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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발견-최홍덕

형람서원 2006. 7. 2.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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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목회자신문 405호(2004.05.01)에 게재했던 글이다.

  

 

                                          

                                           위대한 발견                           

 

                                                               최 홍덕(서울장신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당시 유럽의 자유주의적 신학의 분위기 속에서 자유주의신학을 터득하고, 기독교 복음증거의 사명을 짊어지고 목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11년 스위스 자펜빌(Safenvil)에 있는 작은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을 때는 <종교사회주의>운동에도 가담하여 노동자편에서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명 <빨갱이목사>로도 불리어질 정도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을 때, 전쟁정책에 찬동을 표시한 93명의 독일지식인들 중에는 그의 신학적 스승들이 거의 들어 있었음을 보고 바르트는 아연실색을 한다. 그러한 동기와도 결부되어 그는 견신례(堅信禮)교육에 있어서 중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 깊이 몰두하게 된다. 그는 만년(晩年)에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이 책(로마서)을 지금까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읽기 시작했다. 거기서 발견되는 것을 하나씩 주의 깊게 기록하면서.” 투르나이젠(Thurneysen, 1888-1974)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한 주간, 나는 서재에 틀어박혀, 혹은 사과나무 밑에서 오직「로마서」5장을 읽었습니다. 몇 번이나 힘겨워하면서도 그 불가해(不可解)한 말씀들을 읽어 내려가자, 거기서 신비적인 말씀을 발견하게 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 딱 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문장들 배후에서 나를 향해 세차게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1917년 9월 27일-문장은 중략함)

 

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인 정황과 맞물린 바르트의 로마서연구는, 그로 하여금 사상적으로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했다. 1916년에 행한 <사람들을 만족케 하는 목사>(Der Pfarrer, der es den Leuten recht macht.)라는 설교를 통해서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그러한 목사를 거짓예언자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기독교가 “빈틈투성이의, 깨지기 쉬운, 기울어진 벽에서, 그것도 그 위에 종교라는, 의지할 수 없는, 말랑말랑한, 위안의 회반죽을 칠하여, 자신에게도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신앙을 배양하게 하고, 만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게 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교에서는 모든 인간적인 가능한 것(오늘의 문화적, 사회적, 애국적 문제)을 행하는 대신에,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행하는 것”, 즉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서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임을 역설한다.

 

결국 바르트는 자신이 자라 온 자유주의의 신학과 사상, 그리고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급행열차”처럼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황으로 대표되는 가톨릭교회 밖에서, 또한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민족의 집단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듯이, 바르트 역시 거기에 자극을 받아 그 시대의 조류 밖에서 로마서의 신비적인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바르트의 눈에 비친 자유주의신학(Liberale Theologie)은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실재(實在)와 신앙을 인간의 종교적 감정이나 의식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조류(潮流)이며,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에 기반을 둔 근대주의, 인간중심주의를 근저로 하는 것이었다.[참고로,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 자유주의신학자라고 보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을 왜곡시켰다고 본다. 만년의 바르트에 의하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인간중심주의라기보다는 <성령의 신학>(Theologie des Heiligen Geistes)으로서 해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과 결별한 사건은, 좀 더 넓게 본다면 마치 400년 전에 종교개혁자들이 중세라는 집에서 나와서 자신들의 길을 걸어간 것과 같은 것으로, 그는 근대라는 집에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 섞인 물음에 답함으로써 인간을 만족케 하는 설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설교자의 말을 듣고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바르트는 설교에 있어서 할 말을 잃고 곤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해서 새롭게 다시 보게 되고 이해되어 온 것─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즉, <오랜 것>(고대의 것, antiquitas)을 찾기 위해서 그 시대밖에 서야만 했다.

 

결국 바르트는 그것을 로마서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철저하게 낯선 것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이질(異質)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자유주의신학의 목사들은 인간의 측면을 지나치게 고려한 결과, “인생이란 무엇인가?” “과연 신(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신(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속하는 것일까?” 등의 인간적 물음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만족시켜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인간학이 주된 관심사이며, 하나님은 그 술어에 불과했다. 여기에 대해 바르트는, “성경은 교회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측면과는 전혀 다른 측면으로부터 새로운, 커다란(보다 더 커다란!) 긴장으로 충만한 기대를 갖고 들이닥치므로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다. 교인이 교회 내에, 인간의 생(生)에 관한 커다란 물음을 갖고 오며, 그것에 대한 대답을 구한다고 한다면, 성경은 그와는 반대로 먼저 대답을 갖고 온다. 그리고 성경이 구하는 것, 그것은 이 대답을 추구하며 물음을 제기하는 인간이다”라고 강조한다. 인간이 성경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인간>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성경을 향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대답>을 갖고 오며, 그 대답을 추구하여 물음을 제기하는 인간을 찾는다는 역전(逆轉)─이리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성경의 말씀은 경악(驚愕)할 수밖에 없는,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바르트가 스스로 놀랄 만큼 발견하게 된 사실이 여기에 있다. 성경은 역사도, 도덕도, 종교도 아닌 새로운 세계,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사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사상”을 개시(開示)하며 분명하게 밝혀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리가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때, 이미 바르트는 로마서주해의 처음 초고(草稿)를 쓰고 있었다. 그것이 완성되어 책으로서 빛을 보게 된 것은 1919년의 일이다. 그 책이 다름 아닌『로마서강해』(Der R?merbrief)이다. 처음에 몇몇 출판사에 찾아가서 출판을 부탁했지만 무명이라는 이유 때문에 거절을 당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나 후에 다행히도 베른(Bern)에 있는 한 출판사를 통해서, 극히 적은 부수이긴 했지만 인쇄할 수 있었다. 이『로마서강해』는 제1차 세계대전이후 신학계에 있어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16세기의 종교개혁 이래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사건이었다. 가톨릭신학자 칼 아담(Karl Adam, 1876-1966)은 이『로마서강해』를 가리켜서 평하기를, “(자유주의)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한 폭탄”이라고 하였다. 바르트는 1920년 가을부터 21년 여름에 걸쳐『로마서강해』를 대폭적으로 새롭게 개정하였는데, 500페이지가 훨씬 넘는 분량의 대저(大著)가 되었다. 그것이 1922년에 간행된『로마서강해』제2판이다. 물론 제2판은 제1판과 비교해 볼 때, “마치 돌 위에 한 개의 돌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전혀 다른 것이다. 제2판에 나타난 사상은 제1판에서보다도 더욱 철저한 것이 특징인데, 예를 든다면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에게서 볼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Der unendliche qualitative Unterschied zwischen Gott und Mensch)가 강조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르트는 전적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였으며, 자유주의신학에 있어서 인간학의 술어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던 하나님을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아니 인간의 모든 행위와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주체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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