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교회 이야기

네스토리우스

형람서원 2006. 7. 13.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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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storius: 4세기말경 소아시아 게르마니시아~451경 이집트 파노플리스.

콘스탄티노플의 초기 주교.


그리스도의 본성(nature)과 위격(Person)에 대한 견해 때문에 431년 제3차 에페소스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그결과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여러 네스토리우스 교회들이 생겨났다.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책 Book of Heraclides of Damascus〉이라는 변증서를 썼다.


출생과 초기생애

페르시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안티오크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장로 임명을 받았는데, 몹수에스티아의 주교 테오도루스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안티오크 근처 성 유프레피우스 수도원에 들어간 뒤 설교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뛰어난 음성을 지녀 연설을 아주 잘했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와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다고 한다.

428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했을 때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은 혼란했다. 전임 콘스탄티노플 주교 시시니우스가 죽은 뒤, 주교 자리가 공석으로 남게 되자, 이 자리를 놓고 교회사가인 시데의 필립푸스와 434년 결국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 프로클루스가 줄곧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이 도시에는 정통신앙을 위협하는 이단자들이 상당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4월 10일 주교에 취임하면서 "황제여, 당신이 이 땅에서 이단들을 말끔히 없애버린다면 나는 당신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고 선언했다. 5월 30일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단을 제재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그들을 열성적으로 탄압했다.


교리논쟁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 아나스타시우스를 전속사제로 데리고 왔다. 이 사람은 11월 22일에 설교하던 중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수태한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반대했다. 이 명칭은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격분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편을 들어 성탄절에 마리아가 왜 테오토코스가 아닌지를 주장하는 설교를 했고, 이런 내용의 설교를 그뒤로도 여러 차례 계속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명칭이 아리우스주의(4세기초 아리우스가 처음 주장한 이단설로 예수도 피조물이며 半神에 불과하다는 신앙)를 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그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양자로 삼은 단순한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안티오크의 주교 사모사타의 파울루스(260경~270 재위)가 내세운 이단설을 다시 주장하고 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 주교 키릴루스(412~444 재위)가 이 문제에 개입하여 마침내 네스토리우스를 몰락시킨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설교사본들은 외국에까지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이집트에서는 그 설교내용을 놓고 수도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적도 있었기 때문에 키릴루스는 429년 부활절 직후 네스토리우스의 견해를 공격하는 회람을 발행했다. 키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를 공격한 데는 2가지 동기가 있었다. 첫째, 그는 정말로 네스토리우스가 순결한 신앙을 더럽히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라고 부르기를 거절한 것은 하느님이자 사람인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그는 자기의 전임 주교 테오필루스가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경쟁교구인 콘스탄티노플의 입지를 약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렇게 신학적인 동기와 정치적인 동기가 뒤얽혀 있었다.

그해(429) 여름이 끝나갈 무렵,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에게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로부터 단지 짤막하고 퉁명스러운 답장만을 받은 데다가, 자기의 징계를 받고서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친 자기 휘하의 성직자가 네스토리우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키릴루스는 먼저 로마 주교 켈레스티누스(422~432 재위)와 접근 한 뒤 황실에 지원요청을 했다. 켈레스티누스는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거나, 로마에서 정죄를 당한 바 있는 펠라기우스(원죄 교리를 거부함)의 제자들 몇 명을 받아들인 적이 있던 네스토리우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켈레스티누스는 네스토리우스가 쓴 책들의 사본을 당시 뛰어난 신학자이자 서방교회 수도원제도의 주요 조직가인 요한네스 카시아누스에게 보내어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요청했다. 그런 다음 430년 8월에 공의회가 열렸고 이 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다.

그해 11월 키릴루스는 자신의 교구에 소속된 주교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불러모으고 네스토리우스에게 편지로 12개의 명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저주하면 파문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그 편지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키릴루스의 사절들은 자기들이 선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황제가 431년 성령강림절에 에페소스 공의회를 연다고 공포해놓은 상태였다. 이 공의회가 열리면 이집트에서 망명한 사제들을 시켜 키릴루스를 고소하게 하여 그를 단죄하겠다는 것이 네스토리우스의 계획이었다.


에페소스 파문

에페소스 공의회는 6월 7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특정 대표들의 도착이 늦어져 개회가 지연되었다. 특히 안티오크 주교 요한네스(428~441)의 도착이 늦었는데, 그는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에페소스 주교 멤논의 귀띔을 들은 키릴루스는 요한네스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공의회를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6월 22일에 1차 회기가 시작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고, 키릴루스를 비롯한 회의 참석자들은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다. 나흘 뒤 에페소스에 도착한 요한네스는 대립회의를 소집하여 키릴루스와 멤논을 파문했다. 7월 10일 로마 주교 켈레스티누스가 보낸 3명의 사절이 에페소스에 도착했다. 다시 주도권을 잡은 키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다시 정죄했다. 양측은 모두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음모에 음모가 뒤따르던 중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누이 풀케리아(과거에 네스토리우스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음)의 말을 듣고 네스토리우스를 안티오크 근처의 수도원으로 추방하였고, 공의회는 폐회되었다.

그는 추방된 수도원에 4년간(431~435)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사정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극 Tragedy〉이라는 책(이 책은 몇 부분만 남아 있음)을 썼다. 그는 이제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점차 교회의 통합을 위하는 쪽으로 발전한 끝에 동방파(안티오크의 요한네스 지지파)와 키릴루스파는 교리문제를 네스토리우스 개인의 운명에 관한 문제와 별도로 취급한다는 점에 합의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안티오크 근처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난처한 일이었으므로, 요한네스는 어쩔 수 없이 네스토리우스를 추방하도록 황제에게 건의하였다. 황제는 그를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곧 그것이 너무 관대한 명령이라고 여기고, 다시 그를 리비아 사막에 있는 대(大)오아시스(지금의 카리야 오아시스)로 옮기라고 명령했다(436~437경). 그뒤에도 그는 약탈자들 때문에 파노폴리스(아크밈)로 갔다가, 그곳에서 시에네(아스완) 맞은편 엘라판틴으로, 그뒤 다시 파노폴리스로 갔다. 네스토리우스는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고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방문객도 있었고 편지도 왔다. 그는 자기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유티키아누스 논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유티키아누스 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완전히 포함·흡수되어 인성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사상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에게 그들의 주교 플라비아누스(446~449 재위)와 로마 주교 레오(440~461 재위)를 지지하는 글을 써 보냈고, 키릴루스의 계승자 디오스코루스가 플라비아누스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보았다. 그것은 네스토리우스 자신이 당했던 수난의 반복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자기 사상의 변호서이자 자서전이기도 한 책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는 이 책에 〈다마스쿠스의 헤라클리데스의 책〉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출판하기 위해서 가명을 사용했다. 이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네스토리우스의 글 가운데 직접 쓴 유일한 논문으로, 1895년에 시리아어 번역판이 발견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450년 7월 28일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당시 살아 있었다. 짐작컨대 후임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이전부터 그를 문명사회로 되돌아오게 할 결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나, 이러한 소식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뒤였다. 그가 죽은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시작되기 바로 이전 아니면 직후이다.


교리와 의미

그당시 알려진 대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그리스도를 인간과 신 2개의 위격으로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자신은 그러한 견해를 배척했으며,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키릴루스의 해석은 오해에 근거한 것이었다.

실제로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것은 '프로소폰'(prosopon) 방식의 결합이었다. 그리스어 프로소폰은 다른 대상들을 수단으로 사용해 자신을 확장하는 한 개인의 자기현시를 뜻한다. 예를 들면 붓은 화가에게 프로소폰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들은 인성(人性)을 사용하여 자신을 현시하였다. 그러므로 인성은 그의 프로소폰 안에 포함되며, 따라서 현시의 유일한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철저한 탄압을 받아 사라졌지만, 그밖의 지역에서는 존속하였다. 페르시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받아들였는데, 그 주요목적은 페르시아 군주들에게 자신들의 종교가 페르시아의 원수인 로마인들의 종교와 같지 않음을 보여주어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신도의 수효는 아주 적지만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이들은 이라크·소련·인도·이란·시리아·남북 아메리카 등지에 살고 있다.

J. G. Davies 글 | 李吉商 옮김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논문]

네스토리우스의 이단 판결에 대한 재고를 주장함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연구], 주재용(한신대 교수)

"현대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가 속했던 안디옥 학파의 신학적 경향을 따르고 있다. ....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받을 신학적 근거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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