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
12. 웨스트민스터 총회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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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둘째 날 : 열한 번째 시간 -
1강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전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날을 종교개혁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 날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고, 그 날에 갑자기 완료된 것도 아니다.
The Protestant Reformation began in Wittenberg, Germany, on October 31, 1517, when Martin Luther, a teacher and a monk, published a document he called Disputation on the Power of Indulgences, or 95 Theses. The document was a series of 95 ideas about Christianity that he invited people to debate with him.
우리는 “Protestant Reformation”을 “종교개혁”으로 번역한다. 중국어로 번역하면 “로마교회를 항론한 개혁”이다. 그런데 칼빈파는 Reformed faith or theology, “개혁된 신앙 혹은 신학”을 사용한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에게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18세기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 시대에 사회의 중심축이 교회에서 철학자와 사업가(항해술로 국제교역)로 이동했다. 18세기 계몽철학에 시녀가 된 신학(자유주의)과 시대정신에 항거하는 다양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1,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사회는 UN을 형성했고, 기독교는 1948년 WCC를 구축했다. 1962년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지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WCC에 적극 참여하며 종교통합운동을 진행했다. 결국 1999년에 JDDJ(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의화교리공동선언)를 루터교회와 체결했다. 그리고 2006년에 감리교도 JDDJ에 동참을 선언했다. 2009년 로마 카톨릭 교회(천주교)는 성공회 교회의 사제와 신자를 카톨릭으로 받아들이면서, 성공회 고유의 전례와 전통을 허용하는 재통합 수준으로 합의했다. 결국 개혁된 교회 진영에서는 WCC 진영에 찬성하는 진영과 WCC가 아닌 보편교회 형성을 지향하는 진영으로 분리되었다.
“확실한 것은 미국에서는 200만명이 넘는 미주리 루터교 노회의 신자들과 35만명의 위스콘신 복음주의 루터교 신자들 및 미국 장로교회(PCA)의 35만명 가량의 신자들을 포함한 상당히 많은 교회가 종교개혁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집계는 남반구와 비교할 때 매우 빈약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나이지리아의 장로교인은 4백만명이며,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개혁교회 출석 교인은 약 150만명이다. 멕시코 국립 장로교에는 280만명의 회원이 있고, 한국에는 1천만명의 장로교인이 있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의 성장은 선교사들이 신앙고백주의와 경건주의의 혼합체 덕분이며, 그 혼합체는 현재 신학교와 교회에서 번창하고 있다”(종교개혁신학, 15).
1930년대 미국에서 자유주의의 광풍을 막기 위한 초교파적 연대를 구성한 것이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이다. 20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근본주의는 5대 가치(성경무오,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재림)를 세우고, 그 가치로 자유주의의 파도에 맞섰다. 근본주의의 5대 가치를 놓고 초교파적인 연대를 구성했지만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했다. 교파를 넘어선 연대는 쉽게 무너지는데, 교파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의 거대담론에서 “루터와 칼빈”으로 거대담론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한국에 있다. 17세기 로마 카톨릭, 소시니안(그전은 세르베투스, 지금은 유니테리안), 알미니안을 반박하는 신학 체계(elenctic theology)로 개혁신학을 구성했다. 우리는 여기에 재세례파적 체계를 추가시켜야 한다고 제언한다. 우리는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의 가치, 로마 카톨릭의 부당한 가르침(면죄부, 의화교리, 복음없는 미사 등등)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리고 재세례파적 극단적 주장(무폭력평화주의, 지상이상공동체건설)을 동의할 수 없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으며, 1619년에 정죄된 알미니안을 수용할 수 없다. 개혁파의 신조 정립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마틴 루터의 신학에 대한 미비한 이해 체계도 정립해야 한다. 마틴 루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지만, 마틴 루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신학 계승과 확립을 위해서 중요하다. 마틴 루터의 기본 가치는 이신칭의와 십자가 신학이다. 존 칼빈은 이신칭의와 성경해석이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신학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에서는 종교개혁 전의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 그리고 반종교개혁으로 구성한다.
※ 종교개혁에서 종교(宗敎, religion)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의 ‘종교’는 16세기 어휘이다. 즉 20세기, 21세기 ‘종교’와 16세기 ‘종교’의 의미는 같지 않다. 우리가 다루는 16세기 종교는 유럽에 한정된 개념이다. 그러나 국제화가 되면서 종교는 제종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16세기 종교는 기독교를 의미하고, 20세기 종교는 제종교이다. 17세기 국제화가 되어가는 무렵 유럽에서 “종교는 기독교”라는 의식에서 “제종교”라는 의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면서 기독교 사회(Christendom)에 대한 항의 의식이 형성되었고, 국가 체계에서 자유를 얻었다.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가 아닌 종교가 자유롭게 된 것이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후 약 1400년이 지나 제종교들이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600년이 지나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이탈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된 탈기독교(Post-Christendom) 사회가 되었다. (*)
2강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모든 있는 것에는 있음을 있게하는 계기가 있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전 1장). 모든 있는 것은 옛 것의 조합으로 형성된 다른 산물이지, 무에서 유가 되는 창조가 아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도 한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이다. 종교개혁은 오류와 부패에서는 불연속(단절)이고, 진리에서는 회복하고 연속하려는 지향성이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 존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성찬 이해에서 세 신학자의 견해가 대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신학을 형성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있게 된 신학 훈련의 배경이 있다. 종교개혁이 되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사모하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은 이단으로 판정받거나 순교당하기도 했다. 교회가 진리를 이단으로 판정한 사례는 의외로 있다.1)
사람들은 종교개혁 하면 루터나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과 쯔빙글리 등이 행한 종교개혁 이전에 먼저 개혁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기상조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력에 눌리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단으로 몰리거나 순교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음으로 종교개혁의 기운은 싹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들을 세 종류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신비적 개혁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1327), 하인리히 수소 (Heinrich Seuse, 1295-1366), 요한 타울러 (Johannes Tauler, 1300-1361) 등은 하나님과 일치를 도모하는 신비적 신앙으로 교회갱신 운동을 전개했다.
2. 실제적 개혁자- 발도(Petrus Waldus, ?-1218)와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도덕과 윤리적 실행의 혁신을 시도했다.
3. 교리적 개혁자- 존 위클리프 (John Wyclif, 1329-1348)와 존 후쓰 (John Huss, 1370?-1415) 등으로 교리와 신학면에서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불복했다. 신비적 개혁자들에 대해서는 목원 신학 연구소 편의 [신학과 현장] 제 5집 237-264 쪽을 참고하기 바라며 본 논문에서는 실제적 개혁자들과 교리적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한다.
종교개혁 전 개혁자
1. 피터 발도(Petrus Waldus, ?- 1217)
피터 발도(Petrus Waldus, ?- 1217)는 프랑스 리용 지방의 부자 상인이었다. 발도는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사람으로 자기 전 재산을 팔고 성경대로 살려고 매진했다. 발도의 영향권에 있는 무리를 “리용의 빈자(貧者, Poors of Lyon)”라고 불리는 발도파(Waldenser)이다. 발도는 성 알렉시오(St. Alexio)라는 사람이 결혼하는 저녁에 신부(新婦)와 부모를 작별하고 수도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고, 또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난 뒤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뜻을 모으는 동료들과 함께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1170년에 “리용의 빈자”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리용의 빈자(Poors of Lyon)들이 펼친 왈도파 신앙 운동은 그리스도인의 절대권위를 교회라는 외형적 교회 조직이 아닌 오직 성경에서 찾았다. 이는 다가오고 있는 교회개혁운동의 여명이었다. 당대의 성직자들은 전도 활동을 하는 순회설교자들을 푸대접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복음이 단순성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런데 왈도파 신앙운동이 부패한 자신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리용의 빈자들―왈도파 신앙인들은 복음진리를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설교했다. 원시 기독인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을 재현하고 싶어했다. 단순한 것은 언제나 강렬하다. 왈도파 신앙인들의 설교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단순한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참회, 선행, 자발적인 윤리적 삶, 헌신을 추구했다. 또한 성직자들의 방종, 타락, 교회의 부패 그리고 이단 카타리파(Catharism)2) 사상을 질타했다.
발도는 성경과 교부들의 문서를 지역 언어로 번역하려고 했다. 성경을 번역하려고 한 최초의 시도자이다. 발도파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지팡이나 주머니를 가지지 않고 복음을 전하려 나섰고 시골에서, 도시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설교하고 토론했다. 발도파의 설교는 단순하여 당시 대부분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했다. 발도파는 사회에서 고난받는 자, 압박당하는 자, 병든 자에게 동정했고 모든 사람을 형제로 여겼다.
발도는 로마 카톨릭 교회 제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런데 교회의 성직계급주의와 충돌했고, 설교가 없는 미사 제도와 충돌했다. 발도파 사람들이 행하는 설교는 리용의 대주교와 사제들에게 발각되었고, 설교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발도는 거부하고, 1170년 제 3차 라테란 회의에 참석 중인 교황 알렉산더 3세(Alexander III, 1159-1181)에게 설교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리용의 대주교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발도파는 설교할 수 있는 권리가 거부되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는 인간의 음성이라 생각하고(행 5:29) 계속해서 거리에 나가 설교했다. 결국 발도파가 리용의 대주교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함으로 리용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Lucius III, 1181-1185)는 교서 “아드 아볼렌담”(Text of Ad abolendam)으로 발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3) 결국 발도파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그런데 왈도파의 세력이 급속히 확장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큰 문제로 여길정도 강성해 졌다. 발도파의 영향력은 남부 프랑스와 알프스를 넘어 남부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까지 확산되었다.
“리용의 빈자들”은 신성하지 않거나 모독적이거나 경박스런 말을 피했다. 독일어권의 왈도파 사람들은 ‘진실로,’ ‘참으로,’ ‘진정으로,’ ‘솔직히 말해서’ 따위의 표현을 삼갔다. 자신들이 하는 말 모두가 진실하고 정확함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 무렵, 로마교회의 신자들은 의도적으로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험악한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발도파는 이러한 것이 십계명 중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발도파는 모두 동일한 모습을 같지는 않았다. 일부 리용의 빈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자기들이 살고있는 지역의 윤리, 사회 활동, 언어를 거부하여 로마교회의 신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결혼 대상자를 발도파 신앙공동체 안에서만 찾았다. 구성원들 가운데는 자아의식이 높고 우월감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자기의 신앙에 대한 자긍심, 우월감, 배타적 의식을 갖기도 했다. 발도파 교회가 사도 바울의 스페인 여행길에 세워졌다고 하고, 기독교가 로마화 되기 전에 발도파가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존 교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낸 알프스 지역의 발도파 사람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주변 지역 사람들을 얕잡아 보았다고 전해진다.
로마교회는, 교황과 감독이 사도의 유일한 계승자라고 하는 배타적 직분 체계를 근거로, 평신도 무리의 설교 곧 복음 전도 사역을 금했다. 발도파 신앙인들은 달리 생각했다. 예수의 사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하라고 했고, 발도파 사람들은 그러한 사도적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리용의 빈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복음증거와 말씀 사역을 하라고 부름 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가졌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발상은 교계(敎階)를 절대시하고 교황과 감독만이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는 로마교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발도는 1217년 보헤미아에서 죽었다. 그 무리에 대한 로마교회의 금지는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이노센트 3세에 의해 반복되었다. 이 회의에서 발도파와 카타리파를 탄압하기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에게 이단 심문(종교재판)을 주관토록 결정했다. 로마교회는 1229년 발렌시아(Toulouse 혹은 The Council of Valencia) 회의에서 평신도가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는 법을 제정해서, 발도파 현상을 이단적 행위로 단죄했다. 발도파는 오직 한 마음으로 성경에서 가르친 대로 지키고 사도들의 삶을 지향했다. 발도파는 성경에 근거한 설교와 함께, 연옥 교리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기도를 거부했고, 평신도라도 선한 사람이면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발도파는 교리나 사상보다도 윤리적 실행을 중요시하여 산상수훈을 엄격히 준행하도록 힘썼다.
리용의 빈자들은 복음전도와 설교 활동이 교회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교는 신적 소명이다. 그들은 복음전도와 설교활동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절대적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를 금함은 옳지 않다. 교황, 교계(敎階), 교권보다 하나님의 말씀 전파의 사명 수행이 더 우선적이다. 성직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경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명령하면 ‘비록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시, 명령에 복종한다”고 했다.
로마 교회가 발도파 신앙인들의 활동을 강력하게 제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추종자 수는 증가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도 수는 점차 많아졌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앞장에서 지적했듯이, 발도파 신앙인들이 성경 애독, 설교, 복음전도만이 아니라 스스로 빈곤을 선언하고 같은 시대에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발도파 기독인들은 수도사처럼 청빈하게 살았다. 성직자나 수도사가 아닌 자들이 마치 성직자나 수도사처럼 사도적 빈곤을 실천하면서 복음전도에 전념했다. 이는 당시의 교회제도와 수도원제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발도파 사람들의 사도적 청빈과 순결 이미지는 대중만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종교개혁 전 개혁가의 시초격은 12세기에 형성된 발도파이다. 이들의 영향력에서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 체코의 얀 후스등이 있다.
2.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lola, 1452 - 1498)4)
사보나롤라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의 도래를 예언한 예언자였다. 그는 마틴 루터가 출생하기 약 30년 전인 1452년 9월 21일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Ferrara)에서 태어나 1498년 5월 23일 플로렌스에서 순교했다. 그는 소년 때부터 침착하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가 그를 의사로 만들려고 했으나 사보나롤라는 그 당시 사회의 타락과 불의를 보고 뜻한 바 있어 신학을 택했다. 그는 22세 무렵에 볼로냐(Bologna)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나는 이탈리아의 사악함에 눈 먼 백성들을 더 이상 보고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덕이 도처에서 경멸되고 악이 추앙되며 경외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미니크 수도원에서 사보나롤라는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공부하였고 성경에도 정통했다. 1481년 그는 플로렌스에 있는 성 마가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10년 후 사보나롤라는 그곳 성 마가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플로렌스에서 대담하게 죄악을 통박하는 설교를 했으나, 세상 영화(榮華)에 취한 시민들은 그의 설교에 귀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옛 예언자와 같이 열심을 다하여 절규함으로 차츰 반응이 일어나 그가 설교하는 곳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많은 사람이 사보나롤라가 플로렌스 대성당에 도착하기를 몇 시간 동안 기다렸고 강변 설교에서는 만명에서 만 이천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의 메시지는 도시에 가득한 부패를 가차없이 공격했고 성직자들이 영적인 생활보다 성직록과 재물과 외적 의식에 치중하는 탐욕과 형식을 책망했다. 사보나롤라는 교회와 세상의 멸망에 대해 설교했는데, 구약의 예언자적인 자 의식과 요아킴의 묵시(Joachim of Fiore, 1135-1202)에 따른 무시무시한 심판이 교회에 임박함을 느꼈고, 따라서 교회의 갱신을 촉구했다. 그는 로마의 고위성직자들의 위선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사보나롤라는 성경의 권위를 역설했다. 즉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새로운 터전을 제공한 것이다. 그는 노아의 방주, 출애굽기, 학개, 에스겔, 아모스, 호세아, 요한계시록 등을 주제로 설교했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힘과 기운을 준 또 다른 요소는 예언자적 자의식이었다. 그는 "보라, 땅 위에 급하고 속히 임할 주님의 칼"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Ecce gladius Domini super terram cito et velociter!, Behold the sword of the Lord, swift and sure, over the earth). 그는 메디치 가문의 쇠퇴와 프랑스의 찰스 8세가 플로렌스를 침공할 것을 예언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졌다. 플로렌스의 지배자인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가 병으로 죽게 되어 플로렌스는 사보나롤라가 주도하는 공화적 신정정치가 수립되었다. 1494년부터 사보나롤라의 명성은 높아갔고 정치적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프랑스 군대가 플로렌스의 국경에 다가오고 있을 때 사보나롤라는 찰스 8세와 협상을 통해 프랑스군을 순순히 퇴각시켰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플로렌스의 모든 거리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이제 플로렌스에서는 사보나롤라의 이상적 통치체제, 즉 주님을 머리로 하는 신정정치가 시도되었다. 1494년 학개서를 주제로 한 설교와 1495년 시편 설교에서 그는 왜 자기가 정치에 관여해야 하는가를 반문했다. 사보나롤라는 플로렌스 공화정(共和政)의 제일의 통치자 자리를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런데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한편으로 그를 회유하고 또 한편으로 위협을 가하고 탄압했다. 사보나롤라가 교황의 설득에 불응함으로 1497년 5월 12일 교황은 결국 그의 설교 행위에 대해서 금지 명령을 내렸고 그를 이단자로 파문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사보나롤라는 도덕적 신념, 조국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 의로운 일에 대한 헌신 등 실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세의 한 교회를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회의 형식보다는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가르침에 뿌리를 두었고 영적 거듭남을 촉구했다.
3.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 1384)
3-1. 존 위클리프의 생애와 활동
위클리프는 1320년과 1324년 사이에 잉글랜드 요크셔(Yorkshire)에 있는 리치먼드 (Richmond) 근처 위클리프-티즈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약 16세 때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그의 경력중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옥스포드 대학과 깊이 관련되었다. 위클리프는 1345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특대생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1360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 옥스포드, 켄터베리 및 발리올의 교수로 활약했다. 그는 1372년 옥스포드의 발리올(Balliol)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창한 화술로 논리학과 형이상학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위클리프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유명론(Nomialismus) 보다 실재론(Realismus)을 주장했다. 그는 1361년 필링햄 교구 소속의 교회 목사로 임명되었다가 1368년에는 리저살 교구로 옮겼다. 위클리프는 1361년 이후에 얼마 동안 발리올 대학의 학장으로 일했으며 1365년에는 켄터베리 대학의 학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선출된 위클리프를 파격적으로 면직시켰다. 그후 위클리프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배려로 1374년 루터워드(Lutterworth) 교회의 주임 사제로 전보되었다. 여기서 그가 별세할 때까지 교회를 지켰다. 그의 주요 경력은 신학대학 교수, 교구 목사, 교리적 개혁자였으며 영국과 로마 카톨릭 교황과의 세금 등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왕실 사절로서 외교 임무도 수행했다. 처음으로 위클리프가 개혁운동에 나선 것은 로마 교회의 권력 남용에 관한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부터이다. 그의 전생애에 심혈을 기울여 바친 투쟁의 목표는 신적 진리 (der g ttliche Wahrheit)와 인간의 자유(der menschliche Freiheit)의 확립이었다. 위클리프는 조국과 복음 그리고 신앙과 자유의 양극의 조화를 위해 헌신했다. 1374년 위클리프는 왕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교황 그레고리 11세(1370-1378)의 사절과 만나기 위해 부르게 (Bruges)를 방문했다. 거기서 "성직 임명법" 문제와 교황의 봉토로서 영국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40년 동안 프랑스와 싸워 온 영국은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아빙뇽 교황청 (1309-1378)에 대항하여 영국의 성직자에 대한 교황청의 임명을 반대했다. 또한 영국은 아빙뇽 교황의 통치 및 영국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교황이 세속 왕권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미 1366년 잉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 존(John)이 1213년 교황에게 행한 봉신(封臣) 인정을 거부했다. 위클리프는 신학적으로 교황권과 교회의 재산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1376년에 위클리프는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의 재산과 잉글랜드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에 반기를 들었다. 위클리프는 이미 1370년대 초에 "어떤 특정한 상황들 아래에서는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정당하다"라는 국가의 주권과 통치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위클리프는 왕실 근무와 루터워스 교구를 맡을 수 있었다. 위클리프는 더 나아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가장 저주받은 도둑이요 사기꾼이며 교만한 로마의 사제"라고 비난했다. 고위 성직자들과 토지를 가진 수도원들과 로마 교황청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공격했다. 1377년 2월 위클리프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도록 런던의 주교 윌리암 코티나이(William Courtenay)에 의해 런던에서 모인 주교들 앞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러나 곤트의 존(John von Gaunt)과 왕실과 귀족들의 보호로 그 소송이 흐지부지 되었다. 같은 해 5월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교서를 발하여 위클리프를 잡아 심문하도록 명령했다. 1378년 1월 런던의 주교가 소송을 제기했으나 왕실의 보호와 민중의 후원으로 켄터베리 대주교와 런던 주교의 위클리프에 대한 체포, 심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378년 교황청의 대분열(1378-1417) 사건으로 위클리프 자신의 견해가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되어 궁극적으로 중세 교회의 전 구조 전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탁발 수도회를 "가인의 자식들"이라 비난한 것과 또 1379년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을 공격함으로 왕실과 그의 동조자들의 지원을 상실했다. 1348년-1450년 사이에 흑사병으로 야기된 심각한 경제적 혼란으로 하층민의 불안이 점점 높아 가다가 1381년에는 진압하기 어려운 농민반란이 터졌다. 농민전쟁이 절정에 달해 위클리프의 대적들은 그의 이단적 행동과 그의 동조자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나게 됐다고 그를 고발했다. 그리하여 1382년 새로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윌리암 코티나이는 런던회의를 소집하여 위클리프의 저술 중 24개 명제를 골라 정죄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를 소환하지는 않았다. 이제 왕실은 위클리프를 포기하였고 코티나이는 이 정죄된 명제들의 옹호자들은 누구라도 구속할 권한을 얻었다. 그 사이 위클리프는 1382년 11월에 중풍에 걸려 쓰러졌으나 자신의 교리들을 13권으로 된 "신학대전"(Summa Theologia)을 집대성했다. 1384년 12월 24일 위클리프는 미사 참석 중 두 번째로 쓰러지고 사흘 후 세상을 떴다. 그는 로마 교황을 상대로 싸웠으나 운 좋게도 루터워스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후 위클리프 운동, 곧 롤라드 운동은 박해를 받게 되었다. 1401년에 이단에 대한 대책이 의회에서 채택되고 법령 "이단자 화형에 대해"(De haeretico comburendo)를 통과시켜 롤라드파가 다수 화형당했다. 1406년에는 롤라드 운동을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1409년 주교 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교리를 정죄하고 성경번역 사업과 거리 순회 전도 운동을 금지했다. 1415년 5월 4일 콘스탄스 공의회는 위클리프의 글에 나오는 260개의 명제들과 함께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뼈들이 가까이 묻힌 기독교인들의 뼈들과 구분될 수 있도록 성별된 땅에서 파헤쳐 던져버리라"는 명령과 또 그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헤쳐 던져버리라는 이 명령은 위클리프가 죽은 후 44년 동안 유예되다가 1428년 링컨의 주교 플레밍에 의해 유해를 신성한 땅에서 파내어 화형시키고 그 재를 스위프트(Swift) 강에 뿌렸다. 17세기 바로크의 수사학자인 토마스 훌러(Thomas Fuller)는 위클리프의 유해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했다: "그 조그마한 강은 그의 재를 아본(Avon) 강으로 옮겼고 아본강은 세베른(Severn) 강으로, 세베른은 메렌(Meerenge) 강으로 옮겼으며 거기서부터 더 넓은 대양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전 세계로 번져나간 그의 교리의 상징이 되었다."
3-2. 존 위클리프의 사상
A.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 성경관
1)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De veritate sacre scripture) - 위클리프는 학자로서 크리스톰, 어거스틴, 라틴 교부 그리고 중세 신학자 안셀름부터 둔스코투스까지 그들의 작품들을 읽고 인용하였지만, 그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었다. 성경 연구를 통해 그는 중세신학의 오류를 발견하였고, 그 잘못을 지적했다. 위클리프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진리에 대하여]에서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최고의 권위이며 신앙의 기준이고 모든 인간적 완전함의 기준이다"라고 말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최고의 권위는 성경의 내용에 있고 그리스도의 증거를 통해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위클리프의 신학에 있어서 주요한 원리는 성경 곧 하나님의 법이었다. 위클리프의 주장은 성경은 생명의 책(liber vitae)이요, 하나님의 법이요, 만일 교황과 공의회의 결정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은 인간적인 교리로서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흠이 없고 참으로 완전하고 최상의 구원" (lex domini immaculata....verissima, completissima et saluberrima)이다. 위클리프는 성경 안에 구원에 대한 모든 대답이 들어 있다고 하였고 성경이 크리스챤의 신앙이요 설교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다. 또한 그의 저작 [Trialogus]에서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만약에 양심과 교회의 권위가 서로 충돌한다면 사람들은 양심에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위클리프는 믿음에 의한 칭의론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공적 (功積)의 교리를 부인했다. "믿음이 최고의 신학이다"(fides est summa theologia) 라는 그의 사상은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에 가깝게 접근했다. 오직 성경을 연구함으로 한 사람의 크리스챤이 되도록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성경이야말로 모든 논리의 시금석이요, 기준이다. 다른 논리들은 자주 변하게 되지만 성경의 논리는 결단코 변하지 않고 영원히 서 있다(Aliae logicae saepissime variantur logica scripturae in eternum stat). 발도파를 근절하기 위해 로마 교회는 1229년 툴루스(Toulouse) 회의에서 평신도들이 성경을 갖는 것을 금했다. 성경은 오직 성직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위클리프는 평신도들도 성경을 소지하고 또 읽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는 교황과 교회법을 잘 아는 사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성경은 모든 크리스챤들에 의해 읽혀지고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완전한 진리이기 때문이다(illum librum debet omnis Christiananus a discere cum sit omnis veritas). 위클리프는 성경에 반대되는 것이 이단이라고 보았고 자신은 필요하다면 순교할지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위클리프는 성경은 자기 고유의 언어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금하는 것은 근본적인 죄라고 단정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자유로이 읽도록 하기 위해 그의 동료들의 도움으로 불가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여 그의 민족에게 소개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번역된 성경은 그의 추종자들이 필사하여 휴대하고 전도했다.
2) 목회직 - 목회의 직무에 대하여(De officio pastorali) 위클리프는 그의 논문 [목회의 직무에 대하여]에서 사제의 최고의 직무를 설교로 보았다. 주교들이 설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예수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주어진 이 특권에 따라 설교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성찬 집례보다 더 중요한 사명으로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위클리프의 개신교적 복음 사상이다. 사도시대에 교회가 생성되고 성장된 것은 복음의 선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지시 또는 수도원의 규정이나 모든 의식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말씀에 더 높은 권위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위클리프는 교황의 지위는 교회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교황의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과 교황이 가르치고 행하는 모든 것에 얼마나 일치하고 조화하고 있느냐에 기준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상적인 성직자의 직무는 성직자가 기도나 소망이나 생각에 있어서 항상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성직자는 참되게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성직자의 주 임무 중 하나는 참으로 회심의 경험을 한 신앙인으로서 그의 이웃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산상수훈은 인간의 전통보다 더 중요한 이웃사랑의 길잡이다.
B. 교황청에 대항하여
1) 통치권 - 하나님의 통치권에 관한 3권의 책(De dominio divino liblis tris), 시민 통치권에 관한 논문(Tractatus de dominio civili) 위클리프는 1374년 4월 7일 에드워드 3세로부터 루터워스의 주임사제로 임명받은 무렵부터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미 1370년대 초 어떤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는 국가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 견해는 그가 왕의 신하로 들어간 시기에 쓴 두 논문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하여] 와 [시민 통치권에 대하여]에서 충분히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켰다. 이 논문에서 위클리프는 첫째, 교회가 십일조와 소작료 등으로 치부(致富)한 것을 비난했다. 둘째, 교황이 세속권을 간섭하는 것을 비난하였고 셋째, 교황권과 세속권에 대해 진술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체의 합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통치권은 하나님의 대권이며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세상을 다스릴 권리가 없다. 그 이유는 죽을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은 은혜로 모든 소유와 권력을 청지기로서의 시민과 교회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시민 지배자들에게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셨고 교회에게는 영적인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셨다. 그것들은 영구적 재산이 아니라 신실한 봉사의 조건에서만 유지되는 일시적인 하나님의 위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와 교황이 절대적인 행정치리자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 반대로 성례전의 수행자로서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완전한 종이 되셨다. 통치권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위임된 것이므로 오용할 때는 빼앗기게 된다. 옳은 자들만이 통치권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죄 지으며 살아가는 사악한 성직자들은 세속적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교회의 재산이 무익하게 잘못 사용된다면 세속정부에 의해 빼앗길 수 있다. 왕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졌으며 왕은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을 다스리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사제는 고난을 겪으시고 복종하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 왕은 하나님의 의지를 대표하며 사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한다. 왕은 모든 죄를 조사할 수 있으며 죄 속에 있는 성직자들로부터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 그 당시 교회는 영국 땅의 삼분지 일을 소유한 막대한 부를 누리고 있으면서 면세를 주장하였는 데 위클리프의 교리는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위해 정부가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교회재산의 행사권에 대한 이 이론은 교회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과 교황들의 세속 지배 문제로 교황청과 분쟁을 일으켰던 영국의 세속 권력자들에게 기쁘게 받아 들여졌다. 직접적으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카스터(Lancaster)의 공작 존(John von Gaunt)과 그의 귀족들을 기쁘게 했다. 그들은 교회의 재산을 빼앗아 치부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또한 오랫동안 탐욕스런 교권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평신도들에게 만족을 주었고 "사도적 청빈"을 옹호했던 탁발수도회 또한 불쾌하게 하지 않았다.
2) 교황권 -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De potestate papae) 위클리프는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수행할려고 했던 두 가지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 데 첫째, 그의 조국 영국이 정치적으로 교황의 간섭과 지배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통치권을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고 둘째, 영국이 경제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그의 신학대전의 마지막 책 "교황의 권력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사도적 순전함과 청빈으로 베드로를 본받으려 한다면 보이는 교회는 한 사람의 지상 지도자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런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을 거머쥐고 부(富)에 혈안이 된 교황은 아마도 선택된 자가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이다. 교황직은 그 기원에 있어서 인간적- 즉 그리스도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해 창설된 것-이며 그것의 관할권은 엄밀히 영적 문제에 국한된다"라고 강조하면서 교황제도의 폐지와 교회 재산의 몰수를 요구했다. 위클리프처럼 교황권을 깍아내리고 교황들을 모독한 자는 없었다. 그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추기경들을 악마의 종들로 묘사했다. 위클리프는 교황과 추기경들이 그들의 이욕(利欲)에 따라, 그들의 세속적 향락의 추구로 그들의 양들을 잊어버린 것을 비난했다. 그는 교황제도에서 인간의 죄의 계시를 보았고 교황제도는 절대적으로 유해하다고 믿었다: "교황은 교회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교황은 무오류(無誤謬)하지도 않다. 교황은 성경을 가르치거나 하나님의 법을 선포할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황은 사면하거나 파문시킬 권한이 없다. 많은 교황들은 저주받았다 (multi papae sunt damnati)." 위클리프는 이런 언급으로 교황제도를 없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황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태복음 16장 18절 주석에서 위클리프는 베드로와 모든 신실한 크리스챤들을 반석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쇠 (천국열쇠)는 금속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으로 되어진 것으로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모든 성자들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3) 교회론 -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 위클리프가 [교회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교황청이 추기경 회의를 통해 위클리프를 조사하고 "교회가 위클리프를 정죄했다"라는 것 때문이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이길래 자기 (위클리프)를 정죄한다는 것인가? 위클리프는 교회의 중심은 흔히 로마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예정론적 교회관에 따라 교회는 "지금 살아있는 자나 이미 죽은 자들이나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예정된 자들의 총체"(Ecclesia est totus numerus predestinatorum, presentes, preteriti et futuri)라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황은 다만 자기 지역교회인 로마교회의 머리일 뿐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란 교황과 추기경들이 대표하는 것이요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영혼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작품인 "그리스도에 대하여"(De Christo)에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표현했고 베드로는 교회의 머리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대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교황은 그의 권한의 유래를 베드로에 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영어로 된 전단(傳單)에서 위클리프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교회를 주교, 사제, 수도사 등 Tonsur 모자를 쓴 사람들로 이해하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고 있다. 그와 반대로 평신도들은 교회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신실하게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교회의 지체자(성직자들)이 천국에서 복을 받게 되고 그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같은 잘못된 표현 즉 마치 교회와 성직계급을 동일시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위클리프의 교회론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교회란 "영원 전부터 구원으로 정해 놓은 모든 이의 총체"라는 것이다. 교회는 예정된 자의 전체 회중(congregatio omnium predestinatorum)이다. 비록 위클리프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사이를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 이 구분을 지지했다: "사도는 두 종류의 고기를 구분했다. 일부는 그물에 남겨두고 일부는 버린다. 교회 내의 일부는 구원으로 일부는 정죄된다. 교황이 비록 그 자신이 예정된 자라고 말하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가 선택되었는지 아닌지를 누가 선택되고 누가 버림받았는지는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교황도 저주받은 자일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위클리프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과 예정론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4) 성찬론 - 성찬에 대하여(De Eucharistia) 위클리프의 성찬론은 그의 신학과 사상에서 핵심이 될 뿐만 아니라 교황청을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화체설을 주장하였으나 도중에 바뀌었다.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화체설의 교리를 선언한 바 있었는데 위클리프는 고대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화체설의 교리를 비논리적이고 비성서적이며 비신앙적이라고 거부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에서 중요하게 여긴 문제는 떡과 포도주가 되는 본질 요소인 실체가 없어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모양과 맛, 냄새, 색깔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였고 더 구체적으로 외부적 형태가 본질이나 속성이 되는 원실체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어질 수 있는가였다. 그는 성찬에서 떡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단지 떡일 뿐이며 그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재론자였던 위클리프는 만일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없어진다면 존재도 없어진다는 이유로 화체설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화체설은 지어낸 거짓말이요 화체설을 숭배하는 것은 가장 불순한 우상이요, 또 모든 이단 가운데 가장 불경스런 것이라고 공격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보다 오히려 공재설 또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위클리프는 화체에서 떡의 본질이 파괴되지 않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주장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반대하고 모든 외부적인 형태는 반드시 주체에 속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물체나 사물의 모양이나 색깔, 냄새나 맛 같은 외부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속성, 즉 본질만 변형된다는 것은 철학적 논리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떡의 외형은 그대로 있으나 떡의 본질만 없어진다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만약 사제가 떡을 뗄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신성 모독죄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빨로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받는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육체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먹는 것이다. 그분의 살을 육적으로 먹어야 하고 그분의 피를 육적으로 마셔야 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은 없을 것이다." 성찬에 대한 위클리프의 기본 사상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이다. 그는 물이 얼음으로 변화되듯 외형은 변형될 수 있으나 실체나 본질은 변형이나 변화될 수 없다고 보고 성축후에도 떡은 떡으로 그냥 남는다는 원리를 주장했다. 즉 물리적 떡의 실체는 성화된 성찬에 그냥 떡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떡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이 더하여져 공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는데 성찬에 임재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그대로의 몸이 아니라 성례전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sacrametaliter, spiritualiter et virtualiter) 그리스도의 몸의 대리적인 상징으로 임재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가 떡에 계신다는 것은 마치 국왕이 그의 통치권의 어디에 있는 것이나 영혼이 그의 몸 안에 거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역설했다. 위클리프가 화체설을 반대하고 공재설을 주장함으로 영국 왕실과 귀족들과 탁발 수도사들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의 동조인들의 지원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의 성찬론은 후에 루터의 공재설을 뒷받침했다.
C. 위클리프의 애국적 관심
위클리프의 작품에서 그의 애국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위클리프는 영국의 애국자로 그의 조국을 교황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착취로부터 보호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설교와 논문에서 교황이 세속의 문제에 대해 간섭하고 교회의 돈을 로마로 가져가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더구나 영국에서 걷어간 소작료나 헌금이나 교회의 세금 등이 아빙뇽 교황청으로 들어가 영국과 전쟁중인 프랑스의 전비(戰費)로 쓰여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의 반교황적 독설(毒舌)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황은 무장한 기사(騎士)다. 영국은 칼에 의해 정복되었다. 교황은 칼로 그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다. 둘째, 공세(公稅)는 다만 바쳐야할 사람에게만 내야 한다. 교황은 공세를 받을 자격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의 후계자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무력으로 지배하는 세상통치를 원하지 않았다. 셋째, 교황은 신도들의 종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 나라에 어떤 봉사를 하였는가? 그는 다만 그의 개인적 목적과 그의 정부(情婦)들을 위해 우리를 착취한다. 더 악한 것은 돈과 계교로 우리들의 적인 프랑스를 지원한다. 넷째, 교황은 모든 교회의 소유주이다. 우리나라 땅 삼분의 일이 그의 소유이다. 세상 통치권에 있어서 두 주인은 있을 수 없다. 하나는 주인이고 또 하나는 봉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 그 어떤 사람 (교황)에게 신하 노릇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섯째, 존 왕은 파문에서 면제되려고 영국 땅의 일부를 교황청에 희사했다. 그 희사는 영원히 유효해서는 안 된다. 그 조건들은 효력이 없다. 그것들은 파렴치한 성직매매요, 독직(瀆職)이다. 여섯째, 면죄받기 위해 해마다 수 많은 돈이 지불된다면 그것이 기독교적인가? 그러면 그 돈은 누구에게 부담되는가? 죄있는 왕이 아니라 잘못이 없는 백성에게 떨어진다. 그 돈은 차라리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데 쓰여져야 한다. 일곱째, 실수 많은 존 왕에 의해 잘못 체결된 협정은 유지될 수 없다. 그 땅의 협정에 대해 국민이 찬성해야 한다." 위클리프의 이 같은 애국적인 관심이 그의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3-3. 존 위클리프의 영향
위클리프의 영향 위클리프의 저작을 통해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는데 그들이 곧 롤라드파이다. 롤라드(Lollards)라는 말은 "중얼거리다"라는 뜻으로 네델란드에서 유래된 비웃는 말로 네덜란드에선 오랫동안 베긴회와 베가드회에게 적용되었다. 위클리프와 그의 전도자들 곧 롤라드파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과감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1401년 반이단법령(De haretico Comburendo)이 채택되었다. 그 법령 아래에서 많은 롤라드파 사람들이 화형당했다. 1406년에는 [반롤라드 법적 조치]가 취해졌고 1409년 런던 교회 대회에서는 위클리프의 교리들과 허가받지 않은 성경번역을 정죄했으며 허가없는 전도자들의 전도를 금지시켰다. 1417년에는 롤라드파의 지도자인 존 올드케슬(John Oldcastle)경이 정죄되고 모반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때 이 운동에 참가하였던 상류 계급층의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급 계층이 지하에서 계속 활동하였고 그 성격 또한 극단적으로 변했다. 계속되는 박해속에서도 롤라드파의 운동은 근절되지 않았으며 후에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큰 힘을 주었고 그 영향은 유럽대륙의 보헤미아 지방까지 이른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그가 태어난 영국보다 오히려 더 멀리 떨어진 보헤미아 (체코)에서 더욱 영향을 끼쳤다. 1382년 보헤미아 왕 벤첼 (Wenzel)의 누이동생인 앤(Anne) 공주와 영국왕 리처드 2세가 정략적인 결혼을 함으로써 보헤미아와 잉글랜드 간에는 밀접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보헤미아의 학생들이 옥스포드로 유학하였고 거기서 위클리프의 저서와 사상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곧 위클리프의 사상을 프라하 대학으로 전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을 잘 전수받아 보헤미아 교회의 개혁에 앞장 선 사람이 얀 후쓰(Jan Huss)이었다. 그는 보헤미아의 민족적 열망들을 열정적으로 대변하였으며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의 이념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보헤미아의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위클리프는 후쓰와 함께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규정되어 왔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악폐에 대한 반항과 성경의 권위를 높이고 결국에는 교회의 개혁을 몰고 온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운동은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하기 한 세기 이전에 일으킨 종교개혁이었다. 만일 위클리프가 종교개혁의 여건이 성숙한 독일에서 태어나 활동했다면 루터보다 더 먼저 종교개혁에 성공했을 것이다. 어쨌든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서광" 또는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얀 후쓰(Jan Huss, 1371- 1415)
4-1. 얀 후쓰의 생애와 활동
얀 후쓰는 1371년 남 보헤미아의 Husinec에서 출생했다. 후쓰의 이름이 그의 고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386년 프라하 대학교에 입학하여 1393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고 1396년 석사 학위 취득과 함께 프라하 대학교 철학부 교수가 되었다. 1400년에 그는 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면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후쓰는 1401년에 철학부장이 되었고 1402년에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1409년에 프라하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후쓰는 중세 로마 교회의 부패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등장한 위클리프의 종교개혁의 이념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모국어인 체코어로 하는 그의 열띤 설교는 열렬한 지지자들을 얻었다. 찬송가도 회중으로 하여금 체코어로 된 예배 찬송가를 부르게 하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새 찬송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대주교였던 츠비네크 차이익(Zbynek Zajic, 1401- 1411)의 지지도 얻었다. 그러나 후쓰가 1404년 교황정치의 부패를 공격하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옹호함으로 점차로 대주교 츠비넥과 불화하게 되었고 1408년 프라하의 성직자단은 후쓰의 설교를 금지했다. 그는 결국 1410년 설교 금지에 대한 불복종의 혐의로 로마에 소환되었지만 응하지 않자 1411년 파문당했다. 이러한 가운데 후쓰는 피사측 교황청에 점점 과격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즉 그는 자격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후쓰의 입장은 아직 교황청에 대해 정면 대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1411년 요한 23세가 대립 교황인 그레고리 12세의 지지자인 나폴리의 라디슬라브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십자군을 소집하면서, 십자군에 직접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발급하자 후쓰는 그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더구나 1412년 7월 후쓰는 위클리프의 사상은 이단이 아니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412년 10월 18일 후쓰의 반대파는 후쓰에게 보다 강력한 파문을 내리도록 촉구했다. 후쓰는 반대파의 압력에 의하여 벤첼 왕의 피신하라는 권고로 프라하를 떠나야만 했다. 왜냐하면 후쓰로 인해 프라하에는 성사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한편, 콘스탄츠 공의회(1414- 1418)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시문트와 교황 요한 23세의 동의로 이루어졌다. 세 가지 의제가 중요한 문제로 상정되었다. (1) 교황청 대분열의 종식 (2) 위클리프와 후스의 사상으로부터 교회의 보호 (3) 로마 교회의 개혁이었다. 후쓰는 프라하 시 밖의 은신처에서 지기시문트 황제가 그를 초청하여 공의회 석상에서 그의 입장을 변호하겠다는 것과 황제가 직접 후쓰의 안전 통행권을 보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그 제안을 수락했다. 마침내 후쓰는 1414년 10월 11일 길을 떠나 11월 3일 콘츠탄츠에 도착했다. 그의 출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많은 군중 사이를 뚫고 마을로 들어왔다. 교황은 후쓰에게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후쓰는 매일 자기 처소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이에 격분한 추기경들은 황제와의 약속과는 달리 후쓰를 체포하여 12월 6일 도미니크 수도원의 토굴 속에 감금시켰다. 후쓰는 토굴에서 3개월간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었다. 그의 감옥은 화장실 옆에 있어 견디기 어려웠으며 구토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지기시문트 황제와 보헤미아와 폴랜드 제후들이 후쓰의 무죄를 주장하고 석방을 촉구하였으나 추기경들의 눈치를 살피며 기회주의적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결국 후쓰는 석방되지 않았다. 마침내 후쓰는 1415년 6월 5일부터 8일까지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학자들로 구성된 이단 심리위원회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후스의 저서에서 30가지의 교리를 이단으로 기소했다. 후쓰는 이러한 기소에 대해 모두 자신의 저술임을 인정하였으나 그것들을 이단으로 해석하는 위원회의 견해에 반박하고 자신의 입장은 정통적이라고 주장했다. 드디어 심판 날짜가 다가왔다. 지기시문트 황제의 요청에 따라 다이이 추기경과 자벨라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감옥을 방문하여 후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으나 후쓰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후쓰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대성당으로 끌려갔고 그곳에 모인 공의회 석상에서 최종판결을 받았다. 판결은 사형이었다. 사형 집행은 그날 정오였다. 후쓰는 손을 뒤로 묶였고 그의 목은 쇠사슬에 의해 기둥에 묶였다. 다시 한번 철회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후쓰는 거부했다. 결국 화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이 원인이 되어 11년에 걸쳐 보헤미아와 독일을 불안과 공포로 몰고간 후쓰 전쟁(1420-1431)이 발발했다.
4-2. 얀 후쓰의 사상
1400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이래 후쓰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업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평신도 대중의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복음적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했다. 1402년 후쓰는 베들레헴 성당의 설교자로 부임하였고 모국어인 체코어로 설교했다. 후쓰의 강점은 그의 대중설교에 있었다. 그는 그의 불 같은 설교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후쓰는 이미 초기부터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수받아 그의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위클리프의 중심사상은 주권 사상, 성서론, 성찬론, 교황권, 교회론으로 요약된다. 그중에서 후쓰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교회론이다. 후쓰 역시 위클리프처럼 그의 "교회론"(De ecclesia)에서 어거스틴의 교회 개념을 인용하여 교회를 예정된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다: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우주적이며 모든 예정된 자들 공동체, 곧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예정된자들의 총체이다" 후쓰는 [선택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지체로 묘사하는 것과 비교하여 [버림받은 자들]을 악마의 지체(corpus diaboli)로 묘사했다. 후쓰에 의하면 [버림받은 자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라 보기 어렵다: "비록 많은 사람을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지체자라 말할 수 있으나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는 악마의 지체들이다(multi secoundum famen seculi vocantur ecclesia capita vel membra, licet secumdum dei prescienciam sunt mebra diaboli)".교회를 이렇게 이해할 때 교황제도 뿐 아니라 가시적 교회의 권위까지 부정될 수밖에 없다. 후쓰는 주장하기를 "교황이나 주교는 결단코 교회의 이름으로 칼을 잡을 수 없고 전쟁을 수행해서는 안된다. 세속권이나 세속적인 보화(寶貨)에 관심을 두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 교황청은 영적 감화력이 없었고 신앙적인 지도보다는 유럽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인 이익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 당시 통계를 보면 요한 22세 하의 아빙뇽 교황청은 유럽에서 가장 큰 금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청의 일 년 수입이 약 2백만 금화였는데 63.7 %가 외교정책과 전쟁 수행에 쓰여졌고 다만 7.2 %만 구제와 교회건축과 선교를 위해 쓰여졌을 뿐이었다. 후쓰는 교황이나 주교의 허락 없이 설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파문당하고 심판날에 배교자로 취급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적이라고 공박했다. 후쓰와 후쓰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찬에서의 이종배잔이었다. 후쓰는 콘스탄츠에서 미사드릴 때 평신도에게 잔을 주었고 후쓰파들은 1414년부터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기 시작했다.
4-3. 후쓰 전쟁(1420-1436)
후쓰가 콘스탄츠에서 피살되었다는 보도가 보헤미아에 도달하자 백성들은 크게 분개하여 452인의 귀족이 콘스탄스 회의의 결정을 반대하고 후쓰 파는 1420년 프라하에서 로마 교황측에 반대하여 4개 조항을 선포했다. 첫째, 성경에 의하여 자유로이 설교할 것, 둘째, 성찬에 잔도 베풀 것, 셋째, 교직이 국가 정치권을 겸행(兼行)함이 불가함, 넷째, 교직의 여러 죄와 부패를 방지할 것 등이었다. 후쓰가 죽은 후 후쓰파에는 두 파가 급속히 일어났는 데 곧 온건 귀족파와 과격한 민주파였다. 온건 귀족파는 보헤미아의 수도인 프라하를 중심한 귀족들로 구성된 중용파로 성찬에서 떡과 잔을 다 베푸는 것만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에 떡-포도주파 또는 배당(盃黨)이라 하고 양형색설(Utraquists, 兩形色設)주의자라고도 말한다. 이들은 성경이 금하는 의식만 금지하며 복음의 자유와 평신도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는 것과 교직자의 사도적 청빈과 엄격한 교직생활을 요구했다. 과격 민주파는 로마교회의 교리 개혁까지 요구하였고 성경으로 증거할 수 없는 모든 교리를 다 금지시켰다. 이들은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실행의 유일한 기준이 되며 화체설은 오류이며 고행과 종부성사는 폐지되어야 하며, 연옥과 죽은 자를 위해 성자에게 드리는 기도, 성상 및 성유물에 대한 예배 등은 모두 미신이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타보르(Tabor) 고원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타보르파라 부른다. 두 파 간의 논쟁은 격렬하였으나 외부의 공격에는 두 파가 연합전선을 펴서 방어했다. 교황측이 일으킨 십자군의 공격으로 후쓰전쟁이 일어났다. 이 후쓰 전쟁의 성격은 지그문트(1419-1437) 황제를 왕으로서 인정치 않고 제도적인 왕조를 뒤엎고 환상적이고 종말론적인 천년왕국의 건설을 목표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영웅인 타보르파의 소경 장군 요한 지스카(John Zizka, 1376-1424)가 보헤미아를 잘 방어했고 그의 후계자인 프로콥 (Prokop, ?-1434)은 보헤미아의 국경을 넘어 교황측과 전쟁했다. 불리한 교황측에서 타협을 제시하였고 1433년 바젤회의에서 교섭끝에 떡-포도주파(온건 귀족파)는 성찬시 잔의 사용을 인정받고 교황측과 휴전했다. 타보르파는 계속 항쟁함으로 떡-포주파와 내전이 벌어졌다. 타보르파는 1434년 Lipan 전투에서 떡-포도주파에게 거의 전멸당하고 프로콥은 전사했다. 승리한 떡-포도주파는 바젤회의에서 합의한대로 1436년 명목상 로마 카톨릭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462년 교황 피우스 2세(1458-1464)가 그 합의를 무효화 시키자 떡-포도주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보헤미아 국회는 1485년과 다시 1512년에 로마카톨릭과 동등됨을 선언했다. 종교개혁 때 상당수가 개혁사상을 받아들였고 소수는 로마교회로 돌아갔다. 위클리프-후쓰의 사상의 참 대표자들은 떡-포도주파라기 보다는 타보르파였다. 1458년 경부터 타보르파와 떡-포도주파 그리고 발도파가 합해 보헤미아 일치형제단(Unitas Fratrum)을 조직하였는데 그것이 후쓰 운동의 핵심적 요소를 흡수하여 후대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정신적 조상이 되었다. 이 모라비안파가 영국의 요한 웨슬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종교개혁 전 개혁가들을 살피는 것은 교회 역사 이해에서 중요한 요소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이 결코 쉼이 없음에 대한 이해이다. 이단 종파들의 심각한 맹점은 자기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쉼을 주장한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400년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계시의 쉼이 아닌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위한 준비로 생각한다. 그러나 계시사가 아닌 교회사에 그러한 기간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중세기 1,000년을 암흑기라고 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쉼이 없었다. 거룩한 교회와 거룩한 백성이 있었으며 그들의 믿음의 계승도 있었다. 그런데 교회 시대에는 인간적 전승에 의한 계시 전달이 아닌 성경에 근거한 계시 전달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차이이다.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표어를 세웠는데, 개혁 전 개혁가들이 순교하면서 세운 가치이다.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과 말씀없는 성례전을 비판했다. 로마교회에서 주장하는 교황의 절대권이나 계급화된 성직제도를 거부하고 잘못된 가시적-제도적인 교회관을 비판하며 성경에 합당한 교회 이해로 개혁했다.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운동은 로마 교회의 강한 저항과 박해에서 좌절된 것처럼 보였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한 거룩한 백성들의 쉼없는 순종이었다. 복음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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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 최덕성,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부산: 본문과현장사이, 2015)에서 최덕성은 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한 사례들을 모아,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열정과 교회의 부패와 부당한 독단을 소개한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로부터 박해받은 사람을 “4. 피터 왈도 5. 리용의 빈자들 6. 존 위클리프 7. 롤라드 신앙운동 8. 얀 후스 9. 기롤라모 사보나롤라”로 제시했다.
2) (참고) 카타리파는 11-12세기 중세 유럽(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등)에서 발생한 기독교의 이단으로,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 καθαρὀς = katharos'에서 유래했다. 카타리파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진 이단으로 당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세력을 떨쳤다. 카타리파는 그들의 신학보다는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삶의 관계이다. 카타리파 지도자들은 당시 로마 카톨릭 사제들과 다르게, 금욕과 절제, 검소함으로 자신들의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카타리파는 남부 프랑스에 있는 그들의 중심 무대, 알비시의 이름을 따라 ‘알비파(Albigensians)’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마니교적 이단으로 불가리아에서 일어난 보고밀(Bogomils)파와 만나기도 했는데, 마니교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아 물질과 영혼이 대립 관계에 있다고 여겼다. 권현익 선교사는 알비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했다. “저는 “알비인”이라 표현하는데, “알비인”이란 특정 교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비파”는 “프랑스 알비 지역에 활동했던 개혁교회와 일부 이단들을 하나로 뭉쳐 표현한 로마교회의 표현”입니다. “알비인”은 “알비-발도인들로 알비 지역에 대표적으로 활동하였던 개혁교회 그리스도인”으로, 곧 “발도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알비 지역에는 알비-카타르인(협소적 카타르인으로 이원론적 이단 집단)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발도인들이 더 많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협소적 의미의 카타르인”들은 발도인 안으로 개종되어 수용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알비인에 대해서 이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로마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나 학계에서 알비인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 개혁교회가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신앙 선조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인터뷰 중에 권현익 선교사의 답변 -
3) (참고) 2015년 6월 22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회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과거에 우리들 관계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과 갈등을 보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인식할 수 있고 서로가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만 한다”고 했다. (중략) “교황은 그간 가톨릭교회와 발도파 사이에 진행된 교회일치 대화가 공통의 뿌리를 많이 확인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앞으로도 이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출처: NEWSM)
4) (참고)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는 『군주론』(Il Principe, 영어 The Prince)을 저술한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가 있었다.
3강 종교개혁 대략
종교개혁은 1기와 2기로 나눈다. 1기는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제시하고, 2기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시기를 다룬다. 1560년 프랑스신앙고백서를 시작으로 1648년 잉글랜드에서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문서”(신앙고백서 1647, 소교리문답 1647, 대교리문답)가 완성된 것까지 다룬다. 1648년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해이기도 하다. 이 조약은 구교와 신교 간에 있은 30년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가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맺은 강화 조약으로, 구교와 신교가 함께 공존해 나갈 것에 있을 것을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에 있어온 국가 간의 종교개혁은 끝난 시기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1648년까지를 종교개혁시대로 본다. 따라서 마틴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7년부터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1648년까지 기간을 종교개혁 시대로 분류한다. 좀 더 광의적으로는 1688년 명예혁명까지로 볼 수 있다.
마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존 칼빈을 중심으로 헨리 8세(잉글랜드 국교회 출현)와 재세례파(再洗禮派, 영 Anabaptism, 독 Täufer, 급진적 종교개혁) 그리고 필립 멜랑톤, 마틴 부써, 하인리히 불링거 등을 1세대 종교개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존 낙스와 앤드류 멜빌, 데오드레 베자, 프랑스 개혁교회(위그노), 네덜란드 칼빈파(개혁파) 등을 2세대 종교개혁으로 제시한다. 잉글랜드는 퓨리탄이 신성로마제국은 경건주의(Pietism)가 태동되었다.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 요한 아론트(Johann Arndt, 1555-1621),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ke, 1663-1727), 니콜라스 루드비히 진젠돌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 모라비아교회의 창설자, 보헤미안 형제단(Bohemian Brethren)) 등이 있다.
유럽에서 1684년 베스트팔렌 조약(Westfälischer Friede, 영 Peace of Westphalia), 잉글랜드에서 1688년 명예혁명(名譽革命, 영 Glorious Revolution)으로 종교와 국가 관계에서 종교의 동등성은 사라졌다. 더 이상 종교가 국가 및 사회 문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이에 사회에서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을 근거한 계몽철학(啓蒙主義, 프 Lumières, philosophy of enlightenment)에 발흥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경험주의)과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회의주의)에 의해서 철학이 발흥했다. 1776년 잉글랜드 식민지였던 아메리카가 독립을 선언했고, 1800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이 출현했다.
간략한 연보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1520년 스트라스부르크 종교개혁. 1529년 2월 21일에 미사를 폐지: Mattäus Zell, Wolfgang Capito, Caspar Hedio, and Martin Bucer
1521년 보름스 칙령(Wormser Edikt), 루터를 이단으로 선언함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 멜랑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en League), 슈말칼덴 동맹은 츠빙글리주의를 배제하고, 루터주의에 근거해서 공식적인 신학적 입장을 표명.
1531년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카펠 전투(Kappel Wars) 전사
1533년 만성절(All Saints Day)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의 파리대학 총장 연설
1534년 잉글랜드 종교개혁, 헨리8세의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
1536년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로 제네바 종교개혁으로 선회
1536년 존 칼빈(John Calvin,1509-1564)의 <기독교강요> 초판 출판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Diet of Regensburg)
1546년 루터 별세
1546-1547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c War). 카알 5세가 승리로 1548년 휴전했다. 1549년 스트라스부르크는 슈말칼덴 동맹에서 황제의 지배로 들어가면서, 마틴 부써는 추방되었고, 잉글랜드 크랜머의 초대로 이주했다.
1547년 잉글랜드 헨리8세 사망, 프랑스 왕 프랑소아 1세 사망.
1553-1558년 메리, 피의 여왕(Bloody Mary)
1558-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1603-1625년, 제임스 1세(1566-1625)
1625-1649년, 찰스 1세
Commonwealth 시대(1649-1668)
<칼빈 대략>
1536년 기욤 파렐의 인도로 제네바 사역 시작
1538년 제네바 추방,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마틴 부써의 초대)
1541년 제네바 초청으로 복귀
1553년 세르베투스 화형 – 소시니안(세르베투스주의, Servetus-ism) – 유니테리언으로 유지되고 있음
1555년 제네바아카데미 설립,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 체결: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인정되고, “영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Cujus regio, ejus religio)는 원칙이 결정되었다.
1559년 “프랑스신앙고백서”(Gallic Confession of Faith, French Confession of Faith)
1560년 존 낙스(John Knox, 1514~1572)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 작성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546년 조지 위셔트(George Wishart, 1513-1546) 순교, 존 낙스 갤리선 노예
16세기 무렵에 롤라드 파의 가르침과 존 후스의 개혁사상이 스코틀랜드에 들어오게 되었고, 또한 윌리엄 틴데일의 신약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개신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성경읽기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했고,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성경을 금서로 지정했다.
14살 때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첫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 1528)이 화형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 후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를 만나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위샤트는 존 낙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지 위샤트 역시 젊은 나이에 이단으로 몰려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 1546년, 33세에 화형을 당했다.
1561년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 1522-1567) “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의 37개 조항을 개혁교회의 원리로 정립
1560년 멜랑톤 별세
1564년 칼빈 별세
1577년 일치문서(Formula of Concord), 루터파 형성.
1568-1648년 네덜란드 독립전쟁
1575년 레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 설립
1618-1619년 도르트 회의, 항론파 정죄, 도르트 법령(The Canons of Dort, 1619)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
※ 스코틀랜드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스코틀랜드 존 카메론(John Cameron, 1580-1625), 소뮈르 학파
잉글랜드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
잉글랜드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프랑스 피터 라무스(Peter Ramus, 1515-1572), 철학자, 회중주의
프랑스 모세 아미라우트(Moïse Amyraut, Amyraldus, 1596–1664). 4point
1562-1598년 프랑스 위그노 전쟁(The French Wars of Religion)
1572년 바돌로매 축일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1598년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685년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루이 14세
4강 때가 찬 종교개혁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참 교회에 대한 충성이고 열망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막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성급함이 1세기 교회에만이 아니라 어느 때에 교회에 있었고, 21세기 교회에도 있다. 복음을 역행하는 다른 복음의 위협에서 복음으로 교회를 지키는 것은 복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중세기 십자군 전쟁은 1095-1291까지 약 300년 동안 진행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서방교회와 이슬람의 충돌인데, 서방교회가 동방교회,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일도 발생했다(4차 십자군 원정, 1202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에 의해서 1453년에 멸망되었다. 성상파괴론자 1만 5,000여명은 튀르크 군에 편재되어 콘스탄티노플에 창과 화살을 겨눴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기독교 제국(Christendom) 몰락의 시작이다. 그러나 유럽 지역으로 많은 비잔티움의 교회사역자와 다수의 사본이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Ι, 274-337)가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Ι, 314~335)에게 넘겨주었다고 알려진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寄進狀: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1440)" 문서가 조작된 위서임을 밝혔다. 십자군전쟁으로 활발해진 이동과 교역으로 부의 이동이 촉진되었고, 문화 이동으로 새로운 시대,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 다시(re) 태어남(naissance, 재생)1)가 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는 사회 문화(학문과 예술) 전 분야에서 발흥했다.
흑사병(Black Death)은 1347년부터 1351년 사이, 약 3년 동안 2천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쥐와 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흑사병은 유라시아 서부 일대를 휩쓸면서 당시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인구의 60%가 감염되었고, 치사율은 30~60%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흑사병은 16세기에도 꾸준하게 유지되었다. 종교개혁가들도 흑사병 상황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1527년 루터는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팸플릿을 출판했다. 이것은 루터가 브레스라우의 목사인 요한 헤스로부터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한 글이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은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전염병조차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라고 말하며, 전염병에 대한 조치와 치료를 위해서 노력했다. 1568-1571년 제네바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3,0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 교구의 중심 건물인 베드로 성당을 건축한 일이다. 역사에서 무리한 전쟁과 무리한 건축 사업은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 1443-1513)가 베드로 성당 재건축 계획을 세우고 설계안을 공모한 결과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의 작품이 뽑혔다. 이 작업은 1676년에 종결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대성당 신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1506년 면죄부를 발행했다. 뒤를 이은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도 면죄부를 발행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 면죄부 발행이 성행했다. 교황청 조직에서는 성직 매매가 성행했다. 마틴 루터는 ‘면죄부가 죄의 완벽한 사함을 준다’는 훈령 19조에 대해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게시하며, 종교개혁의 선을 확증시켰다. 이후로 로마 교황주의에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 중, 抗罗宗)”는 “루터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 왜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기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보는가?
그것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1520년 보름스 회의(Diet of Worms)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기 때문이다. 루터가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를 계기로 로마 카톨릭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면죄부, 죄사함에 대한 질의),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음,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의 시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세운 것은 루터가 개혁 사상으로 등장한 최초의 일이고, 95개조 반박문이 유럽으로 확산되며 개혁 사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서 말한다.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었다고 한다(직지심경. 1377년). 그런데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로 알려지고 있다(1455년). 그것은 영향력에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정보전달의 혁명을 가져왔다. 개혁가들이 집필한 원고는 인쇄되어 유럽으로 보급되어 정보 전달 방법과 속도에 혁명을 가져온 것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기술이다. ※ 우광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코드’(2017년)에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고려 인쇄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당시의 상황을 짚어나가는 추적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1333년 교황 요한 22세가 니콜라우스 신부를 캄발리크(중국 베이징) 대주교로 임명하며 들려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바티칸 비밀 수장고에서 발견된 교황의 편지 필사본에, “고려왕이 우리가 보낸 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해줘서 기쁘다”는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기점은 1517년 10월 31일이다. 장로파와 감리파가 대다수인 한국 개신교에서 종교개혁기념일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시점으로 세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는가?
이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다소 논의가 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직접 본인이 내걸었다고 언급한 증거자료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에피소드에 대한 관심은 역사를 보는 한 관점에 대한 훈련으로 가치가 있을 뿐, 학문적 가치는 부족하다.
첫째로는 루터가 직접 논제들을 게시판에 내 걸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멜랑톤이다. 그는 루터가 사망한 후 몇 달 뒤에, 루터의 저작물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모아서 2권으로 출판했는데, 책 서문에서 루터가 성문에 내 걸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멜랑톤은 당시 현장에 없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름을 받고 교수로 가르치기 위해서 이사를 온 것은 1518년 8월이었다. 그래서 멜랑톤의 주장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둘째로 제기된 학설은 루터가 게시판에 내다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 속한 독일 역사학자 이셀로흐(Erwin Iserloh, 1915-1996)는 루터가 95개 조항을 교회당에다가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고위 성직자들에게 편지로만 보냈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공적인 사건이 아니라 개인적인 항의와 시정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셋째 주장은 이런 논쟁들을 검토한 후, 루터의 비서 혹은 학교 직원이 게시판에 부착시켰다는 주장이다. 루터가 반박문을 직접 게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내다 걸었다고 하더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당시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은 토론 주제를 대학교회 게시판에 내걸고 토론에 초대했었다. 그런데 토론 주제를 게시하는 일은 주로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던 학교 교직원이 수행했다. 헤르만 셀더하위스(Herman Selderhuis, 1961- :<루터를 말하다>.신호섭 역, 세움북스, 2016)는 루터 전기에서 이런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했던 교직원이 토론 주제를 걸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주장에는 루터의 비서였던 게오르그 뢰러(Georg Rörer. 1492-1557)가 1540년 루터의 신약성경 개정판에 남겨놓은 기록에 보면, 루터가 공식문서를 알리는 방식으로 성벽교회에 게시판에 내걸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11월 1일은 만성절이자 공휴일이었으므로, 하루 전에 깊은 신학적 토론을 하기에는 적합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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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 시기 유럽 각지에서 희랍, 로마의 고전을 연구가 성행함. 인간의 존엄, 개인의 경건과 윤리생활,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인문주의(Humanism)가 태동. 종교개혁의 하나의 배경 : 1) 새로운 인간성에 대해서,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의 존엄성」에서 운명의 주인이 자신임을 선언; (2) 중세교회의 모순과 부도덕 풍자에 관해서, 에라스무스, 「바보 예찬」을 통해 교회를 풍자; 3) 고전에 대한 문헌비판함; 로렌조 발라, 「콘스탄틴의 기증 문서」가 가짜임을 밝혀냄; 4) 타 종교에 대한 관용에 대해서,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의 세계 종교가 함께 예배하는 사원 묘사.
5강 루터의 종교개혁
※ Martin Luther(1483-1546), Martin, ‘마틴’과 ‘마르틴’으로 표기하는데, ‘마틴’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마틴 루터는 농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마가레타 루터(Margaretta Luther)의 아들로 1483년 11월 10일 출생했다. 루터의 부모는 아이슬레벤(Eisleben: 루터의 출생지)의 농부 생활에서 맨스필드(Mansfield)의 광부 생활로 전환하며 성공적인 일생을 이루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엄격한 카톨릭 신앙의 소유자였고 경건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14살 청소년 루터는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뛰어났다. 그는 명문 귀족 집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류트(lute)를 연주하면서 생활고를 해결했다.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부유한 상류 귀족인 우르술라 코타(Ursula Cotta) 부인이 루터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되어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루터는 코타 부인의 하숙생으로서 코타 하우스(Cotta Haus)에서 기거를 하게 되었다. 광산촌 서민 출신이었던 루터는 부유하고 교양있는 귀족들의 상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으로서 루터는 이곳에서 1498년부터 1501년까지 살았다.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1501-1505, 22세) 대학에서 인문과학 학사과정을 마쳤다. 문법, 수사학,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윤리학과 형이상학을 공부했고(trivium & quadrivium, 3학4과, 인문학(liberal arts) 7과, 삼학: 문법, 수사학, 변증학(논리학)이고, 사과: 산술(수학), 기하학, 천문학(점성술), 음악) 이곳에서 선생 가브리엘 비엘을 통하여 어거스틴과 신비주의 저서들을 접하면서 인문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루터는 1505년 일반 교양 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Stotternheim) 인근에서 도보여행 중 벼락으로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17일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어거스틴 수도회 소속 에르푸르트(Erfurt)의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갔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어떻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나?”라는 안페히퉁( Anfechtung, 영적시련: 인간의 내적 의심과 절망뿐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공포와 위기) 문제를 풀기 위한 기나긴 영적 투쟁의 시작이었다. 에르푸르트에는 당시 약 2,000여 개의 많은 수도원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루터가 입문한 어거스틴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하고 학구적인 수도원이었다. 또한 어느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계율과 철저한 수도 생활을 요구했다.
1506년 4월 3일, 수도원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지난 후 루터는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약 1468-1524) 원장과 만났다. 슈타우피츠는 중세 수도회의 최고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루터에게 길을 인도하며 많은 영향을 준 중요한 위인이다. 루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슈타우피츠에게 자신의 크고 작은 죄를 고해했다. 슈타우피츠는 일일이 열거하고 고백하고 사죄를 받을 수 있는 죄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의 타락한 성품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관심을 개인적인 죄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돌려놓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죄에 대한 고민의 문제를 말씀을 통해서 찾기를 권고했다. 그리고 슈타우비츠는 루터에게 성경 연구에 매진하도록 인도했고 특히 성경 원전으로 씨름하게 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유했다. 루터는 이 수도원 생활하면서 어거스틴 신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후일 루터 신학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론과 성도들의 믿음을 강조하는 신학은 어거스틴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신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서 영적 스승이었고 사랑으로 길을 인도해 준 멘토였다.
루터는 1507년(24세) 4월에 에르푸르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5월에 첫 미사를 집례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를 뛰어난 지력과 종교적 열심을 갖춘 유능한 청년으로 인정하고 비텐베르크 대학에 교수가 되도록 선제후 프레데릭에게 천거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1502년 설립된 신설 대학으로 당시는 소규모의 대학이었다. 루터는 1508년부터 이 대학 강단에서 강의 사역했다. 1508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를 시작으로, 1509년 3월 신학사(Baccalaureus Biblicus)학위를 수여받은 후에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센텐치아(Sentencia)」 등을 강의했다. 루터는 1509년에서 1511년 사이 에르푸르트에 잠시 거주한 기간 외에 대부분의 생애를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루터는 1510년(27세) 11월에서 1511년 4월까지 로마를 방문했다. 방문의 이유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엄격한 수도원의 규칙을 계속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규칙들을 완화시켜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생겨, 그 문제를 로마 교황청과 논의하는 대표로 파견된 것이다. 그는 다른 동료 한 명과 함께 로마를 방문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Dokter der Theologie)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Licentia Magistralis)을 얻은 후 정식으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자유롭게 성경을 교수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때부터 루터의 대부분 강의는 성경신학 분야였다. 그는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 주해 강의를 했다.
1515년 루터는 비텐베르크 연구실에서 결정적 경험, Turmerlebnis(탑경험)을 했다. ※ 탑경험의 구체적인 날짜는 정확하지는 않는데, 1512-1529년 사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마서 1:17이기 때문에, 로마서 강의를 시작할 무렵부터 가능할 것이다. 그는 로마서 1:17 말씀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구원의 방식을 확증했다. 로마서 1:17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구원의 근원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시편 말씀(시 31:1, 71:2)의 도움을 받아 결정적으로 깨달았다. 곧 롬 1:17의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의(義)’”를 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주의가 얼마나 복음을 왜곡했는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전임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 때 공포된 면죄부 판매령을 시행하여 1515년부터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1517년 초 신성로마제국 지방에 뛰어난 웅변으로 명성을 떨치던 수도사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이 교황의 휘장을 앞세우고 나타났다. 그는 비텐베르크 주변에서 왕성하게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팔았다. 특유의 언변으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주장했고,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와 브란센부르크의 대주교 슐츠(Schultz)에게 서면(書面)으로 면죄부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나 변화가 없자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의 성격, 효과, 부당성, 문제의 심각성 등에 대한 토론을 제시하는 95개조 반박문(The Ninety-five Theses(95 Theses) or Disputation on the Power and Efficacy of Indulgences)을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게시했다. 루터가 게시한 95개조 반박문은 인쇄물로 인쇄되어 유럽에 확장되었다. 로마 교황청이 주도적으로 행했던 면죄부에 대해서 결정적인 비판이 되었다. 결국 1567년 면죄부 판매를 금지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자의 통공, 연옥, 림보(limbo, 선조림보(Limbus Patrum)와 유아림보, 유아림보는 2007년에 폐기됨)등은 유지하고 있다.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 theologia gloriae)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그리고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theology of the Cross)을 대조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자비 신학 구조를 구축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면죄부 비판)과 함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토론”(Dispu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gy)을 출판했다. 1518년의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십자가 신학, 이신칭의 등을 구체적으로 형성시켰다.
교황 레오 10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V세는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시도했다. 결국 루터는 이단으로 기소되었고, 황제는 교황청과 함께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했다. 교황은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협박했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청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랐다. 그리고 루터는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다. 황제와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보호하는 루터를 물리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1520년 8월, 10월, 11월에 루터는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교회의 바벨론 유수(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크리스찬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의 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Luther’s 3 famous dissertation).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논문은 독일어로 작성해서 신성로마제국 전역에 유포되었다. 이 책에서 만인제사장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무너뜨렸다. 두 달 후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논문에서는 성례전-화체설-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했다. 셋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지게 되었다.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자 그의 손자 카알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는 1521년 보름스(Worms) 국회를 소집하는데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려고 했다. 결국 루터는 황제와 의회 앞에 출두하게 되었다. 황제는 루터에게 저술과 주장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고 했고, 하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주었고, 루터는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결국 마틴 루터는 교황청과 황제로부터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파문을 당했다. 황제 카알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할 사람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4세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 (Wartburg) 성으로 보냈다. 루터는 그곳에서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경 독일어 번역을 완성했다. 1522년 루터는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그는 1534년까지 외경까지 포함하여 성경 완역본을 완성했다. 루터는 이 번역된 성경을 해를 거듭하면 번역을 수정했고, 1545년에 <독일어 성경전서(die gantze Heilige Schrift Deudsch)>를 발간했다.
<우신예찬>(愚神禮讚, Stultitiae Laus. 1511년), 헬라어 신약성경 편집(1516년)을 하여 종교개혁의 길을 닦은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와 루터가 같은 길이 아님을 확인했다.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적 기독교를 추구했고, 루터는 구원 이룸의 기독교를 추구했다. 에라스무스가 밝힌 <자유의지론>(1524년)에 대해서 루터가 <노예의지론>(1525년)으로 반박하면서, 인문주의적 기독교와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의 두 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진영에 있음을 확인했다.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종교개혁을 더 이상 확대하는 것을 금지했다(“Protestant”(항거자, 항로파)라는 명칭 생김). 슈파이어 의회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인 루터파는 서로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오스트리아 빈까지 침략해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성로마제국의 양측은 화해와 타협을 피할 수 없었다. 멜랑톤이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 28조항)를 작성하고, 루터가 인정하면서, 루터파 진영이 구축되었다. 카알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거부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최초의 개신교 신앙고백서이지만, 신성로마제국에서 루터파의 중심을 잡은 신앙의 요체였다.
신앙고백서는 개신교의 신앙집단의 믿음의 요체를 고백하며 종파를 형성했다. 1536년에 바젤에서 작성한 [제 1 스위스 신앙고백서(First Helvetic Confession)], 1566년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작성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서, 1560년 귀도 데 브레(Guido de Bres)의 주도로 작성한 [벨직 신앙고백서]가 있다. 1563년에 잉글랜드 국교회가 작성한 [39개조 신앙고백], 1619년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알미니안을 배격하면서 작성한 도르트 교령, 런던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6년)이 있다. ※ 'Helvetic'(헬베틱)은 스위스(Switzerland)의 라틴 이름이다. 1658년에 사보이 선언(청교도 독립파)이 작성되었고, 1689년에 2차 런던신앙고백서(침례파)가 작성되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루터파의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이 체결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사라진 1540년대에 이르자 양측 제후들에서 군사적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1546년 카알 5세는 루터파를 완전히 박멸할 목적으로 5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영을 구축했다. 반면 루터파 측 제후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휘 체계와 규율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황제의 군대가 승리했고, 1548년 매우 어수선했다. 1548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임시 협정(Augsburger Interim) 덕분에 루터파는 두 가지, 즉 성직자 혼인과 성찬 때 평신도도 빵과 포도주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황제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은 마틴 부써(Martin Bucer, 1491-1551)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초청으로 이주했다. 마틴 부써는 잉글랜드에서 죽었다. 부써는 메리 여왕이 즉위(1553년)하기 전 소천했고, 이 때 함께 초청된 피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1499– 1562)는 다시 스위스로 귀환했고,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유럽으로 도피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쓰게 되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인해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546년에 루터는 소천되었다. 루터가 세상에 없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루터파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다시 전쟁이 게시했다. 1555년 9월 25일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Peace of Augsburg)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알 5세의 명의로 공표되어 루터교회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받게 되었다. 협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지배자의 종교가 그 영내의 종교가 된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을 천명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영주들의 연합체인데 영주의 신앙에 의해서 신앙이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한 제국에 두 종교(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주의)가 공존하게 되었다. 제국에서 남쪽은 로마 카톨릭주의가 북쪽에는 루터파가 세력을 확보했다. 종교 정세는 카톨릭이 가장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1577년 <일치방식>(Formula of Concord)으로 루터파의 두 진영, 순수루터파(Gnession-Lutheran)와 필립파(Philippisten)가 한 루터파로 형성하게 되었다.
※ 1524-1525, 토마스 뮌쳐(Thomas Muenzer, 1489-1525), German Peasants' War(독일 농민 전쟁). “마틴 루터는 농민전쟁을 비난하고 귀족의 편에 섰다”고 평가한다. 뮌쳐는 재새례파적 경향의 위인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했다. 루터는 “강도질하는 농민 폭도에 대하여”으로 신학적 문제성을 지적했다. 재세례파는 로마 카톨릭, 루터, 츠빙글리, 칼빈 모두에게서 인정받지 못했다. 로마 카톨릭은 당시 로마 카톨릭에 반기를 든 뮌쳐에 대해서 “혁명의 신학자”로 복권시켜야 한다고 제언한다.(조영규, “살길 찾기 위한 어설픈 타협으론 아무도 살리지 못한다”, <카톨릭프레스>, 2016-05-27)
※ 1534년 뮌스터 반란(Täuferreich von Münster), 재세례파의 반란으로 재세례파의 방향을 전적으로 전향하게 된 파괴적 모습.
6강 칼빈의 종교개혁
“의심할 여지없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야말로 ”존 칼빈“이다.”
교회사가인 유스토 L. 곤잘레스(Justo L. Gonzalez)의 칼빈에 대한 정의이다. 칼빈을 종교개혁을 집대성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종교개혁을 총합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이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틴 루터가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홀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개혁신학의 정수를 펼쳤다. 결국 루터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손을 잡았고, 그들의 뒤를 걸었다. 그리고 루터는 합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루터가 신학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틴 루터에게서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루터의 풍부한 감성에서 중세적 신비주의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학문 체계에 있는 시대적 한계에서 보아야 한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후대 사역자인 칼빈은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칭의와 함께 성화의 균형을 이루며 신학을 전개했다. 『기독교강요』를 끊임없이 증보한 칼빈의 신학 세계는 기독교 신학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신학 과정이다. 칼빈은 1536년에 초판을 발행했고, 1559년 최종판(5회 증보, 4권 80장)을 출판했고, 1560년에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자기 작품을 번역하여 저술을 진행한 연구자는 사상사에서 볼 수 없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 번역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기독교강요』가 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기독교신학 체계를 완성했고, 증보되면서 신학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럼에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완성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칼빈이 1564년에 소천되지 않았다면 성경주해와 설교 과정에서 형성된 지식으로 6회 증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간략한 생애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피가르디의 감독 교구인 노용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 코뱅(Jean Cauvin)이었다. 칼빈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고하거나 추억하는 내용을 저술에서 보여주지 않았다. 참회록이나 자기 자서전적 진술을 진행하지 않았다. 칼빈에 대한 이해는 그의 서신을 통해서 파악해야 한다.
1509년은 루터(26세)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첫 번째 강의를 마친 직후였다. 아버지 제라드 코뱅은 1481년 노용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시민권을 획득했고, 시청직원과 주교 법률 고문과 비서를 거쳐 교황청의 공증인과 대성당 참사회에서 일했다. 어머니는 귀족의 딸이었는데 칼빈을 낳고 5살 즈음에 죽었다. 칼빈의 아버지는 곧 바로 재혼했다. 재혼한 아버지는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형 샤를은 사제가 되었지만 종교개혁을 지지해서 이단 혐의로 파면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다른 형제인 앙투앙은 후에 종교개혁에 동참하여 여동생 마리와 함께 칼빈을 따라 제네바에 정착했다. 앙투앙은 제네바에서 서점을 운영하며 시민권을 획득했다. 후에 200인 의회의 의원과 60인회의 의원, 그리고 종합구빈원의 감독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귀족 가문인 몽모르 집안으로 칼빈을 보내 교육을 받게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제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에 12살 때 칼빈은 성직록(聖職錄)을 받으며,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2살에는 라 제신에서, 1527년에는 마르테빌의 생 마틴교구에서, 1529년에는 퐁 레벡에서 성직록을 받았다. 고등교육을 받을 나이인 열두 살에 파리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고, 그곳에서 인문과정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523년까지 칼빈은 고향에 있는 학교다녔다. 그리고 14살 되던 해 마튀렝 코르디에(Mathurin Cordier, 1479-1564)가 라틴어 교수로 있던 유명한 기숙학교인 파리의 마르슈 대학에 들어갔다. 칼빈이 코르디에에게 라틴어를 배운 기간은 매우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코르디에는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나중에 코르디에는 칼빈에 의해 제네바와 로잔의 교육 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리로 온 칼빈은 프랑스 이름 대신 라틴어 이름을 사용했다. 코뱅이 아닌 칼빈(칼뱅, 깔뱅)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마르슈 대학에서 짧은 기간(3개월)을 보낸 칼빈은 1524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다른 기숙학교인 몽테규 대학(파리 대학교)으로 갔다. 몽테규 대학에서는 인문학(3학4과)을 수학했다. 로마 카톨릭 정통주의의 요새였다. 그곳에서는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도 수학했다.1) 그곳은 학생들이 매우 두려워는 곳이었다. 학업의 강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가 아닌 라틴어로 모든 수업이 진행되었다. 칼빈은 여기서 유명론 철학을 접했고, 1528년에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칼빈은 몽테규 대학에서 과외 활동 시간에 당시 금서였던 루터, 멜랑히톤의 책들을 몰래 읽었다고 한다. 파리 대학에서도 에라스무스의 인문학 영향을 받아 기존의 로마 카톨릭 신학을 벗어나 인문주의적 성향의 학문과 신학을 접목하여 공부했다.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마틴 루터의 등의 신학적 주장들에 대한 논쟁들이 왕성하게 토론되었다. 칼빈은 자연스럽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성직록을 받고 있었다.
칼빈이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 생제르만 데프레 성당과 파리 외곽 동쪽으로 41㎞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Meaux: 프랑스 종교개혁의 생수의 우물)에서,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 1450-1537) 교수를 중심으로 개혁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데타플은 기욤 파렐의 스승이기도 했다. 1509년에 르페브르는 라틴어 시편 번역본 5가지를 비교하여 연구한 책(Fivefold Psalter)을 출판했는데, 그의 저술을 마틴 루터가 읽었다고도 한다. 1523년에 프랑스어로 복음서를 번역해서 발행하기도 했다. 그는 1525년에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망명했다.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çonnet, 1472-1534)는 르페브르의 도움을 받아 “모”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이 모임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도 동참했다. 파렐은 1525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바젤에서 소책자로 출판했다. 모의 기욤 브리소네 주교는 교구에서 설교하도록 인가받았지만, 1523년에 설교가 금지되고 추방되었다. 이때부터 파렐도 ‘순회 설교자’로서의 여정이 시작됐다. 파렐은 칸톤 베른의 지원 아래서 스위스 칸톤 지역에서 개혁 사상을 전하며 칸톤들을 개혁했다. 1530년 뇌샤텔(Neuchâtel)을 개혁했고, 1532년에 제네바로 이주해서, 1536년에 제네바에 개혁사상으로 전환시킨 위인이 파렐이다. 파렐은 뇌샤텔에서 사역했고, 마지막까지 칼빈을 지지하며 격려했다.
1528년 칼빈은 몽테규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학의 길이 아닌 법률계로 나아가도록 유도했다. 칼빈은 1528년부터 1532년에 부르쥬(Bourges)와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오를레앙 대학에서 독일 출신의 인문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인 멜키오 볼마르(Melchior Wolmar, 1497-1560) 교수를 만났다. 칼빈은 그에게서 헬라어를 배웠고, 그를 통해 루터의 사상을 접촉했다. 볼마르 교수의 집에서 당시 9세였으며 후에 동료이자 후계자가 된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를 만났다. 1530년에 볼마르는 부르쥬 대학으로 갔고, 칼빈도 그를 따라갔다. 그곳에서 칼빈은 인문주의 정신으로 로마법을 가르쳐온 유명한 법률가 알시아(Alciat) 교수에게 법학을 수학하여 법률 자격증을 획득했다.
1531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자유를 얻어 고대 언어와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오를레앙 대학교수회에서 만장일치로 법학 박사 학위를 결정하였으나 칼빈은 끝내 사양했다(다른 견해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이야기도 많다). 칼빈은 법률자문 변호 자격은 취득했다.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 속에서 인문학을 놓치지 않았고, 1532년 그의 회심의 작품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을 출판했다.
1533년은 그의 삶을 바꾸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파리 대학의 학장이며 절친한 콥(Nicholas Cop. 1501-1540)의 취임사가 종교개혁적 내용으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취임사 작성에 칼빈도 포함되어 칼빈은 파리를 탈출하여 유랑하던 중 갑작스럽게 회심(subita conversio, sudden conversion, 1534년 경)했다.2) 1534년 칼빈이 성직록을 포기함을 기점으로, 칼빈은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개혁신앙으로 회심된 것으로 확증한다.
1534년 4월쯤에는 24살의 젊은 칼빈이 노교수인 르페브르를 프랑스 남부 네락(Nerac)으로 내려가 만났다.
1534년 10월 18일 프랑스 파리 시내 곳곳에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례와 교황주의를 비난하는 벽보(Placards)가 게시되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벽보(프랫카드)는 스위스로 망명간 파렐이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535년 1월 21일,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6명이 화형당했으며,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학살당했다. 칼빈이 프랑스에 있을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칼빈은 고향으로 잠시 피한 후 다시 파리 하숙집에 잠시 들렀다가 앙굴렘(Angouleme)에 있는 친구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let) 집에서 임시 은거했다. 틸레는 르페브르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의 집에는 4천 권의 장서를 소유한 부호였다. 결국 칼빈은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1535년 기독교강요를 집필했고, 1536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출판했다.
1534년 칼빈은 『영혼수면설에 대해서』(De Psychopannychia, 1542년 개정함)을 썼다. 이 책에서 인간은 죽은 즉시 영혼이 수면 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한 재세례파들의 중간상태에 대한 주장을 반박했다.
※ 세르베투스는 1553년, 『기독교 재건』(Christianismi Restitutio)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삼위일체,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뿐만 아니라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반박하기 위해 32개의 편지를 책으로 묶어냈다.
프랑스에서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려고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고, 로마 카톨릭주의를 피해 제네바로 갔다가 만났고, 화형에 처해졌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비판하기 위해서 1554년에 라틴어로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신앙의 수호』를 썼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카스텔리오는 “이단자들에 관하여, 만일 그들이 기소되어야만 한다며”라는 글을 발표하여, ‘관용’, “이단자에게 관용”을 외치는 선구자가 되었다. 칼빈은 프랑스 국왕에 관용, 합리적인 진리 진술에 대한 성찰과 관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카스텔리오 이후에 관용은 이단 주장, 무제한 관용을 주장하게 되었다.
칼빈을 기독교 신학자로 세운 『기독교강요』는 1536년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총 516페이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었다. 처음 4장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이고, 마지막 2장은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와 신앙의 자유의 문제를 다뤘다. 『기독교강요』는 출판되자마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고, 9개월 만에 모두 판매될 만큼 화제가 되었다. 칼빈의 작품을 파렐이 읽었고, 제네바의 사역자로 칼빈을 원했다. 그러나 칼빈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하기를 원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로 가려는 길에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네바를 경유한 우회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기독교강요』는 3년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1539년 제2판을 출판했다. 2년 후인 1541년에는 제네바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그 이후 『기독교강요』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출판된다. 칼빈은 라틴어로 저술한 뒤에, 다시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루터의 독일어와 라틴어 기술은 문체가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의 라틴어와 프랑스어 문체는 유사하게 진행된다. 1559년 최종판(5회 증보)이 출간되었고, 1561년에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출판했다. 처음 6장으로 구성된 『기독교강요』는 최종판에서는 4권에 80장까지 확장 증보되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신학대계라고 하는 것보다, 성경해석을 위한 가이드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교육하지 않고, 성경을 강의했다.
바젤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는 길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전쟁하는 전쟁터였기 때문에 제네바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 하루 머물고 떠날 작정이었다. 당시 제네바는 파렐이 카톨릭주의에서 개혁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제네바는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근대적 정신이 어느 정도 수용되는 분위기였지만 도덕적 타락도 성행했다. 기욤 파렐은 수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며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종교개혁의 영향 아래 들어오게 했다. 파렐은 제네바 개혁을 위해서 칼빈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강권해서 제네바의 교사가 되도록 했다.
칼빈은 15살 많은 파렐의 제언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칼빈이이 수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파렐은 화를 내며 협박과 저주하는 수준까지 나갔다. “만약 당신이 당신을 이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위급한 상황을 못 본 척 하고 단지 학문만을 위한 평온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대의 평화에 저주하시길 원한다.” 칼빈은 파렐의 선언에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제네바에 머물기로 했다.
칼빈은 제네바 피에르 교회의 성경교사로 되었다. 그런데 1536년에 제네바 피에르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의 하나님 교회의 목사, 신학 박사였다. 필자는 칼빈을 목사라고 제언한다. 칼빈은 목사로서 신학과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했고, 많은 사역자들과 교분을 나무녀 동역했고, 제네바 시의회와 원활한 소통을 통해서 시민질서를 확립했다. 한국 목사들이 설교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칼빈보다 더 많이 설교하지 않았다. 칼빈은 일 년에 평균 200회 설교했고, 200회를 강연활동을 했다. 그는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했고, 격주로 매일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한 시간 이상 진행되었고 원고나 메모가 없이 행해졌다. 시의회가 칼빈의 건강을 위해서 설교 횟수를 제한하기로 결의할 정도로 칼빈의 설교 횟수는 많았다.
1536년부터 1538년까지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사역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서 추방되었다. 파렐은 뇌샤텔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써의 초청을 받았다. 칼빈은 처음 계획했던 스타라스부르그에 가는 것을 겸허하게 수용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한 칼빈은 안정적인 생활은 아니었다. 마틴 부써는 칼빈에게 피난민 목회의 사역을 맡겼다. 비록 바쁘고 피곤한 일상이었지만 가장 안정적인 시간이었다. 일부 시편들과 찬송을 프랑스어로 번역했고, 종교개혁에 합당한 예배의식을 만들었다. 『기독교강요』 제2판을 출판하고, 『로마서주석』도 출판했다. 칼빈은 과부였던 이델렛 드 뷰어와 혼인했다. 칼빈의 아내는 1549년 제네바에서 먼저 사망했는데, 칼빈의 병약한 몸과 과도한 사역을 보좌하다가 그랬을 것으로 추측한다. 칼빈은 혼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의 인도로 혼인했고, 합당한 혼인 생활을 유지했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년 1월 29-1552년 12월 20일)는 굉장히 활달한 성품이어서 맥주 사업으로 경제 활동을 했다고도 한다.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 생활이 칼빈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안정적인 시기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에게 다양한 신학 정보(장로 제도 운용)와 목사의 성품에 대해서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으면서도 제네바의 신학 문제를 지원했다. 파렐과 칼빈이 빠진 제네바에 로마 카톨릭주의가 다시 들어오려고 했다. 칼빈이 없는 동안 로마 카톨릭 추기경 사돌렛(Jacob Sadoleto. 1477-1547)이 1538년에 제네바 시민들을 로마 카톨릭 교회로 회유하기 위한 편지를 썼는데, 제네바에서는 그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제네바 시는 결국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칼빈에게 사돌렛에 대한 반박문을 부탁했고, 칼빈은 1539년 사돌렛에 대한 반박문(Reply to Jacopo Sadolet)을 주어 제네바를 보호했다.
1541년 제네바는 상황이 반전되었고, 제네바는 칼빈을 목회자로 청빙했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파렐과 동료들은 제네바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조했고, 칼빈은 제네바로 귀환을 결정했다. 제네바로 돌아가는 칼빈의 심경이 그의 글에 있다.
“나는 하루에 천 번 부서져야 했기에, 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차라리 백 번 이상이라도 다른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선택권이 내게 있다면, 나는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 외에 모든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의 마음이 죽은 것 같이 여기며, 주님께 나를 제물로 드립니다.”
칼빈은 두려움을 안고 제네바로 돌아갔다. 제네바로 돌아간 칼빈은 처음 좌절되었던 교회질서를 작성해서 시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조례를 통해 제네바 교회는 당회(Genevan Consistory)가 지도하고 감독하게 되었다. 당회는 목사들과 12명의 장로들이 모여 구성했다. 칼빈의 강력한 개혁정책, 거룩한 질서를 수립할 때에 제네바 시민, 시의회와 충돌이 발생했다.
칼빈은 제네바 사역(1541-1564)을 23년동안 사역했다. 1541년 칼빈을 청빙한 제네바는 칼빈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았다. 1553년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이들이 득세하여 상당히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제네바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개혁하려는 칼빈의 노력은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무엇보다도 신앙적 원리에 따라 살지 않는 이들에게 수찬을 정지시키려 했는데,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그 주된 세력이 시 당국이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수찬정지를 명하거나 철회하는 것은 의회의 권한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권한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것은 그 후 10여 년간 감독회와 시정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요인이 되었다. 또 이때 칼빈의 엄격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가세했고, 신학적으로 칼빈을 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많은 술집이 폐쇄되었고 간음이나 노름, 부도덕한 행위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교회결석, 예배 도중에 나가는 행위나 신성모독적인 언행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 부류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었고, 둘째는 방종파(Libertines, 혹은 자유파: 아모(Pierre Ameaux), 뻬랭(Perrin) 일파와 파브르(Favre) 일파)이었고 셋째는 칼빈과 신학적 입장을 다른 위인이었다. 당시 칼빈과 신학적 견해에 대립했던 위인은 제롬 볼섹(예정론), 장 트롤리(Jean Trolliet), 세바스티안 카스텔로, 그리고 미카엘 세르베투스 등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종파 인사였다는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단지 이 글의 전개상 편리하게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546년 1월 말, 한 차례 치리회와 갈등을 겪은 적이 있는 카드 제작자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는 칼빈을 고발했다. 몇 달 후 칼빈을 제네바에 데려오는 데 애썼던 아미 페랭(Ami Perrin, ?-1561)이 칼빈에게서 공개적으로 돌아섰다. 아미 페랭, 파브르(Favre), 방델이 포함된 세력들은 프랑스 망명자들과 함께 칼빈을 제거하기 위해 목사회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칼빈을 대적자하는 세르베투스를 지지했다. 그런데 세르베투스는 너무나도 명확한 삼위일체를 거부한 이단이었다. 세르베투스가 무너지자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며 칼빈을 대적했던 무리들도 더 이상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가 사라졌다.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에 대해 스위스 각 도시들뿐만 아니라 불링거, 멜랑톤, 심지어 칼빈의 반대파였던 제롬 볼섹까지도 처형을 지지했는데, 카스텔리옹은 이단 사상에 관용을, 신성모독자들에게는 추방이나 투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프랑스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처형을 앞두고 투옥되었다. 그는 탈옥해서 제네바로 피했다. 제네바를 지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음으로 체포되었다. 제네바 당회에서는 그에게 38개의 죄목을 작성하여 세르베투스가 이단인 것을 보고했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 칼빈은 이단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은 늑대를 살리기 위해 불쌍한 양떼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심각한 잔인함이라고 주장했다.
※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는가?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 사상이다. 이단 사상은 종교적 죄인이 아니라 정치범이고 사상범이다. 즉 국가질서문란죄, 반역죄에 해당되어 시의회에서 판결했다. 당시 칼빈은 제네바에서 시민권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세르베투스의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를 존경한 두 사람, 소시니우스(Socinus, Sozzini Lelio1525-1562/조카 Sozzini Fausto, 1539-1604)가 동쪽으로 피신해서 세르베투스의 신학을 구체화시켜 소시니안(Socinianism)을 구성했다. 그들은 유니테리언 종파로 현존하고 있다. 유니테리언은 세르베투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1553년 세르베투스가 처형되면서, 칼빈의 대적자들은 모두 약화되었다. 1555년 2월의 선거에서 방종파는 완전히 몰락되었다. 제네바 교회의 결정까지 합쳐져, 칼빈파가 시민대표 및 시의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555년의 컨시스토리 회의록에서 제네바 사람들이 도박에 빠진 모습, 가족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는 모습 등이 보고되었다.
칼빈의 3기 사역 기간(1555~1564). 53세 무렵의 칼빈. 방종파가 사라진 이후에 제네바에서 칼빈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에서는 마틴 루터와 구분되는 종교개혁가로서의 칭송했다. 칼빈과 루터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칼빈은 루터를 존경한 것이 문헌에 나타났고, 루터가 칼빈을 평가한 것은 볼 수 없다. 다만 루터파에서 칼빈파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경계를 보였다. 1549년 칼빈은 제네바 교회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취리히 교회를 중심으로 티구리누스 합의문(Consensus Tigurinus, 취리히 합의: Consensus of Zurich)를 맺음으로 스위스 칸톤의 연합을 가능하게 했다.
칼빈은 메리 1세 시절 발생한 개신교 피난민들을 1555년부터 제네바에 수용했다. 시의 보호 아래 존 낙스나 윌리엄 위팅햄(William Whittingham, 1524-1579) 등의 유명한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이 때 제네바에 들어왔다. 제네바에서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출판되기도 했다(제네바성경, 1559년). 그 중에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칼빈은 개혁된 신학으로 후진을 양성하여 교회를 세우는 교육기관을 추진했다. 1558년 3월 25일에 장소가 정해지고, 1559년 6월 5일에는 학교를 개교했다. 칼빈이 시민권을 얻은 것도 1559년 때이다. 제네바아카데미는 칼빈의 개혁신학을 유럽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 루터의 저술이 출판 수단으로 확산되었고, 칼빈의 신학은 제네바아카데미를 도구로 확산되었다.
칼빈은 1556년부터 쇠약해져 1558년 말에 열병에 걸려 이듬해 초까지 심하게 앓았다. 1559년에 기독교강요가 출판되었는데, 칼빈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에서 작업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과업까지 수행했다. 칼빈은 병상에서 일어난 직후 설교를 사역을 감행했다. 결국 경련을 일으키며 격렬한 기침 발작을 일으키는 등 심각하게 병쇄가 악화되었다. 1564년 2월 6일에 피에르 교회에서 한 설교가 그의 인생 마지막 설교가 되었다. 4월 25일에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5월 2일에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도 칼뱅을 방문했고, 19일에는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정기모임을 가졌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주의 부르심으로 세상을 떠났다.
칼빈의 직계 후계는 데오도르 베자(Théodore de Bèze, 1519-1605)가 감당했고, 디오다티(Giovanni Diodati, 1576-1649, Swiss-Italian Reformed theologian), 테오도르 트론친(Theodore Tronchin, 1582-1657),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이 사역했다. 튜레틴의 아들, Jean-Alphonse Turretin. 1671-1737(제네바에 자유주의 신학을 도입함, 헬베틱 신앙고백서 서약 의무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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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재성은 칼빈과 로욜라는 함께 1년 동안 학교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Van Halsema는 1528년, 칼빈이 파리를 떠난 바로 그 해에 훗날 예수회를 창설하는 37세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학업을 위해 파리에 왔다고 주장했다(Thea B. Van Halsema).
2) 칼빈은 1557년 〈시편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록 내 아버지께 순종하려는 소망에서 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밀하신 섭리로 나를 제어하사 마침내 내 진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 첫째로 일어난 일은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으로 여러 해 동안 너무나 고집스러웠던 마음을 가르칠만하게(docilis, teachable) 만드셨다.”
7강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1534년 헨리 8세 수장령 (Acts of Supremacy, 首長令),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변경한 국교회주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1539년 6월 헨리 8세는 의회를 통해서 “6개 조항”(Six Articles Act)을 반포했다.
에드워즈 6세(Edward VI,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는 튜더 왕조
1553년 6월 '42개조'(Forty-two Articles of Religion)를 공포했다. 이 문서는 메리 여왕이 폐지했고,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재세례파에 대한 강한 반감이 표출된 마지막 세 조항을 뺀 39개조 신앙고백을 영국 교회의 공식적 신앙고백으로 채택했다.
메리 여왕, 피의 메리(Bloody Mary), 1516-1553(즉위)-1558, 로마 카톨릭주의로 회귀하려함
엘리자베스 여왕,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 1533-1558(즉위)-1603, 국교회주의
제임스 1세, 1566-1567(제임스 6세, 스코틀랜드 왕)-1603(잉글랜드 왕)-1625. 스튜어트 왕조
찰스 1세, 1600-1625(즉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1649
주교전쟁(1639-1640)과 시민전쟁(1642-1651, 청교도 혁명)
찰스 2세, 1630-1649(즉위, 망명)-1660(복권)-1685년
제임스 2세 찰스1세의 아들, 1633-1685(즉위)-1701년
프랑스 루이 14세 퐁텐블로 칙령(1685년), 제임스 2세의 로마 카톨릭 회귀 정책. 1688년, 명예혁명. 권리장전(權利章典m Bill of Rights: 1689) 1688년 11월 5일,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 윌리엄(William, 네덜란드어로는 빌럼 Willem)이 2만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도버 해협을 건너 토베이(Torbay)에 상륙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2세를 공격하기 위해 런던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제임스 2세는 장인이었다. 1689년, 의회는 새로운 통치자와 일종의 협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매듭지었다. 도주한 제임스는 스스로 왕위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고, 로마 카톨릭 신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했다. 보수적 세력은 메리를 여왕으로, 남편 윌리엄은 단지 여왕의 조력자 정도로 만들고자 했는데, 윌리엄은 왕권을 원했다. 결국 윌리엄과 메리 부부를 ‘공동왕’으로 옹립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새 통치자는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회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권리장전에 서명하면서 왕권을 가졌다.
잉글랜드 청교도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비분리 회중파 청교도
스코틀랜드 교회가 장로교 체계를 도입한 것은 1570년 말이다. 그 이전에 주교와 시찰감독(superintendent)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156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자기 교회를 가장 잘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Church)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1)
1558년 말, 스코틀랜드에서 광범위한 개혁운동이 발생했고, 그때 존 낙스(John Knox, 1515-1572)는 제네바에 있었다. 개혁운동을 전개하던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의 흔적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낙스는 1547년 세인트 앤드류의 설교자였고, 프랑스에 의해서 점령될 때 체포되어 갤리선의 노예가 되어 노를 젓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석방은 1549년 초 잉글랜드 에드워즈 6세(Edward Ⅵ)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토마스 크랜머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1547년 피터 버미글리(Peter Vermigli, 1499–1562)와 1549년 추방된 마틴 부처와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로 있던 존 낙스를 구출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다.
에드워드 6세 시대에 교회 질서(ordinal, 1550년)을 제정했고, 1552년에 1549년에 제정된 제1기도서를 폐지하고 제2기도서를 공포했다. 1553년에 칼빈의 예정론과 성찬론이 잘 반영한 42개 신조(Forty-two Articles of Religion)를 공포했다. 에드워즈 6세가 죽은 뒤에 등극한 메리 여왕은 교황주의로 회귀할 것을 추구하며, 잔혹한 학살을 서슴지 않았다. 메리는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Cranmer)를 비롯하여 리들리(Nicholas Ridley)와 라티머(Hugh Latimer) 등 300명 이상을 처형할 정도로 잔혹했다.
존 낙스는 메리 여왕의 핍박을 피해 신성로마제국과 제네바에서 영어 사용자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1559년 5월 2일에 에딘버러로 귀환했다. 낙스가 도착할 때 스코틀랜드는 구교의 아성인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에 확실한 구교 왕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스코틀랜드는 중도정책(via media)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원군을 요청했고2), 잉글랜드의 지원군으로 프랑스의 공격을 견딜 수 있었다.
1560년 7월 6일에는 에딘버러 조약(Treaty of Edinburgh)을 체결하여, 잉글랜드와 프랑스 군대는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했다.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공식적으로 라틴어 미사를 금하고, 감독제도(Episcopal Church)를 거부했다. 감독제도는 로마를 교회의 원점(교황)으로 한 계급적인 교회 질서이다.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는 왕을 원점으로 하는 주교 제도를 세웠다.
1560년 7월 19일 가일 예배당(St. Giles)에서 낙스가 감사 예배를 인도했다.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으로 종교적 문제를 개혁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섯 명의 존(John)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 준비위원회가 4일에 작성한 문서를 스코틀랜드 의회가 8월 17일 채택했는데, 이것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tish Confession)”3)이다.
여섯 명의 존(John of six clergy)은 존 낙스, 존 위록(John Willock), 존 스포티스우드(John Sopttiswood), 존 윈람(John Winram), 존 더글라스(John Douglas) 그리고 존 로우(John Row)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표준 문서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작성 원리는 성경무오(the infallible Word of God)였다. 1561년 12월에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근거하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했는데, 이때를 장로교회의 시초로 삼았다.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근거해서 1560년 <제일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와 <교회 정치>(The Book of Common Order)를 작성해서 교회 질서를 확립했다. 1560년 12월 5일에 프랑스 왕 프랑소와 II세가 죽자, 왕비였던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는 20세의 나이로 1561년 8월 19일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의 화려한 생활을 좋아했는데, 메디치 가문의 카트린이 모후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어떤 연고도 없는 스코틀랜드 출신 전 왕비를 박대했기 때문이다. 에딘버러의 홀리루드(Holyrood)에서 메리 여왕은 구교의 미사를 열었고 낙스는 강력하게 비판과 저항을 받았다. 그런데 여왕의 부적절한 사생활과 여러 불법 행동으로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폐위를 실현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총회장 조지 뷰캐넌)가 1567년 6월 25일에 개최되어, 추밀원(樞密院, Privy Council) 의원과 귀족들이 참여하여 7월 24일에 여왕의 통치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7월 29일에 여왕의 갓 돌인 아들 제임스 6세(James VI, 1567-1625, 후에 잉글랜드와 통합왕국의 제임스 I세가 됨)4)를 왕으로 옹위하고 섭정으로 모레이(Moray)를 세웠다. 1568년 메리는 탈출해서 대항했지만 패배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로 망명했고, 칼라일 성에 구금되었지만 잉글랜드 구 교파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572년 11월 24일 투쟁하는 과정에서 낙스가 소천했다.
존 낙스를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끈 사역자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다. 앤드류 멜빌은 감독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장로주의를 체계화한 장로주의의 교부(Father of Presbyterianism)이다. 멜빌은 1564년 19세에 파리 대학에서 수학했고 21세에 교수 활동을 했다. 1569년부터 제네바에서 베자의 사역에 참여했다. 멜빌은 제네바 대학 인문학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김낙중 교수는 제네바에서 카트라이트와 멜빌이 교우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멜빌은 5년 동안 제네바에서 사역하면서 장로 제도를 이해했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글래스고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멜빌이 스코틀랜드에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다시 주교제도로 회구하려고 했었다. 멜빌은 주교목사도 회중을 섬겨야 하는 사역자간 평등 원칙을 주장했다. 멜빌은 1578년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작성했다. <제2치리서>는 노회(presbytery)를 근거한 장로 정치 원리로 교회 질서를 확립하게 최초의 교회 질서이다.
장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의 주(主)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멜빌은 두 왕국 이론(doctrine of the Two kings and Two kingdoms)을 제언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세상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으로 구분했는데, 멜빌은 두 왕(예수와 왕)과 두 왕국(교회와 왕국)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교회의 왕이신 예수께서 교회를 주관할 수 있도록 제도를 확립했다.
멜빌의 <제2치리서>는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의 사상(Erastianism)과 대치되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VI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1578년 11세가 되면서 제임스 VI는 통치를 시작했다. 제임스 VI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앤드류 멜빌이었음은 의심할 수 없다. 멜빌은 왕의 압정을 피해서 20여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 귀족들은 무력으로 왕을 제압했고, 멜빌 일행이 귀환할 수 있었다.
김중락 교수는 1587년부터 1592년까지를 장로회 제도가 이상적으로 작동했던 기간으로 평가했다. 1592년 황금법(Golden act )이 제정되면서 장로교는 절정에 다다랐다. 1584년 제임스 VI가 주교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만든 암흑법(Black Acts, 왕은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다)을 무효화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개혁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은 장로 제도를 싫어하는 제임스 VI였다. 제임스 VI는 주교 제도를 결코 굽히지 않았고, 1603년 잉글랜드 왕으로 옹위되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과 끊임없는 갈등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1567년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VI는 1603년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 후계자가 되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통합 왕 제임스 I가 되었다. 제임스 1세에 대한 평가는 혹평과 호평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제임스 1세가 번역한 흠정역(欽定譯) 혹은 킹제임스성경(1611년,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Version, KJV)에 대해서 아쉬움을 표현한다.5) 그 당시 제네바성경(Geneva Bible)이 영국에서 잘 읽혀지고 있었는데, KJV 성경을 번역하여 제네바성경의 영향력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1604년 제임스 1세는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1,000명의 목사가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으로 햄프턴궁전 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를 개최해서 장로회 제도를 도입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왕은 “주교 없이는 교회도 없다”라고 외치며 장로주의를 거부했다. 제임스 1세의 1604년은 칼빈이 소천한지 8년이(1565년) 지났고, 바돌로매 대학살(1572년)로 위그노를 학살한 것을 보았다.
혹자는 청교도에 의해서 KJV가 번역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엄격하게 장로 제도를 싫어하는 제임스 1세가 번역했다. 1604년, 청교도(국교회)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 1549-1607)가 왕에게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역본을 번역하자고 제안을 했다. 존 레이놀즈는 중도주의자 리처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의 제자였다. 후퍼는 종교개혁자 볼링거와 친분이 깊었다. 제임스 1세는 이상하게도 제네바성경에 대해서 혐오를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1세부터 잉글랜드 안에 분리주의자(훗날의 회중파 청교도)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The lnvincible Armada)를 격파한 엘리자베스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발했다.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 I, (1533출생)1558-1603)에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장로주의를,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은 분리주의(Brownist)를 제창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장로파가 많고 분리파는 매우 소수였는데, 제임스 1세 이후에 장로파는 감소하고 회중파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제임스 I 시대에 존 스미스를 중심으로 첫째 분리주의 교회를 세웠다. 1606년 윌리엄 브루스터와 존 로빈슨을 중심으로 두 번째 분리주의 교회가 세워졌다. 1608년 존 스미스는 교인들을 이끌고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고, 1609년 스쿠루비(Scrooby)의 윌리엄 브루스터 교인들은 네덜란드 라이덴으로 이주했다.
제임스 1세는 부족한 국고를 채우기 위해서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발했다. 라이덴에서 정착하지 못한 분리주의자들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1607-1609년까지 신대륙에 버지니아에 정착해서 제임스타운에 개척한 존 스미스(John Smith, 1580-1631)는 잠시 귀국했다가, 1616년 다시 탐사를 가졌다. 1620년 9월 16일 윌리암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567-1644)의 지도로 잉글랜드 남쪽 플리머스(Plymouth)에서 남자는 78명, 여자는 24명, 총 인원은 102명이 출발해서, 두 달을 항해서 1620년 11월 9일에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 도착했다. 그들이 가지고 간 성경은 제네바성경이었는데, KJV로 곧 전환했다. 분리주의자(Separatists 혹은 Brownist)들은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로 이름을 바꾸었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존 로빈슨의 지도를 받은 헨리 제이콥(Henry Jacob, 1563-1624)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지양하는 새로운 온건파 청교도주의운동(교회 안에 교회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이 독립교회파, 비분리회중주의(Independent, Non-separating Congregationalists)이다. 이들은 온건파 장로파와 또 다른 입장의 청교도주의 운동이다. (이들도 후에 분리주의자들고 함께 회중교회의 조상이 되었다.)
침례파 운동은 존 스미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영국 국교회 사제였고 제세례파 온건파인 메노나이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김홍기). 스미스는 재침례파인 메노파와 만나면서 그들이 참된 교회라는 것을 인정하며 교류했다. 1612년에 반대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서 침례교를 세웠는데, 침례파의 기원은 존 스미스라고 한다. 1638년에는 칼빈의 예정론과 제한적 속죄론을 믿는 ‘특별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 때에 분리파, 비분리회중파, 침례파 등이 형성되었다. 장로주의는 잉글랜드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스코틀랜드 언약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잉글랜드 장로파는 세력을 확산시키지 못했지만, 분리파(회중파)는 세력이 왕성하게 확산되었다. 과격한 분리파는 식민지에서 활동했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나 사보이선언 작성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비분리 회중파는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운동을 주도했다.
바빙크는 회중파를 통해서 합리주의, 자연주의, 유니테리언이 대거 유입되었다고 분석했다. 제임스 1세 시절에 스코틀랜드는 멜빌을 중심으로 한 장로파를 확립했고, 잉글랜드는 국교회, 로마 교회에서 분리파, 독립파, 침례파 등 다양한 분파가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는 메노나이트, 소시니안 등 다양한 유럽의 이설들이 영향을 주었다.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은 국왕이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순종하며, 교회(the Kirk)를 수호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왕에게 유쾌한 일이 되지 않았고, 끊임없이 종교와 국가 갈등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1733년,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 1680-1754)을 중심으로 교회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로 분리되는 결단까지 감행했다.
활발해진 항해술로 유럽 대륙과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유럽의 산물은 잉글랜드로 더욱 용이하게 도입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名譽革命, Glorious Revolution)과 1706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연합 조약(UK, United Kingdom)은 이해의 신기원을 가져야 한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 회중파, 침례파를 혼합하여 청교도로 정립한 위인은 로이드 존즈의 『청교도 신앙 : 그 기원과 계승자들』(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서문강 역, 생명의말씀사)로 보인다.
찰스 1세부터 웨스트민스터 총회(청교도 혁명)까지 다음에 다룰 것이다.
[참고 1] 스코틀랜드 개혁파는 윌리암 메이트란드(William Maitland, 1528-1573)를 잉글랜드에 파견해서 협상을 진행했다.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처음으로 잉글랜드 군대가 스코틀랜드 땅에 들어오는 것을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한다(Douglas, "John Knox and the Scots Reformation," 251). 스코틀랜드 왕실군대와 프랑스 군대와 대치하던 스코틀랜드 개혁파 군대는 잉글랜드와 1560년 1월 27일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상호방위조약인 벌윅 조약(The Treaty of Berwick)을 체결했다. 1560년 6월 10일, 섭정 기즈의 메리가 사망하자 프랑스 군대가 화평을 원했다.
[참고 2] 메리 스튜어트의 아버지 제임스 5세는 엘리자베스 1세와 4촌 관계였고, 메리 스튜어트에게 엘리자베스1세는 5촌 아주머니가 된다. 모레이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복 오빠였고, 개혁파를 견지했다. 모레이는 메리 여왕에서 추방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와 연대해서 스코틀랜드에 영향력을 발휘했다(참고 , 김정미, 『연애의 사생활』(서울:다산초당, 2010), 6장. 지독한 사랑에 중독되지 마라, 오만하고 경솔했던 사랑, 메리 스튜어트, 헨리 단리, 보스웰 백작).
[참고 3] 제임스 5세와 기즈 매리 사이에 메리 스튜어트가 태어났고, 메리 스튜어트와 단리(Henry Stuart, Lord Darnley) 사이에서 제임스 VI가 태어났다. 1543년 제임스 5세는 메리가 태어나 6일에 사망했고, 메리가 여왕이 되고, 기즈 매리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1587년 메리 스튜어트가 참수되자, 스페인의 필립 2세는 무적함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1588년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를 칼레(Calais, 아르마다 해전)에서 격파했다. 기념메달에는 Flavit יהוה et dissipati sunt 1588(1588년에 여호와께서 바람을 일으켜 흩으셨다)를 새겼다.
엄숙 동맹과 언약(1643년)
서요한 박사의 『언약사상사』(187-192)에서 “엄숙 동맹과 계약의 내용과 신학”에 대해서 제시했다.(참고. ‘covenant’는 계약, 언약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우리는 ‘언약’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서 박사는 ‘계약’으로 번역했다. 박사논문 제목 “The Contribution of Scottish Covenant Thought to the Discussions of the Westminster Assembly 1643-1648 and its Continuing Significance to the Marrow Controversy 1717-1723”(Glamorgan Univ, 1993년), 브리티쉬도서관 선정도서(British Library, www.bl.uk)).
엄숙 동맹과 언약(1643)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지도자인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이 초안을 잡고, 독립파 헨리 베인 경(Sir Henry Vane)에 의해 작성되었다. 1643년에 세 왕국의 지도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서명했다. 엄숙 동맹과 언약(1643)의 목표는 세 왕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이 한 종교, 개혁된 종교를 세우는 것에 있다. (참고. 웨일즈(Wales)는 1284년 에드워즈 1세에 의해서 잉글랜드에 정복되었고, 1543년에 켈트 종교에서 국교회로 완전 통합되었다. 59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선교 사역을 했다) 둘째, 교황제도, 성직계급 제도를 거부한다. 셋째 세 왕국의 지속적인 번영, 안전, 평화를 서약했다(서요한: 1994, 187).
서요한은 『청교도 유산』에서 다시 정리했다. “이 계약서는 모두 6개 분야로 구성된바 (i) 교리와 권장에 있어서 양국의 협력, (ii) 건전한 교리에 위배되는 모든 것과 교황 제도 및 고위 성직 제도의 근절, (iii) 의회의 권리와 왕의 권위 인정, (iv) 왕과 백성 사이를 이간하고 분리하는 모든 악한 것들의 차단, (v) 두 왕국 사이의 평화 유지와 연합의 보존, (vi) 이 동맹과 계약을 작성할 때 의도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상호 지원 등이다.
그러나 이 계약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과 유럽 최고의 개혁파 교회의 모본을 따라 영국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장로교 대표들은 자국의 개혁주의 전통을 영국에 이식하여 유럽의 국가들처럼 장로교를 정착시키려 하였다(서요한: 2016, 192). 다양한 역사 평가가 있는데,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엄숙 동맹과 언약(1643)의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이해하고, 당시 영국사를 이해하는데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그래서 엄숙 동맹과 언약(1643) 본문 번역을 시도했다.
Solemn League and Covenant(1643)
A solemn league and covenant for Reformation and Defence of Religion, the honour and happiness of the King, and the peace and safety of the three kingdom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3 왕국의 평화와 안전, 국왕의 명예와 번영, 종교의 확립과 개혁을 위한 엄숙 동맹과 언약
We noblemen, barons, knights, gentlemen, citizens, burgesses, ministers of the Gospel, and commons of all sorts in the kingdom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by the providence of God living under one King, and being of one reformed religion; having before our eyes the glory of God, and the advancement of the kingdom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the honour and happiness of the King's Majesty and his posterity, and the true public liberty, safety and peace of the kingdoms, wherein every one's private condition is included; and calling to mind the treacherous and bloody plots, conspiracies, attempts and practices of the enemies of God against the true religion and professors thereof in all places, especially in these three kingdoms, ever since the reformation of religion; and how much their rage, power and presumption are of late, and at this time increased and exercised, whereof the deplorable estate of the Church and kingdom of Ireland, the distressed estate of the Church and kingdom of England, and the dangerous estate of the Church and kingdom of Scotland, are present and public testimonies: we have (now at last) after other means of supplication, remonstrance, protestations and sufferings, for the preservation of ourselves and our religion from utter ruin and destruction, according to the commendable practice of these kingdoms in former times, and the example of God's people in other nations, after mature deliberation, resolved and determined to enter into a mutual and solemn league and covenant, wherein we all subscribe, and each one of us for himself, with our hands lifted up to the most high God, do swear,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 귀족들, 젠트리, 시민, 버지스(burgesses, 세금을 내는 자유농민), 복음 사역자들 그리고 한 왕의 통치에 있고 하나님의 섭리에 있고 한 개혁된 종교를 소유하기 원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왕국의 모든 관료들입니다. 개혁된 종교는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진보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국왕 폐하와 관료의 명예와 번영 그리고 참된 공적 자유, 왕국의 안전과 평화에는 모든 개인의 사사로운 조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 왕국에 하나님의 원수들이 시도하고 실천하는 반역과 피의 음모, 계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항해서 참된 종교와 가르침을 모든 지역 특별히 세 왕국에 지금부터 개혁된 종교를 확립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들의 악행에 대한 분노, 압박 그리고 추정은 너무나 심각합니다. 아일랜드 왕국과 교회의 개탄스러움, 잉글랜드 왕국과 교회의 침체된 상태, 스코틀랜드 왕국과 교회의 위험한 상태가 현재 우리의 상태임이 공적 증언입니다.
우리는 (결국) 지난 시절에 왕국의 인증된 관행을 따라서 우리의 종교에 대한 파괴와 파멸에 대항해서 보존하기 위해서, 항의, 저항 그리고 고통을 감내하는 충분한 모든 수단을 마련할 것입니다. 따라서 세 왕국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충분한 심사한 뒤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 상호 엄숙한 동맹과 언약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명하고 우리 각각은 우리 손을 들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맹세하였습니다.
I. That we shall sincerely, really and constantly, through the grace of God, endeavour in our several places and callings, the preservation of the reformed religion in the Church of Scotland, in doctrine, worship, discipline and government, against our common enemies; the reformation of religion in the kingdoms of England and Ireland, in doctrine, worship, discipline and government, according to the Word of God, and the example of the best reformed Churches; and we shall endeavour to bring the Churches of God in the three kingdoms to the nearest conjunction and uniformity in religion, confession of faith, form of Church government, directory for worship and catechising, that we, and our posterity after us, may, as brethren, live in faith and love, and the Lord may delight to dwell in the midst of us.
첫째, 우리는 성실하고 실재적이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처한 각 위치와 부르신 곳에서 힘쓸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 개혁된 종교의 보존 즉 교리, 예배, 교회질서 그리고 통치에 반대되는 우리의 공동의 적들에 대항할 것입니다. 또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의 종교 개혁, 교회질서, 통치가 개혁된 교회의 최상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세 왕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은 가장 근접하게 연결하고, 종교를 일치시키며, 믿음의 고백을 만들며, 교회 통치의 형태, 예배와 요리문답을 위한 교범을 만들 것을 힘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뒤의 후손들, 믿음과 사랑으로 사는 형제들에게 전수하는 것, 주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II. That we shall in like manner, without respect of persons, endeavour the extirpation of Popery, prelacy (that is, Church government by Archbishops, Bishops, their Chancellors and Commissaries, Deans, Deans and Chapters, Archdeacons, and all other ecclesiastical officers depending on that hierarchy), superstition, heresy, schism, profaneness, and whatsoever shall be found to be contrary to sound doctrine and the power of godliness, lest we partake in other men's sins, and thereby be in danger to receive of their plagues; and that the Lord may be one, and His name one in the three kingdoms.
둘째, 우리는 사람에 대한 존경이 없고, 교황주의를 근절함에 힘씀(즉 교회를 대주교, 주교 그리고 주교의 종교법 고문관, 수석대표, 대성당 주임사제, 지역 주임사제와 교구 사제단, 부주교, 그리고 계급주의에 근거한 모든 교회적 직분), 우상숭배, 이단, 분파주의, 신성 모독적 불경함, 그리고 건전한 교리와 경건의 능력에 반대되는 것으로 밝혀지는 모든 것,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가 참가하는 것을 없이하여, 그들만 재앙을 받을 위험에서 처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한 분이시고, 그 이름이 세 왕국에서 하나입니다.
III. We shall with the same sincerity, reality and constancy, in our several vocations, endeavour with our estates and lives mutually to preserve the rights and privileges of the Parliaments, and the liberties of the kingdoms, and to preserve and defend the King's Majesty's person and authority, in the preservation and defence of the true religion and liberties of the kingdoms, that the world may bear witness with our consciences of our loyalty, and that we have no thoughts or intentions to diminish His Majesty's just power and greatness.
셋째, 우리는 동일한 성실함, 실재, 지속성으로 우리 각각의 소명을 따라 우리의 영토에 세 왕국의 자유, 의회의 권리와 특권을 보존하는 것을 서로 협력하며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종교의 변호와 보존을 위해서 왕의 권위와 인격과 권위를 변호하고 방어합니다. 세계는 우리의 충성된 양심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국왕의 권능과 위대함에 대해서 헤칠 의도나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IV. We shall also with all faithfulness endeavour the discovery of all such as have been or shall be incendiaries, malignants or evil instruments, by hindering the reformation of religion, dividing the King from his people, or one of the kingdoms from another, or making any faction or parties amongst the people, contrary to the league and covenant, that they may be brought to public trial and receive condign punishment, as the degree of their offences shall require or deserve, or the supreme judicatories of both kingdoms respectively, or others having power from them for that effect, shall judge convenient.
넷째, 우리는 또한 왕에서 백성을 분리시키는 행위, 종교 개혁을 방해하는 악독하거나 패악한 방법, 선동 혹 다른 모든 유사한 행동을 색출하는데 충성되게 전력할 것입니다. 혹은 한 왕국이 주도하거나, 국민들 사이를 분파시키고 분열시키는 어떤 행위, 동맹과 언약에 반대되는 것은 공적 재판에 회부되어 합당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처벌 방법은 각 왕국의 최고 재판소 혹은 요청과 합리적인 심판의 수준에 따를 것입니다. 법적 권능을 가진 사람들은 각 효력에 따라서 법적 편이성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V. And whereas the happiness of a blessed peace between these kingdoms, denied in former times to our progenitors, is by the good providence of God granted to us, and hath been lately concluded and settled by both Parliaments: we shall each one of us, according to our places and interest, endeavour that they may remain conjoined in a firm peace and union to all posterity, and that justice may be done upon the wilful opposers thereof, in manner expressed in the precedent articles.
다섯째, 우리 조상은 과거에 우리 왕국들에 있는 행복과 복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의회에서 의해서 최근에 결론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각자의 위치와 관심을 따라서, 우리 모든 후손들에게 확고한 평화에 결속이 유지될 수 있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작성된 문서들에서 표현된 방법들에 대해서는 의지를 갖고 통제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VI. We shall also, according to our places and callings, in this common cause of religion, liberty and peace of the kingdom, assist and defend all those that enter into this league and covenant, in the maintaining and pursuing thereof; and shall not suffer ourselves, directly or indirectly, by whatsoever combination, persuasion or terror, to be divided and withdrawn from this blessed union and conjunction, whether to make defection to the contrary part, or give ourselves to a detestable indifferency or neutrality in this cause, which so much concerneth the glory of God, the good of the kingdoms, and the honour of the King; but shall all the days of our lives zealously and constantly continue therein, against all opposition, and promote the same according to our power, against all lets and impediments whatsoever; and what we are not able ourselves to suppress or overcome we shall reveal and make known, that it may be timely prevented or removed: all which we shall do as in the sight of God.
여섯째, 우리는 왕국의 평화, 자유, 종교의 공동 명분에서 우리가 있는 장소와 부름을 따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맹과 언약을 유지하고 추구하기 위해서 모든 지원과 지지를 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명분에 중립적이거나 혐오스러운 무관심, 반대하는 견해로 변절하는 것, 복된 연합과 협력에서 이탈하여 분리하는 것, 어떤 결합이나 설득 혹은 테러로 인해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고통 받지 않을 것(갈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 왕국의 유익, 국왕의 명예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현세에 유익만을 열성적이고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명백하게 반대합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우리의 능력을 따라서 모든 장애에 전력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압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계시된 말씀과 지식,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시대에 저항하여 제거할 것입니다.
And because these kingdoms are guilty of many sins and provocations against God, and His Son Jesus Christ, as is too manifest by our present distresses and dangers, the fruits thereof: we profess and declare, before God and the world, our unfeigned desire to be humbled for our own sins, and for the sins of these kingdoms; especially that we have not as we ought valued the inestimable benefit of the Gospel; that we have not laboured for the purity and power thereof; and that we have not endeavoured to receive Christ in our hearts, nor to walk worthy of Him in our lives, which are the causes of other sins and transgressions so much abounding amongst us; and our true and unfeigned purpose, desire and endeavour, for ourselves and all others under our power and charge, both in public and in private, in all duties we owe to God and man, to amend our lives, and each one to go before another in the example of a real reformation, that the Lord may turn away His wrath and heavy indignation, and establish these Churches and kingdoms in truth and peace. And this covenant we make in the presence of Almighty God, the Searcher of all hearts, with a true intention to perform the same, as we shall answer at that Great Day when the secrets of all hearts shall be disclosed: most humbly beseeching the Lord to strengthen us by His Holy Spirit for this end, and to bless our desires and proceedings with such success as may be a deliverance and safety to His people, and encouragement to the Christian Churches groaning under or in danger of the yoke of Anti-christian tyranny, to join in the same or like association and covenant, to the glory of God, the enlargement of the kingdom of Jesus Christ, and the peace and tranquillity of Christian kingdoms and commonwealths.
왜냐하면 세 왕국은 하나님께 많은 죄와 반역의 죄책(유죄)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재 억압되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과, 우리는 우리의 죄와 세 왕국의 죄를 벗어 버리기 위해서 겸손하기 위해서 꾸밈없는 열정으로 하나님과 세계 앞에서 고백하고 선언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복음의 유익을 중요하게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순결과 능력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려고 힘쓰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각종 죄와 범죄가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참되고 순수한 목적, 열정 그리고 힘씀으로 우리의 모든 능력과 의무를 다하고, 공적과 사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든 의무를 다하여, 우리의 삶을 개정할 것이며, 참된 개혁의 모범으로 각각 나아갈 것입니다. 주께서 분노와 엄중한 진노를 돌이키셔서 교회와 왕국에 진리와 평화가 세워지길 기원합니다.
엄숙 동맹과 언약(1643)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개혁된 교회(국교회가 아닌)가 확립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엄숙 동맹과 언약(1643)을 파악하여 이 “언약을 누가 깼는가?”에 대해서 파악하려고 했다. 그런데 엄숙 동맹과 언약에서는 왕정유지, 왕의 명예와 존중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1649년에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했다. 그것은 엄숙 동맹과 언약을 준수하지 않은 것이다. 1651년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엄숙 동맹과 언약에 선서하며 왕으로 즉위했고, 1651년 크롬웰에게 패배하고 프랑스로 네덜란드로 도피했다. 1660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찰스 2세는 1661년 공식적으로 엄숙 동맹과 언약에 배치되는 법(The Act Recissory)을 제정함으로 폐지시켰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엄숙 동맹과 언약에 거부하는 세력은 있었다.
언약서에 서명한 비국교도인 크롬웰 진영에서 지키지 않았고(국왕을 처형함), 국교도인 찰스 2세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영국(UK)는 로마 카톨릭과 국교회(주교제도와 계급주의)에서 개혁된 한 종교를 세우지 못했고, 국교회, 장로파를 기본으로 다양한 종파들이 공존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명예혁명 이후로 풍미하는 합리주의로 교회가 허물어졌고, 그 위에 이슬람 세력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프랑스는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년)을 퐁텐플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년)으로 폐기하여 로마 교황주의로 회귀했고, 결국 종교자유국가가 되었다. 영국은 엄숙 동맹과 언약(1643)으로 한 개혁된 종교를 확립하려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작성했지만, 크롬웰, 찰스 2세 등이 준수하지 않고 파기함으로 국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자유국가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유럽에는 이슬람 확장이 진행되고 있고, 교회는 쇄락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스코틀랜드 장로파를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탐구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언약도)들은 엄숙 동맹과 언약에 대한 서약을 지키려고 끝까지 노력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는 누구도 하지 못하고 않는다. 다만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류하는가? 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1625년 3월 27일, 제임스 1세 사후(死後),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Ⅰ, 1600/재위1625-1649)가 왕좌에 즉위했다. 우리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장로교를 거부하고 박해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1603년 잉글랜드 제임스 I세로 통합왕이 되었을 때도 그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 1603년)에 의해서 진행한 흠정(欽定) 성경 번역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15살의 프랑스 앙리 4세(Henri IV, 1553-1610)의 딸, 로마교회 신자인 앙리에트 마리(Henrietta Maria of France, 1609-1669)와 6월 13일에 혼인했다. 마리는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될 때, 두 아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보존하여 복구할 수 있게 했다.
1605년 로마 교황주의자인 로버트 개츠비(Robert Catesby, 1572-1605)를 비롯한 공모자들이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를 폭발로 암살을 모의했는데 실패했다(화약음모사건, The Gunpowder Plot, 예수회 역모라는 의견도 있음). 이로 인해서 잉글랜드에서 로마 교황주의에 대한 향수는 사라졌다.
찰스 1세는 자기 아버지보다 더 강력하게 주교주의 국교회(Anglican Church)를 기반으로 왕권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세수 정책과 외교 정책(프랑스와 스페인과 전쟁을 일으킴)에 실패하면서 1628년 의회의 승인으로 과세, 출병해야 하는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왕권과 국교회를 강화시키고 의회를 무시하면서 내전(內戰)까지 불사했다. 잉글랜드에서 1215년 존 왕이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하면서, 400여 년 동안 왕과 의회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출신 왕들은 잉글랜드의 전통을 잘 알지 못하고 왕권신수설을 과도하게 주장한 것이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에 집착한 대표적인 왕이다. 찰스 1세의 왕권신수설의 지지에는 버킹엄 공작(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 1592-1628)의 역할이 지대했다. 혼인을 주도했고, 스페인 파병, 프랑스 위그노 지원 등을 주도했다. 모두 실패했고 찰스 1세의 멸망의 근원이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에게 1628년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을 제출했다. 권리청원에 서명한 찰스 1세는 1629년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제 정치를 유지했다.
국교회를 강화하기 위해서 찰스 1세는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 1573-1645)를 1628년 런던 대주교로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세우면서 진행했다. 라우드는 로마 교회와 화해를 추구하며 청교도를 박멸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제임스 1세 시절, 1618년 도르트 회의에 참석하여 항론파에 찬동하기도 했다. 찰스 1세와 라우드의 박해가 강화되자 1630년경에 분리파 1,000여명은 식민지로 도피했고, 1640년에 2,000여명이 줄이어 도피했다(Moore: 2018, 71).
스코틀랜드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의 사역으로 1574년부터 1596년까지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황금기를 가졌다. 1578년에 제2치리서를 작성했고, 1592년 스코틀랜드에 장로교가 국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국왕으로 간 제임스 I세의 반격으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1610년에 제 1차 주교제도를 부활시켜서 스코틀랜드는 장로 제도와 주교 제도가 공존하는 형태가 되었다. 1618년 퍼스(Perth)시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퍼스 5개 조항’(Five Articles of Perth)을 통과함으로써 감독 제도를 전환시켰다.
1636년 찰스 1세는 라우드와 일련의 국교회 사제들과 함께 퍼스의 5조항(Five Articles of Perth)에 더 강화된 <규범집>(Book of Canons)을 작성하여 장로교회의 모습을 제거하려고 했다. 1637년에 예배의식서인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을 작성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교회에 도입시키려 했다. 라우드는 강단 설교를 금지하고 의식, 의복을 통일시키려고 했다.
이 때문에서 잉글랜드에서는 불만이 고조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 결정에 강력하게 반대한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이다. 찰스 1세는 주교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재도입시키려고 런던 주교인 라우드를 통해서 시도했다.
1637년 7월 23일 새로 작성한 예식서를 따라, 존 낙스(John Knox, 1514-1572)가 사역했고(1560-1572) 무덤이 있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dral)에서 미사를 진행했다. 그 때에 행사에 참석한 제니 게디스(Jenny Geddes, 1600-1660)라는 한 여인이 일어나서 미사를 거부했다. “Deil colic the wame o’ ye, fause thief; daur ye say Mass in my lug?”(마귀가 당신의 배 속에 가득한, 거짓말 하는 도둑, 어떻게 감히 내 귀에 미사가 들리게 하는가?, Devil cause you severe pain and flatulent distension of your abdomen, false thief: dare you say the Mass in my ear?)를 외치면서 사제를 향하여 의자(스툴, Stool)를 집어던짐으로써(그 의자는 아직도 세인트 자일스 교회 안에 보관되어 있음), 저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제니 게디스의 스툴에서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인 존 낙스, 앤드류 멜빌, 사무엘 러더포드는 국왕을 향해서 거룩한 복음과 주의 권위를 담대하게 선포했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은 국왕도 복음 앞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주의 사자(使者)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 분리주의자들은 국왕의 통치와 간섭을 벗어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식민지로 이주했다. 분리파들은 왕이 없는 “언덕 위에 도시(a city upon a hill)”를 꿈꾸며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1606년 잉글랜드 105명이 이주하여, 1607년 버니지아 주에 최초 도시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설했다. 1620년 9월 102명이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하여 11월에 플리머스(Plymouth Colony)를 출발해서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에 상륙했다. 상륙하기 전 41명이 메이플라워 서약(The Mayflower Compact)에 서명했다.
1625년 찰스 1세는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왕은 청교도들의 식민지 이주를 특허장(Charter)을 주며 허용했는데, 반대파를 제거하는 암묵적인 장려 행위로 분석하기도 한다. 존 윈스럽(John Winthrop, 1588-1649, 식민지 초대총독)은 1630년 1,000여명이 17척의 배로 식민지로 향했다. 그는 배 위에서 "우리는 언덕 위의 도시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1637년 세인트 자일스 교회당에서 시작된 스코틀랜드 장로파의 저항 운동은 1638년 2월 28일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당(Greyfriars Kirk)에 모여 “국가 언약(National Covenant)” 문서에 서약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파는 언약도(the Covenanters)라고 불리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에 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참가자들이 언약(covenant) 문장에 서약한 것이다.
언약도에 행위에 대해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 왕은 반역으로 규정했고 50년(1638-1688년)동안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이 기간에 1만 800여 명이 순교로 언약을 지켰다. 1688년까지 50년을 “언약파의 시기”라고 부른다(이상규: 1979, 31). 이들이 지킨 신앙이 스코틀랜드 장로파였는데, 1688년 명예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로 세계정신은 신정국가 수립이 불가한 정교분리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만유의 주이심임을 고백하고 실현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1638년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거룩한 왕국을 구현하기 위해서 생명을 건 언약을 체결했고, 무력 저항을 선택했다. 그들의 바르고 헌신적인 믿음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고, 그들의 희생 위에 미국과 대한민국의 장로교회가 있다.
장로파들이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행동은 세계교회사에서 찾을 수 없다. 프랑스 위그노는 30년 전쟁에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년)을 맺었지만, 루이 14세는 한 왕에 한 믿음(un roi, une foi)이라는 정책으로 퐁텐플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년)을 발효시켜 낭트 칙령을 해체하고 위그노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이에 위그노들은 도피로 본래 위그노 신학은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은 프랑스 신앙고백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프랑스 교황주의가 실행한 성 바돌로매 학살 사건(St. Bartholomew's Day Massacre, 1572년)은 유럽인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퐁텐플로 칙령으로 언약을 무단 파기하는 것과 무자비한 학살은 유럽 지성인이 감당할 수 없었다. 퐁텐블로 칙령으로 20만-1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위그노가 프랑스를 떠났다. 루이 14세는 1686년 1월 17일 “80만-90만 명의 위그노 중에서 지금 프랑스에 남은 자는 1000-15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있다. 결국 프랑스 혁명(1789-1799)으로 프랑스는 왕과 국교를 상실하고 말았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면서 혁명 공화국은 종결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국가 언약에 대해서 찰스 1세는 해밀턴(Hamilton) 후작을 특사를 보내 조정하려고 총회 개최를 명령했다. 1638년 11월 21일 글래스고 대교회당에서 18년 만에 총회가 개최되었다. 240명의 총대가 모였고 해밀턴이 연설했지만, 총회장에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 서기에 존스톤이 선출되었다. 핸더슨은 잉글랜드 국교회 주교의 종으로 살기보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종으로 죽기를 소망한다고 외쳤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가 작성한 <공동기도서>를 폐지하고, 주교제도를 주장하는 주교들을 모두 파문시켰다(김중락: 2017, 236-237).
1639년 찰스 1세는 주교제도 폐지한 스코틀랜드를 명분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정복하려고 했고, 언약파도 무력저항을 선언했다. 김중락은 언약파들이 탁월한 전략 전술과 프로파간다 기술로 임전했다고 설명했다(김중락: 2017, 240). 이 때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더 핸더슨과 사무엘 루터포드 같은 목사들이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부당한 압박에 대해서 무장 봉기를 감행했다.
스코틀랜드에는 대륙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군인들 제임스 그래엄(James Graham, 몬트로즈 후작, 1612-1650)과 알렉산더 레슬리(Alexander Leslie, 리벤 백작, 1582-1661)가 돌아왔는데, 언약도와 함께 행동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캠벨(Campbell) 가문의 좌장이자 최고 귀족인 아치볼드 캠벨(Archibald Campbell, 아르가일 후작, 1607-1661)까지 언약도에 가세했다. 잉글랜드 분리파들은 부당한 압박에 대해서 식민지로 이주해서 자기들의 이상향인 언덕 위의 도시를 건립하려고 했다. 제네바의 칼빈은 시(市)와 주변 칸톤(Canton)들과 외교 관계에 능통한 경륜이 있었고,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은 군 전략을 운용할 수 있는 경륜이 있었다.
1, 2차 두 차례에 걸친 주교 전쟁(Bishop's War)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승리로 끝났다(1, 2차 주교전쟁에 대해서 김중락의 스코틀랜드 종교개사(흑곰북스)에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찰스 왕은 복수의 칼을 갈면서 후퇴해야 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이 잉글랜드에 활용한 프로파간다의 내용은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주입시킨 것이었다. 결국 스코틀랜드 굴복을 추진했던 왕과 의회는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1639년 1차 주교 전쟁은 5주 만에 종결되고 버윅에서 평화협정(Treaty of Berwick)을 체결했다. 그런데 1640년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했다가 3주 만에 해산시켰다(단기의회, Short Parliament). 그리고 2차 주교 전쟁을 일으켰으나 금방 패배하고 리폰 조약으로 종결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I세에게 850만 파운드를 전쟁배상금으로 요구했고, 왕은 어쩔 수 없이 1640년 11월에 의회를 다시 소집해야 했다.
그런데 단기의회와 달리 의회가 종결되지 않고 1660년까지 진행되었다(장기의회, Long Parliament). 1640년 개회된 의회는 1641년에 강제력을 발동시켜 캔터베리 대주교 라우드와 재정장관 스트래트포드(Stratford) 백작을 반역 행위로 구금시켰다. 스트래트포드는 왕명(王命)을 수행해서 죄가 없는데, 스트래트포드의 위력을 두려워한 의회파는 반역자에게 재판이 필요 없다(개인권리를 무시함)는 사권박탈법(Bill of attainer)으로 처형시켰다. 왕은 가장 중요한 두 신복을 잃었다.
찰스 I세는 스페인, 프랑스 국외 전쟁에도 개입해서 재정을 낭비했다. 제임스 I 세는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충분하나,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미심쩍은 재정 수준”을 잘 인식한 반면, 찰스 I 세는 무모하게 전쟁을 수행했다. 결국 1628년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 제출한 의회를 해산시키고, 1629년 4월에는 프랑스와, 1630년에는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공식적 종료했다.
그런데 1630-1640년까지 주교 전쟁을 진행하다가 결국 왕의 목숨뿐만 아니라 왕조까지 상실될 위기를 맞이했다. 찰스 1세는 주교 제도를 위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의 청교도를 박해했고, 켄터베리 대주교는 구교로 회귀하기 위해서 왕과 결탁했다. 로마 교회의 예수회는 끊임없이 잉글랜드를 구교로 돌이키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17세기 브리튼 섬(Britain)은 신앙, 정치, 사상에서 너무나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장기의회는 찰스 1세의 요구에 순순히 순종하지 않았다.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청교도 신앙을 보장하여 영국교회의 주교제도의 폐지 도입을 요구했다(이상규: 1979, 38). 왕은 왕권신수설을 포기하지 않았고, 의회파도 법치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왕은 의회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1641년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 국교도들이 3,000여명이 살해되었다. 1641년 12월 의회는 대항의서(Great Remonstrance)를 제출하여 군대 파견은 동의하는데, 군 지휘권은 왕이 아닌 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여 왕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대항의서가 찬성 159표, 반대 148표로 가결되었다.
찰스 I세는 149표에 희망을 갖고 반격을 개시했다. 왕은 급히 자기를 지지하는 북부 요크 지역으로 도피했다. 1642년 8월 왕당파(Cavaliers, 기사당)와 의회파(Roundheads, 원두당) 사이에 1차 내전이 시작되었다. 에지힐 전투(Battle of Edgehill)를 시작으로 내전이 발생하고 말았다. 2년 동안 왕당파는 공격을 감행했다.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한 힘을 보였다. 왕당파는 정규군들이었고 의회파는 시민군들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의회파는 귀족, 젠틀맨의 일부와 자유농민 ·상공업자들이었고, 왕당파는 귀족, 젠틀맨의 대부분과 소작농이었다(젠트리,Gentry는 귀족은 아니지만 가문 휘장을 사용할 수 있고, 토지나 자본을 소유한 상인, 지주, 법률가 등의 중산 계급이었다). 의회파는 당시 발흥하는 모직물에 종사하는 신흥 젠틀맨들이었다. 잉글랜드 의회에는 의회파가 다수였지만 군대는 없었다. 왕당파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민군으로 급조했다.
1643년 왕당파 군대는 런던을 향해 진공 추진했다. 런던 봉쇄를 목표했는데 내부 분열(수도인 런던 침공에 대한 거부)과 지엽적인 패배 증가로 제동이 걸렸다. 1643년 후반기부터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신형군(New Model Army)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왕당파 군대는 퇴각해야 했다. 그러나 전황(戰況)은 어느 쪽의 우위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찰스 I세가 아일랜드와 협정을 맺으면서 잉글랜드에서 민심이 완전히 이반되었고,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와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1643년 잉글랜드 의회파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을 체결했다. 스코틀랜드의 관심은 스코틀랜드에서 주교 제도를 완전히 철폐시키는 것이었고, 잉글랜드는 왕당파를 척결해서 종교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두 집단(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잉글랜드 청교도파)이 한 목표 “예수 그리스도 나라의 확장”으로 동맹과 언약을 체결했지만 함께 완수하지 못할 협약이었다(同床異夢).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한 국가(United)가 되는 것(1707년)에 가깝게 되어가는 현상이 전개되었다.
1645년 왕당파와 의회파는 브리튼 섬 중부 네이즈비(Naseby)에서 격돌했다. 왕당파는 괴멸했다. 의회파 병사들은 청교도들이었는데, 왕당파 비전투원을 가혹하게 공격했다는 평가가 있다. 1645년 7월 랭포트 전투에서도 의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찰스 1세는 생존한 왕당파 잔여 병력을 모아 전투를 결행했지만 패배했다. 1645년 11월 찰스 1세가 궁정과 사령부가 있는 옥스퍼드로 귀환했는데, 크롬웰의 군대가 1646년 봄 옥스퍼드를 포위 공격했다. 찰스 1세는 4월말쯤 변장하고 2명의 수행인과 옥스퍼드를 빠져나와 5월 5일 스코틀랜드 군대에 투항했다.
1647년 크롬웰에게 지병이 발생했다. 의회는 감독제도에서 장로교 체계로 전환시키고 찰스 I세를 복귀하자고 요구했다. 크롬웰과 독립파들은 반대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 제도를 위계제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의회는 급여 문제 등으로 군대를 해산시켰다. 군대는 해산하지 않고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군대 내부에 수평파(Levellers, 분배파, Diggers)와 독립파가 충돌했다.
1648년 2월 찰스 I세는 잉글랜드 장로파 등과 밀약을 맺고 스코틀랜드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로 진격했다. 왕당파는 포로인 수평파 지도자 존 릴번(John Lilburne)을 석방시키며 분열을 획책했지만 실패했다. 전쟁에도 패배한 찰스 1세는 크롬웰의 포로가 되었다. 왕당파와 장로파는 왕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1648년 12월 크롬웰은 프라이드 대령으로 의회에서 장로파를 색출해서 추방시켰다.
찰스 1세는 1649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1651년 그의 아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 둥지를 잡으려고 했지만 카비스데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동했던 몬드로즈 후작은 처형되었고, 찰스 2세는 1638년 국민 언약과 1643년 엄숙 둥맹과 언약에 서명하면서 1650년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결국 스코틀랜드 의회는 양분되었다. 엄숙 동맹과 언약을 유지하자는 항의자(Protestors)와 크롬웰의 군대를 무산시키려는 결의자들(Resolutioners)로 분열하고 말았다. 총회는 1651년 결의자가 다수가 되었다.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와 잉글랜드 잔유 왕당파와 결속하려고 했지만, 잉글랜드 왕당파는 소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651년 찰스 2세는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에게 격퇴되어 프랑스,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도 저항을 포기하고 잉글랜드 의회에 30석을 보장받고 자치권을 포기해야 했다. 애드윈 니스벳 무어는 이 현상을 영적 패배로 평가했다(무어: 2018, 102).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크롬웰 통치에서 총회가 해산되었지만 집회의 자유는 허락받았다.
크롬웰은 1649년 아일랜드를 잔혹하게 정벌하고, 1653년 스코틀랜드까지 복속시켰다. 그리고 영국의 유일한 성문법인 통치장전(Instrument of Government)을 제정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정식명칭,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자리에 올랐다. 크롬웰의 무시무시한 독재정치로 청교도 시대가 도래할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내부 분열(수평파), 민심이반, 후계자 지도력 결핍 등으로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1660년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의 왕정복고되면서 즉각 국교회, 주교제도가 부활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까지 국교회를 거부하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심각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명예혁명 후 1690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1653년 이후 폐지에서 재건되었다.
[참고 1] 참고로 정성구 박사가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고백서 복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 정성구 박사는 1638년 1200여 명의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이 작성하고 대표자들이 서명한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고백과 서명’(가로 70cm X 세로 90cm)을 공개했다.
[참고 2] 1776년 식민지 개척자들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이주했는데 75%가 청교도였다. 미국 내 교파별 교인분포가 1776년 회중교회(20.4%), 장로교(19), 침례교(16.9), 감독교회(15.7), 감리교(2.5), 로마 가톨릭교(1.8)로 분포했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 동부 지역 13주는 영국을 향해서 독립선언을 선포했다. 1850년에는 감리교(34.2), 침례교(20.5), 로마 가톨릭교(13.9), 장로교(11.6), 회중교회(4.0), 감독교회(3.5)의 순으로 나타났다(조병하).
1768년에 프린스턴 대학에 새 총장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 위더스푼(1723-1794)은 상식철학을 들여왔고, 1812년 설립된 장로교신학교의 제1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한 세기 이상 영향을 끼쳤다.
[참고 3] 수평파 운동(水平派, Leveller, 1649-1649)의 첫째는 급진적 청교도주의(Radical Puritanism)이다. 수평파는 재세례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평파는 성도나 죄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는 평등론을 채택했다. 재세례파와 연관된 급진적 청교도주의는 수평파, 디거파(경제적 평등주의), 퀘이커파(Quakerism)이 있다. 수평파 지도자였던 릴번(J. Lilburne)도 제세례파 신도였다. 1640년대 예정설을 신봉하는 분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5왕국파(Firth Monarchist), 대기파(Seekers), 머글튼파(Muggletoniansts)등이다. 이들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했는데, 수평파와 디거스는 그런 의식을 거부했다. 수평파는 성경을 평등의 교본으로 보고, 칼빈주이와 로마 교황주의를 배격했다. 둘째는 신고전적 자연법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도덕적 절대성이라는 기본지식이 있다고 믿었다.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 놓은 법이고, 이성에 의해서 만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수평파는 자연법과 신법을 불가분한 것으로 보았다. 수평파는 자연법, 신법, 이성은 같은 것으로 인식했다. 자연법은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3-1600),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 헨리 파커(Henry Parker, 1604-1652) 등의 법학자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1647년 릴번(Lilburne)은 자연법을 이성과 같은 것으로 보았고, 천부인권과 평등을 주장했다(인민동의설, 인민주권설). 셋째는 영국사와 영국 법률에 관한 일련의 사상이다. 조상들이 잃어버린 자유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었다(노르만과 앵글로색슨의 갈등).
수평파 운동은 크롬웰의 독립파에 의해서 좌절되었지만, 프랑스 혁명과 19세기 영국 챠티스트(Chartist)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의회파에 합류했던 수평파는 1647년 독립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1652년 릴번은 네덜란드로 추방되었는데, 1653년에 돌아와 체포되어 1657년 도버 성에 사망했다. 수평파 지도자는 존 릴번(John Lilburn 1614-1657), 리차드 오버튼(Richard Overtone 1631-1664), 월리암 월윈(William Walwyn 1600-1680) 등이었다. (*)
8강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통해 본격적으로 돌입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1520년대 루터교회 설교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도 잉글랜드의 위클리프의 후예인 로라드파(Lollards)의 영향이 있었다. 루터의 저서는 특별히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에서 애독되었다. 강력한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던 스코틀랜드 의회는 1525년 종교개혁 사상을 “추하고 악한 교훈”이라고 비난하며 그 전파와 확산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대륙으로부터 프로테스탄트 서적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년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영역한 신약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었다.
개혁 사상에 의한 최초의 순교자는 패트릭 헤밀톤(Patrick Hamilton, 1504?-28)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계명성이라고 호칭되는 첫 순교자이다. 종교개혁의 시작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공통적인 모습이다. 아쉽게도 종교개혁의 순교자들은 타 종교나 독재정권이 아닌 교회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했고 1520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 시절에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류에서 대학의 교수로 조용히 활동했다. 그는 음악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개혁신앙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527년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1)으로부터 이단 혐의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한 해밀턴은 마르부르크(Marburg)로 탈출하여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 등과 교제하면서 루터파 신앙에 몰입했다. 그는 “루터파의 신앙에 관한 짤막한 논문”(Loci Communes Theologici: 신학의 일반적 장소, 1526년)을 작성했다. 이것은 틴데일의 친구인 존 프리스(John Frith)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개혁의 열정에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 사역을 수행했다.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류로 오라는 대주교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자 체포되어 1528년 2월 27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4세였다. 해밀턴은 스코틀랜드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었고, 그 복음으로 스코틀랜드를 개혁하려다가 순교되었다. 해밀턴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30여 년간 20여 명에 달하는 개혁파들이 화형당했다.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는 1538년 고전어에서 헬라어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소환되자 잉글랜드에서 스위스로 망명했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은 위샤트는 스위스의 첫 신앙고백서인 〈제1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영역했다. 이후 1544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신앙을 전하는 한편, 로마 카톨릭교회 당국의 교권 남용을 비판했다. 1545년 고향에서 공증인과 가정교사 일을 하고 있던 존 낙스가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고 개혁파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시민들 사이에 개혁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 당국에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위샤트는 이러한 개혁운동의 주동으로 지목되어 1546년 1월 대주교의 조카인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으며 1546년 3월 1일 세인트앤드류에서 33세에 화형에 처해졌다. 존 낙스는 패트릭 해밀턴에 대해서는 그저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조지 위샤트는 직접 만났고 그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다고 전해진다. 패트릭 해밀턴과 조지 위샤트의 순교는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년)의 인생에서 진리를 향한 열망을 더 키워주었고, 결국 그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로 살아가도록 그의 삶을 이끌었다.
위샤트의 화형에 반기를 들은 시민들이 봉기했다. 억울하게 죽은 위샤트를 위한 피의 보복을 해야 한다거나 생명은 생명으로 갚자는 맹세들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결국 1546년 5월 29일 봉기한 시위대는 위샤트의 화형을 명령한 비튼 추기경의 관저를 급습해 살해했다. 비튼 추기경을 살해한 시위대는 세인트앤드류 성을 점령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후 세인트앤드류는 개혁파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1547년 4월 10일 존 낙스 또한 박해를 피해 그가 가르치던 세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세인트엔드류로 들어갔다. 낙스는 그곳 사람들의 요청으로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 설교자로 봉사하며 이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왕정에서 프랑스의 원병을 요청했고, 프랑스 군의 공격에 1547년 7월 말에 함락되었다. 체포된 수비대원 전부는 프랑스로 잡혀가 갤리선의 노예생활을 해야 했고, 존 낙스로 거기에 포함되었다.
1548년(19개월 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6세, 토마스 크랜머의 도움으로 노예선에서 풀려났고, 낙스 일행은 잉글랜드 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1949년 잉글랜드 추밀원(樞密院, Privy Council)은 낙스의 종교개혁 정신을 높이 사서 그를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도시인 버위크의 설교자로 임명했다. 그곳에서 낙스는 예배 개혁과 복음적인 설교를 하며 저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보였다. 1551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6세의 궁정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메리 여왕이 즉위한 직후 잉글랜드는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낙스는 1554년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잠시 머문 후 스위스 제네바로 옮겨갔다. 제네바에는 영어사용자 피난민들이 있었고, 낙스는 피난민 교회에서 목회했다.
제네바에 있는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류, 스터링, 에딘버러, 퍼스 등지에서 개혁교회가 비밀리에 형성돼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555년 은밀히 귀국해 전국을 순회하며 로마 카톨릭의 교직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며 종교개혁 사상을 고취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낙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낙스는 1556년 제네바로 돌아갔다. 기즈의 메리 여왕(Mary of Guise)을 반대하며 종교개혁 추진 동맹인 “Lord of the Congregation”(1557-1560)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귀족과 개혁파 지도자들이 1557년 12월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위하여” 모든 권력, 재산, 생명을 바치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한편, 낙스의 편에 서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혁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제1 스코틀랜드 언약〉(The First Scottish Covenant)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낙스의 귀국을 강력히 촉구했다. 메리 여왕과 갈등관계에 있는 귀족들이 점차 개혁파 신앙으로 합류하게 되어 세력이 강화되었다.
1560년 1월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여왕이 배와 군대를 보내 프랑스 군이 주둔하는 리스를 공격해 함락시키면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자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해 8월 낙스 일행은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해 로마 가톨릭주의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프랑스와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는 등 종교개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교회는 교황의 관할권을 폐기하고, 미사를 금지했다.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오류는 비판하며 개혁했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를 비롯해 윌록(John Willock), 스포티스우드(John Spottiswood), 더글라스(John Douglas), 로우(John Row) 등 6명(Six John)으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작성된 신앙고백서 위에 1561년 12월 5일 낙스와 5명의 목사그리고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 Kirk)를 조직했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인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로얄 마일(Royal Mile)에 위치한 세인트 자일스 교회((St. Giles Cathedral))는 당시 종교개혁의 구심점이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560년에 교황권을 부정했고, 세인트자일스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내려오던 400년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리고 세계 장로교회의 모교회(the Mother Church of World Presbyterianism)가 되었다.
낙스의 종교개혁은 완전한 장로교회 체계는 아니었다. 감독 정치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아버지(the father of Presbyterianism)라고 불리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낙스의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1560년)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면서, 장로 정치 제도가 정착되었다.
앤드류 멜빌이 19세 되던 해인 1564년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셈어 연구에 힘을 쏟아 탁월한 동양어 학자로 인정받았다. 아드리아누스 투르네부스(Adrianus Turnebus)에게서 헬라어를 더 배우고, 피터 라무스(Petrus Ramus)의 강의를 듣고, 푸아티에(Poitiers)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1566), 21살의 나이에 성마르세온학교(the college of St Marceon)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3년을 가르친 후에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개신교 지역인 스위스의 제네바로 가서 데오드르 베자의 제네바아카데미의 인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 가르치면서도 그는 동양어 연구의 힘을 써서 동료 교수인 코넬리우스 베트람 교수(Cornelius Bertram)에게서 시리아어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 학장(Principal)으로 사역했다. 그리고 1575년에는 애버딘 대학교를 새롭게 하는 일도 돕게 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제2치리서>를 작성하고, 1578년 총회장으로 섬기던 때에 <제2치리서>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채택되었다.2)
앤드류 멜빌과 제임스 6세(1세):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1581년 제임스 6세가 성년이 되자, 1560년에 채택한 신앙고백서 지지를 선언하는 왕의 언약(King's Covenant)에 서명했다. 제임스 6세의 유년 가정교사는 조지 뷰캐넌(George Buchanan, 1506-1582)이었지만, 합당한 기독교적 가치가 아닌 세속 왕의 권위를 앞세웠다.
앤드류 멜빌은 두 왕국 체계를 확립했다. 두 왕국 이론이 무엇인지는 1582년 멜빌 목사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후에 잉글랜드 제임스 1세)에게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를 간섭하는 왕을 향해서 멜빌이 한 말이다.
“전하, 이 말을 꼭 해야 하겠습니다. 이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왕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회입니다. 스코틀랜드 국왕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며 단지 한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Melville: 2010, 371)1)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主)이심을 실현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는 사회를 추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1583년 제임스 6세가 루스벤 성에서 탈출하면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제임스 6세는 반장로교주의자인 아란(Arran) 백작을 중심으로 언약도에 대한 거부를 진행했다. 1584년 통일령(the Black Act)와 의회 결의를 통해서, 집회 자유를 빼앗고 주교제도로 회귀했다(Moore: 2018, 63, 김중락: 2017, 190).
그런데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패배하자 다시 장로교를 지지하는 세력이 증가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왕이 제정한 통일령을 폐지하고 장로교 질서로 회복했다(Moore: 2018, 63). 1592년 황금법(김중락: 2017, 193)으로 암흑법을 무효화시켜 장로교 제도의 근간을 확립했다.
그런데 1596년 제임스 6세는 린리스코우 법령(Act of Linlithgow)으로 교회 통제를 강화시켰다(Moore: 2018, 64). 무어(Moore)는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분리주의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을 네덜란드로 도주하도록 만들었다고 제시했다. 그리고 분리주의자, 브라운주의자(Separatists, Brownist)을 “경건한 작은 그룹의 교제는 강조했으나,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경시했다”고 정의했다(Moore: 2018, 64).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사망하고, 1606년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VI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I가 되었다. 제임스 I세는 스코틀랜드 왕과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I세가 스코틀랜드 왕이었기 때문에, 장로 제도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장로파에 대해서 명확하게 거부하고 저항했다.
그런데 제임스의 아내가 교황주의 교도였기 때문에 박해를 피해 이주한 150여명의 교황주의 사제들이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제임스는 주교를 임명하고, 귀족을 매수하면서, 장로교 지도자를 투옥시키고 추방시키며 장로파를 박해했다. 1610년 글래스고우 총회에서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이에 반대하는 멜빌, 존 웰쉬(John Welsh, 1558-1622), 낙스의 조카 등을 투옥시키거나 추방시켰다. 제임스의 행보는 피 흘리며 제거했던 로마 교회를 복구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결국 스코틀랜드 장로파들은 왕의 법에 불복종을 선언했다. 1621년 퍼스 5개 조항(Five Articles of Perth)을 스코틀랜드 의회가 비준했다. 5 조항은 성찬에 무릎 꿇기, 개인 성찬수행, 비공식 세례 거행가능, 견진성사, 축일(부활절, 성탄절)준수 등이었다. 왕이 작성한 5개 조항은 멜빌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제2 치리서’를 거부하는 내용이다. 제임스 1세의 강력한 절대군주(국교회) 강화는 스코틀랜드 장로파를 압박하고, 분리주의자들은 네덜란드로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결과가 되었다.
제임스 1세가 흠정(欽定)으로 성경(KJV)을 번역해서 상당히 유명하지만, 청교도를 박해한 유력한 군주 순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국교회를 “매춘부 엄마”로 불렀다(Moore: 2018, 68). 김중락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에서 가장 큰 문제를 “제임스 6세의 장로교 혐오”로 제시했다(김중락: 2017, 194).
교회 이해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모두 펼쳐진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헨리 8세 때에 로마 교회(교황주의)에서 국교회주의(성공회)로 전환했다. 로마 교회에서 완전 개혁을 추구하던 개혁파는 국교회주의에 대항해서 분리파(적극분리파와 내부분리파)가 있다. 내부분리파는 아직도 국교회에서 낮은 교회(low church)로 유지되고 있다. 적극분리파는 미국으로 이주해서 회중파 교회를 이루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 제도이다. 그 이외에 침례파, 감리교, 구세군 등 무수한 교단이 잉글랜드에서 발생했다.
17세기에 영국에서 발생한 교파를 구분하면, 장로 제도와 로마 교회, 국교회, 분리주의(회중파), 침례파이다. 감리교는 국교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사후에 형성되었다. 여러 종파가 발생된 주요 원인은 교회의 주권(주인)에 대한 이해와 주인임을 고백하는 방식이다. 로마 교회는 교황(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이겠지만), 국교회는 국왕이다.
그리고 다른 종파들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장로파는 하향식이고 회중파는 상향식으로 이해했다. 그 이해는 교회 사역자에 세움에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장로파와 회중파는 교회의 구성원이 거룩을 증진하는 방법, 분별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에서 차이를 보였다. 크게 장로파와 회중파로 구분할 수 있다. 회중파 계열은 침례교, 구세군, 감리교 등이다.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 등은 교회의 주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앙 이룸(혹은 완성) 부분에서 분리된 분파로 분류할 수 있다. 큰 범주로는 분리주의(회중파)로 분류할 수 있다. 장로파는 “구원 이룸” 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함”에 관심을 두었다고 평가한다.
장로파들은 교회를 주 예수께서 세우시고 다스리는 주님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생명을 바쳤다. 국왕은 자신이 교회의 수장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을 앗는 것을 감행했다. 우리는 치열한 교리 논쟁 이전에 교회의 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여 일치를 이룸이 선결되어야 한다. 고대 교회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실체(homoouison)을 고백하면서 신성 이해를 확증하면서 삼위일체를 고백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은 구원 이룸에 대한 논의였다. 루터는 교회와 교황이 주도하는 구원 방식을 거부하고, 구주 예수께 귀결시켰다. 칼빈은 성경 해석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 이룸을 체계화시켰다. 그런데 구원 이룸 도식에 토론을 하면서 다양한 논의를 가져왔고, 그 혼란은 정리하지 못하고 후대로 넘겨 버렸다. 필자는 구원 이룸 도식에 대한 이해도 좋지만 합의에 이룰 수 없음을 인지했다. 그럼으로 합의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도록 협력할 것을 제언한다. 칼빈파는 스위스에서 불링거와 협력했고, 잉글랜드에서 회중파와 협력했다. 다만 회중파가 자체로 사보이선언(The Savoy Declaration, 1658년)을 작성한 것은 그 협력을 깬 것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교회에는 두 에큐메니칼이 있다. 믿음과 직제의 일치로 교회 연합을 이루는 에큐메니칼이 있고, 천상의 주 예수의 다스림을 받은 에큐메니칼이 있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심각하게 교파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유럽의 모든 사상들이(교황주의, 루터파, 칼빈파, 신비주의, 재세례파, 소시니안...) 급속하게 잉글랜드에 유입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총화는 18세기 스코틀랜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회의론(懷疑論, skepticism)으로 종결시켰고, 독일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서 계몽시대의 대여명을 밝혔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1781년)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 Copernican revolution)을 이루었다. 유럽은 1차 대전이 발발하기 까지 예수를 탐구하면서 상상하지 못한 풍요 시대를 경험했다. 칸트 이후에 하이데거와 칼 바르트 이후에 있는 우리시대에, 16-19세기 유럽 사상을 정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금 유럽 지성인들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칼빈, 스코틀랜드 장로파, 네덜란드 개혁파, 미국 장로파와 개혁파, 대한민국 장로파에서 동일한 것이며, 1-4세기 예루살렘과 교부들의 교회와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21세기나 1세기 동일한 주님을 믿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해야 하고 전파해야 한다. 참고로 은사주의 교회들도 사도적 교회를 주장하는데, 그들은 능력 나타남으로 사도적 교회를 주장한다. 장로파는 교회의 주인을 주 예수로 고백함에서 사도적 교회를 지향한다. 사도의 가르침을 전파함에 힘쓴다. 장로파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소홀하거나 망각하면 즉각 능력 나타남으로 변환될 것이다.
멜빌과 제임스 6세의 관계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의 요청을 받고 런던으로 이주해서 잉글랜드 제임스 1세가 되어,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개혁 세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결국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종교적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는 찰스 1세는 매우 강력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국교회주의를 수행했다. 잉글랜드 찰스 1세(스튜어트 왕조)와 스코틀랜드 찰스 1세가 동일인으로 역사의 중첩이 발생한다.
언약도’(Covenanters), 명칭은 자칭과 타칭이 있는데, 그리스도인, 칼빈파, 청교도 등은 타칭이다. 그러나 루터란(Lutheran Church), 언약도는 자칭이다. 언약도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많이 사라졌는데, 스코틀랜드 교회가 강력한 개혁 의식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개혁 사상을 보수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언약도는 찰스 1세가 켄터베리 대주교 라우드가 만든 <기도 예식서>와 <교회 예식서>를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압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되었다. 에딘버러의 성 자일스 교회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세대인 존 낙스와의 인연과 함께,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게 된 언약도 혁명의 발원지이다. 찰스 1세의 정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던 스코틀랜드 전체에, 1637년 7월 23일은 도화선이 불이 붙었다. 그 도화선에 불을 붙힌 사람은 제니 게데스(Jenny Geddes. 1600-1660)라는 여성도였다. 제니는 로얄 마일 길거리에서 소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평범한 여인이었다. 로마 카톨릭적으로 예전을 집전하던 찰스 1세의 파견자를 향해 “거짓으로 가득찬 도둑이여, 악마의 시험을 받아서 구교 성향의 의식 소리를 내 귀에 들리도록 하다니!”라고 외치며 자신이 깔고 앉았던 ‘스툴’(stool, 의자)을 단상으로 던졌다. 제니 게데스의 행동에 예배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스툴을 단상으로 투척하면서 예배당 안은 물론 밖에서도 큰 소동이 벌어졌다. 스코틀랜드는 1638년 2월 28일 에딘버러에 있는 그레이프라이어(Greyfriars) 교회에서 ‘국가 언약’(The National Covenant)을 체결한다. 이 언약은 개인 언약과 동시에 국민 상호간의 언약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스코틀랜드 국가와의 언약 즉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언약도의 교회가 되었다.
이 문서는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 1583–1646)과 아키발드 존스톤(Archibald Johnston, Lord Wariston, 1611–1663)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이 시기를 언약도 시기라고 할 수 있고,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종교개혁의 세력이었다. 찰스 1세는 왕권에 반역한 스코틀랜드를 정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파견했다. 그것은 정벌이 아닌 주교전쟁(Bishop's Wars)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주교정책(잉글랜드 국교회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잉글랜드 찰스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하며, 자력으로 개혁신앙을 고수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유수한 신학자들과 다수의 전투 경험이 있는 전쟁전문가들이 있었다. 사무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1602-1662), 조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 1613-1648), 알렉산더 헨더슨, 로버트 더글라스(Robert Douglas, 1594-1674), 제임스 거스리(James Guthrie, 1612-1661)등이다.
다만 언약도들이 1643년 “엄숙한 동맹과 언약”의 불이행된 상황에 대한 대처에서 분열된 것이 문제이다. 언약도들은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 있는 왕으로 개혁된 신앙으로 한 왕국을 구축한다는 내용에 충실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독립파(올리버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한 뒤에 왕 없는 세상, 공화제(commenwelth)를 추진했다. 이에 대해서 의견이 나뉜 것이다. 그리고 찰스 1세가 처형된 뒤에 그의 아들 찰스 2세를 옹위하는 문제를 놓고 다시 분열되었다.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왕이 되면 ‘국가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약속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서 무력으로 정복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학에는 잉글랜드 독립파 계열의 교수들이 포진했다. 청교도혁명이 미완성으로 종결되었다.
1660년 왕정복고(the Restoration) 이후 언약도의 갈등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찰스 2세(Charles Ⅱ, 1660-1685) 정부가 개혁신앙을 거부하고 국교회를 종교개혁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에는 기존의 장로회 정부 대신 주교주의 정부가 세워졌고, 언약도는 배교자가 되었다. 이후 당국과 언약도의 마찰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국왕은 언약도의 세력을 분열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언약도들은 찰스 2세의 폭정에 대응하지 않고 몸을 피해 위기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언약도를 향한 탄압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찰스 2세를 이는 제임스 2세는 주교주의에서 더 나가 로마 카톨릭주의로 회귀하려고까지 한 것이다. 결국 언약도는 찰스 1세에 맞서 종교적 자유를 지켜냈던 것처럼 다시 국왕의 폭압 정책에 무장항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과거의 저항이론을 보완하여 한층 격화된 저항이론을 주창했다. 존 브라운(John Brown, 1627-1685)의 『변증론』(Apologeticall Relation, 1665),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1635-1713)와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 1631-1671)의 『납달리』(Naphtal, 1667), 그리고 알렉산더 실즈(Alexander Shields, 1661-1700)의 『놓인 암사슴』(The Hind Let Loose, 1692)은 17세기 후반 언약도 저항이론을 집대성한 저서들이었다.
킬링타임(killing times), 1679년 보스웰(Bothwell)에서 정부군에 크게 패배한 언약도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전투에 임했지만 대패했다. 그 전투에서 1,200명이 사로잡혀서 에딘버러로 끌려오고, 그중 400명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마당에 투옥되었다. 마당에 구덩이 판 감옥이었는데, 지붕없는 감옥이었기 때문에 겨울날을 보내기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언약도들은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고 감옥 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많은 언약도들이 옥살이를 하고 재판을 받은 후, 교회 아랫길을 따라 내려가 그라스마켓(Grassmarket)이라는 이름의 거리에서 처형되었다. 나머지는 옥에 갇히거나 대부분 노예로 팔려나갔다. 1661년부터 1688년까지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에 의해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은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0-20,000여명이나 된다.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실각하며 종교의 자유를 찾았다.
17세기 후반 언약도의 강력한 저항에 대한 태도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불의와 폭정에 대한 자세에 독특한 면을 제공했다. 가장 대표적 위인은 언약도의 사자(Lion of the Covenant) 리처드 카메론(Richard Cameron, 1648-1680)이다. 카메론주의(Cameronian)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무장봉기항거의 전형을 구축했다.
1463-1660년, 엄숙과 동맹 언약에서 명예혁명까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주변 정황
1647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주도하는 의회파가 잉글랜드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전후(戰後) 질서 확립에 대해서 청교도 진영에서 일치를 갖지 못했다. 그것은 의회가 스코틀랜드 군대를 용병으로 세우고 크롬웰의 군대에 해산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의회파를 다수 점유한 온건한 개혁파(잉글랜드 장로파 청교도)는 온건한 왕정 존속을 원했지만, 급진적 세력(독립파, 디거파 등)으로 포진된 크롬웰의 진영에서는 왕정 폐지와 공화제를 원했다. 이들의 사유가 급진적인 것은 역사에서 최초로 왕이 없는 국가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온건한 개혁파를 장로파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는 당시 잉글랜드 온건 개혁파는 에라스트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아직까지 잉글랜드 장로파와 에라스투적 견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온건파들은 왕(챨스 1세)을 유지하면서 개혁된 종교를 수립하는 것에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동일했지만, 교회와 국가 관계에서 국가 주도를 견지하는 차이가 있었다. 안상혁은 사무엘 러더포드와 토마스 후커의 논쟁으로 제시하지만(안상혁, 2015), 잉글랜드 의회파 내부에서 에라스투스주의와 독립파(비분리주의)가 나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내전에서 의회파가 승리했지만 찰스 1세는 생존했고,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파의 내부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승리한 세력 내부에서 한 목표이지만 다른 목표를 갖고 있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해 오월동주(吳越同舟)로 구성된 청교도였다고 볼 수 있다.
김중락은 1645년 잉글랜드 총회를 개최하도록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로버트 베일리(Robert Baillie) 등의 활약으로 잉글랜드 교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평가했다. 1645년 8월 19일에 잉글랜드 의회는 전역에 장로회 설치를 명령했지만, 세속권력과 결탁되는 에라스투스주의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김중락, 2001). 김중락은 앤드류 멜빌과 사무엘 러더포드는 에라스투스주의와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제시했다(김중락, 2001). 잉글랜드에 있는 장로파는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압력과 에라스투스주의 자기 이해에서 혼란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베일리는 잉글랜드 장로제를 “절뚝발이의 에라스투스적 장로제”(a lame Erastian Presbytery)라고 비평했다(Cowan: 2018, 125, 김중락: 2001). 에라스투주의자들의 미숙함으로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파가 의회를 장악한 뒤에, 독립파 내부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평파(水平派, levellers)를 제압했다. 1648년 12월 6일, 크롬웰은 토마스 프라이드(Thomas Pride) 대령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에서 장로파 의원을 축출시키고 잔부의회(Rump Parliament)로 계속했다.
1647년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일단 찰스 1세를 구금시키며 향후 방안을 모색했다. 크롬웰은 왕을 존중하며 문제를 논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의회의 수장이 크롬웰에게 군대 해산을 명령했고, 크롬웰이 거부했다. 1647년 수평파 지도자 존 릴번(John Liburne)의 주도 군 폭동 사태가 발생하고, 의회 내부에서는 온건파가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찰스 1세는 구금에서 탈출해서 스코틀랜드로 도주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협력 진영으로 군비를 정비했다. 찰스 1세는 크롬웰을 제거하기 위해서 좀 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해야 했다. 1647년 12월 26일, 찰스 1세는 와이트(Wight) 섬을 비밀리에 방문한 라우던(Laudon), 라우더데일(Lauderdale), 라나크(Larnark) 등 세 명의 스코틀랜드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약정(Engagement)”을 체결했다(서요한: 1994, 249). 온건주의 의회파는 포로로 잡은 존 릴번을 석방하면서 독립파 내부를 교란하려고 했지만, 릴번이 의회파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1648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와 연합해서 런던으로 진격했지만, 크롬웰에게 패배했다. 1648년 크롬웰은 프라이드 대령으로 하원을 무력으로 장악하며(Pride's purse, 1648.12.6-7), 140여명의 온건파들을 추방시키고, 독립파 60여명으로 의회를 구성했다(잔부의회, Rump Parliament). 크롬웰이 무력으로 구성한 잔부의회는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에게 반역죄를 판결하여 처형시켰다. 세계 역사에서 최초로 왕이 사라진 국가가 존재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찰스 2세가 생존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롬웰의 군대가 스코틀랜드와 던바 전투(1650년)에서, 찰스 2세와 우스터 전투(1651년)에서 승리한 후, 패배한 왕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 진영은 둘로 나뉘었다.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크롬웰의 군대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섬멸하고 스코틀랜드를 정복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잔부의회는 스코틀랜드를 “자유 공화국 잉글랜드”에 포함시켜 병합시켜 버렸다. 크롬웰에 의해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병합되었고, 한 종교(독립파)로 세워지게 되었지만, 왕정은 파괴되었다. 스코틀랜드는 크롬웰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사상과 잉글랜드 장로파는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크롬웰은 1653년 잔부의회에서 140명으로 지명하여 의회를 구성했다. “지명의회(Nominated Parliament)”라고 불리기도 하고, “성자들의 총회(Assembly of saints)”라고 불리는데, 성자들은 독립파에게 인정된 위인이었을 것이다. 1653년 통치장전(統治章典, Instrument of Government)을 통해서 크롬웰이 세 왕국의 통치자, 호국경(護國卿,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이 된다. 참고로 Lord Protector을 섭정(攝政)과 호국경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왕이 아닌 절대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섭정은 왕을 옆에 둔 절대권력자이고, 호국경은 왕이 없는 기간에 절대권력자이다.
1650년 스코틀랜드 교회는 급진파와 대항파로 분열했다. 스튜어트 왕가와 타협을 거부한 항의파(Remonstrants) 혹은 저항파(Protesters)와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맞아들일 것을 찬성한 결의파(General Resoulutioners)라는 약정파 가있다. 비록 분열했다하더라도 그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입장은 확고했다. 항의파는 사무엘 러더포드, 제임스 거스리, 아치발드 존슨이었고, 결의파는 로버트 더글러스, 로버트 베일리였다. 항의파는 찰스 2세가 엄숙 동맹과 언약에 서명했지만 서약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의파는 서약에 서명한 왕을 존중했다. 즉 두 진영은 모두 엄숙 동맹과 언약,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존중은 일치했다. 그러나 왕의 태도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랐고, 시대의 격변 때문에 두 진영으로 분열했다. 즉 신학 사상은 동일했지만, 시대를 읽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분리된 한 예이다.
참고로 크롬웰은 스코틀랜드를 공략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명문 4 대학(글래스고, 애버딘, 에딘버러, 새인트 앤드류)을 장악했다. 스코틀랜드 대학은 잉글랜드 대학과 견줄 때에 부족함이 없었다. 크롬웰은 스코틀랜드 대학에 독립파의 주요 인물들을 정착시켜 교육계를 장악했다(마금영, 2000, 104-106). 크롬웰은 1654년 의회를 소집해서 80가지가 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법들은 청교도주의 교회 확립, 종교적 관용, 교육 진흥, 통치의 분권화 등이었다. 유대인들의 입국을 허가했고, 식민지를 확장시켰다. 크롬웰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영향이다. 칼라일은 크롬웰을 전제주의를 종료시킨 헌정개혁가로 평가한 것이다(마금영, 2000, 107-108). 칼라일은 『영웅 숭배론』(1841,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에서 윌리엄 세익스피어, 존 낙스, 마틴 루터, 올리버 크롬웰, 루소, 나폴레옹 등을 인류의 영웅으로 꼽았다.
1660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된 이후에는 감독제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이 없었고 1661년 무효법(Act Rescissory)에 의해 장기의회와 엄숙 동맹과 언약,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작성된 모든 것이 무효화 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3년 8월 17일에 체결된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근거해서 잉글랜드 의회가 1643년 9월 15일부터 1646년 12월 4일까지 개회시킨 종교회의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 7월 1일에 시작되어, 기존에 있는 39개 신조를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이 참여하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총회로 돌입했다. 스코틀랜드 사역자들이 언권 외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1646년에 작성된 문서를 스코틀랜드 총회는 1647년 8월 27일 교단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대체한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1647년 가을 터크니(Anthony Tuckney, 1599-1670)를 위원장으로 하여 대소요리문답 초안을 작성했고, 1648년 6월 20일 일부 수정을 거쳐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1648년 7월 20일 총회가 대요리문답을 승인했다. 그리고 7월 28일 소요리 문답을 채택했으며, 9월 15일 의회가 최종 승인했다. 1649년 8월 총회는 이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 그리고 예배모범과 정치편람을 채택했다.
그런데 잉글랜드 독립파로 결정권자인 크롬웰은 그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1648년 크롬웰과 관계를 시작하여, 1649년부터 크롬웰 군대의 종군목사로 사역했다.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도 오웬은 군종목사로 참가했다. 오웬은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1658년에 사보이 선언을 작성했다. 현재 사보이 선언을 표준문서로 사용하는 교회는 없다. 그리고 당시 크롬웰과 오웬이 주도했던 독립파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파 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다. 장로파의 기본 특징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몇 교단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 다른 표준문서로 옮긴 장로파 교단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역사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국민 언약(National Covenant, 1638년),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과 관련되어 있다. 1658년 독립파는 자체로 사보이선언(The Savoy Declaration)을 작성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정하려 했다는 의견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독립파는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가의 결정과 교회의 결정을 다르게 생각했을 수 있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1600-1680), 예레미야 버로우(Jeremiah Burroughs, 1600-1646), 필립 나이(Philip Nye, 1595-1672), 시드락 심슨(Sydrach Simpson, 1600-1655), 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 1600-1670)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에 참여했다. 사보이 선언을 주도한 존 오웬과 분리파 회중주의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세 왕국에 정착되지 못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왕좌에 앉은 찰스 2세 그 뒤를 이은 제임스 2세는 국교회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에 대한 무참한 박해를 진행했다. 이 기간을 Killing Times(살육의 시대)이라고 한다. 그 때에 독립파가 찰스 2세에게 저항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그 뒤에 독립파의 주도적인 주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는 고교회(High Church)와 저교회(Low Church)로 편성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이 지난 뒤 1689년 2차 런던신앙고백서(The Second London Confession of Faith, 1차 1644년 1차 런던신앙고백서 작성)를 작성한 특수침례파(Particular Baptists)가 국교회주의를 떠나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고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국교회 사제였고, 아버지(Samuel Wesley, 1662-1735)는 고교회 사제였다고 한다.
[참고 1]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는 스위스 의사며 신학자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에게서 나온 사상이다. 사상의 핵심은 혼란한 교회를 국가가 주도해서 안정시킬 수 있다는 개념이다. 라은성 박사는 감독정치(교황정치, 영국국교회)인데, 두 신학사상을 고올주의(Gallicanism)와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로 분류했다. 고올주의는 다시금 셋으로 나뉘는데,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페부르니우스주의(Febronianism, 주교주의와 국가주의 결합), 요셉주의(Josephinism, 오스트리아의 요셉2세가 제언한 것으로, 교회 세움과 성직자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는 형태)이다. 고올주의에서 교황지상주의가 발생했고, 그것에 개혁파로 들어온 것이 에라스투스주의이다. 고올주의는 프랑스에서 발생한 국가교회의 형태로 교회재산, 교회법정, 성직 임명에서 교황의 권리를 제거했지만 왕을 그 자리에 세웠다.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으로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고올주의에 입각해서 위그노 교회와 학교에 철거명령을 내리고 고올주의에 벗어난 모든 의식과 신학을 금지시켰다.
[참고 2] 크롬웰에 대한 최철희(성공회 역사가)는 찰스 1세는 죽음으로 민중의 지지를 회복했고, 크롬웰은 죽음으로 쇠퇴했다고 대조를 제시했다. 크롬웰이 1658년에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이 계승했지만,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로 왕직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주교제도, 기도서, 국교회주의 성직자 1,000명 등도 모두 복구되었다(최철희, 『세계성공회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140-141). 영국 국교회에서는 찰스 1세가 크롬웰에 맞서 사회와 교회를 지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K. D. Holfelder, Factionalism in the Kirk during the Cromwellian Invasion and Occupation of Scotland, 1650 to 1660: The Protester-Resolutioner Controversy(Edinburgh: Univ of Edinburgh, 1998)
칼빈은 에드워드 6세에게 이사야서 주석을 헌정했고, 당시 섭정이었던 서머셋 공작에게 디모데전서 주석을 헌정했다. 칼빈은 유럽 사회에 개혁파 신앙이 정착될 수 있도록 많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개혁파 신앙의 범주로 한 체계를 만들기를 추구했다.
영국교회 간략하게 살펴보기
토머스 베케트(Thomas Becket, 1118-1170)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는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갈등으로 살해되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추인되었다. 헨리 8세가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할 때에, 360년 전(前)의 죄를 기소하여 죽은자를 궐석으로 재판해서 부관참시했다.
백년 전쟁(Hundred Years' War)은 1337년부터 1453년 사이에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전쟁이다.
랭커스터 가 헨리 5세(Henry V, 1386-1422)는 영화 더 킹(2019년)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요크 가(家)와 랭커스터 가(家)가 교차하면서 왕조를 유지했다.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55-1485)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다.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전투에서 플랜테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현손인 헨리 7세가 왕권을 찬탈해서 튜더 왕조를 시작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조는 튜터 왕조(Tudor dynasty, 1485-1603, 7대 왕)이다. 튜터 왕조의 기원은 웨일즈(Welsh)에서 시작되었다. 헨리 7세(1485-1509), 헨리 8세(1509-1547), 에드워드 6세(1547-1553), 제인 그레이(9일여왕, 1553-1553), 메리1세(피의 여왕, 1553-1558), 펠리페 2세(메리의 남편, 1554-1558),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이다.
스튜어드 왕조(1603-1649/복고왕조, 1660-1707)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헨리 7세의 혈통(고손자)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1603-1625). 스튜어드 왕조는 스코틀랜드 왕가였지만, 잉글랜드 왕의 혈통으로 자연스럽게 삼중왕(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이 되었다. 세 왕국은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으로 개혁된 종교로 한 왕국을 이루려 했지만, 청교도 혁명을 이끄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세 왕국은 묶어졌다. 크롬웰의 공화정이 중단되고 1660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되었다. 찰스 2세(Charles II(1630-(재위)1660-1685)는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 1660년 4월 4일 발표)으로 복귀했지만, 지키지 않고 국교회위주의 종교 정책(주교제도, 성직임명권)을 펼쳤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국교회를 중심으로 종교 정책을 전개하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을 무참하게 박해했다. 찰스 2세는 1661년에 무효법(The Rescissory Act)을 포고하면서 1633년 에서(1634-1660까지 무효) 연속함을 천명했다. 1662년에 포기법(The Abjuration Act)으로 1638년의 국민언약(the National Covenant)과 1643년의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of 1643)을 파기했다. 당시 찰스 2세의 명령은 그래함(John Graham)이 수행했는데, 언약도들은 그를 “Bluidy Clavers”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언약도 목사들은 1662년 추방되었고, 1663년에는 무력으로 탄압했다. 1679년에 드럼크록 전투(The Battle of Drumclog)에서 400-500명의 언약도들이 무력으로 항전하여 전사했고, 포로가 된 1,200명은 에딘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1638년에 국민 언약을 맺었던 장소의 마당에 지붕 없는 감옥에 투옥되어 겨울을 보내야 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계승했다. 1688년 네덜란드 오렌지의 윌리엄(제임스 2세의 딸)으로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을 통해서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오렌지 공)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보드로(Robert Wodrow)는 1661-1688년까지 17년을 킬링 타임(The Killing Time)이라고 정의했다. 1689년 권리장전(權利章典, Bill of Rights)으로 왕권신수설은 중단되었고, 인간의 자연권이 천명되었다.
잉글랜드 왕 존은 1215년 대헌장(大憲章, Magna Carta)으로 왕이 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을 귀족과 협정했다.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은 1628년에 잉글랜드 의회가 찰스 1세에게 승인을 요구했지만(단기의회), 왕은 1629년에 의회를 해산하며 거부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왕은 스코틀랜드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11년간 단독정치를 마치고 의회를 소집했다(장기의회). 장기의회(Long Parliament)는 크롬웰이 의회에서 무력으로 반대파를 축출시키고 잔부의회(Rump Parliament)까지 운영하면서, 1653년에 해산시켰다. 1660년에 왕정이 복고되면서 의회도 다시 복구되었다. 대헌장(1215), 권리청원(1628), 권리장전(1689)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정보이다.
1689년 관용령(Toleration Act)이 의회를 통과하며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1690년 회복법(The Act of Settlement)으로 총회가 형성되었고,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로 법제화되었다.
1712년에 "성직 임명권(Patronage)"이 스코틀랜드 의회를 통과했고, 이를 거부하는 교회는 분리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는 성직 추천을 거부하면서 지금까지 소수로 유지하고 있다. 유력한 사역자들은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 토마스 길레스피(Thomass Gillespie),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 등이다.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평화와 전쟁과 관계없이 항상 발생하고 증폭된다. 교회는 발생한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한 적이 거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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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 [비튼 추기경]에게는 수도원장 시절에 이미 1남 2녀가 있었으며, 추기경에 임명되기 이전에 아들 셋을 더 낳았고, 임명된 후에 네 아들을 더 가졌다. 다른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교 개혁 당시 12명의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이 낳은 사생아로 보이는 많은 수도원장들에게 또한 자기들의 사생아들이 많이 있었다.
2) 장대선 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2치리서』(서울: 고백과문답, 20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대, 소요리문답의 구조인데,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는 치리서(Book of Discipline)로 그리스도인을 훈련하도록 배치시켰다. 스코틀랜드 교회 개혁의 특징의 그리스도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종, 설교자의 복음 선포로 수행된다는 것이 매우 명료하다.
9강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재세례파
16세기 종교개혁을 분류하면, 루터파, 칼빈파(네덜란드 종교개혁,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프랑스 종교개혁 등), 잉글랜드 국교회와 극단적 종교개혁으로 나눈다. 극단적 종교개혁의 주요 세력은 재세례파, 아나뱁티스트(Anabaptists)이다. radical(래티컬)이라는 단어 번역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급진적으로 번역하는데, 극단적, 과격한 등으로도 번역한다. radical 종교개혁은 전혀 새로운 주장을 교회와 사회에 내 놓았다. 재세례파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재세례파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되어 교회와 사회 영역에 자리잡았다. 필자는 재세례파의 가장 강력한 설득력은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질서’를 생각하는데, 제세례파는 ‘평등’을 제안했다. 필자는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재세례파는 초대 기독교를 복원하려는 성향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아닌 복음서에서 예수가 원하는 교회를 상상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받은 세례, 30세에 받은 세례를 추구하니, 기존의 물세례 방식을 거부하고 침례 방식을 재현했다. 그리고 기존 교회의 물세례 방식을 거부하고 재세례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유아세례를 부정했다. 재세례파의 기본 자세가 성경본문에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본문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라고 말하지 않고 손가락만 보라고 외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재세례파 운동은 츠빙글리의 사역지에서 발생했다(롤란드 베이튼). 1521년 1월 21일, 십여 명의 사람들이 취리히의 좁은 골목을 의연하지만 비장한 각오로 걸었다. 뮌스터 교회당 근처에 자리한 만츠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시의회로부터 성경 공부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과 펠릭스 만츠(Felix Manz, 1498-1527)1)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회는 시민들에게 아이를 낳은 후 8일 이내에 세례를 받도록 했고, 만약 어길 시에 추방하겠다고 경고했다. 이것을 의논하기 위해 만츠의 집에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시의회에서 개최한 1525년 1월 17일 공개논쟁에서, 유아세례를 옹호한 츠빙글리의 주장에 반박하지 못해 패했다. 시의회는 토론 후 일주일 안에 유아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면 추방한다고 경고했고, 결국 이들은 만츠의 집에 모여 세례를 베풀었지만 취리히를 떠나 졸리콘(Zollikon)에 거주하며 재세례파 집단이 조직되었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 지도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18-1526), 펠릭스 만쯔, 조지 불라우록(George Blaurock, 1491-1529), 휘브마이어(Balthasar Hübmaier, 1480?-1528) 등이었다.
재세례파에는 메노파, 후터파, 침례파, 퀘이커 등이 포함된다. 메노파 아미쉬(Amish)는 지금도 현대문명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대로 농작물을 경작하며 살고 있다.
16세기 유럽의 재세례파(The Anabaptists) 가운데 하나인 스위스 형제단(The Swiss Brethren)으로부터 1693년 야곱 암만(Jakob Ammann, 1644 혹은 1656-1730)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재세례파에 속한 다른 교단인 메노파, 야곱파와 그 신학과 실천면에서 공통적인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 16세기에 초대교회를 회복하려 했던 재세례파운동은 조지 폭스(Goerge Fox, 1624-1691)와 퀘이커교, 경건주의 운동과 형제교회, 존 웨슬리, 청교도 운동, 침례교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교권주의에 항거하며 영적인 갱신을 추구했던 12세기 말 프랑스의 왈도파(the Waldensians)와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는 삶”을 살며 진정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체스코파(Spiritual Franciscans)와도 신학적으로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1527년 1월 7일 지도자였던 펠릭스 만츠는 참수형으로 재세례파 최초 희생자가 되었다. 스위스 재세례파는 평화주의자였고, 평화주의는 네덜란드 재세례파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 1491-1529)은 티롤(Tyrol) 지방으로 옮겨 활동했다. 로마 카톨릭은 재세례파를 발견하고 핍박했다. 1529년 9월 6일 블라우록은 그곳에서 화형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더욱 북쪽으로 이동했다. 모라비아(Moravia) 지방에 이르러서 정착했다. 그곳에서 비뤼더호프(형제촌)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초대교회의 형태를 따라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개인 소유는 없으며 공동으로 재산을 관리했고, 자신의 입술로 신앙을 고백할 때에 침례를 주었다. 개인보다 형제애를 우선시하여 공동체 형태로 살았다. 이들은 지도자 역할을 하던 야곱 후터(Jacob Hutter)의 이름을 따라 ‘후터파(Hutterits)’로 불렀다. 후에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부흥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존 웨슬리 등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온순한 성향이고, 모라비안은 선교 역사를 주도한 대표적 세력이다.
재세례파에는 스위스에 재세례파가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에 재세례파가 있었다. 전자는 온건한 성격으로 평화와 평등을 주장했고, 후자는 폭력적이고 광신적인 면으로 천년왕국의 실현과 평등을 주장했다.
루터와 함께 라이프치히 논쟁에 참여해 요한 에크를 공격했던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는 재세례파인 동시에 혁명적 변혁을 추구했다. 결국 농민 전쟁(German Peasants' War, 1524-1525)을 주도하다 1525년 5월 27일 사형되었다.
그리고 5년 후에 1530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 안정기가 되었을 때, 뮌스터에서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다(Münster Rebellion, 뮌스터 반란).
모피 상인 멜히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 1495-1543)은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루터를 추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성경 해석을 하면서 무지한 자들을 미혹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그의 가르침은 국가와 교회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는데, 스위스 재세례파까지 그를 거절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1533년에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발생했다. 그 중에 네덜란드 서부 하를렘 출신의 제빵사 얀 마티스(Jan Matthys)가 있었다.
마티스는 호프만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에 에녹 선지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는데 자신이 바로 그 에녹 선지자라고 선언했다. 1533년, 마티스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뮌스터의 주인들이라고 선언하며 뮌스터를 정복했다. 그는 뮌스터가 율법이 없고 또한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새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에 독일과 네덜란드로부터 수천 명의 재세례파들이 뮌스터로 집결했다. 얀 마티스(Jan Matthys, 1500-1534)라는 인물이 광신적 신앙을 뮌스터 사람들에게 불어 넣어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군대가 그들을 포위했고, 뮌스터의 재세례파는 무력을 동원하여 방어했다. 1534년 여관 주인이었던 라이덴의 얀이 권력을 쟁탈했다. 그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구약처럼 일부다처제를 주장할 뿐 아니라 자신을 ‘다윗 왕’으로 불렀다. 결국 1535년 6월 24일 성은 함락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며 막을 내렸다.
뮌스터 사건 이후 저지대 라인에 살았던 이들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의 헌신 덕분에 철저한 비폭력 공동체로 전환하여 생존했다. 이들은 후에 메노나이트라는 이름되었다. 유럽에서 극심한 핍박을 피하지 못했던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캐나다와 미국 등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했다.
재세례파는 수 많은 변형과 융합 과정을 거쳤다. 단일신론, 천년왕국, 유아세례금지 등 공통점을 보인다. 지금 재세례파적 경향에서 위험한 성격은 ‘성경제일주의’이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 성경 문자대로 산다는 것으로 수행하는 경향이 있다. 또 반대로 성경대로 산다는 것을 문자에 매이지 않는 신령한 방식대로 산다는 것도 유사한 패턴이다. 문자주의와 신령주의는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란성 쌍둥이이다. 모두 목표가 아닌 손가락만 보도록 한다.
신령주의(Spiritualists, 신비주의)
재세례파는 일관된 신학 사조가 있었는데 반해 신령주의자는 개인적 사상의 사조로 구성되었다. 일치된 신학이 없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사유 체계는 사라지지 않고, 옆에 있는 신학들에 영향을 미쳤다. 신령주의를 강력한 성령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재세례파도 성령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신령주의는 문자와 영을 대립시키고, 가시적인 것을 부정하는 내면성이다. 신령주의는 1) 복음적 신령주의, 2) 합리적 신령주의, 3) 신비적 신령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령주의는 퀘이커교와 경건주의로, 합리적 신령주의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로, 신비적 신령주의는 낭만주의적 관념철학으로 발전했다. 박창건은 재세례파와 달리 신령주의가 오랜 기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영향력도 감소되지 않았다. 재세례파와 신령주의는 여러 모습으로 교회와 사회에 침투했다.
이들은 교권적인 기도문에 의한 형식적인 기도보다는 하나님과 직접 영적 교제를 바라는 반(反) 교회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대원리인 성경과 은혜과 믿음을 거부하고서 대중 속에 파고 들며 조용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이 근대와 현대에 갈수록 확산되었다.
이들은 성경보다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에서 얻은 감흥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과 교리의 권위는 부정될 수 밖에 없다. 각 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가장 가치있게 보았다. 그런데 이런 영적 운동이 합리주의와 잘 융합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합리주의와 신령주의의 공통점은 인간의 능력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신령주의는 로마 카톨릭을 부정할 수 있지만, 로마 카톨릭적인 위계질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캐스퍼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 1489-1561, 독일),2) 세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 1499-1542, 독일),3) 후안 데 발데스(Juan de Valdés, 1490-1541, 스페인)4) 등이 있다.5)
야곱 뵈메(Jakob Böhme, 1575-1624)는 종교 개혁 직후에 활동한 독일의 신비주의자, 영성가, 르네상스의 자연철학자, 최초의 독일 철학자 그리고 초월주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다. 신지학의 아버지(father of theosophy) 야곱 뵈메는 1575년 경건한 루터주의자이자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99년 뵈메는 쾨르리츠의 시민이 되었고, 그곳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그는 그해 5월 카타리나 쿤츠만(Catharina Kuntschmann)과 혼인했고, 그녀는 1601-1611년 사이 4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는 이 시기에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얼마 후 뵈메는 구두 수선공 일을 그만두고 무역업자로 변신했다.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다가 1624년에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와 죽었다. 뵈메는 종교개혁 당시에 가장 유력한 신비주의자이다. 독일의 뵈메에서 스웨덴의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보리)6)가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신비주의(독일신학)는 영성주의 그리고 유대교 일파인 카발라(Kabbala) 사상을 수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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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98년경 취리히에서 출생한 만츠는 에라스무스, 레오 쥬드(Leo Zud) 그리고 하인리히 불링거(H. Bullinger)와 같은 카톨릭 사제의 사생아였다. 만츠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간증문과 18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또 익사 당하기 2년 전 추리히 법정에 제출한 문서인 「항의와 변호」(Protestation und Schutzschrift)가 남아 있다. 이 글은 재세례파의 주장을 변호한 글이었다.
2) (참고) 슈벵크펠트는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와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를 통해 종교개혁의 원리를 접했다. 즉 재세례파적 개혁 원리를 접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원칙을 창안했는데, 성찬 이해(1524)을 놓고 마틴 루터와 갈등했다. 그는 인문주의 동료인 발렌틴 크라우트발트(Valentin Krautwald)와 긴밀하게 협력했고, 천상의 육체 교리로 알려진 성찬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종파가 이루었는데 독일에서는 불법으로 정죄되었다. 그의 사상은 아나뱁티즘, 유럽 경건주의, 영국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주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현대에 약 2,500여명의 회원으로 단체를 이루고 있다.
3) (참고) Frank는 루터파와 재세례파와 모두 접촉했지만, 루터파의 도덕적인 모습에, 아나뱁티스트의 독단적이고 편협한 모습에 실망에서 양측에 속하지 않았다. 프랭크는 로마 카톨릭, 루터파, 재세례파를 모두 거부하고 자기 진영을 구축했다.
4) (참고) 후안 데 발데스는 스페인 귀족의 아들이었고, 관료, 학자, 정치가, 신학자로서 활약했으며, 그의 형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찰스 5세의 개인 비서였다. 학문의 초점이 성경 연구에 맞춰진 알칼라의 신설 대학에서 수학했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기 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개혁자 알카라즈에게서 성경을, 특히 바울 사상을 소개받았다(저자 소개의 글에서). 후안 데 발데스, 돈 베네데토, 『쉽게 읽는 그리스도 때문에』, 김태곤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2009).
5) (참고) 미하엘 벨커 외 다수, 『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48개 도시, 72명의 개혁자들이 이룬 대변혁”인데 제네바와 칼빈과 기욤 파렐에 대해서는 없다.
6) 조덕영 박사의 스웨덴보르그에 대한 글.
1. 스웨덴보르그는 누구인가 : 에마뉴엘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 1688-1772,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짐-편집자 주)는 일찍부터 국내에 알려진 인물이나 무엇보다 최근 천국 체험에 대한 그의 책("천국은 있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뒤늦게(?)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다. 과거 그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으나 그리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그의 천국 관련 체험 책이 재출판되어 광고를 타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새삼 관심을 끌게 되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태생인 그의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부친은 루터파 궁정 목사인 동시에 대학의 신학 교수였다고 알려져 있다.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사색적이고 종교적 관심과 신비주의 경향을 가졌다고 하는 데 1709년 21세의 나이로 웁살라 대학을 졸업한 후, 스웨덴 광산국 기사로 근무하다가 영국 런던에서 5년 동안 뉴턴과 천문학자 할레, 수학자 라일 등을 연구하다가 귀국 한 후 스웨덴 왕립 광산 대학의 부교장이 되고 야금학(冶金學)의 권위자가 된다.
2. 스웨덴보르그의 천재성 : 1719년, 그는 귀족 칭호를 받고 귀족원의 회원도 되었으며 정계로도 진출하는 데 그가 세계적 인물이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다재다능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9개 국어를 구사하였으며 그의 책들은 주로 라틴어로 출판되었다. 당시 학자들의 언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 광물학자, 과학자, 수학자, 생리의학 연구가, 발명가로서의 삶을 산 그는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져 성운설(星雲說)을 발표하고 제염기(製鹽機), 피아놀라(pianola, 자동 반주기), 잠수함, 비행기(엄밀하게 말하면 지금의 글라이더에 가까운 기구) 등의 발명에도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그를 언급했고, 문호(文豪)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가 스웨덴보르그를 모델로 했다는 일화 등은 그를 더욱 유명 인사로 만든 면이 있다. 그의 책은 놀랍게도 광산과 채굴법에 대한 책만 자그마치 77종에 달하는데, 다음은 그가 1747년 과학적 연구를 완전 포기하기 이전까지 펴낸 그의 다재다능함을 알려주는 대표적 저서 목록들이다. 그는 1747년 이후에는 과학적 연구가 아닌 영적 생활과 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3. 스웨덴보르그의 1947년 이전 주요 저서 목록 : "마음의 연구"(1714), "토양과 진흙"(1716), "화석"(1716), "입체측량"(1716), "사물의 원인"(1717), "지구의 정지"(1717), "소금의 증류"(1717), "상업과 공업"(1717), "불과 색채"(1718), "대수학"(1718), "경도의 측정"(1718), "지구의 회전"(1719), "수위"(1719), "운동과 그 본질"(1719), "용광로"(1719), "기하학 및 대수학"(1719), "열의 보존"(1722), "조류의 계산방법"(1722), "정수역학"(1722), "철의 가공에 대하여"(1723), "유황과 유황철에 대하여"(1724), "소금에 대하여"(1725), "철학과 해부학상의 잡다한 주제에 대하여"(1733), "경험적 심리학"(1733), "마음과 몸의 메커니즘"(1734), "철학과 광물학 평가, 3권", "인체"(1734), "무한과 유한"(1738), "근육의 일반론"(1740), "피부와 혀"(1740), "인쇄술"(1740), "뇌 1권~4권"(1740), "미립자론"(1740), "우주의 수학적 원리"(1740), "동물계에 나타난 경륜(1740-41)" "섬유"(1741), "생식기관에 대하여"(1743), "꿈에 대하여(1744). 그리고 이후에 쓴 중요한 책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오직 영계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와 자신의 견해를 말년에 정리한 "진정한 기독교"(Vera christiana religio, 1771)가 있다.
4. 스웨덴보르그의 신비주의 : 스웨덴보르그의 어린 시절 그의 부모는 "천사들이 이 아이를 통해 말한다"고 할만큼 그는 일찍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재다능한 능력뿐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초자연 현상에 관심이 많던 스웨덴보르그는 급기야 50대 중반 무렵인 1743년, 예수님을 3번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때부터 자신은 천리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천국이나 영계(靈界)를 보고 왔다거나 성경 속의 많은 왕들이나 인물들의 영혼을 만나기도 하고, 화성이나 금성이나 달에도 사람이 산다고 주장(친히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등 극단적 신비주의자로 흐르게 되었다. 그는 영계는 세상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며 영계의 언어와 글자에 대해서 말하는 가 하면 영계에서 만난 역사상의 인물들을 언급하고 지옥에도 한번 다녀왔다고 말하는 등 세상과 영계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48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스톡홀름의 대화재를 궤뚫어보고 정확히 묘사하거나 자신의 죽음 예고(1772. 3.29) 편지를 요한 웨슬리에게 보낸 것 또한 유명한 사건이다. 역사상 이런 인물은 어디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을만큼 전무후무한 독특한 세계에 빠졌던 개척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주관적 체험이 성경이나 기독교적 전통과는 너무 동떨어진 주장을 하여 주관적 신비주의라 하는 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도 영계의 일부이고 그는 정령과 자유자재로 대화하는 영매였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무당 유사한 체험이었다. 개인적, 학문적, 탁월함이 균형 잡힌 신앙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스웨덴보르그는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5. 스웨덴보르그의 신학적 입장 : 어릴 적부터 일찌감치 교회의 목사들과도 신과 믿음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좋아했던 스웨덴보르그는 비록 정통적 신관은 아니나 성경의 신에 대한 관심을 끝까지 놓지를 않았다. 현재 그의 무덤도 스웨덴 웁살라 대성당에 있을 정도이다. 이런 스웨덴보르그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신론 : 하나님은 3위(3位, three persons)가 아니며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성부)이시며 신인(神人, 성자)이시며 신적인 권능자(성령)이시다.
2)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존재이시며 신적인 존재이시다.
3) 시험과 악에 대해 :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이김으로써 지옥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우리 인간들도 악을 배격할 수 있다.
4) 성경관 및 성경 해석 : 성경은 일부만 신뢰할만하다(예를 들면 신약복음서와 요한계시록). 따라서 성경은 일종의 알레고리(allegory)적 해석인 상응(相應, correspondences)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담과 노아도 교회의 표상이다.
5) 교회론 :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은 1757년 이루어졌다. 즉 1757년은 지상 교회의 종말이다. 따라서 스웨덴보르그를 추종하는 스웨덴보르그주의에서는 기독교 모든 교파의 참여를 권유하면서 새 교회(the New Church) 또는 새 예루살렘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6. 나가면서 : 결론적으로 스웨덴보르그는 재능면에서는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요, 영적으로는 프랑스의 점성술가 노스트라다무스와 유사한 존재요, 믿음으로는 정통을 벗어난 신비주의자가 된 사람으로 보면 맞을 듯하다. 따라서 스웨덴보르그의 천국 체험도 정통 기독교나 성경적 체험이 아닌 성경을 벗어난 개인적, 주관적, 신비 체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최근 한국교회에 온갖 신비주의가 범람하고 있다. 이 가운데 천국이나 지옥 체험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을 벗어난 이같은 스웨덴보르그식 체험은 결국 신앙을 자기 주관화하여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넘어서버리는 신비주의로 빠져버리게 만든다. 천국,지옥 은 그렇게 함부로 자기 주관대로 체험하고 다녀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마다 다녀왔다는 천국, 지옥 간증이 전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제각각인 것이 이들의 체험이 자기 주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천국, 지옥 체험은 괜한 환상과 불안감을 조성하여 신앙의 열심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 간증자들과 목사들은 이런 측면을 노리고 이들 간증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근본적으로 스웨덴보르그식 체험은 성경을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혼란과 혼돈"을 조장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초월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지옥을 믿는다. 기독교에는 분명한 초월과 신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신비주의화 될 때 참된 신앙을 훼방하고 오히려 이단과 사이비들이 활개치도록 만드는 도구가 됨을 신비주의 간증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신비와 신비주의는 전혀 다른 것이다.
10강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프랜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 1623-1687)은 제네바의 신학자로 변증신학(theologiae elencticae, Elenctic Theology) 혹은 논박신학을 진행했다. ‘Elenctic’는 ‘논증적인’, ‘논박하는’으로 어떤 진영에 대해서 명확하게 세우는 방법이다. 튜레틴이 거부한 신학은 로마 카톨릭주의, 소시니안, 알미니안이다. 이러한 풍토는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세운 원칙이기도 하다. 1619년 도르트 교령이후에 알미니안은 개혁파 진영에서 배격될 핵심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 요체를 이신칭의라고 하는데, “이신칭의와 구원의 확실성”과 “이신칭의와 구원의 탈락가능성”으로 대별된다. justification by faith를 이신칭의(以信稱義)로 번역할 것인가? 이신득의(以信得義)로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로마 카톨릭주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20년 마틴 루터를 정죄하면, 개혁을 요구하는 모든 세력은 이단으로 간주했다. 1534년 잉글랜드 헨리 8세가 수장령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 우산에서 이탈했다. 스코틀랜드는 1560년에 전환했다. 로마 교황주의는 개혁신학의 주장에 대해서 체계를 강화시켰다. 그것을 개혁파에서는 반종교개혁(Contrareformatio, Counter-Reformation)이라고 하고, 로마 교황주의에서는 개혁파를 반종교개혁이라고 한다. 두 측은 모두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고 주장한다. 교회가 변화하고 쇄신하는 것이 반드시 개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기독교 고유의 복음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 - 반종교개혁 - 1522년에서 1648년 사이에 일어났던 가톨릭 개혁(Catholic Reform)을 일부에서는 반종교개혁이라 불렀다. 종교개혁에서 제기된 문제를 가톨릭교회 나름대로 극복하고 참된 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티즘의 사조를 종식시키려 한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는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창설하여 참된 가톨릭 생활을 부흥시키려 하였고, 아빌라의 데레사(St. Teresa of Avila)에 의한 가르멜회의 부흥운동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이 계속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것은 교황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밀라노의 가롤로 보로메오(St. Calolus Borromaeus)는 공의회의 모든 결정사항을 실행에 옮겼고, 제네바의 프란치스코 살레지오(St. Francis de Sales)는 참된 가톨릭 교의(doctrine)와 신심을 부흥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다. 세속군주 중에서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그의 왕비인 영국인 메리 튜더(Mary Tudor) 같은 이는 이 개혁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영국과 스페인, 폴란드와 스웨덴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거의 2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종교전쟁에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의 결과 가톨릭교회는 제도와 조직이 강화되었고, 세속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복음전파사업에 전념하였다. (⇒) 가톨릭개혁
※ 로마 카톨릭에서 반종교개혁의 시작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잉글랜드 여왕인 메리 튜더(1516-1558)를 제시하고 있다.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71) 반종교 개혁 – 카톨릭신문 -
16세기 가톨릭 교회는 한편으로는 시대적인 혼란과 신앙 교리, 교회 관습과 전통의 혼돈으로 점철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개혁과 쇄신의 노력이 빛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15세기초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서구 대이교 사건(1378~1417)을 종결지었지만 교회의 쇄신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세속적인 정치 권력의 간섭과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속화된 교회 자체의 약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한 교회는 다양한 계층에서 복음과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쇄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쇄신의 여정은 쉽지 않았고 성과는 미진했다.
그런 가운데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루터 등에 의한 종교 개혁 운동으로 교회는 분열됐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6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이러한 가톨릭 개혁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반종교 개혁」(Gegen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16세기 교회 분열 치유 노력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 개혁」이 결코 동일한 역사적 운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기본적으로 가톨릭 신앙에서 분열된 프로테스탄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지칭하는 「종교 개혁」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반종교 개혁이 루터의 시대에 일어난 가톨릭 교회의 모든 쇄신 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해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교회의 쇄신을 이루기 위해 특정 지역에 한정돼 발생한 운동이다. 하지만 교회의 쇄신 운동은 이러한 반종교 개혁보다 훨씬 앞서 이미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는 쇄신을 열망하는 수많은 주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 쇄신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가톨릭 교회의 쇄신 운동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중심이 되어 점차 전체 교회로 확산됐지만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반가톨릭적인 개혁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반종교 개혁은 특히 가톨릭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했으며 정치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과 영토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반종교 개혁을 수행한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었다.
개혁 중추는 ‘예수회’
가톨릭 교회는 날로 거세지던 프로테스탄트의 반가톨릭적인 가르침들을 논박하고 정통 신앙 교리를 재확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선 사람들을 다시금 교회의 품안으로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에서 가톨릭 교회가 침체를 거듭하고 있을 때 1560년 경부터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오직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는 투쟁으로서만 인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이 운동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미 지속되고 있던 개혁 운동과 보조를 맞춰 진행됐다.
교황청은 공의회에서 결의한 것을 각 지역교회가 충분히 이해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도록 촉구했고 교황으로부터 쇄신의 주역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던 예수회는 16세기 가톨릭 개혁 운동의 중추가 됐다. 예수회는 특히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과 신학 연구 등을 통해 독일에서 반종교 개혁과 가톨릭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유럽 제국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은 새롭게 변모하는 가톨릭 교회의 모습에 고무돼 쇄신을 실행했고 자기들의 영지 안에서 가톨릭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야기됐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를 통해 제국의 가톨릭 제후들은 자기 영토 안에서 가톨릭 신앙만을 인정하도록 허용됐다.
합스부르크가의 헝가리 왕도 동유럽에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는 것을 억제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1세(1556~1564)와 페르디난드 2세(1619~1637)도 제국 전체를 가톨릭 신앙의 전통대로 수호했다.
1617년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을 때 프로테스탄트를 억제하려 함으로써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정치적으로는 독일 황제의 권위가 실추됐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데 합의함으로써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반종교 개혁과 종교 분쟁이 종결됐다.
전체 교회의 쇄신을 위한 역사적인 물결을 가리키는 용어는 「가톨릭 쇄신 운동」이 적절할 것이다. 반종교 개혁 운동은 대부분의 경우 특정 지역의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이다.
반종교 개혁이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쇄신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교회는 제도와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개혁과 쇄신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반종교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이 됐고 첨예한 종파적 대립을 야기했다.
반종교개혁의 충추에는 트렌트 회의에 있다. 트렌트 회의는 루터 별세 직전에 시작했고, 칼빈 별세 직전에 끝났다.
트렌트 회의(1545-1563)
Concilium Tridentinum(Council of Trent, 1545-1563)는 서방 교회에서 로마 교황주의 진영에서 개최한 회의이다. 회의를 개최한 목적은 루터와 칼빈 진영의 종교개혁에 대한 확고한 자기 교령을 구축하는 것이다. Concilium Tridentinum는 트렌트 혹은 트리엔트로 번역하는데, 우리는 트렌트라고 할 것이고, 공의회, 교회회의, 종교회의, 회의 등은 교차로 사용할 것이다. 트렌트 회의에 대한 평가는 개혁파 교회에서는 역(逆) 혹은 반(反)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평가하고, 로마 교회(천주교) 측에서는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고 평가한다.
트렌트 회의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소천하기 전에(1545년) 개회되었고,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소천하기 전에(1563년) 폐회되었다. 트렌트 회의는 막 형성된 예수회(Societas Iesu, 1539년 창립),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의 주동으로 개최되었다고 한다. 로욜라와 칼빈은 몽테규 대학(college of Montaigu)에서 수학하였다. 예수회 공동창설자인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cus Xaverius, 1506-1552)는 인도와 명(明) 국(國), 왜(倭) 국(國)에서 성경과 신학을 번역하여 정착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어휘들은 자비에르가 창작한 어휘를 답습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회 사제들은 들어가서 활동해서 서양 학문 어휘를 한자어로 연결시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도 예수회 소속이고, 1582년 마카오에 상륙하여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하는 등 열성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 최근에 예수회 소속 사제가 교황이 되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의 종군사제로 세스페데스가 들어와서(1593년) 왜군을 상대로 활동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r)1513-1521)는 마틴 루터의 글에서 41가지 문제(4l propositions)를 정리해서 정죄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교황 진영과 개혁파 진영은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협정문을 채택했지만 결렬되었다. 그리고 교황측에서 1차 소집 통고를 했지만 개혁파에서 거부했고, 1545년에 2차 통보를 했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루터가 소천한 뒤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군대를 동원해서 개혁파를 강제 소환하려고 했다. 슈말칼덴 전쟁으로 교황측이 우세를 차지했지만, 개혁파 진영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항전했고, 1555년 아우스부르크 회의를 통해서 종교의 자유를 확보했다. 그렇게 트렌트 회의는 로마 교회의 자체 회의로 진행되어 결론했다. 개혁파 진영에서 참가하지 않은 것은 결코 자기들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도 지키지 않을 것으로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렌트 회의는 1545년에 시작하여 1563년에 마친 18년의 기간이지만, 3기로 활동하였고 중간에 휴지 기간(10년)도 있다. 1기는 1545년 12월 13일부터 1547년 3월 11일까지 진행했다(교황 바울 3세). 2기는 제2기 1551년 5월 1일부터 1552년 3월 28일까지 진행했다(교황 율리우스 3세). 3기는 1559년부터 1565년까지 진행했다(교황 피우스 4세).
트렌트 1차 결정(1546년 2월 20일-3월 8일까지 4회기(session))은 성경(DECREE CONCERNING THE CANONICAL SCRIPTURES)에 관해서 결정했다. 종교개혁파의 오직 성경에 대해서, 성경 목록을 결정하고 성경과 전통을 공동 권위(pari pietatis affectu ac reverentia )로 결정했다. 벌케이트(Vulgate)와 원어 성경(original texts by Greek and Hebrew)의 권위를 인정했다. Canon 없음, 1장으로 구성함. ※ Canon에 Anathema가 선언됨.
트렌트 2차 결정(1546년 7월 17일, 5회기(session))은 원죄(DECREE CONCERNING ORIGINAL SI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5항, 4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3차 결정(1547년 1월 13일, 6회기(session))은 칭의(DECREE ON JUSTIFICATIO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33항, 16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4차 결정(1547년 3월 3일, 7회기(session))은 성사 중 성만찬(DECREE ON THE SACRAMENTS/ ON THE SACRAMENTS IN GENERAL)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3항, 1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5차 결정(1547년 3월 3일, 7회기(session))은 성사 중 영세(DECREE ON THE SACRAMENTS/ ON BAPTISM)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4항, 0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6차 결정(1547년 4월 4일, 7회기(session))은 성사 중 견진례(DECREE ON THE SACRAMENTS/ ON CONFIRMATIO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3 항, 0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7차 결정(1551년 10월 11일, 13회기(session))은 성체성사DECREE CONCERNING THE MOST HOLY SACRAMENT OF THE EUCHARIST)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1 항, 8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8차 결정(1551년 11월 14일, 14회기(session))은 고해성사(ON THE MOST HOLY SACRAMENTS OF PENANCE)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5 항, 15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9차 결정(1551년 11월 25일, 14회기(session))은 도유성사(ON THE SACRAMENT OF EXTREME UNCTIO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4 항, 3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10차 결정(1563년 11월 11일, 24회기(session))은 혼인(DOCTRINE ON THE SACRAMENT OF MATRIMONY)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2 항, 10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11차 결정(1563년 12월 4일, 25회기(session))은 연옥 교리(DECREE CONCERNING PURGATORY)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0 항, 3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12차 결정(1563년 12월 4일, 25회기(session))은 계속법(DECREE FOR CONTINUING THE SESSION ON THE FOLLOWING DAY)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0 항, 1 장으로 구성함. 면벌부(DECREE CONCERNING INDULGENCES)의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보류한 것이며, 공의회를 폐회하지 않음으로, 1차 바티칸 회의, 2차 바티칸 회의로 연결된다.
트렌트 회의에서는 25회(session)으로 12 분야에서 법령(decree)을 규정했다. 개혁파를 향해서 110개의 Canon(규범, Anathema)를 선언했다. 그 중에서 칭의 부분(6 회기)에서 33회로 가장 많다. 트렌트 회의에 대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4권(1559년)에 교황주의를 비판과 비교할 수 있겠다. 그것은 트렌트 회의에서 개혁파의 주장을 전혀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년)에서는 혼인(24장)을 신앙고백서에 포함시킨 것은 트렌트 회의에 대한 작용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이신칭의 교리를 견고하게 지킨다는 것은 결국 트렌트 회의의 결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세이고, 이신칭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포기하는 것은 트렌트 회의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윌리엄 커닝함의 <역사신학> 3권(서창원 번역) 21장의 “칭의” 부분을 읽어보라.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소시니안(Socinianism)은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사상(Nontrinitarian belief system)으로 개혁파 진영에서 절대적으로 거부한 신학사조이다.
이탈리아 출신 두 명의 평신도 신학자 소시니(Sozzini Lelio, 1525-1562, 조카 Sozzini Fausto, 1539-1604: Socinus, 소시누스)에서 시작된 단일신론 체계이다. 단일신론 체계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구체화된 근대 시대의 사조이다. 자연 종교(自然宗敎, natural religion) 또는 자연신교(自然神敎)이다. 이신론의 배경에는 중세에 등장한 불가지론과 초기 기독교시대의 영지주의가 있다. 초기 이신론자인 17세기초 잉글랜드의 이신론자들은 매우 신중했는데,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기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에 이르면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성향으로 나타났다. 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파괴했다.
파우스투스 소시누스(Faustus Socinus, 1539-1504)는 이탈리아의 시에나 출신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그는 법률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폭넓게 접하고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학에 관심을 돌리면서 그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은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삼촌 라일리우스 소시누스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당시 멜 랑톤, 칼빈, 불링거 등과 친분을 나누며 개혁신앙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반 카톨릭주의자로서 로마 카톨릭교회가 유린한 신앙의 참된 유산들을 찾아내는데 목말라 했던 인물이었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류 종교개혁자들뿐 아니라 극단적 성향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진영과 교류했다. 이러한 삼촌의 영향을 받은 소시누스는 삼촌이 남긴 저술들의 영향 아래 그의 이성주의적 신학 체계를 확립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고 분리주의적 성향을 가진 폴란드 형제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소시누스는 믿음의 궁극적 권위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이 계시보다 우위에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부류는 이신론 체계와 너무나 일치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인간의 상식과 이성에 수용되지 않는 전통적 견해들은 거부했다. 성경은 공교회의 공적 교리라는 울타리에 매이지 않으면서 독자 중심의 해석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사조는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수도사들의 성독(聖讀 ,Lectio divina, 렉티오 디바나) 수행과 공통된 요소이다. 수도사들의 신일합일적 사상과 이성과 직관이 같은 근거를 가질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소시니안들도 오직성경과 전체성경을 견지했다는 것을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의 충족성(The sufficiency of Scripture)을 고수했다.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변증이었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이다. 세르베투스가 “화형되었다”고만 인지하지만, 세르베투스주의가 현재까지 엄청난 위세를 발휘하고 있다. 세르베투스주의는 소시니안(혹은 소키누스주의, Socinianism)로 그리고 유니테리언(Unitarian Universalism)으로 변형되었다. 유니테리언 사상은 회중파가 세운 하바드 대학까지 확산되었다. 다수의 재세례파들이 견지한 신관이다. 유일신론은 이신론적 체계에서 구체화된 신관이다. 소시누스주의는 이신론과도 연관되어 있다. 개혁파 진영에서 소시누스주의에 대해서 수 많은 비판을 쏟았지만 그 영향력을 막지 못했다. 왜 정통파 교회는 이단적 위세를 막지 못할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성경적 위로는 우물을 파는 이삭을 본받는 것(창 26장)으로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
11강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drecht/Dort)
1054년에 한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서방교회)과 정교회로 분열했고, 서방교회는 1517년에 개신교, 개혁교회로 분열했다. 신성로마제국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중심으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영향에서 스위스, 프랑스, 스코틀랜드 그리고 네덜란드에 개혁 사상이 작용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에서 나오면서 먼저 루터 신학을 채용하면서 개혁의 길을 가다가 칼빈 신학으로 개혁파 교회를 구성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하면서 개혁파 신앙으로 투쟁하면서 독립을 쟁취했다(1568-1648).
1568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네덜란드 공화국을 선포한 네덜란드는 이로부터 독립을 승인받기까지 80년 동안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전쟁 초기 네덜란드군 지도자였던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새로운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전 해에 스페인의 포위 공격을 버티어 낸 레이든 시민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1575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레이든에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the University of Leyden)을 세웠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개혁파가 학문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했다. 레이든 대학 건물은 레이든 시내 전체에 흩어져 있고, 가까운 헤이그에도 캠퍼스의 일부가 있다. 대학의 모토는 ‘Praesidium Libertatis’, ‘자유의 요새’라는 뜻이다. 도시가 캠퍼스이고 캠퍼스가 도시이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어로 ‘낮은 땅’이라는 뜻이 있다. 네달란드 지역이 해수면보다 낮은 땅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홀랜드(Holland)라고도 한다. 한자로 음역을 하여 화란(和蘭)이라고 한 것은 홀랜드의 대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튤립을 떠올린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에 의해서 생겨난 나라이다. 1515년부터 무적함대를 가진 스페인으로부터 지배를 받게 되었고, 당시 황제인 카를 5세(Charles V, 1500-1558)와 다음 황제인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는 종교개혁의 개혁교회들을 박해했다. 로마 카롤릭 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혁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30년 전쟁(The Thirty Years' War, 1618-1648)이 발생했다. 윌리엄 3세 반 오란여(Willem III van Oranje, 1650-1702)을 중심으로 하여 158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인해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네덜란드는 이런 배경으로 인해 개혁교회의 역사를 갖고 있다. 네덜란드 교회는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개혁된 교회는 무엇보다 성경을 어떻게 믿고, 고백하는지 신앙고백서가 필요했다. 네덜란드 교회는 세일치문서(Three Forms of Unity),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5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 1563), 도르트 교령(The Canons of Dort, 1619)을 고백한다. 네덜란드 개혁파의 형성은 도르트 신조를 작성하고 채택하는 것이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
네덜란드 교회는 개혁교회로서 신앙과 신학을 견고히 해나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는 신학을 가르쳤다. 네덜란드를 독립 과정에 첫째에 세워진 대학인, 레이던 대학교(University of Leiden)에서 제임스 알미니우스가 신학부 교수로 있었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존 칼빈(John Calvin)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에게 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네덜란드 교회가 개혁교회로서 고수했던 벨직신앙고백서를 수정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네덜란드 교회는 칼빈적 개혁파 신학으로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었고, 예정론을 믿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6). 예정론, 이중예중, 선택과 유기(Election and Reprobation)가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독자들이 많이 혼란을 겪었다. 그럼에도 칼빈은 예정론 진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정론은 하나님 절대 주권 사상에 기초한다. 누가 예정받고, 누가 유기받았는지에 대한 규정(판단)이 아니라, 예정하신 주님을 믿고 그 불변의 자비를 믿고 믿음의 확실성을 갖도록 한 것이다.
알미니우스는 예지예정을 주장하며, 고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1)를 중심으로 개혁교회가 따르던 타락전선택설(Supralapsarian)을 거부했다.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은 창조 이전 선택설과 창조(타락)이후 선택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작정 순서에 대한 토론이다. 타락전선택설도 영원에서 선택이 일어났다.
알미니우스는 예지예정을 주장하면서 기존 개혁교회의 절대예정 신학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가장 큰 문제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미니우스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은 예정론을 반대하여 다섯 가지 항목으로 항의서(Remonstrance)를 주장했디. 그래서 알미니안이라 형성되기 전 그들의 명칭은 항론파(抗論派, Remonstrant)이다(Arminius taught conditional election on the ground of foreseen faith, universal atonement, partial depravity, resistible grace, and the 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
예정은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을 믿을지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는 조건적 예정(Conditional Election: 예지예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는 보편 속죄(universal atonement),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부분 타락(Partial Depravity), 성령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베푸시는 은혜를 사람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저항가능한 은혜 곧 가항적 은혜(Resistible Grace),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도 훗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인내의 불확실(Possibility of a lapse from grace)이다.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drecht/Dort, 1618-1619)
항론을 주장하는 무리는 당대에 학식있는 자들이었다. 결국 네덜란드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네덜란드 도르트(Dordrecht, 도르트레히트)라는 도시에서,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주변 개혁교회의 다른 국가들에서 84명의 교회 대표와 18명의 의회 대표들을 초대해서,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154회의 개혁파 국제 회의, 총회를 개최했다.
이것을 주장했던 이들을 가리켜 항론파(Remonstrants)라고 하는데, 이에 변론하는 반항론파(Counter-Remonstrants) 또는 고마루스파는 개혁교회의 벨직신앙고백서를 보수하고, 항론파에 반대하는 다섯 가지 내용으로 작성한 문서를 체택한 것이 도르트 회의이다. 1618년 11월 13일부터 1619년 5월 9일까지 154회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고, 회의는 라틴어를 공용어로 운용했다. 이 총회에서 알미니우스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배척되었고,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는 성경적인 가르침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의서에 대한 반대의 변론으로 된 5개의 조항이 도르트 교령이 작성되었다. 그래서 도르트 교령을 “반대자들에 대항하는 다섯 조항”(The Decision of the Synod of Dort on the Five Main Points of Doctrine in Dispute in the Netherlands)이라는 다소 긴 명칭이 원 명칭이다.
도르트 교령(The Canons of Dordrecht/Dort)
※ ‘canons’를 ‘신조’라고 번역하지 않으려고 한다. ‘신조’는 ‘creed’에 한정되어 번역하는 것을 제언한다.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Creed를 사용하지 않고, Decree(Decretum)와 Canon을 사용했다. Decree는 교령(敎令)으로 번역한데, 어떤 공동체가 스스로 결정하여 발표하는 문서이다. Creed는 보편교회의 결정인데, 황제가 소집해서 결정한 문서이다. Canon은 규범으로 번역하며, Drcree에 근거해서 배격하는 세력에 대한 문장이다. (라틴어: decretum, decerno, "나는 심판한다")
도르트 교령을 “칼빈주의 5대 강요”(The Five Points of Calvinism, TULIP)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칼빈주의와 도르트 교령이 동등 관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르트 교령은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관한 부분에 대한 토론이고 판결로 보아야 한다.
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안 믿을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도르트 총회가 끝난 뒤에 네덜란드는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라는 제2종교개혁을 겪는다. 잉글랜드 청교도의 저서들이 네덜란드에 들어오면서 변화되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청교도는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브라켈(Wilhelmus à Brakel, 1635–1711)이라는 신학자가 대표적이다. (*)
12강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1485 – 헨리 7세, 튜더 왕가 시작, 절대주의정권 기초확립
1488 - 디아스, 희망봉 발견
1492 -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8 - 바스코 다 가마, 인도 항로 개척
1500 – 로마 교황청, 면죄부 판매
1509 – 헨리 8세, 즉위 / 연산군 시대, 1476-1506
1511 –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1514 – 마키아벨리, <군주론>
1516 -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1517 - 루터, 독일 종교개혁
1519 - 마젤란, 세계일주 항해 / 1519 조광조, 기묘사화(己卯士禍)
1534 - 잉글랜드 국교회 성립(수장령), 헨리 8세의 캐서린과 이혼 문제
1536 - 칼빈, 기독교강요 초판 출판
1543 -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주장
1545 – 트렌트 공의회 -> 1565까지
1547 – 에드워드 6세
1553 – 메리 여왕, 교황과 화해, 카톨릭으로 돌아감, 수장령 폐지, 신교도박해
1558 – 엘리자베스 여왕, 잉글랜드 교회 기초확립(39개 신조)
1560 - 존 낙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작성
1570 - 교황이 엘리자베스 여왕을 출교함
1582 - 갈릴레이, 존 뉴톤 중력의 법칙 발견
1588 - 스페인의 무적함대 잉글랜드가 격파함
1590 - 토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1592 - 임진왜란
1600- 영국, 동인도회사 설립
1603 –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잉글랜드 제임스 1세 즉위, 왕권신수설
1611 - 킹 제임스 성경 번역 출판
1618 -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안주의 배격함
1620 - 영국의 청교도 신대륙으로 이주, 베이컨,<신기관>
1624 - 리처드 몬태규의 반칼뱅주의 논문으로 알미니안주의 득세
1625 - 찰스 1세 즉위
1628 - 의회는 공채나 조세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시민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
1629 - 11년간 의회 없이 통치함
1632 - 갈릴레이, 지동설 주장 / 1627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1637 – 데카르트 <방법서설> : 대주교 로드가 스코틀랜드 지방에 영국 국교회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고, 스코틀랜드 언약도가 형성됨. 스코틀랜드의 귀족, 시민, 농민들은 국민언약에 충성을 바치 겠다는 언약함(언약도).
1640 – 찰스 1세는 전쟁 재원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했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 곧 해산함, 이를 단기의회라고 함. 주교전쟁의 전쟁배상금 확보 때문에 재차 의회가 소집했는데 뜻대로 되 지 않자 해산 명령을 내렸고, 의회가 거부함으로 내전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장기의회라고 함.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의회의 요청에 의해 소집됨.
1642 - 시민전쟁, 의회파와 왕당파 간의 전쟁
1643.7.1. - 웨스트민스터 총회 개최
1643 –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세 왕국이 엄숙한 동맹과 언약 체결.
1644 - 크롬웰의 철기대, 왕당군 격파, 청교도는 곧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
1645 - 윌리엄 로드 대주교 처형
1647.4.29.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완성
1647.11.5. -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완성
1648.4.14. -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완성
1648 -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649.2.22. - 웨스트민스터 총회 해산(5년 6개월 22일간의 회의 기간에 1163회 회합 또는 위원회 가짐)
1649 - 2차 내전에서 독립파와 평등파가 승리, 공화정 수립, 찰스 1세 처형
1651 – 올리버 크롬웰(호국경), 토마스 홈스, <리바이어던>
1658 – 크롬웰 사망(3월), 사보이 선언(9-10월깢, 120 회중교회 200명 대표, 6명의 위원 중 5명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자).
존 오웬,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릿지, 조셉 카릴, 윌리엄 그린힐
1660 – 찰스 2세 왕정복고
1662 - “일치령”
1685 – 프랑스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800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등장
1688 – 명예혁명
왕당파와 의회파로 대치되던 1643년 7월 1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개최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회 이상의 정규모임을 가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는 151명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처음 호명된 30명은 평신도 사정관들로 10명의 상원의원들과 20명의 하원의원들이었고, 나머지 121명은 각 지역에서 선출된 성직자(Westminster Divines)들이었다. 1643년 8월 17일에 체결된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 의해서 스코틀랜드 사역자들이 업저버로 참석해서 함께 신앙고백서 작성 과정에 참여했다.
당시 로마 카톨릭주의의 성직자들은 절반 정도가 문자를 읽지 못한 상태였는데, 총회 대표들 중 85%는 학사, 석사 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이었다. 청년 때에 총회를 목격한 청교도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총회의 대표들은 모두 학식이 뛰어나고 경건하며 능력 있는 목회자들로 사도시대 이후부터 이렇게 탁월한 성직자들이 모인 회의는 이전에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51명의 대표들 명단 중에 25명은 한 번도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두 명은 총회 때에 세상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총회를 반대한 찰스 1세를 두려워했거나, 혹은 감독제도를 좋아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의회는 부족한 위원들을 채우기 위해, 21명의 위원들을 추가로 선정했다. 총회 첫날에는 69명만 참석했다. 대개 평소 회의 참석자는 60명에서 80명 사이였다. 출판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102명의 성직자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가 모든 일정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대표 가운데 적어도 80%는 지역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들이었기 때문에 5년간에 걸친 긴 회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회의 중에 자주 발언한 성직자는 12명 정도였고, 그 중에서도 독립파 대표인 토머스 굿윈은 127차 회의에서 무려 357회 발언해서 1위였다. 많은 이들이 학식과 능력은 있었지만, 듣고 생각하고 투표하는 것에 만족했다. 마지막까지 첨예한 신학 논쟁은 에라스투주의였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소시니안, 알미니안을 배격하는 것에는 일치를 보았다. 에라스투주의는 거부되었지만 실제로 에라스투주의를 분별하기 쉽지 않았다. 1643년 엄숙한 동맹과 언약에서 ‘왕’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구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한 교파를 이루기 위한 총회가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한 믿음 고백으로 한 왕국을 세우기 위한 총회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로마 카톨릭주의를 개혁하고 새로운 교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총회였는데, 다른 교회질서에 대한 의견들이 있었다. 많은 토론과 협의 끝에 최종 문장이 결정되어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다. 즉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장로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작성된 문서가 아니다. 그런데 장로교회만 채택하는 표준문서가 되었다.
※신조, 신앙고백서
신조(信條)는 영, Creed, 라, Credo(Credomus)에 대한 번역이다. 신조는 증표, 상징이라는 의미로서 영, Symbol, 라 Symbolum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신조는 신경(信經)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도신조’보다 ‘신도신경’이라는 용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니케아 신조 혹은 니케아 신경으로 사용한다. 신조는 교리와 동의어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교리보다 신앙고백이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교리가 결정되기 전부터 있었던 문장이기 때문이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다. 기독교 교리는 삼위일체(동일실체, homoouison)과 그리스도 양성교리(theotokos, Dei Genetrix)이다. 또 한 문장은 아타나시우스 신조(Quicumque, Symbolum Athanasianum, Athanasian Creed)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공교회(에큐메니칼 회의)에서 결정한 문서가 아니라는 것이며, 또 문서 작성자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용만 좋으면 됐지 저자가 중요한가?라고 질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교회 문서는 저자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도신경은 공교회 문서가 작성되기 전부터 교회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와 니케야 신조와 권위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로마 교회를 시작해서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절대문서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는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라고 사용한다. 게요(揭要)의 ‘게(揭)’는 ‘게양(揭揚)’에 사용되는 어휘로, 높이 든다는 의미이다. ‘요(要)’는 중요(重要), 요약(要約), 긴요(緊要) 등의 의미이다. 게요는 “믿음의 문장을 높이 든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군대(軍隊)의 군기(軍旗)가 될 것이다. 우리는 ‘신도게요’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의미를 알면 좀 더 명확한 어휘이다. 장로파 신도게요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그것은 장로파 군대의 군기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신앙고백서는 영, Confession, 라, Confessio에 대한 번역이다. 루터파와 칼빈파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루터(M. Luther, 1483-1546)는 1529년 대,소요리문답을 집필했다. 그리고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멜랑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이 작성했고 루터가 인준했다. 루터파(Gnesio-Lutherans)는 멜랑톤(the Philippists) 사후 20년이 지난 1577년, 1580년에 서로 화해와 일치를 위해 새로운 신앙고백,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을 채택했다. 칼빈파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 정착했다. 칼빈파는 각 지역마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신앙고백서는 믿음 문장으로 표준문서(standard text)를 작성한 것이고, 요리문답(要理問答, Catechism)은 믿음 문장을 훈련하기 위한 방편이다. 칼빈은 제네바로 귀환하여 1542년 제네바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루터와 칼빈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되기 전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이들의 요리문답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을 기본 골격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칼빈파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그에 문서를 교육하기 위해서 요리문답을 구성했다.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를 작성했는데, 팔즈에서 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근본으로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아우구스부르크 협약(The Peace of Augsburg, 1555년)을 근거해서 구교도 루터파도 아닌 팔츠에 개혁신학(칼빈파)을 제거하려고 할 때,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 III, 1515-1576)가 불링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불링거는 '참된 기독교를 위한 바른 신앙과 보편타당한 교리', 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지원했다.
네덜란드 개혁파는 벨직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일치신조(Three Forms of Unity)로 채택했다. 프랑스신앙고백서(Gallic or French Confession of Faith, 1599년)은 요리문답을 작성하지 못하고 소산되었다. 벨직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년)도 그렇지만 네덜란드 교회가 표준문서로 채택해서 보존되었다. 이러한 문서는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생존할 때 작성된 문서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과정에는 트렌트 종교회의(Concilium Tridentinum. 1545-1563)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서’를 ‘신조’라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도르트 신조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1618년에 개최된 도르트 공의회이다. 도르트 회의는 국제회의이고 유럽의 모든 개신교 사역자들이 참가한 유일한 국제, 공적 회의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르트는 공회의적 성격이 있지만, 칼빈파의 공회의이다. 한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 The Universal Church)의 공회의(The Council)는 아니다. 트렌트 종교회의도 교황주의의 종교회의이다. 보편교회의 회의는 1054년 이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개혁교회는 454년 칼게돈 공교회(칼케돈 신경)까지는 보편교회의 신조로 인준한다. 7회 공회의에서 4회 문서만 바른 문서로 채택한다. 도르트 신경은 개혁파(칼빈파)의 문서이다.
325년 니케야 신경,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 431년 에베소 신경, 451년 칼케돈 신경이 에큐메니칼 신조이다. 신조는 기독교의 문서이다. 개신교는 루터가 선언한 “이신칭의”를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으로 신봉한다. 개신교 안에도 신인협력(Synergism) 요소를 용인하는 진영과 거부하는 진영으로 현격하게 구분된다. 루터파나 칼빈파는 신인협력을 전혀 용인하지 않는다. 루터파나 칼빈파에서 작성한 문서는 신앙고백서로서, 각 진영의 표준문서이다. 다른 개신교 종파들도 각각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그 신앙고백서가 자기 믿음의 기본 신앙 정체성이다.
한국 장로교는 1907년 독노회에서 12신조를 표준문서로 채택했다. 2012년 김길성 박사와 최성헌 박사는 공통으로 “합동과 통합 등 4개 장로 교단 신앙고백서 분석”했다. 합동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요리문답 그대로 수용했고(1963년), 고신 교단은 성령과 선교 관련해서 첨가된 2 장(35장)이 있는 문서를 수용했고(1969년, 1975년), 통합 교단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 위해 ‘21세기 신앙고백서’ 채택했고(1986년, 1997년), 기장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버리고 진보적 성향의 신앙고백서 작성했다(1972년)고 발표했다.
교단은 자기 표준 문서를 밝히는 것이 교단의 기본이다.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밝히고 탐구하는 것이 교단 신학자와 목사의 기본 훈련이다. 그것은 곧 고대 신조와 성경으로 믿음을 일치시키는 한 방법이다. 믿음 훈련은 곧 믿음의 주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를 믿는가? 그 믿음의 주께서 세상에서 자기를 누구라고 말하는가?를 질문하신다. 그 때 우리는 다시 믿음 고백해야 한다. (*)
- 루터의 탑경험(turmerlebebnis), 믿음의 의롭게 됨 -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ㄱ)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에 대해서 탐구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생에 관한 진리의 영접에 관한 것이며, 또 진리가 어떻게 유지되고 계승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는 이유를 알지 못하며, 죽음 뒤의 공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은 사는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원리적인 사유는 포기하고 사회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어 살면서 시간이 되면 죽어 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고뇌하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참 진리를 파악하며 진리로 살다가 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될 것”(요 8:3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생의 구조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 고뇌가 심해져서 약한 정신병 혹은 심한 정신병이 있게 됩니다. 첨단기술문명과 첨단의료사회에서 정신병이 증가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질적인 문제를 찾지 않으면 일반궤도에서 이탈할 위험이 너무나 큽니다. 인간의 자연, 본질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또 인간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사명에 대해서 인지한다면, 진리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게 하시는 이를 성령, 보혜사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의 영, 보혜사께서 임하시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믿으며 의지하며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 대표적인 믿음의 선진은 마틴 루터입니다.
1512년 어느 날 루터는 수도원의 탑 혹은 비텐베르크 교수실에서 '탑의 경험' (turmerlebebnis)으로 칭하는 회심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루터의 오랜 신앙의 방황이 종지부를 찍는 경험입니다.
루터는 1505년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벼락에 죽었다, 옆에서 죽었다 등등)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가 제언한 법학을 공부하려다가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 사제가 되었고 끊임없는 영적갈등을 겪었습니다. 루터는 중세 교회가 권위를 중시한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인간에게는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 조건적인 공로를 얻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예비적 은혜(prevenient grace)에 힘입어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 즉 온전한 공로에 기초하여 인간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이론이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수 많은 고행을 통해서도 양심적으로 자유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재량공로(meritum de congruo)이건 적정공로(meritum de condigno) 수 많은 고뇌 속에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했습니다. 루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면서, 로마서 1:16-17에서 결정적인 답을 찾았습니다.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6절).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됩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신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루터는 1521년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루터는 주저하지 않았으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복음, 하나님의 능력,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도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복음을 감추거나 그 복음에 소극적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며 반역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둘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16절). ‘하나님의 의’는 루터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치환해서 제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의로 치환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구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구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그리스도의 의의 성분에 대해서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연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첫째 요소는 죄사함이며, 죄사함으로 주어지는 거룩한 삶과 영생의 선물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댜(17절,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우리시대에는 ‘믿음(πίστις)’에 대한 규정을 하려고 많은 논의를 합니다. faith가 아니라 faithfulness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선언도 faith가 아니라 faithfulness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faithfulness는 ‘충성’으로 번역되다가 ‘신실함’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faith는 ‘믿음’ 혹은 ‘신앙’입니다. 믿음은 대상으로 인도하고 붙들도록 하는 도구이고, 신실함은 그 성품이 1차 목적이고 최종 목적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은 두 종류의 믿음이 아니고, 성숙한 믿음의 정진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도록 합니다.
넷째,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17절). 루터는 믿음의 체계에 모든 근심과 염려와 불안을 떨쳐 버렸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근심과 염려와 불안이 업습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믿음을 주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구하기 때문에 근심과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기도 하고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신자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도록 십자가 신학을 외쳤습니다. 이 믿음의 교리는 로마서 1:17 말씀이지만, 사도행전에서 고넬료에게 세례를 준 베드로의 행동이었고,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입니다. 할례자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주의 종은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무할례자의 교회와 할례자의 교회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모든 장벽을 헐고 연결하는 하나님의 선물, 도구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3-18)
루터는 탑경험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확증을 했고, 확증된 진리는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어도 두렵지 않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단을 너머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주어진 진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가진 진리의 확증은 인간적 아집이 아니라 성령의 돌봄으로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인간의 아집과 성령의 역사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전파의 차이에 있습니다. 루터로 말미암아 잠재되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회복되었고, 그 복음은 세계 만방에 개혁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루터가 확증한 그 진리에 동의하면서 종교개혁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루터를 믿음의 합당한 선진으로 생각하고 종교개혁을 탐구합니다. 한 믿음에 여러 종파가 있는 것은 믿음의 사람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이 같다면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고, 믿음이 다르게 보일지라도 주 예수의 믿음과 증진이 같다면 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주 예수를 왜곡하는 다른복음은 주의하며 배격해야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가장 아름다운 보암직한 먹음직한 탐스러운 다른복음으로 유혹합니다. 다른 복음을 배격할 유일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고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어린양 우리 주 예수, 만유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믿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의 복음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중세 교회가 증명했습니다. 칼빈은 유사한 형태를 유대교가 했다고 제언합니다. 그러한 폐단은 현재 교회도 피할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들의 빛을 말 속에 넣어둘 수 없습니다. 빛을 발하싶시오. 복음을 전하십시오. 복음을 변증하십시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종들이여!! 구원,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복음을 전합시다. (*)
*2024년 1월 14일 주일예배 설교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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