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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조 박사 칼럼] “과연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가?”

형람서원 2024. 8. 29.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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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대학 초년생일 때 수강한 교양과목 ‘철학개론’ 시간에 교수로부터 들은 이 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목회자의 아들로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던 필자에겐 도무지 수긍이 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실존주의 철학에서 내세우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말이었다. 즉, 인간이 먼저 실존하고 그 후에 무엇을 생각하여 본질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실존주의 철학(Existentialism)은 인간의 유한성, 불안, 허무를 극복하고자 인간 본래의 자기를 추구하자는 철학이다. 세계 1, 2차 대전의 결과로 초래된 인간의 소외, 허무, 불안이 가중된 것이 현대 실존주의 철학을 가속화 시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실존주의자들이 “실존”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만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주체적 의지, 자유, 책임을 소유한 행동적 주체자(Master)야 말로 “실제적 자아”요 “실존”이라고 했다. 그래서 “실존자”는 주체적으로 자각의식을 갖고 본질을 결정해 가는 자유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이며 기존의 초월적 본질이나 가치에 절대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들은 가르친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의 주체사상도 이를 차용하였다.

이와같이 실존주의 철학은 모든 기존의 신적인 도그마의 절대화에 반대하고 미리 정해진 보편적 진리를 거부한다. 오직 인간 실존이 결정한 진실만을 최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인본주의(Humanism)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프랑스의 샤르뜨르가 “실존주의는 인본주의다”라고 선언했던 데서 확연히 드러났다. 심지어 그는 실존주의는 막시즘 공산주의의 한 분파라고까지 역설하였다. 여기서 실존주의는 철저히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사상임을 확연히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존주의는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주장하며 인간 생각을 인간 존재의 기반으로 삼는 우를 범하였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전통적으로 내려 온 “하나님 중심”(Theocentrism) 사상을 사정없이 파괴한 “인간 중심”(Anthropocentrism) 사상이었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다(잠 1:7). 이러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4세기의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인간은 참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고,  13세기의 아퀴나스는 “존재는 생각 전에 온다”고 선언했었다. 이 선언들은 오랜 세월 후에 근대에 와서 생겨난 데카르트의 인본적 합리주의나 샤르뜨르의 실존주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존재는 인간이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그러므로 생각은 존재의 결과일 뿐이다. 생각이 결코 존재의 원인과 기초가 될 수 없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아니라,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Sum Ergo Cogito)가 성경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던 니체는 인간이 실존적인 “초인”(Ubermensch)의 의지를 발휘하여 삶의 고통과 무의미를 극복하면서 기존 기독교와 도덕을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은 죽었다”를 외치며 도덕적 상대주의에 갇혀 정신병으로 죽었던 니체는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이러한 니체를 비롯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그룹에는 하이덱거, 샤르뜨르, 보봐르 등이 속해 있다.

이에 반해 실존주의 안에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창하는 그룹이 있음은 일면 다행으로 보인다.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 등이 이에 속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선구자로 알려진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소유하므로 그래서 괴롭다. 그러나 신의 의지로 회귀하여 삶의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초인의 의지”를 내세운 무신론적 니체와는 달리 “신의 의지”를 강조한 점에서 타당하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문제점은 그가 하나님을 실존주의적 이성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단순히 믿고 따르는 것은 맹종이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지극히 비신앙적, 비논리적 주장을 했다. 그리고서는, 객관적 진리를 경시하며 주관적 진리를 강조했다. 그가 강조하는 신앙은 한결같이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신앙에 기울어져 있다. 따라서 기존의 기독교 체계를 부정하고 공적 예배 출석을 비판하며 심지어 죄악시했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자가 칼 바르트이다. 그는 기독교 실존주의로 불리는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신학을 주창하며, 객관적 계시 대신 주관적 계시를 강조하는 한편 성경무오설까지 부정하였다.

이와같이 무신론적 또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허점들을 돌아 볼 때, 사실상 진정한 성경적인 의미의 실존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존주의 자체가 본질보다 실존을 앞세울 때 그것은 이미 성경적인 진리를 일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신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실존주의 철학이 현대인의 사상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쳐온 것인지를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 진리 대신에 상대주의, 합리주의, 주관주의,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온갖 인본주의적인 철학들이 실존주의 속에 융합되어 현대인의 사상을 오도하여 성경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의 지혜로 이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영적 분별력”(Spiritual Discernment)이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된다. 올바른 신학과 신앙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3-5).

황현조 박사(IRUS 교수, 커네티컷비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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