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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의 구원론 < 그리스도의 대속(Redemption)이 없는 기독교 >한종희 목사

형람서원 2024. 10. 20.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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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의 구원론 < 그리스도의 대속(Redemption)이 없는 기독교 >

한종희 목사

5. 육체부활 부정과 새 부활관 제시

우리는 앞에서 이미 예수의 품성은 “신인양성이 아니고, 인성뿐이라”는 김 교수의 해설을 읽었다. 여기서는 예수의 육체부활을 부정하여, 예수의 품성을 단성론으로 주장하였다.

1) 육체부활을 부정하고, 새 부활관을 주장하였다

『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20세기 전반부 세계 신약학계에 군림한 불트만은 예수의 역사적인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의 부활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요,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더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고 증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나 유대 문서를 보면,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부활했다는 확신만으로는 제자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신앙 고백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활이란 사건만으로는 예수가 메시아요, 구원자라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 스스로가 자기가 구원자임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헛된 것 같았으나, 예수의 부활에 의해 “그 가르침이 옳았음이 확신될”때라야만, 부활은 예수가 구원자임을 확인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 (김세윤, pp.32-33)

『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활은 여러 가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사건입니다. 그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옳았다”라고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나, 자기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구원자라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 (김세윤, pp.45-46)

 

두 인용문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은 구약과 유대 문서에 없었던 주장이라고 하였다.

둘째, 새 부활관을 제시하였다.

첫째, 불트만이, 예수의 역사적 삶이나 가르침은 알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예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가 메시아요,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불트만의 주장이 잘못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하였다. 왜냐 하면,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연구가 있었는데, “구약과 유대 문서에는 메시아가 부활할 것이라는 가르침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대문서나 구약”에도 없는 육체부활로는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와 구원자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러면 무엇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구주와 메시아로 신앙고백하게 하였는가? 사도들이 유대문서나 구약에도 없는 육체부활로는 예수를 구주와 메시아로 고백 할 수가 없었지만, 예수를 구주와 메시아로 주장하게 하는 다른 부활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다른 부활을 두 번째 인용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나 자기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구원자라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

이 인용문을 요약하면, 예수의 부활은, 시체가 살아난 육체부활이 아니고, “예수의 교훈이 옳았고, 구주라는 주장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제자들이 인정한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죽은 후, 육체로 부활한 적이 없지만, 장사 후 3일째 되는 새벽에, “예수가 구주시며, 메시아라”는 신앙고백이, 제자들의 가슴에 불 일 듯이 살아났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하게 죽으매, 제자들이 흩어졌으나, 장사 후 3일째 되던 새벽에, 스승의 교훈과 주장이 옳았음을 제자들이 깨닫고, 스승에 대한 믿음이 부활하여, 순교하면서 전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를 주요, 메시야요,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은, 스승의 교훈과 주장이 옳았다는 믿음의 부활 때문이고, 육체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부활은, 무덤에서 시체가 살아난“육체의 부활”이 아니고, 제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났던 스승에 대한 “믿음의 부활”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이 구약과 유대문서에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구약이나 유대문서에는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연구결과라고, 김 교수가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메시아의 부활을 예언하였고(시16:8-10), 사도행전은 이 시편의 예언이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해설하였다(행2:29-32). 다음은 시편의 예언이고, 사도행전의 해설이다.

시 16:8-11, 「 내가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혼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라.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행 2:29-32, 「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시16:8-11은,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예언하였고, 사도행전이 이 구약을 인용하였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수차 육체부활을 예고하였다(마17:22,23; 막9:31; 눅9:22).

 사도들은 육체부활을 목격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말하고, 걸었고, 식탁을 같이하였고, 4개의 복음서에 기록하였고, 그래서 육체부활이 성경과 복음의 핵심이 되었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인 것도, 육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고(고전15:3-8),

 예수님의 육체부활 때문에 기독교가 발생하였고,

 초기의 기독교가 200년간 카타콤에서 지탱한 것도 육체부활의 확신 때문이다.

 기독교가 모든 종교와 차별성을 이룬 것도 육체부활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이 성경대로 사도신경을 작성하였고, 교회가 사도신경을 지켜온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로마나 헬라의 역사기록 보다 더 확실하여, 그리스도의 육체부활에 대한 더 확실한 증거가 되거늘, 김 교수가 일체의 기적을 불신하기 때문에, 부활예언이 구약에 없다고 말하여, 육체부활을 부정한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윗돌 치기와 같다. 또한 김 교수가 예수의 육체부활을 부정하였으니, 신자들의 육체부활도 부정한 것이고, 내세와 영생도 부정한 것이다.

2) 새 부활관의 두 가지 전제

김 교수가 새 부활관의 전제로 두 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모든 종교가 가는 길은 달라도 목표는 같을 것임을 질문형식으로 주장하였다. 둘째는, 인간의 모든 사건은 절대적인 의미가 없고 상대적이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모든 사건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도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에 맞아야 하고, 또 현 시대에 맞아야 하기 때문에, 2천 년 전 사람들이 말한 육체부활을 주장해서는 안 되고, 현 시대에 부합한 새 부활관을 찾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현 시대에 맞는 부활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 인용문을 보라.

『 “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주장하는가,” “모든 종교들은 결국 다 똑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고, 단지 그 길이 다른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이 어떻게 2천 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고, 또 수만리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 여기에 있는 나에게 효력을 발생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 사건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오늘의 나를 위한 구원 사건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건은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만 가치를 갖는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건이 왜 나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김세윤, pp.49-50)

문제는 두 가지 전제에 부합하는 새 부활관이다. 두 가지 전제에 부합하는 새 부활관은 어떠한 부활관일까? 다음은 김 교수가 인용문에서 제시한 새 부활관이다.

3) 부활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하였다

김 교수는 앞의 인용문에서,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하였다.

「 2천 년 전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건이 왜 나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은 자연적(自然的)인 사건(事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2인용문에서 말한 自然的인 事件은 自然的인 復活을 말하고, 이 自然的인 復活은 시체가 무덤에서 살아난 육체부활(肉體復活)을 말한다. 2천 년 전에 유대에서 발생한 예수님의 復活이 오늘 나에게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이 自然的인 復活 즉 肉體復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만일 김 교수가 “예수의 부활이 肉體復活이었다면, 오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면, 김 교수가 육체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들어났을 것이고, 육체부활을 믿는 대부분의 신자들과 신학생들이 강력하게 반격했을 것이고, 대화가 끊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가 肉體復活을 불신하지만, “自然的인 復活”이라는 간접표현과, “부정의 문장”으로 말하여, 肉體復活을 믿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덮어서, 신학생과 교인과의 논쟁을 피해갔다. 문제는 예수의 復活이 肉體復活이 아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肉體復活이 아닌 부활은 어떤 부활일까? 김 교수가 肉體復活이 아닌 復活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復活이라고 하였다. 實在하지 않는 復活이 진정한 부활임을 다음 글에서 주장하였다.

4) 실재하지 않는 부활이 진정한 부활이라고 하였다

김 교수가 다음 인용문에서 實在하지 않는 復活을 해설하였다. 즉 김 교수는 實在하는 自然的인 復活을 폐기하고, 實在하지 않는 復活을 복음으로 선포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인용문장 해독에 문제가 있다. 김 교수가 實在하지 않는 復活을 해설하면서,

⑴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고, 간접적인 어법과,

⑵ 철학적인 용어와,

⑶ 생략된 문장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풀기 어려운 문장이다.

『 인간의 모든 사건은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서만 가치를 갖는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유대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사건이 왜 나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復活은 自然的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주 밖의 초월자가 직접 개입한 창조의 사건입니다. 생명이 없는 상태에 생명을 주었음으로 창조의 사건입니다.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초월자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나에게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 (김세윤, p.50)

김 교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부활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自然的인 復活 곧 肉體復活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復活이 어떤 復活이란 말인가? 다음은 김 교수가 인용문에서 말한, 復活에 대한 세 가지 주장이다.

『 예수님의 復活은, 우주 밖의 초월자가 직접 개입한 창조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復活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초월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復活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에 오늘 나에게도 절대적인 의미가 있어집니다. 』

이상 3 문장은 예수님의 實在하지 않는 復活에 대한 해설인데,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독자들 대부분은 하늘에 뜬 구름을 잡는 기분일 것이다. 표현이 철학적이고, 간접적이고, 생략된 문장이라, 어느 구절에도 쉽게 이해할만한 글귀나 표현이 없다. 김세윤 교수가 이 난해한 표현 속에 담은 내용이 무엇일까? 이 난해한 문장을 어떻게 풀 것인가? 천천히 분석해 보자.

⒜ 3 문장의 “우주의 ,” “시간과 공간의 ,” “시간과 공간의 초월”에서, 과 초월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있는 세계(世界)를 가리킨 것이니, 實在하지 않는 世界를 말한다. ⒝ 시간과 공간 밖의 초월자도 우주의 밖에 있는 인물이니, 역시 實在하지 않는 人物이다. ⒞ 復活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에,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 것도 역시, 復活이 實在하지 않는 復活일 때에 한해서, 復活이 비로소 의미가 있어진다는 뜻이다.

이 3 가지 해설의 핵심은 다음 3 가지에 있다.

“實在하지 않는 世界,”

“實在하지 않는 人物,”

“實在하지 않는 復活.”

 

이 셋을 합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성립된다. 즉 예수의 復活은 오직

“實在하지 않는” 人物이,

“實在하지 않는” 世界에 개입하여,

“實在하지 않는” 復活을 일으켰을 때에 한해서, 비로소 의미가 있어진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다시 거꾸로 말해서,

復活을 일으킨 하나님이 實在하거나,

復活이 시간과 공간에서 實在로 발생했거나,

復活이 實在했던 復活이면,

이러한 부활은 自然的인 復活이며, 肉體復活이기 때문에, 2천 년 전에는 통하였지만, 현대인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김 교수가 제시한 두 가지 전제(presupposition)대로, 復活이 모든 현대종교가 지향하는 목표에 맞아야 하고, 현대사회가 수용할 수 있어야 하니, 復活도 반드시 實在하지 않는 復活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김 교수가 ⑴ 직설적인 어법을 피하고, 간접적인 어법과 ⑵ 철학적인 용어와, ⑶ 생략된 문장으로 해설한 復活이 實在하지 않는 復活이다. 다음은 實在하지 않는 復活의 실체(reality)이다.

5) 실재하지 않는 부활의 실재(reality)

『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復活이 일어났습니다. 이 復活이 여러 가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옳았다고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復活시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復活은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이나, 자기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구원자라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 (김세윤, pp.45-46)

하나님이 예수님을 復活시켰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원자라는 주장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제자들이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김 교수는 이것을 實在하지 않는 復活의 실체(reality)로 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實在하지 않는 復活은 무덤에서 발생한 自然的인 復活 곧 肉體復活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과, 구주라는 주장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제자들이 인정함을 뜻한다”고 하였다. 제자들이 따랐던 스승이 비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스승의 교훈이 옳았고, 인류의 구주라는 주장이 옳았다고 깨닫고, 순교하면서까지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했듯이, 하나님과 제자들이 인정한 이 새 부활관을 현대인에게 적용하여, 인간의 인성과 실존(existence)을 회복하고, 사회정의와 평화를 구현하여, 지상낙원을 건설하자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자, 현대 진보신학의 주장이다.

김 교수가 이렇게 새 부활관을 들고 나온 이유는, 이 새 부활관만이 현대의 모든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에 부합하고, 또 현대인이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 항목 서두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현 시대에 부합하는 상황신학을 말한 것이다. 최근의 상황신학은 그 표현이 이 정도에 머물지 않고, 보다 더 선명한 다원주의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믿고 신성을 배격하면, 기독교가 다른 윤리종교들과 동일하여지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세계의 윤리종교들이 하나로 합쳐져 통일종교를 이룩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날에는 이 거인에게 항거하는 근본주의자를, 절대주의자들, 유아론 자들은 설 땅이 없다.

6.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김세윤, pp.53-58)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발생한 구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떤 언어, 어떤 그림, 어떤 상징으로 설명해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신약 성경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구약의 구속방법으로 설명하되, 네 가지의 그림으로 설명하였다고 하였다. 그 네 가지 그림언어(metaphor)는 앞에서 말한 은유(metaphor)와 동일한 용어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 안에서 발생한 구원을 어떻게 설명해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여, 어떠한 그림을 통하여, 어떠한 상징을 이용하여 설명해야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신약 성경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구원을 구약의 배경 속에서, 구약의 구속 방법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크게 네 가지 중요한 그림언어(metaphors)를 사용하여 십자가에 나타난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김세윤, pp.53-54)

이 인용문에서 그림언어(metaphor)가 문제다. 김 교수가 구약의 구속방법으로 네 가지 그림언어(제사, 화해, 구속, 새 언약)를 (김세윤, pp.55-58) 언급하였다. 그림언어의 사용법에 대하여는 필자가 은유의 해설에서 이미 설명하였거니와, 그림언어의 사용에는 원칙이 있다. 그림언어 자체는 껍질(shell)이라 버리고, 그림언어(제사, 화해, 구속, 새 언약)가 품고 있는 속뜻을 실체(reality)로 받아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구약의 구속방법을 네 가지 그림(제사, 화해, 구속, 새 언약)이라고 말한 것은, 이 네 가지 그림을 껍질(shell)로 취급하여, 폐기함을 뜻한다. 그러면 네 가지 그림언어(제사, 구속, 화해, 새 언약)의 속뜻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구약의 네 가지 그림언어의 속뜻(실체)을 밝히지 않고, 다음 항에서, (김세윤, pp.69-70) 신약의 그림언어를 해설하면서, 밝혔다. 그러므로 구약의 그림언어의 속뜻도 다음 항에서 밝혀질 것이다.

7.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김세윤, pp.59-81)

 이와 같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여러 그림(metaphor)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룬 것을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라고 합니다. 나 밖에서 일어났기에 객관적인 구원사건이라 합니다. 이제부터는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이 어떻게 ‘나’ 개인에게 효력을 발생하는가” 하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다루고자 합니다. 』 (김세윤, p.58)

『 성경은 이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네 가지 그림(metaphor, 은유)으로 표시했습니다. 즉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함(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등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와 같은 그림 언어들을 사용하여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이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what he is)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what he has done)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주관적 구원 사건의 실재(reality)를 여러 가지 그림으로 나타냅니다. 하나하나 살펴봄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김세윤, pp.69-70)

(1) 김 교수가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을, 구약의 그림과, 신약의 그림으로 그렸는데, 구약의 그림(제사, 화해, 구속, 새 언약)은 앞에서 해설하였고, 신약의 그림(의인,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은 여기서 해설하였다. 김 교수가 구약의 그림 해설에서는, 네 가지 그림만 소개하였고, 그림의 실재(reality)는 생략하고 밝히지 않았는데, 여기 신약의 그림에서는 네 가지 그림(shell)과 함께, 그림의 실체(reality)까지 밝혔다. (필자: 실재(實在)와 실체(實體)는 동일한 뜻)

그러면 신약 그림의 실체는 무엇인가? 신약 그림(의인,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what he is)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what he has done)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됨됨은 “성품”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은“순종”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됨됨이와, 하신 일에 참여함”은, 곧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성품을 회복함을 말한다. 김 교수가 십자가의 대속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은혜구원(제사, 구속, 화해, 새 언약)과 신약의 은혜구원(의인,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을 그림(shell)으로 취급하여 폐기하고, 이 두 그림의 실체(reality)로 제시한 행위구원(됨됨이와, 하신 일)을 기독교의 구원으로 확정하였다. 기독교의 구원을 대속의 은혜구원에서 행위의 윤리구원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구약의 복음(제사, 화해, 구속, 새 언약)을 그리스도가 성취할 대속의 예언(창 3:21; 4:13-5; 사 53:1-12)으로 믿어왔으며, 신약의 복음(의인,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믿어왔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였다. 정통신학은 구약과 신약이 동일하게 십자가에서 이룬 대속(redemption)이 구원이고, 행위는 구원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행위에 있지 않고, 대속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대속 대신 할례(행위)가 구원이라고 주장하던 할례 파들을 바울이 저주했던 것이다(갈1:6-9; 2:15-16; 5:2-4). 김 교수가 십자가의 대속을 폐하고, 순종을 구원으로 주장한 것은, 기독교의 폐기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담도 피 흘린 가죽옷을 입히셨고, 아담의 아들 아벨과 셋도 어린 양의 제사로 하나님이 받으셨고, 아브라함도 할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모세도 피 뿌려 장자의 저주를 막았다. 오직 피가 구원을 주는 복음이다(레17:11,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2) 결국 김 교수가, 십자가 대속으로 이루신 구원을 그림으로 취급한 이유가 들어났다. 기독교가 2천 년간 믿어온 구약의 은혜구원(제사, 구속, 화해, 새 언약)과 신약의 은혜구원(의인, 화해, 양자, 새 피조물)을 그림(shell)으로 처리하여, 기독교의 구원관에서 폐기하였고, 대신 행위구원(그리스도의 됨됨이와, 하신 일에 참예함)을 그림의 실체(reality)라 하여, 기독교의 구원으로 취하였다. 김 교수가, 구약과 신약이 선포해온 은혜구원을 폐기하고, 행위구원을 취하였으니, 이 행위구원은 유교, 불교, 유대교, 무슬림과 동일하고, 다원주의를 공식화한 가톨릭, Billy Graham, John Stott와도 동일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을 믿지 않는 모든 목사나, 신학자들과도 동일하다.

결국 김 교수가

 죽음과 구원의 해설에서는, 내세와 영생을 부정하고, 현세의 윤리회복을 구원으로 주장하였고,

 그리스도의 품성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여, 예수를 보통사람으로 주장하였으니,

 김세윤 교수에게 남은 것은, 현세와, 윤리구원과, 물질(육체)뿐이고, 내세나 영혼은 없다.

 이 김 교수의 윤리구원은, 김 교수가 현대에 적절하게 상황화한 새 신학, 새 복음이고,

 동시에 김 교수의 구원관은, 모든 현대신학(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 진보적 복음주의)의 구원관과 동일하고,

 또한 종교 다원주의의 구원관과도 동일하다.

(3) 김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에 참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예하여” 이루어지는 행위구원이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행위구원을 성화로 보았다. 다음은 김 교수의 해설이다.

『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동참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됨됨이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래서 제자도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그 영광의 형상을 점점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을 되찾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김세윤, p.103)

김 교수는, 앞에서 성화가 곧 구원이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성화가 제자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제자도로 이루어지는 성화는, 제자가 스승의 성품(nature)과 행적(achievements)을 본받아 이루어가는 윤리구원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같은 인간인 예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교훈에 순종하고, 스승의 성품을 닮아서 받는 윤리구원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화와 제자도는 그리스도의 신성 부정하고, 인성만을 주장하는 단성론(單性論)을 전제한 것이다.

본래 정통신학은, 성서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믿기 때문에, 물질창조와, 기도응답을 믿고, 지옥 형벌과 최후의 불 심판을 믿으며, 십자가 대속으로 받은 은혜구원의 감격이 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능히 하나님께 헌신하고 복종함으로 윤리가 성취되어진다. 그러나 현대신학이나 김 교수는 하나님의 물질창조와, 기도응답과, 지옥형벌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 십자가 대속으로 주어지는 은혜구원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신한다든가 복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김 교수의 하나님은 헤겔이 말했던 생각 속의 하나님 곧 관념(idea)의 하나님이고, 이름뿐인 허수아비 하나님이다.

단지 인간에게 인성회복이 필요하다는 필요성과, 인성회복이 당연하다는 당위성을 따라서, 인성을 회복하자고 외치고, 그 실현 방법으로 예수를 본받아서 인성을 회복하자고 외칠 뿐이다. 그러나 필요성이나, 당위성이나,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삶으로는 인간의 물욕, 정욕, 명예욕(교만)이 억제되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형벌이 없는 법규는 아무리 그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여도 지켜지지 않는 것과 같다. 심지어 살인금지법도 당위성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다.

우리는 김세윤 교수가 기독교의 구원을 행위구원과 제자도로 전환한 것을 보았다. 기독교의 구원을 행위구원과 제자도로 전환한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학자 A. Ritschl(1822-89)32 과, 신정통주의 신학자들(K. Barth, R. Bultmann, E. Brunner, P. Tillich, Niebuhr형제)과,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J. I. Packer, John Stott)과,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들(Billy Graham, H. J. Ockenga, E. Carnell, C. Henry)이다. 다원주의 신학을 수용한 모든 신학자들과 교단들도 다 여기에 속한다.

이 제자도의 윤리구원 운동이 왜 일어났는가? 20세기 초에, 인류문명이 위기에 처한 사실을 알아차린 30대의 젊은 목사들이, 인류문명의 구제책으로 들고 나온 것이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자는 발상이었다. 필자가 앞에서 열거한 독일과, 영국과, 미국의 목사들은 계몽사상(現代精神)을 수용했던 자들로서 다 30대에 나섰던 목사들이다. 즉 역사에 단 한 번 있었다고 보는 예수를 인류의 대표자와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가 되어 본받고 닮아가는 윤리구원을 받아서, 평화와 정의를 구현시켜 영원히 공존공생 하자는 것이었다.

윤리구원의 평가

(1) 이 제자도로 윤리를 회복하자는 데는 반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제자도로 “윤리가 살아날 수 있느냐”는 과제로 남는다. 윤리의 근본은 겸손이고, 욕심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겸손하고 욕심을 버려야 이웃을 사랑하여 덕을 세우고 화목하며, 공법과 공익을 지킬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이 이 제자도로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억제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현대인은 계몽주의(진화론과 유물론)를 신봉하여,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불신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하지 아니함으로, 제자도만으로는 자기부정이 불가능하다. 오늘날 보수교회들도 대부분이 성장과 성공만 외쳐 경쟁과 욕심만 부추기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킬 것을 말하지 않으며, 죄과 심판을 말하지 않는다. 권징도 없어졌으니, 교회와 신자들이 타락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을 하나님을 떠난 열매 없는 나무로 보시기 때문에, 심판하신다(눅13:1-9).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의 소유자만 구원하시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는 구원에서 제외하신다고 하였다. (약2:14,20,26)

(2) 20세기 후반세기에, 수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믿지 않고, 지옥과 천국을 믿지 않고, 형벌과 축복을 믿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윤리를 회복함에 있어서는, 성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서해석학을 발전시켜왔고, 제자도(弟子道)를 강조해왔지만, 이들의 하나님은 이름뿐인 관념(idea)의 하나님이라, 인간에게서 하나님 경외심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며, 인성회복이나 윤리회복도 이룰 수가 없었다.

바르트가 신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끝없이 강조하였으나,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 형벌을 불신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르트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복종하지 않았다. 바르트가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 Church Dogmatics)을 9,000페이지나 되는 분량으로 써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강조하였으나, 바르트의 하나님은 두려울 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다만 이름뿐인 관념(idea)의 하나님, 허수아비 하나님인지라, 바르트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복종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 월남전 같은 전쟁들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일찍이 Kierkegaard(1813-55)가 인간의 인성회복(실존회복)을 외쳤고,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수많은 철학자들(생명의 철학실존주의 철학분석철학)과 신학자들(신정통주의신복음주의해방신학민중신학 등)이 일어나 인간의 인성회복(실존회복)을 외쳤지만, 이들의 철학과 신학에는 진노하고 형벌하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인성회복(실존회복)이 불가능하였다.

(3) 현대신학이 성경과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한 것은, 이 제자도 이외에 또 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B, Russell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구현을 외치며, 압제자를 항거하는 것이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성서의 도움 없이, 공산혁명을 명분으로 기득권층에 항거하여, 자기 동족 2,000만 명을 재판없이 학살하였고, 모택동도 기득권층 3,000만 명을 학살하였다.33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항거나 혁명만으로도 잠시 동안은 정의를 어느 정도는 구현할 수 있었지만, 인성회복은 불가능하였다.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혁명의 주체들이 저질렀던 횡포와 독재와 독점은 전 보다 더 무서운 빈곤과 억압을 가져온 사례가 많았고, 또한 공산화까지도, 경제가 파국에 빠지고서야, 1970년대부터 중국 공산당을 시발점으로, 서서히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받아드리기 시작했다. 현대신학도 강력한 데모와 항거로 정의구현에는 상당한 보탬을 주었지만, 인성회복에는 무기력하였다. 현대신학의 하나님은 기도응답이 없고, 상벌이 없고, 내세와 영생이 없고, 단지 이름뿐인 관념의 하나님인 것을 알아챈 신자들은, 인성회복은 고사하고, 도리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영국교회와 유럽교회가 이미 경험한 바이고, 미국의 교회들(장로교감리교성공회)도 경험하고 있다. 김세윤 교수가 1999년에 독일 튀빙겐을 방문하고, 계몽사상을 수용했던 유럽과 영국의 교회들이 초토화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개탄하였다.

『 이것은 1997년 여름, 필자가 20년 만에 방문했던 영국에서의 충격을 다시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 당시 영국은 기독교가 위축되어 상당수의 교회 건물들이 창고로 개조되기도 하고, 마을의 박물관으로, 심지어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유럽교회들의 약화는 극에 달하고, 물신주의적, 세속주의적 향락 문화로 사회가 계속 퇴폐해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이 유럽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 34

김세윤 교수가 1997년에 영국을 방문하고, 1999년에 독일 튀빙겐을 방문하여 보았던 것은, 교회들이 초토화 되어가는 모습이었다고 하였다. 교회당이 창고로 개조되고, 박물관 혹은 이슬람 사원으로 변조되어 가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물창조와 내세와 지옥과 천국 영생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앙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불신하여 신앙이 없어지면, 인성회복은 고사하고,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가기 때문에, 교회운영마저도 힘들어진다. 그래서 김세윤 교수는 기독교 안에 무신론자들을 교인으로 포섭하기 위해서, 신학해설에 분석철학을 적용하여, 신학에서 일체의 기적을 찾아내 폐기한 것이다. 한국의 정진석 추기경도, 2009년 1월 1일 기자와 나눈 신년 메시지에서, 5병2어의 기적을 공개적으로 부정하였고, 빅 뱅 설(Big Bang)과 진화론을 주장하여, 사도신경을 문자대로 믿지 않고도 교인이 될 수 있게 하였으니, 가톨릭교회의 문이 진화론자들에게도 활짝 열린 것이다. 이제는 예수의 신성과 내세를 믿지 않고도 가톨릭교회 회원이 되는데 문제가 없다. 그렇게도 세계 보수교회가 믿고 의지해온 Billy Graham, John Stott, James I Packer도 기적과, 육체부활과, 내세를 부정하였으니, 진화론과 빅 뱅 설을 확신하는 현대인들까지도 교인이 되게 한 것이다.

(4) 그러나 유럽이나 미국이나 근본주의 이슬람이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과 미국도 오순절 교회처럼 근본주의에 속한 교회들은 부흥하고 있다. 상벌이 있고, 내세와 영생이 있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들은 부흥하나,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날로 쇠퇴하고 있다.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열린 음악과 함께 영성운동이 한참이다. 그러나 열린 음악은 사도신경을 폐기하고, 성령수태와 육체부활과 지옥형벌과 내세와 영생을 폐기하였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름뿐인 관념(idea)의 하나님인지라, 두려워할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관념의 하나님께는 복종하지 않으며, 영성도 살아나지 않는다. 참 영성이 무엇인가? 참 영성은, 성서대로 하나님을 믿고, 지옥형벌과 천국영생을 믿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참 영성이다.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 복종이 현대인이 그렇게도 바라고 소원하는 참 영성이다.

그래서 최근에 진보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회들이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개발해낸 것이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이다.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은, 현대인들을 위해서, 현대인이 싫어하는 그리스도의 성령수태와 육체부활과 공중재림과, 천국영생과, 지옥형벌이 들어있는 사도신경을 폐기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배순서에서 사도신경을 제거하였고, 찬양 곡에서는 사랑과 용서만을 가사로 하고, 육체부활과, 내세의 지옥과, 천국의 영생 등은 철저히 제거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해설이 믿어지지 아니하면,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을 깊이 분석해 보라.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폐기한 열린 예배에 어울리는 열린 음악에는 육체부활과 내세의 지옥과, 천국의 영생 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오는 영성회복을 기대할 수가 없으므로, 이전 기독교의 영성을 대신하여, 기타(guitar)와 북과 율동과 빠른 박자와 강력한 소리에 사랑과 용서를 담아서, 사람들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여, 모든 시름과 스트레스를 잊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얻어진 영성에는 악행을 형벌하시며, 천국에서 영생케 하시는 하나님이 없음으로, 순간적인 감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리를 뜨면서 영성도 없어진다.

물론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끝없이 반복하여 부르지만, 그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용서만 있고, 형벌이나 내세의 지옥이 없기 때문에, 어떤 짓을 해도 항상 마음이 평안하다. 물론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교회 목사들이,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에 보수교회의 예배를 섞어 범벅하는 예외도 종종 있다.

또한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에서도, 지옥이 없다든가, 하나님의 진노가 없다든가 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나 주장은 금기사항이라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멍청하여져서, 가사에서 반복하는 용서와 사랑만 기억에 남고, 진노와 지옥과 천국과 영생은, 이것을 말해주던 사도신경이 폐기되었고, 복음성가에도 없으니, 기억에서 계속 지워져간다. 이것이 Billy Graham의 복음이었고, John Stott의 복음이었고, James I Packer, C. S Lewis의 복음이었고, Edward Carnell, Garl Henry의 복음이었고, Harold J. Ockenga의 복음이었다. 여기에 열거한 목사들이 활발하게 사역했던 년대가 1940-1950년대였으니, 이들의 설교와 강의만을 듣고, 이들의 책만을 읽고 성장해온 오늘의 세대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해보라.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설교와 복음을 분석해보라. 이 필자의 해설이 100번 현실이고 사실임을 금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앞에서 열거한 지도자들이 서서히 다원주의를 선포하고 있다. 가톨릭, WCC, NAE. WEF 등이 다 이 범주에 든다.

(5) 최근 미국과 한국 교회가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으로 현대과학으로 메말라진 영성을 회복하려 하지만, 참 영성이 회복되어질 리가 없다. 현대신학으로는 인류와 문명을 파멸에서 구해내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더 이상의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신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허수아비 신인 줄 알면, 그 신 앞에 그 누가 무릎 꿇고 기도하려 하겠는가? 사람이 모이지도 않는데, 누구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겠는가? 하물며 그런 신에게 복종하겠는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김세윤 교수와, 같은 범주 안에 머무는 목사들이 쓴 책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을 내세워 사도신경을 예배순서에서 삭제하는 이유도 아는 사람이 없다. Billy Graham이 그가 신문 기자에게 말한 간증에 의하면, Graham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의 교리에 확정적으로 안주한 것이 31세(1949)였다고 하였다. 35 Graham과 동역했던 목사들(H. J. Ockenga, Edward Carnell, Carl Henry)이 다 194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에 안주했던 사람들이고, 영국의 C. S. Lewis, John Stott, James I. Packer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다 근본주의를 사장시키는데 총력을 기우렸으며, 이들의 후예들이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을 고안해낸 것이다. 지금은 이들과 이들의 후예들이 다원주의를 선창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현재 보수신학에 머물러 있는 교회들 대부분이 이런 내막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열린 예배와 열린 음악을 교회 안에 끌어드려 정통신학과 범벅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6) 이처럼 현대신학의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 하지 못하는 신이고, 기도에 응답하지 못하는 신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모이지 않으며, 있는 교인들조차 떠나간다. 교인들은 현대신학을 따르는 교회를 떠나가지만, 현대신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신학자들과 목사들이다.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교회와 신학교를 떠나지 못한다. 21세기에서도 교회와 신학교는 정통신학을 믿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음으로, 현대신학을 지키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정통주의 신학을 믿는 신학생들과 교인들을 상대로 책을 쓰고 설교해야만 하니,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한 자기들의 교리를 들어내 주장할 수도 없고, 정통신학을 들어내 공격할 수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다. 만일 현대신학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거나, 정통신학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면, 그들의 정체성이 들어나, 정통신학을 지키는 교인들과 신학생들이 교회와 신학교를 떠나든지, 현대신학을 지키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교회와 신학교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인용문은, 김 교수의 긴 부활해설에서, 實在하지 않는 復活에 대한 부분만을, 원문(原文)대로 적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필자가 토씨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원문대로 적은 것이다. 김 교수가 이 문장에서 實在하지 않는 復活을 제시하였으니, 독자들은 우선 원문을 정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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