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은 27권이다. 정경목록에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27권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범위와 목록에 다소 차이가 있다. 유대교와 개신교는 정경 범위는 같지만 정경 목록 순서가 다르다. 유대교 정경(TANAK)은 창세기에서 역대기까지이고, 개신교 구약성경은 창세기에서 말라기이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회는 말라기 이전에 다른 정경이 있다. 로마 카톨릭, 동방 정교회, 유대교는 모두 계시가 지금도 계속하는 구조(계시계속주의, 동시성원리-simultaneity)를 갖고 있다.
라이마루스(Reimarus, 1694-1768)의 유작(遺作)을 레싱(Lessing, 1729-1781)이 발견해서 발표한 예수에 대한 호기심에 시작한 예수 탐구는 ‘사회 운동가’로 이해하는 ‘예수 3탐구’까지 진행하고 있다. 예수는 ‘윤리 교사’, ‘신비주의 사상가’, ‘사회 운동가’인가? 왜 시대를 따라서 예수 이해는 변하고 있고, 또 더 어떻게 변할 것인가? 20세기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의 중심점’으로 제안했다. 현재는 예수를 어떻게 중심으로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한 해명이 주류이다.
마이클 F. 버드의 <주 예수의 복음>의 몇 장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어휘가 “전승, 구전, 예수 어록, Q(Quelle, 원천)” 등이다. 필자는 ‘공관복음(Synoptic Gospels)’이라는 용어에 이의(異議)를 제기했다. ‘공관복음’이란 용어를 통과시키면, 전승, 구전, Q 등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마태, 마가, 누가를 묶었다고 하는데, 칼빈은 공관(synoptic)이 아닌 ‘조화(harmony)’를 사용한다. ‘공관’은 ‘한 점(Q 혹은 마가복음 근원설)’에서 시작한 다른 여러 파편(자료)들을 엮을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굳이 세 복음서가 있을 이유가 없고, 다른 위서들(도마 복음, 베드로 복음)이 정경 목록에서 빠질 필요도 없게 된다.
전승, 구전, 어록 등을 이야기하면, 복음서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을 정당한 방법으로 생각해야 한다. 정경의 확실성은 ‘본문’이 아닌 ‘사상’으로 옮겨진다. 김세윤 교수의 “인자-그 사람의 아들”을 탐구할 때, “왜 복음서에 있는 인자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하는 자문을 했었다. 복음서에서 인자는 “죄사함의 권세”(마 9:6, 막 2:10, 눅 5:24), “안식일의 주인”(마 12:8, 막 2:28, 눅 6:5)이라는 언급이 명시되어 있는데, 김세윤의 진술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식비평으로 보면, 후기에 제자들이나 후대 기록자가 삽입한 신학화된 첨가물로 보면 된다. 즉 복음서에 있는 것에 ‘예수 진짜 어록’을 탐구해서 결정하는 일을 연구자들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3탐구 연구자들이 진짜 예수 어록을 ‘하나님 나라 운동가’에 관한 것으로 제한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복음서에 ‘예수의 진짜 어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보수적’인 것이다.
양식비평에 따르면(그 안에서 보수적 견해)는 네 복음서가 네 명의 저자에서 시작해서 다수 첨언자들의 자료를 추가시킨 것이 된다. 세 명의 저자 중 근원 저자는 ‘Q’와 ‘마가’가 된다. 지금은 ‘Q 복음서’도 있다. ‘Q 복음서’는 신약신학에서 근원적 어록처럼 여긴다. 그럼 “다섯 권의 복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네 권의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라고 저서에 표기가 없다. ‘마태복음의 저자’가 ‘마태’라는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태라고 ‘편이상’ 사용하는 연구자가 있을 것이고, ‘믿고’ 사용하는 연구자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를 마태라고 믿고 사용하는 사람은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관복음이란 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편이상 사용하는 사람은 공관복음, 역사적 예수, 예수 운동 이든 용어에 제약이 없다. 그것은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마태복음의 저자를 마태라고 믿고 사용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한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라고 믿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옛 지계석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잠 22:28) 옛 지계석을 계몽철학에서 흔들었고, 자유주의가 뽑았고, 현대신학에서 옮겼다. 현대주의에서 바름을 주장하는 것은 독단적인 행동이 되었다. 그 시대에 교회가 진리의 기둥으로 서 있다.
복음서를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신학 도식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두 관점으로 만들어진 작업이고, 저자는 여러 제자들이 모아서 첨가시킨 것이 된다. 그래도 난점은 A.D. 70년 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죽음을 짧게 잡아 33년(혹은 37년)으로 볼 수 있는데, 30년에 자료를 조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학화된 정보가 복음서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지계석이 뽑힌 상태에서 신학하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은 빼놓고서라도, 구전, 전승, Q, 예수 어록, 목격자 등을 빼놓고 신약신학에 관한 저술을 읽어보라. 그럼에도 꾸준하게 예수 탐구에 대한 연구를 읽고 탐구하는 것은 어찌되었든지 구원을 얻게 하려는 한 방편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어야 하고, 세상 속에서 택자를 불러내야 할 사명이 있다. 흔들리는 형제들을 위해서 격려하고 더 효과적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동역해야 한다. 지금도 현대신학에 기초한 수 많은 탁월한 연구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옛지계석에 기초한 학문은 답보 상태에 있다. 옛지계석에 기초한 연구자들이 더 즐겁고 신나는 연구물들을 개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복음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네 권이다. 네 명의 저자가 각각 기록했다. 그것을 증명하라면, 증명할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러나 각각 기록되지 않았다는 증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옛 문헌 탐구는 증명이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증명하고 탐구하려는 시도까지 독단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복음서 저자를 간주하는 것은 전승에 의한 것인데, ‘옛 지계석, 교회의 전승’과 ‘옛 지계석을 뽑은 자유주의 전승’이 있다. 두 전승 중, 한 전승을 따라 결정하고 성경을 연구하면 된다.
고경태 목사는 "한국에서 신학하기"와 "칼 바르트 신학 이해" 강의를 유투브로 제공하고 있다(협찬 산여울기획, 임낙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