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문화기행

2010년 2월 22일(월) 취가정, 환벽당, 식영정 탐방

형람서원 2010. 2. 2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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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2일(월) 취가정, 환벽당, 식영정 탐방

 

   가사문화권은 광주 북구 충효동과 담양군 남면 일대에 환벽당과 식영정을 마주보고서 성산별곡 등 식영정 20선, 식영적 4 선(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정철)이 활약했던 무대입니다. 광주와 담양이 서로 가사문학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사문학에 대한 확장이 약화되는 것 같습니다. 가사문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광주와 담양이 공동으로 단일된 협의체를 구성하여 클러스터를 이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1. 취가정(醉歌亭)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金晩植)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權糧:1569∼1612)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환벽당에서 창계천(지금은 증암천) 물길따라 약 200m 지나서 취가정이 위치해 있습니다. 김덕령 장군은 가까이에 있는 환벽당의 주인 김윤제 사촌 간으로 형인 김윤제에게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충장공 김덕령의 억울함은 임진왜란과 선조와의 전쟁 후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전쟁 후 임란의 전쟁의 유공자들에 대한 국가의 보답은 매우 냉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덕령 장군에 대한 평가가 취가정에서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의병을 이끌며 입지전적의 전공을 세웠지만(석저장군), 결국 이몽학의 난에 연루됨으로 되어 태장으로 억울하게 죽었다. 당시 역적으로 연루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김덕령은 자시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 감옥을 나가서 들어와서 무고함을 고했지만, 결국 형장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김덕령은 임진왜란의 전쟁의 수훈자로서 피해를 입은 인물이다. 김덕령은 무등산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취가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임금께 끊임없는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취가정은 왼쪽으로 천이 흐르며, 동남쪽으로 방향으로 한 전형적인 한국의 주택의 위치입니다. 언덕 위에서 보이는 들녁과 산들에서 아담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취가정이 고종시대에 지어진 것이며, 또 한국전쟁에서 소실되어 1955년에 재건된 건물이라는 정보는 가사문학과 좀 거리가 먼 것 처럼느껴집니다. 그러나 김덕령과 연결된 권필의 "취가시"가 가사문학의 3대 시인 권필의 작품이라는 것에 의미를 찾아 봅니다.

 

2. 환벽당(環碧堂)

 

   환벽당(環碧堂)은 식영정 건너 광주호 상류 청계천가의 충효동 쪽 언덕 위에 있다. 높다랗게 자리잡은 이 정자는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년~1572년)가 지은 정자다.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다.

 

  1. 환벽당은 가사문학 클러스터에서 유일하게 '당'에 속한 건물입니다. 모두가 '정'인데 환벽당입니다. 그것은 집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쇄원은 '원'으로 정원이 드러나며, 환벽당은 집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2. 환벽당은 가사문학의 1세대의 자취입니다. 가사문학의 1세대는 면앙 송순(宋純 ; 1493~1583) , 소쇄원의 양산보(梁山甫, 1503년~1557년), 그리고 사촌 김윤제(金允悌 1501년~1572년)로 봅니다. 이들이 환벽당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소쇄원과 면앙정에서 가사문학을 시작하였습니다. 송순과 양산보는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인해서 낙향해서 담양에 칩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윤제는 나주목사를 퇴역한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환벽당을 짓고 풍류를 누렸습니다. 그러던 꿈에 조대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보고 내려가 보니 용소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소년 정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비범함을 보고 김윤제는 자기의 외손녀와 혼인을 시키며 정철에게 가정적 안정과 함께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원하였습니다.

 

  3. 환벽당(環碧堂)은 우암 송시열의 흔적에 또 조선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송시열은 조선 당파 논쟁에서 대수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수 많은 유배와 복귀를 하면서 당대를 호령했습니다. 그의 흔적이 전라도 있습니다. 먼저는 담양의 환벽당(環碧堂)에 자신의 필체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보길도에 제주도에 유배를 가던 중에 필체를 남겨 두어 송시열의 발자취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전라도에는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가 있습니다. 도산초당과 윤선도의 녹우당에서 추사의 글이 있습니다. 전라도는 조선의 역사가 그대로 흔적을 남겨두어 조선 역사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양에서 가장 먼 전라도에 조선의 흔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4. 환벽당은 앞에 취가정을 놓고 있습니다. 취가정이 들판이 보이는 정자라면, 환벽당은 숲 속에 쌓인 은둔의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나무 숲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정취가 은은한 느낌을 줍니다. 

 

3. 식영정(息影亭) 

 

    식영정(息影亭)은 서하당 김성원이 그의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이 성산에 와 있을 때 머물렀던 곳 중의 하나이다. 『서하당유고』의 기록에 따르면 명종 15년(1560)에 지었다고 한다.

   김성원은 송강 정철의 처가쪽 친척이며,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문이다. 
   정철(1536∼1593)은 명종 16년(1561)에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다툼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 식영정을 무대로 하여 많은 선비들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시문을 익히고 『성산별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식영정은 앞면 2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한 것이 특이하다.

 

  1. 식영정(息影亭)은 아래에 몇 개의 부속건물이 있습니다. 길 옆에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 왕래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식영정은 광주댐을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광주댐이 옛 정취를 모두 앗아갔지만, 호수의 정취를 느끼게는 해줍니다. 

 

  2. 식영정과 환벽당이 서로 옆으로 보고 있어 가사문학의 중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산별곡의 아름다운 자연의 찬사를 보며 과거로의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여행은 과거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이 남겨놓은 문학작품에서 문학의 멋과 함께 과거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3. 식영정 뒤편에 있는 소나무는 모든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태입니다. 그래서 나무가 아름다운 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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