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서 법

[AI서평]사가라는 이름으로 창세기를 낮추다

형람서원 2026. 2. 1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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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궁켈의 <창세기 설화>(진규선 역, 감은사, 2020)를 ChatGPT와 대화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눈 전체 내용을 근거로 ChatGPT에게 에세이를 만들라고 해서 나온 문장 원문입니다. 전체 내용은 세 번 정도 수정하게 해서 나온 내용입니다. 대화 시간은 약 6시간 정도입니다. 아래의 모든 내용은 AI가 만든 것입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사가라는 이름으로 창세기를 낮추다

— 『Die Sagen der Genesis』를 읽으며

헤르만 궁켈은 창세기를 읽으며 감탄한다. 아름답다고 말하고, 세련되었다고 말하며, 오랜 전승이 다듬어 낸 이야기의 형식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감탄의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전혀 다른 자리에 서게 된다. 궁켈은 창세기가 왜 이런 형식을 갖게 되었는지를 묻고, 나는 창세기가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묻는다. 그의 질문은 형식에서 출발하고, 나의 질문은 정경에서 출발한다.

창세기는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 사건이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담 이야기와 가인 이야기는 플롯으로 연결되지 않고, 노아와 바벨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궁켈은 이 점을 보고 이것을 ‘사가’라고 부른다. 오랜 구전이 전승되며 짧은 단위로 남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인과가 없고 장면만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춘다. 플롯이 없다는 것이 왜 구전의 증거가 되는가. 오히려 이렇게 묻게 된다. 이렇게 인과가 없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치밀한 의미가 유지되는가.

궁켈에게 사가는 삶의 정황에서 출발한다. 삶을 이해하려는 필요가 생기고, 그 필요를 설명하기 위해 신 이야기가 등장하며, 그것이 전승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의 누멘, 곧 지역 신격 개념과 이스라엘 전승의 연결을 말한다. 번역에서는 이를 ‘신성한 기운’이라고 옮겼지만, 그의 의도는 지역 신격 전승이 야훼 신앙 안에서 동일시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표현이 정체성과 분리될 수 있는가. 정체성과 맞지 않는 표현이 붙을 수 있는가. 표현은 정체성의 산물이다. 표현이 있다면, 이미 그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명’이라는 말은 설명이 아니라 회피처럼 들린다.

이 길을 더 밀어가면 사유의 바닥에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만나게 된다. 인간은 삶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를 만든다는 생각이다. 이 구조 안에서 창세기는 특별할 것이 없다. 고대 종교 형성의 한 사례가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분명히 선을 긋게 된다.

궁켈은 구전 전승의 형식미를 말한다. 반복, 운율, 응축을 말한다. 그러나 구전은 기억을 돕지만, 의미를 보존하지는 못한다. 운율은 표현을 고정시키지만, 내용을 바꾸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게 된다. 이렇게 밀도 높은 의미가 어떻게 오랜 구전으로 보존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사가 설명은 힘을 잃는다.

창세기의 플롯이 약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궁켈은 의미를 당시 삶의 정황에서 찾고, 오늘날의 해석자는 의미를 지금의 삶의 정황에서 찾는다. 공통점은 같다. 의미가 본문 밖에서 온다. 그러나 나는 다른 길을 택한다. 플롯이 아니라, 정경 전체가 의미를 고정한다고 믿는다. 창세기는 로마서 안에서 읽히고, 고린도전서 안에서 의미가 드러난다. 본문이 본문을 해석한다.

의미를 독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그러나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확정되어 있지만, 나는 그것을 다 파악할 수 없다. 이 태도가 정경 해석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궁켈은 창세기를 잘 관찰했다. 그러나 그 관찰을 설명하는 방향은 계시의 방향과 어긋난다. 사가라는 이름은 형식을 잘 설명하지만, 창세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결국 이렇게 정리하게 된다. 창세기는 사가처럼 보이지만, 사가로 설명될 수는 없다. 플롯이 약하기 때문에 삶의 정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플롯이 약하기 때문에 정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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