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장로교란 무엇인가?(2) 대한민국에서 장로교란 무엇인가?

형람서원 2024. 3. 4.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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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란 무엇인가?(2) 대한민국에서 장로교란 무엇인가?

 

최근 챨스 핫지 박사의 『장로교란 무엇인가?』(양남식 역. 젠틀레인, 2021)가 출판되었습니다. 유투브 영상에서는 What is Presbyterian?(장로교란 무엇일까?)라는 제목의 영상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장로교 사역자들이 장로교에 대해서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그래서 저도 시험적으로 “장로교란 무엇인가?”(형람서원TV)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담아보기도 했습니다. 소개하는 영상이 많다는 것은, 많은 장로파 사역자들이 고민하고 있으며, 아직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박사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대표하는 한 학자입니다. 한국 장로교 신학의 두 축은 “구(舊, 옛날) 프린스턴”과 “프린스턴” 전통입니다. 핫지의 아들 A. A. 핫지(Archibald Alexander Hodge, 1823-1886),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 박사까지, 1929년 혹은 1935년까지가 구(舊) 프린스턴을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그들의 저술은 한국 장로파가 책임지고 번역해야 할 작품입니다. * 참고로 박형룡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프린스턴에서 공부했습니다. 한경직 1926-1929년, 김재준 1927-1932년에수학했습니다. 1923년에 메이천 박사가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출판했습니다.

1929년 메이천 박사(J. Gresham Machen, 1881-1937)는 프린스턴 대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면서 OPC(Orthodox Presbyterian Church) 교단을 형성했습니다. 메이천 박사의 뒤를 이는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 1895-1987)와 존 프레임 박사(John M. Frame, 1939- )가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신학 전통은 구(舊)-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전통을 추구한다고 합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은 “프린스턴 전통”이며,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총신대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으로 강연하면서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정체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신학의 흐름이 과거에 메일 필요는 없지만, 과거의 신학 정체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흐름의 방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총신대학교는 “구-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신학 전통과 “청교도 개혁주의” 전통이라는 같지 않은 두 명제를 갖고 있습니다. 전자는 “역사적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구 프린스턴 전통에서는 후천년론적 종말론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청교도 종말론입니다.

 

미국 장로교회는 1683년 아일랜드에서 식민지로 온 프랜시스 메케미(Francis Makemie, 1658-1708) 목사를 중심으로 1706년에 필라델피아에서 독노회를 조직하며 태동했습니다. 필자는 장로파(Presbyterian)란 어휘가 미국에서 정착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로파의 근원이 스코틀랜드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Presbyterian이란 것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교회가 Presbyterian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본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자유 교회”로 나뉘어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843년에 분열했고 2007년에 연합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연합에 반대한 자유교회가 있습니다. 자유교회는 세계에 약 150여개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먼저 분리파 청교도가 정착하여 회중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와 유럽의 다양한 기독교 종파들이 유입되었습니다. 그 중에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회들은 장로파(Presbyterian)로, 다른 교파와 구별된 자기 정체성을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식민지 시절에 1차 대각성운동(1734-1742)이 있었고, 1776년 7월 4일은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이고, 독립전쟁에서 승리는 1783년 9월 3일로, 13개주로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1차 대각성운동은 독립 전에 회중파 사역자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장로파와 회중파는 대각성 운동에 대한 평가를 놓고 성향이 나뉘었습니다. 독립한 후에 발생한 2차 대각성운동은 챨스 피니(Charles Grandson Finney, 1792-1875, 부흥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은 침례교 사역자 디엘 무디(D. L. Moody, 1837-1899, 세대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장 먼저 도착한 회중파는 새빛파와 구빛파로 나뉘었고, 장로파는 신파(신학파)와 구파(구학파)로 나뉘었습니다. 대각성운동에 호의적인 장로파는 신파이고, 회중파는 새빛파입니다. 새빛파에서도 극단적인 성령파는 별도로 구분되기도 합니다. 필자는 3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이 있는 신파적 성향의 장로교 사역자들이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한 장로파에서는 규범에서 벗어난 도전적인 행동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교회에서 조지 뮬러(회중파), 무디 등의 이름이 유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은 신파적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로파 첫 선교사 언더우드는 북장로파 소속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들어가서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을 요청했고, 남장로교 선교사들도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호주 선교부와 카나나 선교부에서도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1884년에 시작된 선교에서 1907년 독노회가 설립되는데 표준문서는 “12신조”로 했습니다. 12신조는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고, 인도에서 사역하는 장로파 선교사들이 작성한 것입니다. 인도에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신파적 경향이 있다고 평가하는데, 그들이 작성한 12신조 서문에는 도르트 교회법규와 웨일즈-칼빈주의(칼빈주의-매도디스트)에 대해서 포용할 것을 명기되어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대한 표기는 당연합니다.

 

1885년 조선(朝鮮)의 제물포로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들어왔습니다. 대각성운동의 부흥운동(초교파 운동)의 여력과 근본주의(초교파 운동)이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준 사조입니다. 우리나라에 다수의 장로교 사역자들이 사역하며 장로교회를 세웠지만 장로교 신학의 정체성으로 교회 세움에는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청(淸)나라 산동성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선교사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 목사가 제시한 선교정책(삼자 원칙: 자립 - self supporting, 자치 - self govering, 자전 self - propagating)을 수용하면서 더욱 장로교의 모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역자들은 한국 장로교회의 명패는 장로교이지만 교회 운영은 회중파적 교회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그 분석은 타당합니다. 한국 장로교회들이 장로교의 신학 이해와 정치 원리로 장로교회 세움을 이룬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그 질문 이전에 장로교회를 사모하는 장로파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장로교회의 사역자로서 명예롭게 생각하는 사역자가 얼마나 될까요?

 

챨스 핫지 박사의 『장로교란 무엇인가?』는 강연을 묶은 소책자입니다. 장로교 이해를 위해서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챨스 핫지 박사가 차지하는 위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챨스 핫지 박사의 장로파 교회 이해에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긴밀한 연속성을 갖고 있음이 표명합니다. 미국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잉글랜드 장로파 정치원리의 사역자들이 교회를 세우며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장로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장로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으로 필자는 생각합니다.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사역자들은 선교지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지만 동일한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타 문화권이기 때문에 동일한 역사적 선상에서 연속성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각성 운동에서 우호적인 사역자들은 초교파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고 1900년 중반에 발생한 자유주의와 투쟁을 위해서 형성된 근본주의 운동도 초교파적 운동이서 자연스럽게 장로교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 신학교에서 장로교 신학에 대한 정체성을 선명하게 세우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세 중반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배격하거나 선호하는 경향으로 미국 교회가 나뉘었고, 그 영향은 한국 교회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도 자유주의와 현대신학을 추종하는 진보 진영과 그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으로 양립되는 형태가 되어, 장로교 신학의 특징을 부각시키지 못한 한 조건일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반드시 교파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교파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파에 대한 분명한 교파 의식은 필수입니다. 그것은 인격, 지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재세례파적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 무교회주의도 한 분파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시대에는 도피성도(가나안 성도)도 한 분파를 이룰 정도로 다양화되어 집단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이후에 “플로팅 크리스천”, “OTT 크리스천” 등 교회 밖 크리스천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파생되고 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이 철수하고 자립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를 파송하는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장로파에 관해서 영향력과 지지가 되는 세계적 거점으로 지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로교 신학을 보전하고 전파할 주도적인 위치를 수행해야 합니다. 교회의 외형적 규모는 갖춰졌습니다. 규모에 합당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장로교 신학에 대한 구체적인 정체성을 파악하며 수립하며 발전시켜야 합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고백한 대로 자기가 서 있는 위치(Here I Stand)를 인지해야 합니다. 여기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리이고, 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자기 자리를 인식하지 못하다면 허공을 치는 듯한 싸움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국 장로파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위치는 “장로파 교회”입니다. 자기 위치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결코 원하는 위치에 다다를 수 없으며 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챨스 핫지의 『장로교란 무엇인가?』는 교회와 국가 관계, 교회의 권세, 교회의 직분자, 하나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역자는 스트레인지 박사의 찰스 핫지의 교회론의 글까지 추가시켜 좀 더 구체적인 이해를 갖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챨스 핫지가 제시한 글로 매우 명료한 이해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핫지 박사가 소개한 장로교에 대한 소개는 교회 질서, 권세, 국가 관계 등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장로교의 정체성입니다. 핫지 박사가 활동하던 시대는 대각성 운동에 대한 견해로 구파와 신파(Old Side & New Side)로 나뉘어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핫지 박사는 구파적 견해를 가진 원리적인 장로파 신학자였습니다. 필자는 구파와 신파를 통합할 것을 제언하는데, 그 기준점(stand point)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년)로 규합시키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 장로파가 두 진영이 갈등이 잘 융합되지 않았고, 300년 뒤의 한국 장로파에서도 두 진영으로 보이는 세력이 잘 융합되지 않습니다. 개혁파는 항상 연합과 협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칼빈이 그랬고 스코틀랜드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러한 정신이 없었다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고,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 장로교는 미국 장로교처럼 분열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국 교회의 전철(前轍)을 피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더 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파가 분열되었습니다. 선교 초기에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들도 들어왔지만 미국 장로교 선교사의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미국 장로교회의 전철을 따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패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에 의해서 우리말 성경이 번역되었다는 것은 오묘한 상상을 제공합니다. 특이하게 한국 장로교 이룸에 세계 장로파가 거의 모두 협력한 것입니다. 지금 한국 장로파 교회의 외적 위용으로는 세계적입니다. 다만 내적 모습, 신학 수준에서 세계 장로파 교회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위상에 걸맞은 활동을 보여준다면 합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의 한 지역인 대한민국에서 장로교회를 놀랍게 형성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 장로교회가 세계장로교회를 책임지고 합당하게 이끌 책무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개혁신학”, “개혁주의”를 귀에 막히도록 들었습니다. 의외로 “보수주의”라는 말은 약간 들었고, 옛 목사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장로교 신학”이란 주장은 누구에게도 거의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1920년대 근본주의 운동, 자유주의 신학을 변호, 변증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것이라고 필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신학은 자유주의를 변호하는 것을 목표하지 않습니다. 장로교 신학은 장로교회 이룸을 목표합니다. 장로교회의 순수 신학의 정체성과 교회 질서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장로교 목사, 신학자들이 개혁주의, 개혁신학을 외치기 때문에, 오히려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우리 신학의 원천지로 이해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장로파 신학교의 조직신학의 모범적 교과서가 네덜란드 개혁파(CRC 교단) 루이스 벌코프 의 『조직신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들의 글을 거의 접하지 않았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글에 대한 강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구 프린스턴의 신학자들의 글도 잘 습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장로파 교회의 신학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신학이 한국 장로교 신학의 원천이 되어야할까요?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이 칼빈 신학이고 장로파 신학과 다르지 않지만, 장로파 교회가 활동하던 지역은 아닙니다. 장로파 신학과 네덜란드 신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분명하게 존재할 것입니다.

 

장로교 대표 신학자 챨스 핫지가 소개하는 “장로교란 무엇인가”는 장로교 이해에 귀중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챨스 핫지 박사의 『조직신학』을 거의 읽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챨스 핫지 박사의 저술은 장로교 신학 이해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찰스 핫지 박사의 신학이 장로교 신학의 정통성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신학 이해와 찰스 핫지 박사의 신학 제시를 비교하면서 장로교 신학 이해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교사들에게 장로교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장로파 선교사들은 장로교회 이룸보다 교회 이룸(자립, 자치, 자전)에 전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사회, 문화적 연속성이 없는 지역에서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대한 깊은 배려도 약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하나는 장로교회를 이루면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아닌 12신조를 세운 것입니다.

 

핫지 박사는 아메리카에서 장로교회 이룸을 위해서 전력했습니다. 미국이 독립할 때에 뉴잉글랜드의 유럽인들을 중심, 종교자유 국가를 천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 선서에서 “헌법”이 아닌 “성경”을 사용합니다. 아직까지 대통령 선서에서 기독교의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데, 종교자유 침해한다고 무슬림, 불교신자,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항의한 모습은 찾기 어렵습니다. 2006년에 무슬림이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었을 때에 선서에 코란과 성경을 놓고 갈등했다고 합니다. 유대인 주지사는 타나크(TaNaKh)로 취임 선서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제헌 국회에 기도로 시작된 것을 자랑할 뿐, 어떤 기독교적인 모습이 국가 의식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국가 의식에서 기독교의 기도나 예식을 요구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우리 사회가 좀 더 합리적으로 세워질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한국 장로교 사역자들에게서도 “장로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저술과 소개 영상이 나와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며 확인하는 것이 인생이듯이, 장로교의 정체성 확립하며 제시하는 것도 끊임없이 진행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을 아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장로교인이 장로교를 아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미국 장로파 사역자들도 그렇기 때문에 꾸준하게 장로교에 대한 자기 이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장로파 신학자들에게 고민하는 모습이 점점 나오고 있습니다. 필자도 그러한 한 일환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를 아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정체성을 알아가며 확립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소양이며, 결코 확립할 수 없지만 끊임없는 정진으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의 두 지식 체계로 <기독교강요>을 시작했습니다.

 

빌립보서 3:12-1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찰스 핫지의 장로교란 무엇인가저자찰스 핫지출판젠틀레인발매20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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