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고찰
최낙범 박사(총신 교수, 새순교회)
우리는 만남으로 주어진 생을 살아간다. 처음 세상에 올 때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부모를 만나게 되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친구와 이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은혜로 만나게 된다. 그 어느 만남도 우리의 삶에서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소중한 만남들이요, 필요한 만남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무엇일까? 하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부모와의 만남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친구나 이성, 혹은 스승과의 만남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것은 이러한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건축하고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삶이 전개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하나님과의 만남을 삶의 우선에 두고 그를 섬기며 사는 것을 중요하다고 할까?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을 통해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음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후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우리 위해 부활하게 하시므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길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의 한계극복이나 죄를 씻고 구원받음이라는 이유만 가지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중요한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받은 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성령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데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우리가 자연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데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는 아담과 연합되어 그로부터 죄를 전가 받고 죄인(옛사람)이 되어 죽음의 노예로 살던 삶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로부터 의를 전가 받고 의인(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는 아담을 머리로 한 세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던 삶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공동체, 즉 그리스도인들과 연합(교회)을 이루며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갖는 독특한 존재방식이요, 존재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를 이 땅의 많은 사람 중에 죄인(옛사람)에서 그리스도인(새사람)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구속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일에 이토록 중요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를 살펴보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는 하나님이 영원세계에서 시행한 것으로 우리를 선택할 때 이미 구속중보자인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성령이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한 전제 사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에베소서1: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이 본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에 대해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실제로 이 본문은 칼빈의 이중예정론에서 선택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때 많이 사용한다. 예컨대 선택이 창조 이전이냐? 아니면 타락 이후냐의 문제에서 선택의 성경적 진술은 창세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킨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란 용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본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는 창세전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선택하므로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놓은 것이다. 또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인류 중 일부가 선택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 중에서 선택받은 우리들을 가리킨다.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우리(성도)에게 구원의 모든 축복(거룩하고 흠이 없는 백성 되는 것)이 미치게 하는데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란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후 그로 하여금 구속사역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신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영원세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창세 후 시간세계에서 성령이 시행하는 모든 구속사역의 기본 전제일 뿐 아니라 구속사역의 기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창세 이전부터 인간의 모든 공로를 배제시킨 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시작하셨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둔다. 이는 창세전에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이 구속협약을 맺을 때 구속중보자는 그리스도로, 속죄방법은 희생제사로, 선택과 유기로 나누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그 후 때가 되매 하나님의 구속경륜 가운데 구속중보자인 그리스도가 이 땅에 성육신 하시고 우리들의 대표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므로 구속사역을 이루셨다.
이 내용은 바울의 대표성 원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인류의 첫 대표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그가 지은 죄가 그에게 연합된 인류에게 전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와 죽음이 온 인류에게 동일하게 전가되므로 현재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둘째 대표이신 그리스도가 구속경륜 가운데 이 땅에 성육신 하신 후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므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더 나아가 죄의 결과인 저주와 죽음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이에 대한 성경적 진술(롬 6:3~5; 6:10~11)을 보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연합)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0~11)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물이 아니라 인류의 둘째 대표로서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대신 죽으심이요, 삼일 만에 부활하심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려 내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말씀들은 창세전에 선택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사건 때 함께 죽었음을 보여 주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때 함께 살아났음을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고 늘 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객관적으로 잘 보여주는 유일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사건이다. 즉 그리스도가 대표로서 죽을 때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연합하여 죽었고, 그리스도가 대표로서 부활할 때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연합하여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의 근거를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사역(십자가와 부활)에 두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제는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느냐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이루어놓으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택함 받은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단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소명, 중생, 회개, 신앙(믿음),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 중에서 어느 단계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믿을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믿을 때 그러니까 칭의와 수양 이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선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후에 신분적 변화인 칭의와 수양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순서 혹은 구원서정의 몇 단계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할 때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믿음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는 기독론적 메시지에 대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다.”라는 구원론적 메시지에 대한 믿음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교호적으로 사용하거나 종합하여 사용해도 무방하겠지만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였다.”라는 구원론적 메시지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을 더 실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였다.”라는 구원론적 메시지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는데, 어떤 방식으로 연합이 이루어지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는 복음을 제시했을 때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의식을 가지고 회개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는 순간,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결국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과 권세를 날마다 공급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전 과정의 기초를 이룰 뿐 만 아니라 구원의 전 과정을 가능케 만들어 준다고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방식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갖는 특징은 인간에 의한 일시적이고, 물리적이며, 외적인 연합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생명의 연합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며, 신비한 연합이라는데 있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세력도 이 연합을 파괴하거나 이 연합으로부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또 그분과 끊임없이 교제하고 섬기면서 복음명령과 문화명령을 잘 수행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연합으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만남을 자랑하고 사는데, 그리스도인들 서로와의 만남은 어떠한가? 이런 물음 앞에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사는 사람인데, 특별한 만남과 삶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비 그리스도인들과는 생명의 본질이 다른 사람들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비 그리스도인들의 만남과는 분명히 다른 만남이어야 한다. 어떤 원리아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할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왜 중요한지에 대하여 살필 때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원리로 만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한 생명의 뿌리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아 사는 몸 된 그리스도의 지체요, 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현실적으로 저마다의 입장과 처지가 다를지라도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만남을 보면 안타까운 점이 너무 많다. 즉 이 말은 우리의 만남을 볼 때 만남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동떨어진 만남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뿌리박혀 있는 지체들의 외적이고 세상적인 그 무엇에 매력을 느끼고 그것에 근거하여 만나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도인들의 소유, 학력, 환경, 주위배경 등을 보고 상대를 선택하고 상대와 교제한다든지, 혹은 비 그리스도인들처럼 외적목적이나 우정의 정신에 호소한다든지 혹은 한 팀의 단체정신이나 동지애 등에 기초하여 만나고 일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상대방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원리로 만나지 않고 세상적인 동기와 원리로 만나다 보니 상대방이 자기마음에 맞지 않거나 자기욕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산 형제자매를 감정으로 대하고 만다. 또 그것이 자신의 인격과 신앙성숙에 어떤 영향이 오는지 아예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어진 직분이 계급과 권력인줄 알고 그것을 무기삼아 무분별한 비판과 권위행사를 감행하고 만다.
결국 이런 만남에는 기쁨과 평안과 신뢰대신에 불안과 대립과 갈등이 고조될 수밖에 없고 긴장이 떠날 날이 없게 된다. 과연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런 현실을 보고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구현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자기이름과 자기유익, 자기실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도용한 세상공동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과도 연합되었다는 공동체의식과 시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우리는 저마다의 외적환경과 교육정도, 생활양식 등에 바탕을 둔 그런 만남이 아니라 만남의 근거요, 원리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자매로 알고 만나야 한다. 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령으로 이루어진 연합을 보존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형제자매들을 겸손으로 만나야 한다. 또 오래 참음으로 교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하며 만나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원리 아래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을 다시 시작하면 우리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풍성한 거룩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느끼면서 서로를 섬기고 세워 주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될 것이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가슴에 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전사들이 될 것이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확장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최낙범 박사(총신교수, 새순교회),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B.A), 총신대신학대학원 및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 졸업(Th.M), 숭실대학교 대학원졸업(Th.M), 미,Kernel University 대학원 졸업(Th.D),총신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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