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목적 첫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라고 예정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성화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에게 있어 성화된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된 삶이다. 따라서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선택된 자는 아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이다. John Calvin, CC, Vol. XXI(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9), 198-99. 선택은 예정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 예지에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이 예지에 근거해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누가 영접하고 누가 거부할지를 미리 아시기 때문에 영접할 자를 선택하신다고 한다. 이처럼 그들에게 있어 선택은 예지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상당히 그럴듯한 이론같이 들린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예지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의지가 구원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서로 협동작용을 한다. 루터 교회 체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예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항거하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 있으며, 감리교 체계에서는 참고 견디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선택이 예지에 근거해 있다고 주장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돌트총회(the synod of Dort)에서 정죄되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체계의 핵심은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지만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에 무엇인가를 공헌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효력 있게 하는 인간의 공헌을 요구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두 가지 중대한 진리를 간과해 버린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무시하여 구원의 절대성을 말할 수 없게 한다. 구원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면 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변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어떻게 구원의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가? 구원의 확실성도 시시때때로 변할 수밖에 없다. 신앙생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이라기보다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순종하면 된다. 둘째, 구원이 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은총이 협력하는 관계에 있게 되는데, 이는 정죄된 펠라기우스주의들과도 같은 견해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구원에 조금이나마 공헌할 수 있다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을 허락하셨고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를 결정하셨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다. 그 원인과 기회는 인간 안에 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타락의 원인이나 기회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한 것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를 우리가 다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중예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로운 판단에 의해서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기독교 강요>, 3.23.8.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지혜로는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허용과 선택과 유기의 결정은 공의로우시며 선한 것이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는 우리에게 감추어진 비밀이다. 칼빈은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3.23.8.
5) 선택과 유기의 근거
① 선택의 이유와 근거 “왜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살며, 또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전도해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에 처하시는가?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많은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사랑 때문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4:37, 7:7-8, 10:14-15, 23:5).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심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택의 이유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잘나서 또한 앞으로 좋은 신자들이 될 것을 예견하시고 택하신 것이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요 사랑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창세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εξελεξατο)하셨다. 선택하였다(εξελεξατο)는 선택하다(εκλεγω)의 부정과거시제(aor. mid. ind.)로서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선택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엡 1:4). 또 에베소서 1:5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προορισας ημας εις υιοθεσιαν δια Ιησουχριστου εις αυτον). 여기서 “예정하였다”(προορισας)는 예정하다(προοριζω)의 부정과거시제(aor. act. part)로서 하나님이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칼빈은 에베소서(1:4-6) 주석에서 예정은 첫째,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의 주체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너희가 나를 택(εξελεξασθ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εξελεξαμην)하여 세웠나니”(요 15:16). 둘째,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결정이요 예수 안에서 하신 것이라고 했다. 선택은 하나님이 누구의 압력을 받아서 하신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ω)와 “그리스도를 통하여”(δια Χριστου)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선택의 근거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다. 그래서 선택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겨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을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약속”이다. <칼빈의 예정론>, 180.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셋째,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κατα την ευδουκιαν του θελεματος αυτου)에 기인한다.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택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신앙의 최고의 표현은 찬양이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의 자비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형식인(formal cause), 예수님을 질료인(material cause),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동력인(efficient cause),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목적인(final cause)이라고 했다. Calvin: Commentaries, Joseph Haroutunian(ed.), 305-306.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 여기서 창세 전이라는 말은 우리가 선택된 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라는 뜻이다. 이는 선택의 근거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뻐하신 뜻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심을 의미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선택하신 자를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부르시고 중생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록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찬송을 부르며 가게 하신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자비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혜인가! Calvin: Commentaries, Joseph Haroutunian(ed.), 305-306.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은혜로운 뜻이며 우리 편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진 것이다. 전자는 선택의 이유요 후자는 근거가 된다.
② 유기의 근거 선택이라는 언어 속에 유기라는 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선택과 마찬가지로 유기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셨기 때문에 유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죄가 아니다. 죄는 이차적인 원인이다. 칼빈에 의하면 전자는 원인(遠因)며 후자는 근인(近因)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영원한 예정에 따라 이미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개인과 모든 인간의 운명을 정하신 것이다. 아담은 그 자신의 죄로 유기(永罰)된 것이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은혜로 선택하신다. 칼빈주의자들 중에 하나님의 계획 순서에 대해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했을 때 인간은 타락될 자로 간주되었는가 타락되지 않을 자로 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하나님이 타락할 자로 봤는가 아니면 단순히 창조한 사람으로 봤는가 문제이다. 타락전 선택 설에 따르면 1)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하도록 선택하고 어떤 자들은 멸망하도록 정한다. 2)창조한다. 3)인간의 타락을 허락한다. 4)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낸다. 5)이 구속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낸다. 타락후 선택 설은 1)하나님은 창조하고 2)타락을 허용하고 3)타락한 사람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는 영생을 어떤 자들에게는 유기에 내버려두시고 4)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고 5)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구속의 적용을 위해서 성령을 보낸다(<칼빈주의 예정론>, 로레인 뵈트너, 151). 타락 전 선택 설은 “차별”에 강조를 두며 이 관념을 전 과정에 관련시킨다. 차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유기와 선택에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인류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며 똑같은 본성의 소유자이며 타락될 인류도 부분이 아니라 전체였기 때문이다.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이 문제의 제출이 그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실제적 처리는 택함 받은 자들이나 버림받은 자들을 막론하고 둘다 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나 유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죄는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차별의 구체적 사실 구원이나 형벌 그 어느 것이든지 다 포함한 운명에 관한 차별에 선행하는 것이지 차별의 추상적 관념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제정하는 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죄가 예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지 않고는 구원과 형벌에 관한 차별 제정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벤자민 B. 워필드, <구원의 계획> 모환수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28). 둘째, 유기의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지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지하셨지만 그것이 유기(永罰)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로마서 9:13에서 사도 바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에서와 야곱 중에서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롬 9:18).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에도 선하신 뜻이 있는 것처럼 유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선택된 자나 유기(永罰)된 자나 다 같이 유혹과 악을 행할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된 자에게 고난은 다른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선택된 자에게 환난과 고난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선택된 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선택된 자의 구원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Joseph Haroutuian, Calvin: Commentaries, 307. 유기된 자에게 고난과 환난은 그들의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환난이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유기에 있어서 원인(遠因)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근인(近因)은 유기된 자의 죄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의 깊은 원인은 우리에게는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말했다.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19, (Baker Book House, 1989), 417.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어떤 자는 구원에, 어떤 자는 멸망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판단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칼빈은 성경에 있는 대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라고 말한다(롬 9:20).
6) 선택의 확신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증되지만 유기된 자는 그들에게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은혜의 사역이다. 여기서 전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는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 1527년 존 녹스가 침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읽어 주었던 설교가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라고 한다.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는 확신에 차고 감격과 환희에 넘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창세 전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선택의 확신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늘 감사했다(롬 1:1).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유기(永罰)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우리의 선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registra)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선택을 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Joh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The Banner of Truth Trust, 1973), 33, 47. 여기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볼섹이나 피기우스 게오르기우스처럼 믿음의 결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칼빈이 에베소서 설교에서 사용한 선택의 확신에 관한 세 가지 메타포를 통해서 우리는 선택의 확신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생명책에 선택된 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확실성을 말해 주고,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우리의 선택을 보는 인식론적인 방법을 말해 주며, 믿음의 복사라는 메타포는 선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적인 방법을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7) 예정과 책임 예정과 책임의 문제는 참으로 많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하나님의 예정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기계인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버트로 만들지 않으셨다. 자유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다. 그래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어떠한가? 인간이 왜 악을 행하는가? 선을 행하는 인간이나 악을 행하는 인간도 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 선택은 하나님의 예정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하나님이 조성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유기(永罰)는 하나님의 예정이지만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은 유다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선을 행하라고 예정하신 것이지 악을 행하라고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8) 칼빈 이후의 예정론 칼빈의 후계자요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summa toitus christianismi)이라는 책에서 예정론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교리를 재구성했다. 칼빈은 예정을 하향식으로 전개하여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 예정으로 나아가지만, 베자는 상향식으로 전개하여 예정에서 시작에서 창조, 타락, 구속, 성화로 나아간다. Wilhelm H. Neuser(ed.),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39.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배자의 신학은 예정론을 중심으로 한 신학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베자 밑에서 배운 그의 제자 알미니우스가 배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 나중에 항론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항론파의 예정론은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도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신인 협동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돌트 신조에서는 항론파의 이런 다섯 가지 반대를 성경에 입각하여 무조건적인 선택을 재 천명했는데, 이 신조는 칼빈주의의 구원교리를 잘 요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원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재 천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돌트 신조는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신다”(God saves sinners)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James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Biling and Sons LTD., 1963), 6. 돌트 신조나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타락전 예정설과 타락후 예정설을 다 수용했지만 타락후 예정론 입장에 예정론을 기술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James Orr는 돌트 회의시 우세했던 견해는 온건한 타락 후 예정설이었다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는 이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기된 것이라고 한다. 커닝함은 전 예정설은 “비교적 소수의 칼빈주의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페어번은 그 이름들을 상세히 거론치 않은 채 말하기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타락 전 예정설을 옹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구원>, 김경진 역( 생명의말씀사, 1989), 21. 각주 18에서 재인용했음). 돌트 신조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중보자로, 그리고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똑같은 비참함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은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또한 그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능력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우심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신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편저( 생명의말씀사, 1984), 제7장 264.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는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한 자기 뜻에 따라 되어 갈 일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또는 변할 수 없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로 되지도 않으시고,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심도 없으며,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이 제거되지도 않고 도리어 확립되게 하셨다. 2. 하나님은 장차 일어날 듯한 혹은 일어날 일을 무엇이든지 아시지만 장래 일 때문에 혹은 일어날 것으로 선견하신 것 때문에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3.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선정하셨다. 4. 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 마음의 은밀한 계획과 기뻐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다. 이렇게 결정하실 때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 안에 하신 것이지, 어떤 선견된 신앙이나 선행, 오래 참는 일,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조건, 혹은 하나님을 그렇게 하도록 움직이는 원인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며, 또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5.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영원한 뜻과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그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았고, 때가 되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얻고 양자 됨을 얻고 성화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저, 제 3장, 23-24. 찰스 핫지도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 경애할 만한 단체 (웨스트민스터회의)의 회장 튀쓰 (Twiss)씨는 대단한 타락전 선택론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은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분명히 타락 후 선택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타락 전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영생으로 정하시고 남은 자들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신장 혹은 억제하시는 오묘하신 뜻에 따라 간과하시며, 그의 영화로운 공의를 찬송케 하기 위해 그들의 죄값으로 치욕을 받도록 내버려두기로 정하셨다고 했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I., 317.) 헤르만 바빙크에 의하면 세 사람의 개혁자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한다. 선택과 유기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의 행위이고, 논리적으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종종 타락 후 선택론적 추론을 따랐다“고 말했다. 또한 바빙크에 의하면 타락 전 예정론은 예정-원죄-자법죄의 순서이고 타락 후 예정론은 원죄-예정-자범죄의 순서이다.(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9), 518-526)
소요리문답 19번과 20번에도 후택설 입장으로 전개한다.
모든 인류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어 생전의 모든 비참함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벌을 받게 되었다(19번). 하나님께서는 다만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시듯, 은혜의 언약을 세워 구속주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구원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셨다(20번).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편역, 149, 문답 19-20번.
신 정통파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예정론을 그의 교의학의 중요한 뼈대로 삼으면서 신 중심의 예정론이 아닌 극단적인 기독론 중심(exclusive Christ monism)의 예정론을 기술함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의 이중예정론을 부인했으며, 예수님의 죽음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여 보편 구원론으로 가게 했다.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99-104.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다. 그래서 예정의 확신을 갖게 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선택받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으로 예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창세 전에 인간과 교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이중 예정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 예정을 부인하며 보편 구원으로 가는 논리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예정론은 성경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성경적이며 합리적 사고가 짙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David L. Mueller, Karl Barth(Word Books, Publisher, 1976), 96-107).
9) 신학적 적합성 예정론이 칼빈의 핵심적인 교리가 아님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엽적인 교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정론은 성경이 가르친 실제적인 교리로서 성 어거스틴에서 시작하여 종교 개혁자뿐만 아니라 신 정통주의에서도 중요한 교리이다. 그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구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깊이 말해 주며 구원의 절대적 확신을 보여주는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예정론은 신자의 선행과 경건의 뿌리라고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정체성(Christian identity)을 갖게 하는 뿌리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신자의 정체성 문제이다. 미국에 이민간 자녀들의 커다란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라고 한다. 미국 사람도 아니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람도 아니라는 정체성의 위기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처럼 신자는 신자다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 사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신자는 예정론에 기초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기에 개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의 확실성과 소망을 주는 확신이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인류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인간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분의 선하신 뜻과 섭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가들이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나 인간 의지에 두고 있다. 이런 역사관이 다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이는 인간 중심의 사관이다.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나, 자연의 순리나, 못 가진 자와 가진 자의 계급 투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움직인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선택된 자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계신다는 예정과 섭리에 기초한 역사관을 확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칼빈주의자들이다. 이런 확신이 있는 자만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확신과 소망 가운데서 완수해 나갈 수 있다. 칼빈의 작정교리에 대해 그의 후계자 베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는 칼빈과 베자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전통신학은 강경하든 온건하든 기본적으로 작정신학이다. 베자는 선택교리에 선험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칼빈의 예정교리를 재해석했다.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그를 따랐는데, 13세기 중엽의 칼빈주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필립 홀트롭은 말했다. 홀트롭이 베자의 작정신학을 다음과 같이 도표로 설명한 후, 칼빈과 베자의 견해를 다시 도표로 비교한다. 필립 홀트롭, <기독교 강요 연구핸드북>,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449-453.
(도표) 1.가장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예지(προγνοσις)이기도 한 영원하시고 지고하고 불변한 작정( πριθεοσις) 2.예정 3.유일한 중재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통해 선택되고 구원받을 자들에 관한 예정 -.유기 되고 정당하게 저주를 받을 자들에 관한 예정 4.의로운 상태로 이루어진 창조 5.아담 안에서 이루어진 온 인류의 자연적이고 순전히 자발적인 부패 6.그리스도께로의 효과적인 부르심, 들음으로 말미암은 믿음, 믿음의 결과들, 자비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 -.부패로 인한 정당한 포기, 강퍅케 함, 강퍅케 된 결과들, 영원한 죽음. 7.하나님의 영광, 그분은 8.지극히 자비하시고,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위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베자에 의하면 타락의 원인은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이다. 즉 타락은 순수한 허용(nuda et otiosa permissio)을 통해서 발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작정을 통해서 된 것이다. 칼빈과 베자의 비교는 다음 도표에서 볼 수 있다.
(도표) 칼빈 ---- 1. 예정 또는 작정 교리를 중심에 놓고 봐서는 안된다.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는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하나의 초점이란 게 없다. 성경에는 하나의 초점이란 게 없다. 성경은 비사변적이며 구원에 관심이 있다. 칼빈은 자신이 한가한 사색으로 본 것을 피했다. 2. 예정을 구원론 밑에서 다룬다. 성경이 그것을 그 위치에 놓고 다루기 때문이다(참조, 롬 9-11장). 선택하시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선택을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지금 여기서’의 영역에서 떼어놓는 것은 잘못이다. 선택은 그렇게 전해야 한다. 3. 구원론에 포함되는 예정은 기도와 최후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예정 교리는 기도와 최후 부활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나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택은 이익, 열매, 존경, 송영을 주며, 우리를 경건, 거룩, 겸손으로 인도한다. 관계신학. 4.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호의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예정과 섭리는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섭리는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성향을, 예정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들의 위치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이 교리들은 서로 다른 제목하에서 논리적으로 다룰 수 있다. 따라서 섭리를 신학 밑에서 보며 예정을 구원론 밑에서 본다. 5. 그러므로 예정에서 주요 관심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과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예정과 타락과의 관계(원래의 전택설-후택설 문제)에 관한 추상적 사색이 없다.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후기의 전택설-후택설 문제)에 관한 학문적 논쟁에 관심이 없다. 칼빈은 예정을 확고히 구원론 밑에 둠으로써 전택설-후택설 문제를 회피했다. 그의 선택 신학에는 선교신학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6. 칼빈이 “선택을 전파”해야 한다고 역설한 이유는 “성경이 배척을 오직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위로 말한다”(Dijk, berkouwer)는 인식 때문이다. 배척은 항상 선행된 죄와 관련이 잇다. 숙명론의 관점이나 전택설의 논리에서 보면 선택과 유기를 동시에 동일한 방법(eodem modo)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칼빈은 좌우대칭을 배척한다. 7. 칼빈은 예정 교리를 선험적이고 사색적으로 보지 않고 구원사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서 경험적으로 본다. 예정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뒷받침이다. 그러므로 그는 구원론에서 예정으로 진행하며, 반대로 진행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가 있기 때문에(제 3권 초판) 예정도 있다. 선택의 열매들을 보지 않는다면 선택 자체를 보지 못한다. 선택의 원천은 열매들로서 나타난다.
베자 ---- 1. 예정 또는 작정 교리는 중심에 놓고 봐야 하며, 모든 신학과 역사의 토대로 봐야 한다. 실로 그 교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런 위치를 지니다. 양대칭이 잘 균형 잡힌 체계를 수립하며 사변적인 문제들을 논하되 특히 영원과 시간의 관계를 토대로 한다. 2. 하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예정을 신학 밑에서 다룬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은 창세 전에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선택자든 유기자든 삶이 독립된 존재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3. 신학에 포함되는 예정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주된 원인과 부차적인 원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예정 교리는 선택자들과 유기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상기시키지만, 선택을 위로와 기쁨의 교리로 보려는 노력이 전무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 전의 계획을 강조하려고 할 뿐이다. 본질주의 신학. 4. 예정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예정과 섭리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서로 떼어놓아서는 안된다. 두 교리는 모든 신학과 역사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둘을 함께 봐야 하지만, 섭리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의 실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정이 먼저 온다. 5. 그러므로 예정에서 주요 관심사는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다. 베자에게는 예정과 타락의 관계에 관한 상당한 사색이 있다. 그는 뚜렷한 성경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 가운데 타락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예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최초의 일관된 전택설 진술이 있다. 그것은 후대의 모든 전택설을 예기하는데, 이것이 전택설 후택설 논쟁의 전제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6. 베자가 비교적 전도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시간과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반응이 하나님께 아무런 차이도 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선택자의 죄는 유기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된다.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전택설은 베자를 숙명론에 가깝게 붙들어 배며, 그는 사실상 에오돔 모도(동일한 방법)을 받아들인다(인과성만 있다). 그는 최대한 좌우대칭을 받아들인다. 7. 베자는 예정교리를 칼빈보다 더욱 선험적이고 사색적으로 보았다. 예정을 모든 구원사의 기반으로 보았다. 확신에 대한 강조는 베자에게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예정에서 구원론(하나님의 최종적 영광)으로 진행하며, 반대로는 진행하지 않는다. 예정이 있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강퍅케 함과 유기도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본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선택의 열매들은 오직 그 원천에서만 나타난다. ------------------------------------------------
아담이 넘어진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하신 섭리가 있지만 전적으로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타락을 하나님께서 허용은 하셨지만 아담이 불순종 한 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아무튼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전적인 부패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누가 선택되었는지 임의로 알 수 없다. 교회에서도 누가 선택되고 유기되었는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 선택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진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 거울”이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3.24.5.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선택된 자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을 복사하듯이 우리의 예정을 믿음으로 통해서 복사할 수 있다. 오해하지 말라. 예정론은 신자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서 있는 교리가 절대 아니다. 예정의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교리로서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기초해 있으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기초해 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예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일단 선택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당신의 선하신 섭리와 보호하심으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그래서 예정교리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에게 위로와 확신과 희망을 주는 중요한 교리 중의 교리이다.
10. 종말
종말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한 교리를 이름하여 종말론이라고 한다. 종말론이란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가 합쳐져 되었다. 에스카토스(eschatos)와 로고스(logos)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번역하면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통상 종말론은 개인에 관한 문제들(육체의 죽음, 영혼 불멸설)과 세상에 관한 문제들(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대 부활, 최후의 심판, 최후의 상태)을 다룬다. 안토니 A. 후크마는 성경적 종말론은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포함해야 한다고 한다. 안토니 A.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유호준역( 기독교문서선교회, 90), 11. 다시 말하면 성경적 종말론에서 “종말”이란 단순히 마지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신자들이 누리는 삶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종말은 시작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종말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의 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순례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종말론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다. 이 말은 그가 종말을 조직신학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종말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종말론을 <기독교 강요> 3권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다. 최후의 부활을 다루면서 종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제목이 최후의 부활이다. <기독교 강요>, 3.25.1-12. 신자는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사는 자이다. 부활이란 철학자들이 말하는 단순한 영혼 불멸설을 아는 것도 아니며 환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신자가 바라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칼빈 자신도 인정했다.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히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육신은 썩어져 흔적도 없이 한 줌의 흙으로 변해 버림은 누구나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신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신자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이 몸의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래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몸의 부활을 증명해 주는 원형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신자의 부활을 확증시켜주는 보증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만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부활케 하실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고, 같이 음식을 잡수시며, 제자들이 귀신이라고 했을 때 손과 발목을 만져보라고까지 하셨다. 이 이상 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신자의 육신은 부활하고 우리 영혼은 불멸한다고 칼빈은 말했다. <기독교 강요>, 3.25.6. 그리고 부활할 때 현재 입고 있는 몸으로 다시 부활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의 본체는 보유하지만 썩을 육신이 썩지 않을 육신을 입게 된다는 점에서 몸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자의 최후의 소망은 부활이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몸이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이민가는 것과 같다. 이 소망을 갖고 우리 신자는 이 세상에서 더욱더 열심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종말의 논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