 찬사와 존경을 인류의 죄를 뒤집어 쓴 죽음으로 밖에 보여주지 못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끝에 부활이 있었다. 결국 케노시스 기독론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극치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겸손이 중요한 종교적 미덕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겸손을 내가 아닌 다른 이에서부터 찾을 때 이미 겸손은 사라진다. 겸손은 삶 속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의 뜻대로 비워가고 있느냐 하는, 다시 말해 나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우지 못하는 종교인들을 보게 된다. 입으로는 순종과 겸손을 외치며 실제로 자신은 신의 지위보다 더 높은 곳에서 군림하려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것은 비우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비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구원이 자기 말 한마디에 달려있는 것처럼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의인 너는 죄인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겸손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부활 역시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한국일보}(캐나다판) 1998년 4월 16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