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예수의 윤리
본 장에서 니버는 ‘예수의 윤리’에 대해서 “예수의 윤리는 예언적 종교의 완전한 결과”로 제시한다. “그 사랑의 이념은 예언적 신앙의 하느님이 세계와 관계하고 계신 분인 것처럼, 인간의 경험적인 사건들과 그리고 그 필연성들과 동일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 경험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동시에 관계된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하느님께서 세계에 내재한 것처럼 인간에게 내재하며, 하느님은 세상에서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가능성을 초월한다. 그 이념이 선이다. 그래서 세계가 존재하는 한 선은 존재한다. 그런데 실존은 항상 혼돈(chaos)의 위협과 무의미의 위협에 있다. 여기에서 질서와 통일성을 찾는 것이다.
하느님의 통일성은 정적(static)이 아니라, 능력이 있고 창조적인데 그것이 ‘사랑’이다. 이러한 통일성을 자아(the self)가 이루어 낸다. 자아가 관계를 추구하며, 충동과 충돌을 극복하여 이기주의적 세력을 극복하게 한다. 예수의 윤리는 이러한 이기주의적 충동과 다른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의 윤리”이다. 예수의 윤리는 수평적, 대각선적이 아닌 오직 수직적인 차원만 보유하고 있다.
자기 주장(self-assertion, 엄격주의적인 복음적 윤리-자기 해석이 바르다고 생각하는)로서, 자기 사랑(self-love- 동물적인 충동)으로 육적인 실존(physical existnece) 예수의 윤리에서는 금지된다. 니버는 예수의 윤리가 팔레스타인 농경사회에 적합한 비신중적인 엄격주의가 내포되어 있음으로 배제하고 현대의 도시적 실존에 부합된 윤리로 재편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의 가장 본능적인 확장은 소유를 통한 확장이다.” 자기-사랑은 교만에 근거함으로 예수에게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교만은 종교적인 면과 신중적인 도덕의 입장에서 나타난다.
징벌에 대한 예수의 태도. 자기-주장의 형태에서 비타협적이고 교정적인 정의가 나타나는 것은 원시적인 습관의 극치이다. 즉 원시공동체에서는 피의 응징을 허용하였고, 교정적 정의는 이기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를 니버는 거부한다. 원수의 용서에 대한 권고에 대해서 “이 모든 권고 속에는 저항과 분노가 감추어져 있다.”고 거부의사를 밝혔다. 용서의 근거를 하느님의 용서에 두어서 우리의 용서를 주장한다. 즉 죄인에 대한 징벌을 내릴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종교도덕적인 통찰로부터는 사회도덕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고 예수의 윤리를 거부한다. 이러한 근거로 톨스토이가 교도소 제도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한 것을 근거한다. 즉 예수와 톨스토이를 비교하는 것이다.
예수의 종교도덕적인 사상을 실제적인 사회도덕이나 심지어는 정치도덕적인 체제로 세밀하게 다듬으려고 하는 노력은 항시 예수의 도덕적 통찰력의 간파력을 둔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교리를 적용할 때 회개보다는 오히려 도덕적인 만족감을 가져오게 하여 자기-주장이 계속 발생된다. 이것이 자유주의가 지향했던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의 열정이었다. 이젠 보편주의적인 입장에서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예수의 윤리에 있어서의 사랑절대주의는 필수적이고 교묘한 형태의 자기-주장과 대립하는 비판적인 활력을 가지고 있는 완전주의적인 입장에서 가장 편협한 인간에 대한 동정심(human sympathy)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예수의 윤리의 보편주의는 스토아 철학의 보편주의와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다. 스토아주의의 귀족적인 겸양이며 예수의 윤리는 하느님 아래서 동등한 사랑이다.
예수의 보편주의적 특성은 ‘가족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이다. 가족에 대한 충성보다는 고차원적인 충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윤리는 현대의 사회의 문제에 적용할 수도 없고 어떤 가상적인 사회에도 적용할 수 없다.”고 발트(Karl Barth)의 말을 동의하면서 제시한다. 이러한 말이 단지 수직적이고 종교적인 말이며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현실을 취급하는 신중한 사회윤리에 대해서 가치 있는 통찰력과 비판의 준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윤리마저도 순수한 종교적인 윤리를 통해서는 직접 유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엄격성은 보상에 대한 약속이다. 보상의 두가지 범주는 먼저 ‘의로운 자의 부활’과 ‘신중적인 도덕을 용인’하는 보상이다. 예수의 겸손은 자기-희생을 동반하여 고상한 자기-실현을 하게 된다. “예수의 교운 가운데 이러한 요소는 자기-실현을 어떤 사회적이며 신중적인 윤리와 연관되는 입장으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가 공리주의적 윤리의 근거가 되었다(니버의 생각). 자기 희생을 통한 자기 실현이 모두가 보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니버는 순교자가 비록 불멸의 명성은 얻었지만 번영이나 성공은 없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보상에 대한 대안으로 종말론적 의미로서 ‘천국에서의 보화’가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윤리는 중간적인 윤리(interim ethic)으로 가치가 있다. 니버는 예수가 취한 가족에 대한 이해와 바울이 주장하는 가족에 대한 윤리를 다르게 해석하여 예수와 바울을 다르게 평가한다. 그래서 예수의 윤리를 기초적인 요소로 평가한다.
역사에 나타난 묵시주의는 모든 인간의 삶에 처한 상황 아래서 불가능한 가능성을 신화적으로 표현하여 미래에 소망(하느님 나라의 도래)을 두게 한다. 역사적 환상인 신화 가운데서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은 실제적인 역사에는 없었고 단지 신화적인 진리이다.
--> 니버는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기독교가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더 이상 근거를 잃어버렸다. 자유주의가 이해한 예수가 완전한 예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이해와 다른 예수의 윤리를 제시함에서 ‘사랑과 평화’가 강조된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예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에 잘못을 비판하여 새로운 학설을 세우는 것은 또한 바르지 못하다. 비판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니버의 기준은 현대 도시 사회의 무질서(혼돈)에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기능이다.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중세로마교회를 비판한 개혁 신학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세워 개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현대 상황을 근거로 한다면 자유주의보다 못한 혼돈의 신학이 된다. 자유주의는 비록 인간 이성과 고대 근동의 문서들을 동반하여 근거하였기에 문제이지만, 성경을 중심으로 하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