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기독교강요

13. 종말론 (제3권 25장)

형람서원 2006. 3. 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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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종말론

 

(제3권 25장)

 

 

제25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에 대한 교리 주장 1-4)

1. 부활의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의의 태양이신(말 4 : 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시고,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딤후 1 : 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요 5 : 24), "이제부터‥‥‥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 2 : 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 : 6), 이것은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려운 싸움 가운데서 심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소망의 특성에 대해서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롬 8 : 25),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므로(히 11 : 1), 이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우리가‥‥‥주와 따로" 거하기 때문이다(고후 5 : 6).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한다(골 3 : 3-4). 그러므로 우리의 놓인 처지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딛 2 : 12-13). 따라서 우리는 피로하여 우리의 길을 돌아가거나 또는 우리의 위치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쁨 속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 : 8-9).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골 1 : 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마 6 : 21).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믿음이 드물다. 우둔한 우리들이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처럼(빌 3 : 14) 어려운 일은 없다.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동기를 준다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열심히 논하며, 심지어 서로 논쟁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최고선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플라톤뿐이었고, 플라톤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그 연합의 거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였다.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목표를 보여주며(빌 3 : 8), 자기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빌 3 : 13) 이 목표를 얻기까지 노력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며, 세상에 붙잡혀 태만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빌 3 : 20).

그리고 신자들이 이 경주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동반자라고 한다. 그는 도처에서 형태도 없는 폐허를 보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한다(롬 8 : 19). 아담의 타락이 자연의 완전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후에, 사람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받게 된 속박은 그들에게 중대한 슬픔이 되었다. 그들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연히 타락 전의 완전한 상태를 동경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다(롬 8 : 22). 이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가(롬 8 : 23) 자신의 부패 속에서 쇠약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적어도 사람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는 무생물들을 모방하지도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세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바울은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롬 8 : 23 참조). 우리의 부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이 되셨으므로(히 10 : 12),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 : 28). 어떤 곤란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이 구속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한다.

 

3. 바라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정당하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 15 : 13-14).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 : 19).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여 있으며(고전 15 : 30 참조) 참으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롬 8 : 36, 시 44 : 22). 따라서 우리가 양자가 되며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복음의 권위는 그 일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간단한 논의를 이 때까지 연기한 것은,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독자들이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줄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생과 영광을 입으셔서, 온 몸이 그 머리(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의 실례로서 우리에게 몇 번이든지 보여주신다.

완전히 썩어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 이런 견해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으나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면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우리를 둘러싼 불행 가운데서(고후 4 : 8-9 참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 : 10).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쥐어 떼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추론한다(고전 15 : 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다.

오히려 각 지체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모든 지체에 완성되어야 할 것이 머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든 지체들이 모든 점에서 머리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한다(시 16 : 10, 행 2 : 27 참조). 우리도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이 믿음의 일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완전한 결과는 모든 부패를 면하고 완전한 몸을 다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엡 1 : 20 참조),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빌 3 : 20-21).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골 3 : 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번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한다(롬 8 : 11 참조).

나는 지금 간단하게 취급할 뿐이나, 이것은 더욱 자세히 취급할 수 있으며 더욱 찬란한 해설을 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말에서 경건한 독자들은 각자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얻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요 11 : 25). 이 거울에서 부활의 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오랜 기간에 싫증이나 초조를 느끼지 않는다면,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생각대로 분초를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그에게 붙은 자"라고 충고한다(고전 15 : 23).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여자들이 전해준 이야기, 또 공포심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빛나는 기념품을 성전이나 공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시지 않았는가? 왜 빌라도 앞에 그 두려운 자태를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왜 제사장들과 온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시지 않았는가?6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정당한 증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대답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약하다고 해서 경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주관되어, 공포심에 압도되었던 자들이 무덤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만큼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건한 열성 때문에, 또 얼마만큼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갔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본 일에 대해서 천사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인들이 한말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가 스스로 사실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의 신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일반 사람들과 총독이 풍성한 증거가 제시된 후에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나 다른 표징들을 볼 기회를 빼앗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꾼이 지켰지만(마 27 : 66), 사흘째 되는 날에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눅 24 : 3, 마 28 : 6,11, 27 : 24 참조). 뇌물을 받은 병정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마 28 : 12-13,15). 이는 마치 제자들이 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또는 무기로 무장을 했다거나, 심지어 이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제자들을 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왜 그들을 쫓아가서 민중의 도움으로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잡지 않았는가? 빌라도는 참으로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들의 소리가 울렸다(마 28 : 6, 눅 24 : 6 참조). 하늘 광채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천사임을 명백하게 알려 주었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육신 부활에 대한 근거이

부활을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바울은 간단하게 이 점을 가르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 : 21). 여기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이며, 우리의 지각을 압도하는 위대한 기적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해서 어떤 자연 현상을 상상하는 것은 가장 부적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계에서 증거를 빌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 : 36). 씨를 뿌리면, 썩은 것으로부터 곡식이 돋아나므로,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기적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실은 그다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이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능에 그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면, 장차 올 부활을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신념에 고무되어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 : 19). 다윗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라고 한다(시 68 : 20). 욥은 사람이라기보다 시체같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날이 오면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즉, 그의 권능을 보이시려고)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 : 25-27),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부활에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듯이 교묘하게 왜곡하지만, 그들은 논박하려는 점을 도리어 확인한다. 거룩한 사람들은 곤란을 당할 때에 무엇보다도 부활의 비유에서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에스겔에 있는 구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들 앞에 길이 열리리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것과 같다고 했을 때에, 에스겔은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중에 들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그 뼈에 힘줄과 살이 붙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한다(겔 37 : 1-10), 예언자는 이 비유로 백성이 돌아갈 소망을 가지게 하였지만,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구원에 대해서도 부활이 그 모형이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음성이 생명을 준다고 가르치신 후에, 유대인들이 그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즉시 다음과 같이 첨가하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 : 28-29)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전투 중에도 개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에게 내세를 약속하신 분은 우리가 맡긴 것을 지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1 : 12).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고, 의로우신 심판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딤후 4 : 8).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미리 내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고통으로 갚으시며, 부당한 핍박을 받는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은(살후 1 : 6-8)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곧 그 다음에 첨가하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며 모든 복음을 믿는 자로부터 기이히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 : 10).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 두 가지 생각 중에서 처음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창조를 논할때에 다소간 언급한 것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이 생각이 얼마나 동물적인 오류인가를 다시 한번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는다. 그 결과, 몸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된다.

성경의 교훈은 훨씬 탁월하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을 "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벧후 1 : 14). 그러나 바울은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고후 5 : 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 : 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한다(고후 5 : 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는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히 12 : 23) 모든 의심을 일축한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몸을 벗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눅 23 : 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눅23 : 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벧전2 : 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행 7 : 59).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15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요 12 : 32 참조), 한편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말씀은 없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일을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낼 것인가? 장소에 대해 묻는 것도 미련하고 무익한 일이다. 영혼은 몸과 같은 차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 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눅 16 : 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한다. 동시에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라고 명령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그 때까지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한계, 즉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즐길 때를 기쁘게 기다리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며, 모든 일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보류된다는 한계를 지키고 만족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 확실히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같다. 즉,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져 있을 것이다(유 1 : 6).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다. 마니교도들은 이 생각에 대해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무가치한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영혼의 하늘 생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영혼은 불결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한 그들의 망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우선 바울은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고후 7 : 1) 명령하므로,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고후 5 : 10)한 판단은 이것의 결과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말과 부합하는 말을 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 : 11).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과 혼과 아울러 그들의 몸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한다(살전 5 : 23).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으로 성별하신 몸이(고전 3 : 16) 부활의 소망이 없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신자들의 몸은 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가?(고전 6 : 15) 하나님께서는 몸의 각 부분을 그에게 성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사람의 혀가 그를 찬양하며,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딤전 2 : 8),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지 않는가?(롬 12 : 1)

사람의 이 부분에 대해서 하늘 심판자께서 이렇게까지 빛나는 영예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죽을 인생이 그것을 회복될 소망이 없는 흙으로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를 섬기라고 우리에게 충고한 바울은(고전 6 : 20),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라고 확실히 주장한 그것이 영원한 부패의 운명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한다(고전 15 : 53). 만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만드신다면, 이 성질의 변화는 어디서 생길 것인가? 만일 성경이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다면 이 모호한 표현이 그들에게 너절한 반대를 할 구실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한다.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한 사실을(롬 14 : 11) 잔소리꾼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사 49 : 18)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는(사 45 : 23, 롬 14 : 11)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의 글을 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각각 일생 동안 한 일을 고해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일 새 몸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단 12 : 2) 한 말에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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