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독서(5) 하나님의 엄위에서 선 인간 Inst., I, 1, 3.
칼빈의 인식론(epistemology),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인간이 설 때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부패와 무능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영광에 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칼빈은 성경의 예를 들어서 모두가 충격을 받음에 대해서 제시했다.
철학의 인식론에서는 "타우마제인(taumazein)", “놀람, 경이”를 인식의 시작으로 본다. 이것은 호기심(curiosity)과는 전적으로 구분한다. 칼빈은 경건의 시작이 “두려움과 경이(dread and wonder, horror ille et stupor)”라고 하였다. 철학자들처럼 자연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는데,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겠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선다면 죽음의 공포에 쌓일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엄위 앞에 서지 않은 상태에서 기고만장한 행동을 한다. 그런데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뵈올 때에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왜 하나님의 임재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험이 아닌, 자기내면과 만남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추구를 하는 성경의 인물들은 없다. 오직 믿음을 추구하는데, 예기치 않을 때에 하나님의 나타나셨다. 그래도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 임재에 죽음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칼빈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심히 두려운 일이라고 했다(왕상 19:13).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믿음의 모습은 하나님의 엄위를 알지 못하는 현대교회의 기이한 현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려했지만,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 인간 모세를 세워서 일하심이 원리가 되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교회의 사역자를 도외시하는 것은 바른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죽음에 이르는 두려움(느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향한 지식의 중요한 시작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신학의 시작은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구약백성처럼 하나님의 임재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기독교의 믿음과 신학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의 깊음에 있다. 다만 칼빈 시대는 기독교 사회로 이교도가 소수인 사회이기에, 은혜에 대한 충격이 많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120명에서 출발한 교회에서 십자가 전도는 큰 장벽이었고, 선교지에서 십자가는 거치는 것도 미련한 것도 아닌 무(無)이다. 그럼에도 열방에 복음(은혜)이 증거되면서 하나님의 엄위와 자비를 알게 된다. 신학도는 엄위한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 - 형설청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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