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담임)의 이근삼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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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신교회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의 최초 접촉과 관계는 이근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근삼은 1946년 고려신학교 1회 학생으로 입학한 1951년 5회 졸업생이다. 그는 박윤선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네덜란드 개혁신앙을 배운다.
당시 고려신학교는 교수를 양성할 목적으로 5회 졸업 동기생 홍반식(구약학), 오병세(신약학), 이근삼(조직신학)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1953년 이근삼은 미국에서 5년 동안 고든대학(B.A), 훼이스 신학교, 카버넌트 신학교(Th.M),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변증학 1년)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한다.
여기서 그 후 박사학위 과정 공부를 위해 1958년 8월 네덜란드 자유대학으로 향한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은 일찍이 그의 스승 박윤선이 유학(1953-1554)했던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개혁신앙의 토대 위에서 박사과정을 마무리(1962.7)한다. 이근삼은 네덜란드 유학 시절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성도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 만남은 자유 개혁교회와 고신교회의 관계로 확대된다.
이근삼은 미국 유학 시절 알던 네덜란드 지인(G. A. Blaauw)이 소개해 준 바우터스(D. N. Wouters, 1930-2017) 목사의 도움을 받는다. 바우터스 목사는 네덜란드 개혁교회 가운데 소위 ‘총회파’(synodaal 이 교회에 관해서는 후에 설명한다) 소속이었다.
그의 헌신적 도움은 먼 이국땅 동양에서 온 이근삼의 유학 생활에 큰 힘이되었다. 바우터스 목사 가정은 이근삼을 가족같이 대했다. 이근삼은 1953년 이후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네덜란드 일간지 트라우(Trouw 1959.10.29.)는 동양 유학생 이근삼의 이야기를 기사화했다. 가족의 이별을 감수하는 유학 생활이 신기했던 것이다. 마침내 바우터스 목사는 기금을 모아 이근삼의 가족을 데려왔다(1961.2). 대단한 섬김이고 사랑이었다.
1962년 5월 태어난 딸의 이름을 ‘선화’(화란의 선물)로 짓는다. 같은 해 7월 31일, 출산한 어린 딸을 데리고 로테르담을 출발하여 32일의 긴 항해 끝에 9월 1일 부산항에 도착한다.
이근삼은 교의학 교수 베르카우어(G. C. Berkouwer)의 지도하에 석사 과정(Drs.)을 마친다. 박사 과정은 헤르만 바빙크(H. Bavinck)의 조카 요한 바빙크(J. H. Bavinck) 아래에서 변증학을 전공한다.
요한 바빙크는 <선교학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s, 1960)이란 책을 써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이근삼의 박사학위 논문(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은 일본의 국가종교 신도(Shinto)에 관한 것이다.
어느 날 이근삼은 흐로닝언(Groningen)에 있는 ‘자유’(vrijgemaakt) 개혁교회의 한 장로를 알게 된다. 그를 통해 자유 개혁교회 목사 스탐(C. Stam)을 만난다.
이근삼은 암스테르담에서 멀리 위치한 북부 지방 흐로닝언 남(Zuid) 교회까지 가서 설교할 기회를 얻는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주 안에서 같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한국의 고신교회에 대해 알리는 기회였다.
이 만남으로 이근삼은 자유 개혁교회와 아주 가까워진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이근삼을 통해 한국의 고신교회의 진리 파수와 거룩한 삶을 향한 투쟁에 큰 동질감을 느낀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역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이근삼 목사를 신뢰하며 좋아한다. 자유 개혁교회의 상황과 한국 고신교회의 역사가 매우 비슷한 점이 서로를 엮는 끈이었다.
두 교회는 어느새 서로 형제자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이근삼이 유학을 마칠 때까지 지속되고, 귀국 후 교회적 연결로 이어진다.
첫 공통점은 두 교회 모두 교회로부터 축출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공통점은 축출된 시점이 두 교회 모두 전쟁 중이었다는 것이다. 자유 개혁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이고, 고신 교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이었다.
그리고 셋째 공통점은 두 교회 모두 종교 개혁자 칼뱅의 신학과 개혁신앙을 따른다는 점이다. 넷째 공통점은 두 나라와 교회가 일본제국의 피해자라는 점이다. 다섯째 공통점은 좌측에 자유주의와 우측에 경도된 근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임경근
네덜란드와 한국 교회 이야기(12) 두 네덜란드 교회에 비친 한국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한반도에 있는 신생 교회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대한민국에 대한 소식은 주로 선교사들이 쓴 선교 소식지에 실린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의 주간지 <더 레포르마치> 1954년 3월 13일 기사에 한국에 관한 글이 나온다. 캄펀 신학교 교수(설교학/예배학)였던 코르넬리스 페인호프(Cornelis Veenhof)가 쓴 “한국 교회”(De kerk in Korea)라는 글이다. <허트라우>(Getrouw)지에 소개된 <The Missionary Standard> 선교 잡지의 한국 교회에 관한 기사를 읽고 다시 쓴 것이다. 어떤 선교사가 한국 교회를 방문한 기록이다. 여기에 소개된 교회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를 주목한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일 년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 5시면 교회에 모여 새벽기도를 한다. 그것도 일제히 소리 높여 각자 통성으로 기도한다. 서양 선교사의 눈에는 신기하다. 아주 특별한 방식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 교회는 고난받는 교회이다. 한국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다. 전쟁 때 공산군이 교인들을 교회당 안에 가두고 바깥에서 문을 폐쇄했다. 그리고 건물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 60명을 죽인 사건도 언급한다. 긴 창으로 죽은 시체를 다시 찔렀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무시무시한 시련과 핍박을 견뎌내도록 도와주셨다고 전한다. 그런 가운데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에 선교사는 감동한다. 셋째, 한국 교회는 헌신하는 교회이다.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당을 재건하기 위해 한국인 성도는 재물을 아낌없이 바쳤다고 한다. 논 팔고 집 팔아 교회당을 재건하는 데 사용했다. 그런 헌신은 서양 선교사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구제 사역에도 열심이라고 전한다. 고아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과 어린이를 위한 보호소를 운영하며 돕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페인호프는 그런 아름다운 한국 교회의 모습을 전하면서 자기 교회 내부의 복잡한 싸움을 바라보며 반성한다. 고난받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자신들을 얼마나 감동케 하는지 고백한다. 만약 하나님이 같은 고난을 네덜란드에 보냈다면, 자신들은 한국 교회처럼 견뎌내지 못할 거라고 자세를 낮춘다.
또 다른 기사가 1959년 10월 3일 네덜란드 총회파 개혁교회의 대표 일간지 <트라우>(Trouw) 신문 3면에 실렸다. 이근삼의 유학 생활 인터뷰 기사이다. 가족사진도 함께! 신학 공부를 위해 한국을 떠나 외국 유학하는 동안 가족과 6년이나 떨어져 있음이 신기한 이야깃거리였다. 사진에는 사모와 아들(고려신학대학원 이신철 선교학 은퇴 교수)이 이근삼의 무릎에 안겨 있다. 왼쪽에는 한자 ‘李根三’과 오른쪽에는 한글 ‘이근삼’의 친필이 있다. 이근삼은 자유대학에서 공부하는 백여 명의 외국 출신 학생 중 6년이나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신기한 기인으로 소개된다. 인터뷰에서 이근삼은 서양 사람처럼 자신도 가족과 함께 있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상황임을 설명한다. 교회를 위해 공부하는 임무가 가족보다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기자는 이런 정신력을 가진 이근삼에 비해 자신들은 너무 쉽게 신앙 생활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와 반대하던 지도자들의 고난에 주목한다. 해방 후 한상동 목사가 장로교회로부터 쫓겨나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비슷한 칼뱅주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근삼은 그 교회를 “hervormden”(네덜란드 국가교회 이름) 혹은 “gereformeerden”(국가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개혁교회 이름)이라고 소개한다. 소수 그룹이지만, 고신 교회의 신도가 15만, 교회 550개, 목사 130명이라고 밝힌다. 한국 교회는 불교와 같은 이교 세속문화와 충돌하고 있다면서 이근삼은 한국에 돌아가면 교육을 통해 칼뱅주의적 세계관을 전해주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근삼은 미국 유학 당시 받은 장학금을 아껴서 네덜란드로 오는 여비로 썼다.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유학도 장학금으로 가능했다.
네덜란드 총회파 개혁교회(GKN synodaal)의 일간지(<Trouw>)는 신기한 동양의 학생에게 관심이 있지만, 자유 개혁교회의 잡지(<Getrouw>)가 교회에 관심을 보인 것과 미묘한 차이가 엿보인다.
* 더 많은 사진 자료는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잘 정돈된 상태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13) 고신 교회 파송 첫 네덜란드 유학생
1994년 필자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결정과 추천이 있어서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보에 유학생 모집 공고를 냈을 때 필자가 지원했고 선발된 것이다.
고신 교회가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자매 관계였기 때문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가 고신 교회의 학생을 캄펀 신학교에 추천하면 받아주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이근삼은 네덜란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1962) 가까이 교제했던 흐로닝언 교회의 스탐(C. Stam) 목사와 지인들에게 고려신학교 교수 요원을 교육해 줄 것을 요청했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곧 바로 요청에 응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근삼 교수는 당장 유학생 파송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네덜란드 첫 유학생은 차영배(1929-2018)였다. 차영배는 울산 온양 출신으로 진주 사범학교를 거쳐 국립해양대를 다니다가, 1953년 고려신학교에 입학했고, 1961년 졸업한 후, 대구 계명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고려신학교의 추천을 받아 1964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교의학 석사 학위(Drs.)를 마치고(1968년) 박사 학위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1971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한국외국어대 화란어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총신대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바빙크를 한국에 전한 신학자로 알려졌다. 그는 1995년 은퇴했다.
차영배는 고려신학교 파송으로 캄펀 자유 개혁교회 신학교에서 공부한 최초의 유학생이다. 차영배를 유학생으로 입양(?)한 교회는 네덜란드 중부지방에 위치한 분스호우턴-스파컨부르흐(Bunschoten-Spakenburg) 교회였다. 이 지역교회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가 융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옛 항구 도시의 아름다운 풍광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인구는 2만 명 정도이지만, 주민의 70-80%가 기독교인이고 특별히 자유 개혁교회 성도가 많다. 예배당이 무려 4개나 되고 4천 명의 교인이 있다.
필자의 유학 시절 이 교회에서 목회하는 네덜란드 목사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다. 목사 가족은 한국 남아를 입양해 양육하고 있었다. 또 인도에서 여아를 입양했는데, 결혼 후 20년이 되던 때 본인의 혈육 아이를 출산하는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캄펀에 살고 있는 필자의 가족을 입양한 아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초대한 것이다. 참 경건하고 아름다운 가정이었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 분스호우턴-스파컨부르흐 교회는 고려신학교가 추천한 유학생의 비용을 모두 책임졌다. 학업과 생활비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와 한국을 오가는 여비와 이사비용, 그리고 생활비, 도서비, 휴가비, 자녀 양육비 등 모든 것을 제공했다. 박사 논문을 책으로 엮어 출판하는 출판비도 네덜란드에서 부담했다. 아주 특별한 지원이었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는 한국 유학생을 품고 신학 공부를 하도록 전적으로 지원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더 레포르마치’ 10월 24일 교회 뉴스(Kerknieuws)에 차영배 목사의 입국 사실을 고지하며 기대감을 표현했다.
차영배는 개인 자격으로 캄펀(Kampen)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신 교회를 대표하고 있었다. 분스호우턴-스파컨부르흐 교회는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를 대표하고 있었다. 차영배 개인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었겠다 싶다.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한국 고신 교회가 서로 힘들고 어려운 같은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서로 자매교회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기에 유학생을 받는 쪽이나 보내는 쪽이 모두 차영배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실제로 다음 해 1965년 흐로닝언 교회는 ‘코리아 행동대’(Actie-comité-Korea)가 결성되어 고신 교회와 교류하고 돕는 단체를 만든다. 동시에 흐로닝언 지방 노회는 한국 고신 교회와 자매결연 가능성을 타진하는 연구위원회를 구성한다.
고신 교회가 장로교이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연구한다. 그런데 고신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1965년 고신 교회도 총회적으로 네덜란드 자유 개혁교회와 자매결연을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단을 구성한다. 고신 교회가 신학 유학생을 보내면서 두 교회의 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출처 : 고신뉴스 KNC(http://www.kos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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