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준
제 목 :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하여 칭찬과 영광을 얻었다(241124)
성 경 : 데살로니가전서 2 : 17 - 20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제2차 선교여행 기간에 세워진 교회다(빌립보교회, 고린도 교회 포함, 행15:36-18:22).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지역에 3주간 머물면서 전도하여 세워졌다. 사도 바울은 항상 혼자서 전도하지 않았다. 항상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그 하나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반역죄인들을 다시 자기 백성 삼고자 대신 죗값을 갚으셨다. 그 죗값을 갚는 방법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 죽음으로 대신 속죄 제사를 바치는 것이었다. 그 대신 속죄 죽음의 확증이 부활하심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 죽고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은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영원히 살게 된다고 전했다.
바로 그 구원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그리스도가 연합을 이룬 한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믿음의 사람은 몸이다. 이 연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어서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의 신비다. 이 믿음의 신비는 그리스도이신 예수와 영원히 연합된 몸이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하셔서,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된 몸인 믿음의 사람도 영원히 살게 된다. 그 영원한 삶의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고로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 영원한 처소이다.
그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하시므로 시작되었다. 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완성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다. 곧 재림의 날이다. 그 재림의 날에 모든 죄가 소제(掃除)되고 부활하여 영생의 몸을 입어 구원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3주간 전도하여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졌다.
바로 그 교회의 특징은 유대 동족들의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으로 믿고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영생소망의 인내로(살전1:3) 외적인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참신한 믿음 생활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이었다. 부활과 영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평화로운 사람들이었다. 평화로운 사람들이란 마음이 안정되어 요란하지 않고 고요한 마음을 말한다. 그 교회가 옛사람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복음 진리를 더 많이 가르치고자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유대인들이 깡패들에게 돈을 주고(행17:5) 사도 바울이 전도하지 못하게 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났다.바울은 베뢰아와 아덴을 거쳐서 고린도로 이동하였고, 실라와 디모데는 마게도냐 지역(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포함하는 큰 지역)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 후 고린도로 복귀한 실라와 디모데의 보고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음을 사도 바울이 듣고 칭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위로하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그 교회를 다시 가고자 시도했으나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일을 하다가(행17:16-) 가지 못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는 가운데(행18:1-) 실라와 디모데를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보고를 들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고 위로하는 서신을 보내며 매우 보고 싶음을 전했다(살전3:6).
17절, 18절을 보자.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17).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18).”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할 일을 남겨둔 채 유대인들이 보낸 깡패들에게 쫓겨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마음에 담고 떠났다. 그들을 보기를 원하는 것은, 복음의 도를 풀어 충분히 전하고 가르치지 못함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고 떠난 곳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더더욱 핍박을 받아서 떠난 장소는 다시 가지 않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애정이 커서 다시 보기를 바랐었다(1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잠시 떠나 있다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로 다시 가서 복음의 도를 해석해서 충분히 가르치려는 생각이 무산됐다. 사도 바울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까지 멀리 갔다.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도움을 받아 복음의 도 전파의 문이 열려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일로 바빠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지 못했다.
사도 바울이 한 번 혹은 두 번 데살로니가 교회로 돌아가기를 바란 것은 베뢰아에서 유대인들이 신사적이어서 바울의 말이 성경대로인지 확인하기를 바랄 때였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전도하다가 당한 실패였다. 바로 그때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고 싶었으나,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일로 인하여 가지 못했다. 데살로니가와 고린도는 먼 거리였다.
또 사도 바울이 사탄이 막아서 데살로니가 교회로 다시 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테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심판을 말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반역죄인들을 위한 대신 속죄 죽음이었음이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당시 철학자들에게는 구원이란, 영혼이 육체를 떠나 신들의 세계로 가는 것이었다. 철학자들은 육체를 매우 천하게 여겼다. 따라서 육체가 부활하고 영생의 몸을 입는 구원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영혼만이 육체를 떠나 신들에게로 간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었다. 그 철학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영·육 간에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고 말하지 못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십자가의 도를 부끄럽게 여기고 말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몇 사람이 바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랐으나, 아테네에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린도로 갔다. 이 일을 생각하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는 길을 사탄이 막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역죄인 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상에 피 흘려 죽었다는 사실을 뺀 전도는 전도가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 죽음은, 반역죄인 된 자들을 대신한 십자가상에 죽음이고, 부활은 그 십자가상의 죽음이, 반역죄인 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음을 확증하는 사건임을 전해야 전도다. 그 전도로 복음 곧 십자가의 도를 듣는 사람이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 반역죄인 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위해서 전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해야 한다. 그 증언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교회에 더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18).
19절, 20절을 보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20)”
사도 바울은 전도자였다. 그 전도자의 자랑은 데살로니가 교회였다.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3주간의 전도로 교회가 세워졌다. 그 교회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다.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바울이 전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 앞에 살았다. 바로 이 일이 바울 전도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면류관이었다. 바울은 자랑거리 데살로니가 교회 같은 곳이 없었다(19).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파를 위탁받았다. 사도로서 사명과 소임을 다했다. 많은 사람이 주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루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으로 전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알고 위탁한 대로 전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다. 바로 그 칭찬받음이 바울의 영광이다. 이러한 칭찬과 영광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서 전도하자.
전도자가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전도자의 마음에 기쁨이 솟아난다. 성령의 역사로 나와 같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출생하니 기쁨이 넘쳐난다. 이런 전도자의 기쁨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도에서 크게 맛보았다. 이런 기쁨은 전도하여 주 예수를 믿으면 더욱 커지는 법이다. 전도자의 기쁨은 사람들이 자기의 전도를 듣고 주 예수를 믿게 될 때 생겨나는 기쁨이다. 전도하여 결실을 거두면 전도를 받아 주 예수를 믿는 사람과 전도자에게 주 예수의 생명이 함께 역사한다. 그리하여 두 당사자에게 생명의 기쁨이 살아난다. 이 기쁨을 나도, 너도 우리가 누리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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