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자는 잃을까 염려하고,
잃은 자는 다시 얻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우리네 인생은 어쩌면 끊임없는 ‘잃어버림’ 즉 상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소중했던 추억을 잃어버리고, 어릴 적 가졌던 꿈을 잃어버리는 것까지…… 자신에게 한없이 중요했던 것들을 우리는 잃고 또 잃고, 이별하고 또 이별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상실’ 중에 사랑했던 이들과 지상에서는 영영 만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어떻게 위안 받을 것인가.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남겨진 자들의 상실에 대해,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짧은 한 마디로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준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마라!”
언뜻 읽으면 다소 생뚱맞은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슬픔의 오르막길을 이제 막 올라야 할 이들에게는 아마도 가슴 한구석을 깊이 파고드는 위안과 지혜의 조언일 것이다. 이는 곧, 슬픔은 감추면 감출수록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된다는 것, 어떻게든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만 위로가 된다는 것, 그래야 다음 단계인 치유의 계단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의 심장에 가득찬 눈물을 한방울도 남기지 말고 다 흘려버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당신에겐 지금 30분간 흘려야 할 눈물이 채워져 있는데, 슬픔을 창피한, 혹은 남에게 들키지 말아야 할 요소로 생각한 나머지 억지로 참아버리는, 그래서 20분 만에 얼른 그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 형제 중 두 명을 잃은 한 여자가 있었다. 첫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녀는 망연자실 속에 관을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남편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고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다. 세월이 한동안 흘렀고, 어느 날 두 번째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었다.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 그녀의 어머니는 비통에 빠진 딸을 옆으로 살짝 데리고 가서는 귀띔했다.
"지난번같이 소란 피우지 않도록 해라. 눈물이 화장을 다 망쳐놓을 거야. 지난번에 마스카라가 눈물에 다 번져 네 몰골이 어땠을지는 생각해봤니?"
그녀는 어머니를 가만히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대신 무엇이 망쳐질지 알고 계시나요?"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기 직전, 중풍으로 9년간 마비된 몸으로 힘겹게 살아왔다. 평생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연구하고, 자신이 실제로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질병에 시달렸던 그녀는, 가빠지는 숨과 점점 꺼져가는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그녀의 마지막 저서 <상실 수업 On Grief and Grieving>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감당 못할 만큼 신은 가혹하지 않다는 것, 절망 속에서 속히 빠져나오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됐을 때 느껴지는 분노와 통곡, 혹은 원망과 자존심, 그밖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만 가지 감정을 ‘제발 부인하지 말고 100퍼센트 다 드러내 놓아라’고 저자는 부탁하고 있다.
이는 삶의 마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는 삶’의 증거에 다름 아니다.
상실에 대처하는, 그러면서도 상실을 진솔하게 껴안는 10가지 지혜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주고 있다. 죽어가는 이를 위해, 남겨진 자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저자의 말은 단 한 마디조차 버리지 못할 정도로 심장을 파고드는 깨달음을 던져준다.
1. 신은 감당할 만큼만 고통을 준다
슬픔의 첫 단계는 우리가 상실에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인생이 무의미해지고 감당할 수 없게 느껴질 뿐더러 삶이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점점 정신이 무감각해져 간다. 어떻게 살아갈지, 살아간다 해도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스럽다가 그저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2. 슬픔에게 자리를 내어주라
분노가 솟구치면 소리 내어 분노하라. 판단하지 말고, 의미조차 찾으려 하지 않고, 오직 분노 그대로를 느끼라. 어차피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도 불공평하다. 그러니 이토록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상실 앞에서,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랴.
3. 눈물의 샘이 마를 때까지 울라
하지만 이것을 알라.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버리는 것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4. 떠나간 이가 해왔던 것, 그것을 하라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당신이 ‘남겨졌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잃었는가? 당신이 왜 굳이 남겨졌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가? 신과 우주만이 그 정답을 얘기해주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만은 있다. 당신들은 모두 ‘살기 위해’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5. 사랑을 위해 사랑할 권리를 내려놓으라
착하고 바르게 살면 그 대가로 고통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랑할 권리를 조용히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6. 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라
이제 됐다. 그만 하면 됐다. 이제 당신에겐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가서 자신과 접촉하고,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지 눈여겨 볼 일이다. 몸의 속도를 늦추고, 오직 몸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7. 슬픔에 ‘종결’은 없다는 것을 알라
“수시로 그와 관련된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그간 네가 힘들여 꼭꼭 눌러두었던 슬픔은 여지없이 또 분출될 거야. 그러나 기억해. 어떤 경험을 하든지 그 안에는 늘상 슬픔이 웅크린 채 숨어 있지. 애석하게도, 죽음에는 쉬어가는 기념일이 단 하루도 생길 수 없거든.”
8. 상실의 밑바닥까지 발을 디뎌보라
슬픔은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고통과 슬픔은 오직 표현할 때만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떠나간 이에게 편지를 쓰라. 당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지내고 있으며, 얼마나 독하게 잘 참아내고 있는지를, 그리고 단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 없다는 고백을 쏟아 보라.
9. 신의 이해를 구하지 마라
집에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었더라면? 아이들이 그 심부름을 하러 밖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그가 건강검진을 평소에 잘 받았더라면? ……그러나 다시 한 번 묻자. ‘푸른 잎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10. ‘상실’은 가장 큰 인생수업
당신이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갈 것들에 대해 정녕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의 증거가 된다.
<상실 수업> 중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 도서출판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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