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목사 수필

콘스탄티누스(272-(306)-337) 황제의 3 아들과 아타나시우스 그리고 삼위일체

형람서원 2024. 3. 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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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272-(306)-337) 황제의 3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311년에 동방 황제를 제압하고 통일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는 헬레나이다. 헬레나는 성지 순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대표적인 장소는 시내산 수도원을 건축해서 시내 반도에 산이 시내산이라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를 깨친 후, 막시니아누스를 격파, 제국 동부를 통일했다. AD 311년 기독교 교도에 대하여 콘스탄티누스,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조건부의 관용령(寛容令)을 낸 후, AD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한 자유령(自由令)을 공포했으나, 후에는 이를 무시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정적인 막센티우스와 막시무스가 죽었는데, 결국 리키니우스와 양분되어 갈등하게 되었다. 결국 AD 323년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대립 해륙(海陸)에서 패배하고 AD 325년 데살로니가(Thessaloniki : Salonika)에서 처형되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플라비우스 크리스푸스(Flavius Crispus)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에게서 난 아들이었다. 그는 326년에 아버지 콘스탄티누스의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했다(계모 파우스타의 '음모론' 가설). 콘스탄티누스를 "부인과 아들을 살해한 남자"로 잔혹성을 강조하는 이미지와 "기독교의 수호자"의 이미지로 대립되어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와 파우스타 사이에 3남, 콘스탄티누스 2세(Flavius Claudius Constantinus, 316-340), 콘스탄티우스(Flavius Iulius Constantius, 317-361, 콘스탄치우스), 콘스탄스가 있었다. 337년 황제가 죽을 때에 각각 20세, 19세, 17세였다. 세 아들은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325년 니케야 공의회를 결정한 뒤에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아타나시우스는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에 알렉산더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야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를 추방했다. 니케야 공의회를 결정한 황제가 니케야 정통파를 추방시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황제가 죽자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서 아타나시우스는 복권되었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두 사람의 무력 충돌에서 콘스탄스가 콘스탄티누스 2세를 이겼고, 콘스탄티누스 2세는 전사했다. 콘스탄스는 콘스탄티누스 2세에 관한 기록을 모두 소멸시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티우스는 아레안파를 지지했고, 콘스탄스는 니케아 정통파를 지지했다. 그것은 339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주도한 아레안 파에 의해서 추방되었고, 로마의 율리오 1세에게 피신할 때였다. 당시 이탈리아 지역의 황제가 콘스탄스였고, 343년 사르디카 공의회를 통해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고,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를 비호했다. 콘스탄스에게 굴복된 콘스탄티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에 아타나시우스를 복귀하는 것을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는 지지했고,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해서 그리스-로마 신전을 파괴했다. 그리고 아리우스 반대파인 주교들도 추방하고 박해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336년에 아리우스를 불러 신앙을 검증하려고 했지만 아리우스가 급사함으로 직분 회복을 하지 못했다.

 

아타나시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복귀했는데, 338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다시 추방되었다. 343년 세르디카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 복귀를 황제에게 청원했다. 350년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아리우스주의에게 힘이 실렸다. 콘스탄티우스는 아타나시우스는 죽이려고 침략했지만,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 사막으로 피신해서 6년 동안을 은거했다. 363년 박해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콘스탄티우스의 조카인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황제가 바뀌었지만 1년 4개월을 더 유배했고, 율리아누스가 전사하면서, 364년에 유배에서 해제되었다.

 

그런데 아리우스주의인 발렌스 황제(Flavius Valens, 328-378: 364년부터 378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동생으로, 364년에 형과 함께 공동 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아 제국의 동방을 다스렸다)에 의해서 365년에 다시 유배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강한 항의에 의해서 366년 2월 1일에 다섯째 유배는 4개월만에 끝났다. 아타나시우스는 소천하는 373년 5월 2일까지 비교적 평탄하게 지냈다.

 

발렌스를 이은 황제는 로마 50대인 데오도시우스( Flavius Theodosius, 347-(378)-395)이다. 데오도시우스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 정책을 폈고, 380년 2월 27일, 데살로니카 칙령으로 로마의 국교를 기독교로 제정했다.

 

380년 2월 27일은 로마 제국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표한 날이다. 테살로니카 칙령은 아리우스파의 축출을 담고 있다. 동방제국에서는 실제로 아리우스파 주교들은 정통 주교들로 대체됐고, 아리우스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구 추방됐다.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교의 교리 체계를 삼위일체로 니케야 공의회의 결정대로 재확정했다. 이때 신학화를 주도한 신학자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329-390)이다.

 

* 발렌스 황제는 로마 역사에 처음으로 서고트족의 영토내 진입을 합법적으로 허용했다. 410년에 코트족이 로마 시내를 침공하고 약탈했다. 로마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온지 100년만인 476년에 서로마는 멸망한다. * 어거스틴은 430년에 소천했다.

 

* 로마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입으로 침탈되었다. 프랑스 지역에서 넘어온 켈트족은 무려 7개월 동안 로마를 휩쓸었다. 더 이상 빼앗을 게 없어 켈트족이 떠났고 로마는 철저하게 망가졌다. 둘째는 제국의 퇴조 분위기가 뚜렷하던 410년 서고트족의 침입이다. 침략자는 6일 동안 로마를 침탈했는데 교회만 빼고 모든 것을 강탈했다.

훈족은 동고트족 정복 후에도 서진을 계속하여 452년에는 로마를 침입했는데, 레오 교황의 담판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훈족의 쇠퇴한 후 동고트족이 다시 476년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되었는데 교회는 유럽으로 확산되는 역설적인 모습이 등장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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