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
본문: 마 8:1-4
요절: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지난주에 우리는 산상수훈 연구를 마쳤습니다. 이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약성경 말씀을 해설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해설이 있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구약 말씀이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 줄을 잘 몰랐습니다. 7장의 마지막 두 절은 이 사실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말씀을 해석해주는 그들의 서기관들과,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해설을 들으시면서 많이 놀라고 감탄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하고 귀중한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려는 강한 열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 열망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고, 우리의 믿음도 가짜이므로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두 가르치신 후, 마지막에 배운 바를 실제로 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행하여 열매를 맺지 않으면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와 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8,9장에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관찰하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5-7장의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이 드러나듯이, 8,9장의 행하심에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통해서, 제자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행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모든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작으나마 촛불의 역할을 담당하기를 소원합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이곳에서 말하는 „산“은 5:1에서 나오는 산과 같은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이제는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관찰한 대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을 이적 앞에 배열했습니다(4:23).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의 빛 아래서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설명해 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실천에 옮기셨으며, 그 행동 속에서도 말씀 속에 나타난 권능과 지혜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행동을 „표적“이라고 말하는데, 마태복음이 의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기적은 항상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적을 약속하는 목사나 부흥사, 기적을 바라며 몰려드는 군중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는 복음서를 잘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 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치료, 혹은 기적 자체가 전혀 주목받지 않음을 주의하십시오.
2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나병은 페스트(사 37:36)와 함께 근동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참조: 민 12:10 이하; 왕하 5:1 이하). 오늘날까지도 이 병은 무섭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 병이 발발한 것과 완치된 것을 확인해주고, 완치된 후에 정결 예식을 치러주는 임무는 사회의 주요 인물인 제사장이 맡았습니다(레 13-14; 민 24:8-9). 나병 환자는 주거지로부터 추방당하여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끊어야 했으므로(민 5:2 이하), 살아있는 송장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나병을 치료할만한 의약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의 행동은 매우 범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는데, 나병 환자는 건강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를 받아주시고 치료해주신 것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어떠한 법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환자는 벌써 비범한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관념에 따르면 나병은 하나님의 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의 벌을 감수하고 일생 비참하게 살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관념도 깨트린 것입니다.
그는 땅에 배를 대고 눕는 절을 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혹은 전쟁의 패자가 승자에게 하는 것으로서, 그가 하나님께 표시하는 존경을 예수님께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물론 „주“라는 말은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는 명칭은 아닙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말한 내용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예수님께 치료의 능력이 있음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하여 단지 예수님의 긍휼만 바라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치료의 믿음과 함께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심지어 가족마저도 그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는 나병이라는 가장 악한 병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신다는 분명한 표적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다는 비탄과 함께 일생을 슬프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고통으로 생각하고 감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어떻게 율법까지 어기고 예수님께 올 수 있었을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그를 거부하시면 그는 군중으로부터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그분의 말씀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로서 죄인을 받아주시고, 죄인을 다시 하나님과 맺어주시는 분으로, 죄 속에 빠진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분으로써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환자에게 이러한 깊은 깨달음이 생긴 것은 그가 바로 고통스러운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대부분 건강한 이스라엘 사람은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그분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온 사람은 대부분 이러한 큰 문제에 부딪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로운 바리새인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우리는 이 환자가 바로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육신의 병은 그 환자로 하여금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예수님께 그러한 방식으로, 이렇게 겸손하고 간절하게, 또한 단호한 심정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극심한 고난은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오는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게 하는 계기가 되며 또한 큰 힘을 실어줍니다. 고난이 없으면 자신이 병자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이며,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될 수 없습니다. 온몸을 땅에 대고 예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숙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으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이 건강한 자로서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이 필요없는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됩니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서 바짝 엎드리며 그분의 은혜를 구했을 때에, 많은 사람이 긴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실까? 사람들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율법을 깨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허였으므로 그를 꾸짖지 않으실까?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다고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확실하게 자신을 부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 것도 예수님을 부정하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이 그를 만지면서 그의 몸이 정결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더럽고 부정한 자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은, 그를 전폭 받아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고에서 루터는,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예수님의 모든 특권, 즉 거룩함과 영생과 기쁨과 부요함 등을 주시고 죄인으로부터는 더러움과 연약함 등의 죄를 넘겨받아서 지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치료받은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찾아온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극도로 간단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를 받아주셨다는 것과 그를 치료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 이 한 마디(아람어, 그리스어로는 두 단어)로 나병 환자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새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조건이 바로 예수님께 나갈 수 있는 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주십니다. 나병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한 경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은 예수님 말씀 한마디면 됩니다.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치료를 마치신 후에 두 가지 별난 명령을 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와 „제사장에게 … 네 몸을 증거로 보이라“는 두 명령은 입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 명령을 하셨을까요?
먼저, 대부분 치료 사건은 예수님의 명령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명령들은 치료받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뜻을 알려서 이 뜻과 치료 사건을 연결하시려는 목적이 있음이 명백합니다. 즉,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몸소 체험했으니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자신을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메시아와 함께 살자는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초대에 삶으로 답변을 해야 합니다.
첫째 명령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인기를 통해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기 위함이며, 적극적으로는 먼저 치료받은 당사자를 좀 더 깊이 있게 도와주시기 위함이며, 또한 백성이 자신을 영적인 메시아로 이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영적인 사건을 자랑하거나 큰소리로 알리는 것은 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것으로써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사실이 묻혀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먼저 자신의 삶을 정리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므로, 예수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경솔하게 떠들고 다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 사역을 오해하게 하여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도하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함을 배웁니다.
둘째 명령은 구약 규정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참고: 레 13과 14장). 이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약 율법을 초월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넓은 의미로 구약 율법을 성취하는 자가 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로 결속되었다는 것은, 항상 기존 질서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질서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마찰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기독교는 외적, 혹은 정치적인 혁명적 운동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증거로“라는 말은, 치료받은 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에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깨우치려는 전도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선풍을 일으키는 외침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치료받은 자가 해야 할 중요한 전도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들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므로, 먼저 이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임무를 대신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이들이 이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실제로 후에 많은 제사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행 6:7).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정말로 자비로우신 분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갈 때에, 나를 전적으로 받아주실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할지라도 그가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나를 받아주실 뿐 아니라, 가장 큰 것인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내어서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내 문제는 너무 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분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귀중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비참함을 아시고 나를 그곳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해방하셔서 완전한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격심한 고통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생명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눅 2:12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겠다고 하며 그 표적이 바로 말 구유에 놓은 비참하게 태어난 어린 아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모두 지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난민의 아기로 태어나신 하나님이라는 표적보다 더 확실하고 강력한 표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표적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 때가 되었으므로, 오늘 본문 말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에 나타난 예수님의 큰 사랑을 생각하면서,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예수님께, 우리도 겸손하게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하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 8:1-4
요절: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지난주에 우리는 산상수훈 연구를 마쳤습니다. 이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약성경 말씀을 해설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해설이 있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구약 말씀이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는 줄을 잘 몰랐습니다. 7장의 마지막 두 절은 이 사실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말씀을 해석해주는 그들의 서기관들과,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해설을 들으시면서 많이 놀라고 감탄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하고 귀중한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달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려는 강한 열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 열망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고, 우리의 믿음도 가짜이므로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모두 가르치신 후, 마지막에 배운 바를 실제로 행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행하여 열매를 맺지 않으면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와 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8,9장에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관찰하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도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5-7장의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이 드러나듯이, 8,9장의 행하심에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을 통해서, 제자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행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예수님의 모든 특권을 소유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작으나마 촛불의 역할을 담당하기를 소원합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이곳에서 말하는 „산“은 5:1에서 나오는 산과 같은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는데, 이제는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관찰한 대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을 이적 앞에 배열했습니다(4:23).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의 빛 아래서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설명해 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 행동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실천에 옮기셨으며, 그 행동 속에서도 말씀 속에 나타난 권능과 지혜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행동을 „표적“이라고 말하는데, 마태복음이 의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성경은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기적은 항상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적을 약속하는 목사나 부흥사, 기적을 바라며 몰려드는 군중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는 복음서를 잘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 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치료, 혹은 기적 자체가 전혀 주목받지 않음을 주의하십시오.
2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나병은 페스트(사 37:36)와 함께 근동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참조: 민 12:10 이하; 왕하 5:1 이하). 오늘날까지도 이 병은 무섭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 병이 발발한 것과 완치된 것을 확인해주고, 완치된 후에 정결 예식을 치러주는 임무는 사회의 주요 인물인 제사장이 맡았습니다(레 13-14; 민 24:8-9). 나병 환자는 주거지로부터 추방당하여 모든 사람과의 만남을 끊어야 했으므로(민 5:2 이하), 살아있는 송장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나병을 치료할만한 의약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의 행동은 매우 범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왔“는데, 나병 환자는 건강한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를 받아주시고 치료해주신 것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어떠한 법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환자는 벌써 비범한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관념에 따르면 나병은 하나님의 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의 벌을 감수하고 일생 비참하게 살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관념도 깨트린 것입니다.
그는 땅에 배를 대고 눕는 절을 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혹은 전쟁의 패자가 승자에게 하는 것으로서, 그가 하나님께 표시하는 존경을 예수님께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물론 „주“라는 말은 하나님께만 붙일 수 있는 명칭은 아닙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말한 내용입니다: 당신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예수님께 치료의 능력이 있음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심을 극복하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하여 단지 예수님의 긍휼만 바라는 행동입니다.
이러한 치료의 믿음과 함께 돋보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고, 심지어 가족마저도 그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는 나병이라는 가장 악한 병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신다는 분명한 표적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다는 비탄과 함께 일생을 슬프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고통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고통으로 생각하고 감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어떻게 율법까지 어기고 예수님께 올 수 있었을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그를 거부하시면 그는 군중으로부터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그분의 말씀을 간접적으로나마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로서 죄인을 받아주시고, 죄인을 다시 하나님과 맺어주시는 분으로, 죄 속에 빠진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분으로써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환자에게 이러한 깊은 깨달음이 생긴 것은 그가 바로 고통스러운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대부분 건강한 이스라엘 사람은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그분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온 사람은 대부분 이러한 큰 문제에 부딪힌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의로운 바리새인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우리는 이 환자가 바로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육신의 병은 그 환자로 하여금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예수님께 그러한 방식으로, 이렇게 겸손하고 간절하게, 또한 단호한 심정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극심한 고난은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생에서 오는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게 하는 계기가 되며 또한 큰 힘을 실어줍니다. 고난이 없으면 자신이 병자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이며,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될 수 없습니다. 온몸을 땅에 대고 예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숙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으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이 건강한 자로서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이 필요없는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됩니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나병 환자가 예수님 앞에서 바짝 엎드리며 그분의 은혜를 구했을 때에, 많은 사람이 긴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실까? 사람들에게 가까이 옴으로써 율법을 깨고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허였으므로 그를 꾸짖지 않으실까?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다고 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확실하게 자신을 부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 것도 예수님을 부정하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능력이 그를 만지면서 그의 몸이 정결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더럽고 부정한 자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것은, 그를 전폭 받아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논고에서 루터는,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예수님의 모든 특권, 즉 거룩함과 영생과 기쁨과 부요함 등을 주시고 죄인으로부터는 더러움과 연약함 등의 죄를 넘겨받아서 지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치료받은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찾아온 죄인에 대한 예수님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극도로 간단한 표현을 사용하여 그를 받아주셨다는 것과 그를 치료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 이 한 마디(아람어, 그리스어로는 두 단어)로 나병 환자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새사람이 되려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조건이 바로 예수님께 나갈 수 있는 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자는 누구든지 받아주십니다. 나병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한 경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은 예수님 말씀 한마디면 됩니다.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치료를 마치신 후에 두 가지 별난 명령을 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와 „제사장에게 … 네 몸을 증거로 보이라“는 두 명령은 입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 명령을 하셨을까요?
먼저, 대부분 치료 사건은 예수님의 명령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명령들은 치료받은 사람에게 예수님의 뜻을 알려서 이 뜻과 치료 사건을 연결하시려는 목적이 있음이 명백합니다. 즉,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몸소 체험했으니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자신을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메시아와 함께 살자는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초대에 삶으로 답변을 해야 합니다.
첫째 명령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나 인기를 통해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기 위함이며, 적극적으로는 먼저 치료받은 당사자를 좀 더 깊이 있게 도와주시기 위함이며, 또한 백성이 자신을 영적인 메시아로 이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영적인 사건을 자랑하거나 큰소리로 알리는 것은 해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것으로써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사실이 묻혀버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먼저 자신의 삶을 정리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므로, 예수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경솔하게 떠들고 다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아 사역을 오해하게 하여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도하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함을 배웁니다.
둘째 명령은 구약 규정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참고: 레 13과 14장). 이것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약 율법을 초월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넓은 의미로 구약 율법을 성취하는 자가 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로 결속되었다는 것은, 항상 기존 질서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 질서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마찰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기독교는 외적, 혹은 정치적인 혁명적 운동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증거로“라는 말은, 치료받은 환자가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명령에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깨우치려는 전도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선풍을 일으키는 외침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치료받은 자가 해야 할 중요한 전도 명령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들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므로, 먼저 이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임무를 대신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이들이 이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실제로 후에 많은 제사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행 6:7).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정말로 자비로우신 분임을 배웠습니다. 내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갈 때에, 나를 전적으로 받아주실 분은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려고 할지라도 그가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습니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나를 받아주실 뿐 아니라, 가장 큰 것인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내어서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내 문제는 너무 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을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분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귀중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비참함을 아시고 나를 그곳으로부터 끄집어내어 해방하셔서 완전한 자유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격심한 고통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생명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눅 2:12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겠다고 하며 그 표적이 바로 말 구유에 놓은 비참하게 태어난 어린 아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모두 지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난민의 아기로 태어나신 하나님이라는 표적보다 더 확실하고 강력한 표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표적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 때가 되었으므로, 오늘 본문 말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에 나타난 예수님의 큰 사랑을 생각하면서,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예수님께, 우리도 겸손하게 그분께 무릎 꿇고 경배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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