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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교회사 구글링

형람서원 2024. 6. 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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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2.스코틀랜드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

3.성 콜룸바

4.마가레트 여왕 치세하의 스코틀랜드

5.종교 개혁이전의 스코틀랜드 교회

6.종교 개혁의 여명기

7.존 낙스의 활동

8.스코트랜드에서의 종교 개혁

9.17세기 초기의교회

10.계약파들의 승리

11.박해받는 계약파

12.17세기 교회의 생활

13.명예 혁명 체재

14.제1차 분열

15.제2차 분열과 타협파

16.복음주의파의 부흥

17.임의 기부제의 원칙

18.대분열

19.영적인 독립

20.민족 교회의 부흥

21.변화의 세기

22.스코틀랜드 교회의 재통합

23.오늘날의 시대

24.장로 교회의 가족

25.스코틀랜드 교회의 연표

 

스코틀랜드 교회사

 

1.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1)스코틀랜드는 영국북쪽의 소국으로 아일란드에서 건너간 스콧트족과 원주민 픽트(Picts)족이 살고 있었으며, 처음으로 성니니안(St . Ninian)이 4세기 전도하고, 563년에는 성 콜롬바(St . Colunmba 521-597)가 아이오나(Iona)섬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전도를 하였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중심이 되어 영국의 세력에서 독립을 유지해 왔다.

종교개혁이전에 성 안드류스 대학(St . Andrews, 1411), 글라스고 대학(Glasgow1450-1), 에버딘 대학(Aberdeen, 1494)이 설립되고 : 1472년에는 세인 안드류스가, 1492년에는 글라스고가 대 감독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개혁 전에는 교회가 힘을 잃었다.

 

(2) 지리적으로 좋지않는 환경에 놓여있으며 북쪽은 고지대(High Land)이며, 남쪽에 수도인 에딘버러, 새인 앤드류스, 글라스고 등의 도시들이 있다. 민족적으로 스콧트인들(Scote)은 독립심이 강하고, 근면하며, 인색할만큼 근검절약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씨족 관념이(Clan)이 강하여 각 씨족벼로 특이한 색깔과 옷을 착용하였으며(옛날에) , 씨족간에 분쟁도 많았다고 한다.

 

(3) 1707년 스코틀랜드가 영극과 연합(Union) 하기 이전 왕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a) 1513-1542 : 제임스 5세

(b) 1542-1567 : 메리 스트아트(Mary Stuart 1542-1567) *소위 “Queen Scots"

(c) 1567-1625 : 제임스 6세. (1603에는 영국왕을 겸하게 되어, 제임스 일세라는 옹칭을 가지게 됨. 이 이후로 1707년까지 영국왕은 자동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음)

 

 

2.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예비단계.

 

(1)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위크리프의 설교자들(Lallards)이 스코틀랜드에도 일어나 가능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레스비(Resby, 1406)와 크라와(Crawar, 1433)가 순교하였다.

(2) 독일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자 루터의 저작이 밀수입되고, 패트릭 해밀턴(Patreck Hamilton)이 루터의 저작에 감명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서 개혁자들을 만나 개혁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여, 진리를 전하다가 1528년에 스코틀랜드 장노교회의 첫 순교 자가 되었다.

(3) 영국의 종교개혁운동이 영향을 미쳤으나, 반영감정(反英感情) 때문에 스콧트인들은 제네바의 개혁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존 낙스(John knox, 1513-1672)가 순교자 위시아트 (G. Wishart)를 이어 개혁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3. 존 녹스

 

(1)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해 딩턴(Haddington)출신이며, 그도 처음 신부가 되었으나, 고향에서 법률가로 일을 하는 등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위시아트의 영향으로 개혁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547년에 확신을 가지고 체인 안드류스에서 진리를 전파하다가, 불란서 함대가 성을 점령할 때 붙잡혀 19개월간 노예선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1549년 방면된 후에 영국 에드워드6세 궁실의 목사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메리 여왕의 집권 후에 제네바로 피신하여 칼빈을 만결정적인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의 방향을 잡았다. 거기서 결혼도 하고...... .

(2) 1555-1556, 귀국하여 설교와 저각에 힘을 다하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반불파(反佛派)

귀족들과 “가장 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교회”를 설립하기로 계약(Covenant / 또는 (Covenanting)을 1557년에 맺게 되었다. 이 귀족들이 나중에 “회중(교회)의 존귀한 者” 로서 개혁운동의 정치적지지 자가된다.

(3) 1560 영국의 도움으로 불란서 군대가 물러가고, 스코트란드 의회는 녹스의 신앙고백서(Scottish Confession, 1560)을 체택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개혁교회가 되었다.

교황의 법적 권위를 무효화하고, 로마 카토릭 미사를 금지시켰다.

같은 해에 제일 권징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1560)를 저작하여 장노교회정치 원리를 확정하였다. 이 치리서는 의회의 인준을 받지 않고 교회의 총회(the General Assembly)에서 인준하여 교회의 독립을 확정시켰다.(그후 1564에 총회는 녹스가 지은 the Book of Common Order를 채택하였다.)

(4) 1560년에 섭정이었던 기즈家의 마리아가 죽은 뒤에, “스콧트인들의 여왕”이라 불리워지는 메리 여왕이 1561년 불란서에서 귀국한 이후로 1567년 그의 아들 제임스6세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낙수는 에딘버러 성 질스(St . Giles)강단에서, 메리 여왕은 왕좌에서 서로 불호령으로 공박하였다고 한다. 낙스는 생전에 개혁교회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으나, 개신교도로 양육 받은 제임스 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한다.

 

(5) 그의 성품은 편협한 점도 있고, 과격하고 거침없이 말을 함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으나, 대담하고 직선적이어서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실에 틀고 앉은 “마녀들에 대한 선전나팔”(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이란 소책자의 표제가 나타내 보이는것 같이 선동적이고 열열한 개혁운동가였다.

그의 신념은 “예정론 연구” (Treatise on Predestination, 1560, 제네바에서 출간)에서 보이는 엄격한 칼빈주의 신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1587, 1644완간)로 사후에 출판되었다.

 

 

4. 녹스의 후계자 멜빌

 

(1) 안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2-1622)은 녹스의 후계자로서 스코틀랜드 교회를 장노교회로 조직하였다. 1577년 촐회에서 제 이 권징서(Second Book of Discioline, 1577)을 체택하고 목사, 감독, 성직자(minister)는 같은 말로 썼으며 시찰장(Super-intendents)의 임무를 노회(Presby tery)로 이관하고, 감독직은 교회재판(ecclesiastical courts)에서 담당하였다.

 

(2) 그는 베자의 친구이었으며, 학자요 스코틀랜드대학교육 개혁가이기도 하였다.

글라스고대학장으로서 어학, 과학, 철학, 신학등의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하였다.

제임스 왕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수 차례 교수직을 잃었으며, 국교회 예배의식을 풍자하는 시를 써 런던탑에 수금되기도 하였다.

 

 

5.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특징.

 

(1)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교리는 개혁신앙(Reformed faith),정치는 장노주의(Presby-terian system)를 취한다.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확정된 것은 1690년이나, 그때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 제임스6세기 영국왕이 된이후로 영국왕들들이 스코틀랜드에 감독제를 강요하였다. 단일 군주, 단일교회정책을 취한 것이다. 스콧트인들은 정치적, 종교적자립을 원하여 1538년 국민계약(National Covenant)을 맺어 장노제를 유지하기로 맹약하고, 영국왕 찰스일세에 반란을 일으켰고, 1643년에는 청교도들이 우세한 영국의회와 “신성동맹 및 계약”(The Solemn Leagus and Covenant)을 맺고 국왕과 싸우게 되었다.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예배서를 교회의 규범서로 받아들였으 며, 명예 혁명 후에 정식으로 스코틀랜드 영역에는 장노교회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3)예배는 질서와 위엄(order and dignity)이 있으며 단순하다 .고교회파(High Presbyterisns)는 예배의식에 예식서를 사용하나, 대부분 정한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지 않고,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둔다. 사도적 신앙과 보편 교회적 예배에 충실하려 한다.

성찬은 번번하지 않고 장노들이 수종한다. 권징을 실시한다.

 

 

6. 계약파(Covenanters)

 

(1) 16세기, 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로서 종교적, 정치적 맹세로 결속하여 그들의 종교적이상을 성취하려하였다

1556에서 1562사이에 수많은 계약이 이루어지고, 1638년 찰스일세에 대항하여 맺은 국민계약(the National Covenant), 1643년 신성동맹 및 계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정점으로 계약을 종교 및 정치투쟁의 방법으로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계약파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1661-1688년사이에 또 다시 장노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새로운 계약이 생겨 났고, 명예혁명으로 장노주의의 승리로 계약목적이 이루어졌다.

 

(2) 그 이후에 일부의 과격파는 1690년의 장로교회설립에 불만을 가지고 “개혁 증노교회 교인” (Reformed Preabyterians)이 되었으며, 계속 “계약파” 전통을 이어왔다. 그후에 스코틀랜드 장노교회에서 분리한 “자유교회” (Free Church, 1876)에 합세하였다.

 

(3) 리차드 카메룬(Rechard Cameron, ?-d. 1680)은 과격파의 대표이며, 1661-1688년 왕성복구시대에 찰스이세에 대한 무력항쟁을 펴고, 국교회에 동조하는 동족에 대해서도 공격을 엄추지 않았다. 그는 열혈설교가이며 스코틀랜드교회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1680년에 국와의 군대와 교전중 전사하였다. 그를 따르는 과격한 계약파를 “카메루니안”(Cameronians)라 부른다. 지금도 미국에 개혁 장로파가 있다.

 

- 출처 : KCM,

http://kcm.kr/dic_view.php?nid=40678&key=16&kword=%5B%B1%B3%C8%B8%BB%E7%5D&page=

 

 

1. 역사적 배경

 

스코틀랜드는 문명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예술은 놀라울 정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와 비교할 때 백성들은 야만적(barbarous) 이었고, 땅은 개척되지 못했다. 여러 세기 동안 민족(nation)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로마 제국은 어떤 시기에도 스코틀랜드를 차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종교는 조잡했고 미신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의 명백한 우위성 앞에 굴복하였다. 즉 스코틀랜드는 본래 외국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국가였다.

 

(1) 성 니니안(St. Ninian)

 

스코틀랜드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이름은 성니니안(St. Ninian)의 이름이다.

그는 4세기 중엽에 태어났고 솔웨이(the Solway) 지역의 족장의 아들이었다. 니니안은 로마에서 정확하게 기독교 진리를 배웠다. 당시에 사람들이 로마에 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에 니니안은 교회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주후 381년부터 385년까지 성경 연구에 있어 가장 유명한 학자의 한 사람인 제롬(약 348-420년) 이 로마에 있었는데, 모든 사람이 그를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니안에게 영향력을 끼친 주요한 인물은 뚜르의 마르땡(St.Martin of Tours)이었을 것이다 니니안은 마르땡과 함께 프랑스에서 얼마동안 살면서 활동하였다. 니니안은 그의 일생의 과업(his life-work)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마르땡에게서 배웠다. 니니안은 지도자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최남단에 있는 휘돈(Whithorn)에서 정착했다. 니니안은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니니안의 활동은 약30년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니니안은 432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 아일랜드로부터 학생들이 니니안이 세운 수도원으로 왔으며, 그들은 돌아가서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2) 성 콜롬바(St. Columba, 521-597)

 

스코틀랜드에 대한 아일랜드의 영향은 성 콜럼바의 이야기로부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대수도원장과 선교사가 된 콜롬바(Columba, 521-597)는 스코트족의 땅인 아일랜드의 도네갈(Donegal)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성직자가 된 후, 그는 여러 지역에서 설교하였고, 데리(Derry)와 더로우(Durrow)같은 지역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우는 일에 협력하였다.

563년 그는 아일랜드를 떠나 '그리스도를 위해' 순례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12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콜럼바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이오나(Iona)섬으로 항해하였다. 그가 이오나에 세운 수도원은 스코틀랜드와 북부 잉글랜드에 기독교와 켈트 수도원을 전파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켈트 교회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콜럼바의 주요한 초기 생애(Life of Colomba)는 이오나 수도원의 제9대 수도원장 아담난(Adamnan)에 의해 688-692년 경에 저술되었다

현재는 콜럼바가 세운 수도원에 대한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오늘날 방문할 수 있는 대성당과 파편물들은 후기 시대에 속한다. 수도사들은 분리된 방을 가지고 있었으나, 모두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손님들을 위해서는 접견실이 있었다. 수도사들의 의복은 모직으로 된 속옷과 겉옷 등이 있었다.

콜럼바는 일생동안 종교적 실천(religious practice)에 헌신한 깊은 경건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낭랑하고 힘있는(sweet and powerful)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수립하였다. 따라서 그는 스코틀랜드의 사도라고 불리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597년 콜럼바는 이오나섬에서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오나는 6세기 스코틀랜드 복음화 운동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라토렛 교수에 의하면, 잉글랜드를 위한 선교운동이 로마의 선교운동보다 한 세대 후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민 개종에 더 중요한 영향를 미쳤다.

콜럼바에 의해 대표되는 켈트 교회(the Celtic Church)는 약 150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다. 야만인들의 침입의 물결은 로마로부터 브리튼(Britain, 영국, 즉 잉글랜드,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과 아일랜드의 기독교를 거의 완전히 단절시킬 정도로 대륙을 가로질러 휩쓸었다.

 

(3) 어거스틴 대주교

 

교황 그레고리 대제(590-604)는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어거스틴(약 604년에 죽음)을 파견하여, 영국에 정착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려고 했다. 캔테베리의 최초의 대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영국의 사도'(Apostle of the English)로 알려졌다. 그는 597년 켄트(Kent)에 도착했다. 어거스틴은 켈트 교회(Celtic Church)에 관심을 가졌다. 즉 그는 로마의 선교 방식이나 교회 관습과 다른 켈트 교회의 선교 자세 및 관습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역사가 베더(Bede)는 로마 교회와 켈트 교회를 연합시키고자 했던 어거스틴의 시도가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 문제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① 켈트 교회로 하여금 로마 교회가 부활절을 맞이하는 방법을 채택하도록 요구한 점.

② 켈트 교회로 하여금 세례의 로마 교회적 전통을 채택하게 한 점.

③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는 로마 교회의 선교에 켈트 교회가 참여하도록 요구한 점.

어거스틴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로마교회 성직자였다. 매우 양심적이고 경건했으나 그는 외교적 수완과 상상력이 부족했다. 어거스틴은 교황에게 많은 문제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역의 풍습이 잉글랜드의 교회에 채택될 수 있다는 교황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켄터베리(Canterbury)는 작은 로마가 되었고, 대성당과 수도원과 학교를 거느렸다.

남 아일랜드는 주후 630년경에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였고, 잉글랜드는 664년 휘트비 종교회의에서, 북 아일랜드는 703년에, 그리고 스코틀랜드는 718년경에 로마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4) 마가레트 왕비(Queen Margaret, 1045-1093)

 

스코틀랜드 교회가 세계의 나머지 교회들과 완전한 일치를 가져온 것은 마가레트 왕비(Queen Margaret, 약 1045-1093)와 그의 가족이 통치하던 때였다.

마가레트는 노르만족의 침입때문에 스코틀랜드 왕실에 피난했고, 거기서 말콤3세(Malcolm Ⅲ, 1057-93)의 부인이 되었다. 말콤은 그 유명한 찬탈자 멕베드(Macbeth)를 격파하면서 1057년에 왕이 되었다.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북쪽과 동쪽에 있는 섬들을 제외한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이다. 말콤은 노련한 군인이었으나, 그의 인격은 아내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마가레트는 스코트랜드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만하고 기억할만한 인물로 남아있다. 그녀는 강한 종교적 열정과 의무에 대한 충성된 헌신 그리고 특별한 인격의 힘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라틴어로 된 교부들의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성경과 교회 그리고 신자들의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에 있어서 헌신적이었다.

당시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마가레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무슨 말인가! 죄인이 그 거룩한 신비(Holy Mystery, 즉 성찬)를 맛볼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사람도 죄에서 깨끗하지 못하니( no one is Pure From sin) 아무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만일 그 누구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면 주께서 왜 복음서에서 이 선포를 하셨는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마가레트는 1093년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죽었다. 그녀의 남편과 장남도 같은 해에 잉글랜드 사람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그녀의 아들들(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1세)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외국의 교회와 근접시키려는 어머니의 노력을 계속했다.

때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교황의 부당한 간섭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1320년에 4명의 스코틀랜드 주교들이 교황 앞으로 출두하도록 소환되었으나, 스코틀랜드 교회는 조용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대륙과 계속하여 접촉을 했다.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외국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을 넓혔다. 15세기에는 좋은 학교들도 서립되었다. 성 앤드류 대학은 1411년에, 글래스고우 대학은 1451년에, 애버딘 대학은 1494년에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의 노선을 따라서 설립되었다.

중세 후기에 사람들은 교회 내의 타락에 대하여 좀 더 민감해져 가고 있었다. 교육과 학문 그리고 개인적인 사상들도 진전되었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고 성경의 원어(히브리어,헬라어)도 다시 한번 검토되었다. 인쇄술의 발견은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신기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더 실제적이고 내적이며 개인적인 종교에 대해 갈망하게 되었다. 자국어로 된 성경의 출현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

 

(1)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첫번째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의 재능있는 젊은이(a talented youth)였다. 그는 파리와 루뱅(Louvain)에서 공부했고, 후에는 독일의 개혁된 대학인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27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시작했다. 1528년 2월 29일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루터적 단계(the Lutheran stage of the Reformation)의 대표자였다.

 

(2)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

 

16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왕권이 약한 반면에 귀족들의 세력이 거세었다. 교회는 국토의 반을 차지하여 비교적 부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 재산은 평신도 귀족들의 소유였다. 여러 대학들이 있었으나, 교육 수준은 대륙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1543년 국회는 성경 읽기와 번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1544년에 이르러 비이튼(David Beaton, c. 1494-1546)과 친불파는 강한 억압책을 적용하였다.

이 때에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가 활동하고 있었다. 위샤트는 애버딘 대학에서 문학석사(M.A.) 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교장으로 일했다.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자로 소환되기도 했다(아마 그 이유는 그가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가르쳤기 때문이었을것이다). 그는 피신했으나 1년 안에 브리스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무렵(1540년 경)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 갔으며, 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의 진전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소코틀랜드로 귀국한 후 던디(Dundee)와 그밖의 지역에서 설교했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으며 긴 수염을 가졌다. 태도는 정중했으며 생활방식은 단순했다. 그는 매우 진지한 교사였다. 그는 추기경 비이튼의 명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 비이튼 자신은 그후 3개월 후에 성 앤드류스 성에서 매복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다.

 

(3) 메리 여왕과 죤 낙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61년 8월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이미 그녀는 낙스(Knox)가 자기 최대의 적이며 또 스코틀랜드가 이 양편을 함께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스는 처음엔 이 메리 여왕이 프로테스탄트 손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었고 곧 그와 비슷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낙스가 메리 여왕을 세 번 째까지 알현할 때는 정중한 만남 속에서 작은 논쟁만을 벌였었다. 그러나 네 번째 알현에서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조가 보였다.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할까 생각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낙스는 자기의 명령을 발하여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강렬한 반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메리 여왕은 국사에 한 이단적인 설교자(낙스)와 일반 평민들이 개입을 한다고 격분하여 낙스를 소환하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를 꾸짖고 또 낙스를 반역죄인이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세력은 기울었고, 1567년 메리 여왕은 몰락, 퇴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낙스의 오랜 친구인 모레이(Moray)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섭정 제임스는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파와 섭정 지지파 사이의 투쟁 속에 빠져들어 갔다.

낙스는 이 소용돌이 속에 걱정과 근심을 하며 개입하였다. 그러나 낙스의 힘은 기진한 상태에 있었다. 낙스는 임종의 자리에서 교회 직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 그 비판받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단지 그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을 참으로 증오하고 혐오한 것인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기꺼이 은혜를 베푸시사 그의 신비스런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과연 그가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너무도 컸기에 전혀 인간들의 눈치를 살핌이 없이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대로 너무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낙스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감히 고백하나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 점이 없으며,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한 점도 없으며, 나 개인의 정욕 혹은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노력하였을 뿐이다."

또한 낙스는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언에 기록하였다 :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

 

<대영백과 사전>에서는 죤 낙스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

"낙스가 설교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은 그가 이성과 감정을 잘 혼용하는 능력(his capacity to fuse reason with emotion)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 그가 강단에서 열정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지성과 감정에 똑같이 강력한 호소를 하였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그는 비관용적인(intolerant) 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 나 비슷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낙스의 칼빈주의는 후대의 칼빈주의보다는 훨씬 온건한 것이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오직 한마음을 가지고 일생 내내 꿋꿋하게 헌신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이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드물었는데, 그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낙스의 도덕적 생활이 그의 엄격한 시조(rigorous creed)와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 낙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가 있다."

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다. 제임스 멜빌(James Melville)은 낙스를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선지자이자 사도"(that most notable prophet and apostle of our nation)라고 불렀다. 섭정 모튼(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그의 일생동안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Here lieth a man who in his life never feared the face of man).

 

(4)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낙스가 사망한 후, 곧 앤드류 멜빌이 지도자가 되었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Montrose) 부근의 밸도비에서 1545년 8월 1일 출생하였다. 몬트로즈에서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고, 1559년 성 앤드류 대학교의 성 메리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1564년 가을에 파리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성 앤드류 대학교를 떠날 당시, 그는 "영국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시인인 동시에 헬라어 학자"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멜빌은 파리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철학 등을 공부했다. 후에 그는 제네바를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곧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멜빌은 베자의 문하에서 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74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노력과 열의로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어 강의실들이 꽉 들어차게 되었다. 1575년 8월의 총회에서 멜빌은 고위 성직제도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578년 4월부터 그는 <제 2 치리서> 작성을 주도하였으며, 이것은 1581년 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제 2 치리서>는 멜빌의 주요한 노력의 결과였다.

 

3. 죤 낙스의 활동(사역)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인공은 죤 낙스(John Knox, 1513-1572)였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그를 "그의 조국과 세계가 빚을 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인"(the one Scotchman to whom his country and the world owe a debt)이라고 불렀다.

죤 낙스는 제임스 5세의 초기인 1513년(혹은 1515년)경에 해딩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계급 출신으로서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샤트가 설교할 때 검을 들고 그를 호위하기도 했다.

위샤트가 화형을 당한 후, 낙스는 성 앤드류 성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설교의 효과는 놀랄 정도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Others cut the branches of the Papacy, but he strikes at the roots.)라고 했다.

그후 프랑스의 공격으로 성 앤드류 성은 함락 당하고 낙스는 체포되어, 프랑스 노예선(죄수나 노예들이 노를 젓게 한 돛배)에서 19개월 동안 죄수로 지냈다. 그 배에서 복역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성 앤드류 성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았으며, 그 때에 그는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나은 시기에(in better times) 그 곳에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석방된 후, 낙스는 잉글랜드의 버위크(Berwich)에서 여러 해 동안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했다. 당시에 영국 왕은 에드워드 6세(1537-1553)였으며,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지도아래 종교개혁이 급도속로 진전되고 있엇다.

 

낙스는 5년 동안(1549-54) 비위크에서는 목회를 통해, 런던에서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의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버위크에서 목회할 때 그는 성찬 참석자들로 하여금 성탄 식당에 둘러앉게 했는데 그는 그것이 성경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꿇어앉는 것에 대한 낙스의 반대 때문에 크랜머는 제2차 기도집(the Second Prayer Book)에서 꿇어 앉는 것에 관해 극히 개신교적 설명을 가했다. 즉, 성찬식이 시행될 때 무릎 꿇는 것은 시행되지만, 이것은 경배의 의미는 없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삽입하였다(이것은 낙스의 공헌으로 인정된다). 비록 낙스가 <제2차 기도집>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치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행정 장관(magistrate)의 명령때문에 버위크의 옛 회중에게 그 기도집의 사용을 추천하였다.

1553년 메리(Mary Tudor, 1516-1558)는 그녀의 이복 동생 에드워드 6세를 계승하여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여왕은 완고하고 편협한 카톨릭교도였다. 메리의 통치가 시작된 몇달 뒤 낙스는 도망을 쳤고 그후 곧 프랑크푸르트의 영국 유랑민들 사이에 나타났다. 1554년 낙스는 영국 피난민 교회의 목사직을 수락했다.

후에 낙스는 제네바에 있는 영국 유랑민들의 교회에서 목사가 되었다. 1555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는 여러 지역에서 표출되는 종교개혁에 대한 관심때문에 대단히 놀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9개월 동안 아주 담대히 설교했다.

 

1559년 5월, 낙스는 고국의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이 시기까지 그는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의 개혁자들과 유익한 접촉을 하였다. 본래 낙스의 입장은 위샤트와 같이 쯔빙글리 적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칼빈과의 접촉을 통해 대부분의 면에서 칼빈주의적이 되었다. 낙스에게는 <제네바> 도시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학교'로 보였다.

고국에 돌아온 낙스는 성 앤드류스 성당에서 설교함으로써(1559년 6월 11일) 자기가 프랑스 노예선에서 품었던 소망을 성취시켰다. 낙스는 복음적인 기독교신앙의 확립을 위해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다.

1560년 체결된 버위크 조약(the Treaty of Berwick, 1560년 2월)에서 개혁가들은 스코틀랜드에 진주해 있었던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보호하에 두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섭정 역할을 했던 귀즈의 메리(Mary of Guise)는 관점과 야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프랑스적이었다. 섭정은 총명했으나 신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개신교도들이 거의 그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귀족들은 섭정에게 신앙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고 프랑스 군대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병이 들었고 개혁파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부르면서 이제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 양편이 다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1560년 6월 11일 그녀가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개신교 목사 죤 윌록(John Willock)이었다.

속수무책의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지원도 없고 군대의 증강 가능성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1560년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the Treaty of Edinburgh)에 따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모두 퇴각하게 되었다. 7월 15일에 프랑스가 자기 나라로 출항했고 영국군도 도보로 출발했다. 19일에 낙스는 많은 교인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승리한 스코틀랜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왜나하면 스코틀랜드에는 모든 일을 처리할 중앙집권적 권력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8월에 자체적으로 모인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이 스코틀랜드의 정식 신앙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문서는 그 색조가 온건한 칼빈주의였다(a document moderately Calvinistic in tone). 또한 이 문서는 칼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성례전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었다.

 

개혁교회의 조직과 그 치리체제를 정립하는 문제는 계속 남았다. 낙스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교회인사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제 1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하였다(1560년). 거기에는 개혁교회의 조직과 재정문제에 대한 제안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예배는 <낙스의 전례서>(Book of Common Order)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낙스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을 개정한 것이었다. 이 <전례서>에 의하면, 교회 회중은 그들이 매년 선출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또 이 장로들은 회중들 가운데에서 확고한 도덕적 규율(firm moral discipline)을 유지하는 데에 목사를 돕게 되어 있었다. 목사는 회중들에 의해 선출되지만 목사들은 다른 동역자들에 의해 그 신앙과 생활을 엄격하게 심사받고 통과된 후에야만(after rigorous examination of life and doctrine by their ministerial brethren)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유능한 목사가 있으면 그는 어떤 한 지역(주로 과거의 카톨릭 교구와 일치함)을 담당하는 <감독자>(superintendents)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최종적인 권위(final authority)는 장로들과 목사들로 구성된 전체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에 속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시편 찬송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개혁교회의 표지였다. 제네바에 있던 낙스의 교회에서는 51개의 시편 모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총회는 1564년에 전 시편의 완성과 출판을 제시했다. 제네바의 곡조가 평이 좋았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주 그 노래에 화음을 붙여 찬송했다. 그리하여 곧 4부로 된 찬송이 편집되었다. 가사들은 시적인 감각(poetic quality)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후의 다양한 번역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제2차 스코틀랜드 시편집(the second Scottish Psalter)이 1650년에 출판되었다.

낙스의 저술과 그가 끼친 영향력은 사람들에 의해 종교적인 면에서 또 정치적인 면에서 여러 갈래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반드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낙스가 가졌던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신념 위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세워졌다.

낙스는 <하나님의 나팔>이었으나, 후대에 남아있는 설교는 단 두 편 밖에 없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시험"(마 4:1)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의 근원과 한계"(사 26:13-16)이다.

 

4.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560년 8월 낙스의 지도아래 스코틀랜드의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을 폐기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백여년 이상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의 운명은 스튜어트가(家)의 왕들이 교회를 성공회 제도로 만들려는 결의 때문에 성쇠를 거듭하였다. 왕권이 지배적일 때는 성공회 제도를 지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으며(1584년), 다시 교회가 권력을 잡으면 장로제가 실시되었다(1592년).

왕정복고(Restoration, 1660-1688) 이후 성공회 제도가 재수립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이 성공회파와 장로회파 간에는 보다 더 치열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혁명에 의해 스코틀랜드 교회는 다시 장로제로 환원되어 그 이후로 계속 장로제가 실시되었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 나라로 병합되었고, 따라서 <대영제국>(Great Britain)이 탄생하였다. 18세기 초반의 장로제 주장자들(the Presbyterians)은 17세기 후반의 주장자들보다 더 청교도적(Puritan)이었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예배를 감독주의자들(the Episcopalians)의 예배와 명백하게 구별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떠한 형식이나 의식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인쇄된 의식서(printed liturgy)의 사용을 멀리하였다.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존 낙스와 스포티스우드(Spottiswood), 윌로크(Willock), 로우(Row), 더그라스(Douglas), 위남(Winarm) 이 여섯 사람을 시켜 스콜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채용하고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2) 제1회 장로교회 총회와 훈련교서.

1560년 12월 20일 스코틀랜드의 제1회 장로교회 총회가 낙스의 지도아래 개최되었는데, 출석자는 목사 6명, 치리장로 36명이었다. 이 총회는 훈련 교서(Book of Discipline, "스코틀랜드 교회정치 체제""첫번째 훈련교서")를 만들어 냈다.

이 훈련 교서에는 장로, 집사의 임기는 1년으로 하였고, 당회, 대회, 총회의 조직을 정하였으며, 교회 직분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주일학교 부장, 대독자(Readers) 등을 두게 했으며, 기독교교육에 관한 규정을 많이 할애 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태도, 도덕적인 문제를 취급하여 신앙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한 것을 본다.

 

3) 멜빌과 제2훈련교서

 

존 낙스가 죽은 후 앤드류 멜빌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사실상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든 정체(政體)를 정립한 사람이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발전시킨 사람이다. 오래된 훈련 교서를 멜빌은 1578년 제2훈련교서로 개정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1년 총회에서 채택되고, 칙령으로 선포되었다. 이 교서가 바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철저한 장로교회로 만든 것이다. 이 교서는 시정과 교회정치를 분리했으며, 교회 정치는 교리, 훈련, 성찬 등 3부분으로 구분했고, 교회 공직을 목사(감독), 장로, 집사로 구분하였고, 네 번째는 박사와 교사를 덧붙혀 놓았다.

 

(4) 국민 서약(National Covenant)

제임스 6세는 1603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어 제임스 1세라 불리어 졌는데 이때 양국은 동일한 군주 아래로 통일되었다.

이 제임스 1세가 162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구교의 정치 형태와 예배방식으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챨스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교회는 1637년 7월 23일을 기해서 영국 구교회의 예배 형식을 채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 에딘버러의 존 낙스의 옛 교회인 성 길스 교회에서 대사제 로드의 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자마자 부인 노동자 제니 게디스(Jenney Geddes)가 의자를 수석 사제의 머리에 던졌기에 한 순간에 민중은 대 소동이 일어났고 여러 물건을 퇴장하는 사제에게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여 1638년 3월 1일에 귀족, 신사, 목사, 농민 등의 수많은 장로주의자 회중이 그리프리알(Greyfriar)교회 뜰에 모여 "국민 서약"에 서명을 하고, 생명을 걸고 서로 도와 주며 장로주의 신앙에 충성할 것을 서약했다.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널리 퍼져 전 스코틀랜드의 사람들이 서명하였다.

그리하여 1638년 11월 21일 글레스고우에서 총회가 모여 알렉산더 헨더슨이 의장으로 뽑혔다, 그는 왕의 특사와 외교를 벌여 감독제도는 추방하고, 순수 장로회 주의를 안드레 멜빌레가 고안한 대로 회복시켰다.

 

(5) 계약자들(The Covenanters)

1660년 11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공화 정치를 했던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델란드에 망명해 있던 챨스 왕자를 맞아 들여 국민 서약에 서명시킨 다음 찰스2세 왕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얼마 안 있어 국민 서약을 파기하고 장로회주의를 조소하고, 엄격한 법률을 재정하여 영국 국교회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단속하였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인들은 다시 국민서약 아래 단결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계약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챨스 2세 때 이들이 받은 고난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수한 남녀, 어린이들까지 신앙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인 시대(Killing time)"라 일컫고 있다.

 

(6) 혁명과 종교 관용령

1685년, 찰스 2세가 죽은 후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으나 1688년에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이때 이른바 명예혁명(Glorius Revolution)이 일어나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네델란드 사람으로서 "침묵의 윌리엄"의 자손이고, 장로회 주의자였다.

1689년에는 관용령(Toleration Act) 이 의회를 통과해서 역사상 없었던 종교의 자유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주어졌다. 1690년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가교회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712년에 "성직 추천령"이 의회를 통과하였는데, 이 법은 소수의 재산 소유자에게 목사를 임명하는 권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130년에 걸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이 되었다.

 

(7)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최초의 분열은 1733년 에벤저 어스킨(Ebenezer Erskine)의 지도에 의해 일어났다. 성직 추천령에 항의하여 동료 목사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를 나와 협동노회(Associate Presbytery)를 만들었고, 이 새 교회는 100년 간에 걸쳐 몇 교회로 분열을 해 나갔다.

1752년에는 토마스 기레스피(thomass Gillespie)가 성직 추천령에 의해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 대회"(Relief Synod)를 만들었다.

1843년에는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성직 추천령에 반대해서 472명의 목사와 하께 이탈해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대분열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교회원이 선거에 의해 제직(목사, 장로, 집사)을 선출해야 한다는 교회 자립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자유 교회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유력하고 유능한 영적인 목사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1874년 의회는 성직 추천령을 폐기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자치의 힘을 회복하였다.

 

(8) 합동과 재 합동

1847년 토마스 기레스피의 지도로 만들어진 구원대회와 협동노회로부터 이탈했던 사람들이 합동해서 "합동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만들었다. 이 교회는 훌륭한 교회로 성장했고, 뛰어난 목사들을 배출시켰다. 1900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합동 장로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합동자유교회"를 만들었는데 회원은 50만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한 자유교회의 25명의 목사들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라는 이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1929년에 스코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 합동자유 교회가 합병하여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어 대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하여 계속 자기 교회이름을 유지하는 교회들도 있다.

 

아무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세계 장로교회의 체제와 교리에 모판임을 사가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643년 7월부터 1648년 2월까지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참석하여 장로교회의 정치와 교리의 요람이 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기타 원칙들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물론 이 교리의 사상들은 칼빈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스코틀랜드장로교회가 직접적으로 적용했고, 세계에 전하여 준 것이다. 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장로교회의 줄기교회요, 세계 모든 장로교회는 그 가지와 같다고 할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스코틀랜드(Scotland)의 영국 지도에서 보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그리고 웨일즈로 구성된 브리튼 섬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원래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스코트 족(켈트 족의 하나)과 픽트 족으로 나뉘어 있었다가 11세기경에 스코틀랜드로 통합이 된 것입니다. 이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을 합해서 브리튼 제도(諸島)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전성기 때의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이미 이곳까지 미쳤으므로 일찍부터 이 섬들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 지역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콜룸바(Columba, 521-597)와 같은 아일랜드(Ireland)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남쪽의 잉글랜드(England) 지역에는 로마 가톨릭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 땅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게 된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켜서 켈트 교회(Celtic Christianity)라고 부릅니다. 켈트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완전히 독립된 상태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독자적으로 문화를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그 당시 유럽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연약성과 부패의 상태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은 존 낙스(John Knox, 1513?-72)입니다. 그는 1536년에 가톨릭 사제로 서임되었는데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를 만나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설교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스코틀랜드의 섭정으로 있던 제임스 헤밀턴(James Hamilton, 1516-1575)의 박해를 피해 스코틀랜드 동쪽 해안에 있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으로 피신하였는데 프랑스 군대가 이곳을 장악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낙스는 프랑스 갤리선(galley船)에 끌려가서 19개월 간 족쇄를 찬 채로 노 젓는 일을 하다가 풀려나서 잉글랜드로 간 뒤에, 거기서도 많은 이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1551년에는 왕의 궁정 목사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이 개신교도들을 박해함에 따라 다시 유럽으로 피신을 가서 제네바에서 칼빈을 만나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잉글랜드 난민 회중을 상대로 목회를 하다가 1555년에 이르러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헌신된 일반 신자들을 쓰셔서 스코틀랜드 전역에 걸쳐 개신교 신앙이 계속적으로 퍼져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1558년에는 스코틀랜드 최초의 개혁교회가 던비(Dunbee) 지역에서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560년에는 스코틀랜드 의회가 존 낙스를 비롯한 존(John)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섯 명의 사람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습니다. 또한 장로교 정치 원리의 핵심이 담긴 제1치리서 초판도 이 시기에 발행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왕의 지지가 없이도 성취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가톨릭적인 감독 교회 정치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당시 교회의 재정 상태를 보면 여전히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의 재정 체계인 ‘성직록’(the system of benefices)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성직록이란, 교회가 성직자에게 부여하는 물질적인 급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권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세속화될 우려가 많은 제도였습니다. 게다가 개혁교회들의 재정 상태는 취약한 상태에 있다 보니 개혁교회에 속한 목사들 가운데에 성직록을 받기 위해서 옛 교회의 직함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정치적인 면에서는 왕들이 장로교 정치 체제보다는 가톨릭적인 감독 정치 체제를 선호하는 것도 장로교도들에게는 불안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가톨릭적인 감독 정치 체제에서는 대주교 밑에 주교와 사제들이 계층적으로 피라미드적인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왕이 대주교만 장악할 수 있다면 교회 조직 전체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가 훨씬 수월하였습니다. 실제로 잉글랜드 교회에서는 왕이 교회의 수장 노릇을 하였는데, 이것은 1534년에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던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기 위해 선언한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발표한 이후로 계속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장로교 정치 체제에서는 한 사람의 감독 대신에 여러 개의 당회(session)들이 지역 노회(presbytery)를 구성하고 이 노회들이 모여서 총회(general assembly)를 구성하는 형식을 이루고 있다 보니 왕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앤드류 멜빌(Anderw Melville, 1545-1622)의 주도로 제2치리서를 통과시킴으로써 본격적인 장로회 정치를 시행하게 되었습니다(1578년). 제2치리서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그 권위를 받는다고 단언하면서 양측 모두 상대의 영역에 끼어들 수 없다고 하였지만,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는 지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 왕은 제임스 6세였는데, 그는 칼빈주의 노선에 서 있었지만 교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들과 갈등을 빚었으나 결국 장로교주의를 승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교직은 여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잉글랜드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소집함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사망하게 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왕으로도 즉위를 하게 됩니다. 그는 ‘퍼스 5개 조항’1)(Five Articles of Perth)을 시행하여 감독제를 스코틀랜드에 정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왕은 이 계획들을 더 강하게 밀어 붙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1618년 이후부터 그가 재위하는 동안에는 교회가 총회로 모이는 것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625년에는 제임스 1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도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에 감독제가 정착되기를 원했지만 반대의 목소리에 부딪혀서 스코틀랜드 교회가 글래스고(Glasgow)에서 총회로 모이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20년 만에 개최된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회의 치리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가 공인되었던 상태로 되돌려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이러한 결정을 수용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였으나 패퇴하고 맙니다.

 

한편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잉글랜드 안에서 왕을 수장으로 하는 감독제를 더욱 공고화하려고 하였는데 이 일에 앞장을 선 인물이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입니다. 로드 대주교는 잉글랜드 내의 칼빈주의자들을 탄압하였고 주교회의를 통해 잉글랜드 의회의 권한까지 침해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잉글랜드 하원은 1640년에 감독제를 철폐하는 법을 제정하였지만 잉글랜드 교회의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1643년 1월 26일까지 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종교적인 갈등과 정치적인 갈등이 맞물려서 1642년에 잉글랜드에서 1차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잉글랜드 하원이 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일은 기존의 질서가 이미 폐기되어 사라져버린 잉글랜드 교회에 새로운 법적·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잉글랜드 의회는 자체적으로 성직자들2)을 소집하여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회의(the Westminster Assembly)입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1643년 7월에 첫 회기를 시작하여 1652년 3월에 공식적인 업무를 종료할 때까지 여러 표준 문서들을 작성하였는데, 그 중 신앙고백서는 1646년에 완성하였고, 대·소요리문답은 1648년에 완성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와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스코틀랜드로부터 원조를 요청하게 되는데, 스코틀랜드는 그 대가로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교회 정치 제도에 관한 것을 위원회의 안건에 우선적으로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로서는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643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문서에는 세 개의 왕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훌륭한 개혁교회들의 본에 따라 협력과 연합을 추구하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지휘하에 찰스 1세에 맞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개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의회 내에서는 독립교회파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크롬웰과 그의 병사들도 대부분 장로파가 아닌 독립파(회중교회파)였기 때문에 권력의 이동이 불가피하게 일어났습니다. 1649년에 찰스 1세는 참수를 당하고, 성직수임권(patronage)도 폐지되었습니다. 성직수임권이란, 어떤 지역에 교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보통 왕이나 귀족, 혹은 그 지역의 지주들에게 주어졌던 권리입니다. 크롬웰은 1653-58년 사이에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정치 지도자 노릇을 했습니다. 하지만 1660년에 왕정복고(Restoration of the Monarchy)가 일어나서 찰스 2세가 즉위함에 따라 무효법(Act Recissory, 1661)이 공표되어 1633년 이래로 스코틀랜드에서 통과되었던 모든 교회법들이 무효화되었습니다. 또한 감독제가 부활함에 따라 성직수임권도 되살아났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분열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게 되지만, 1688년에 일어난명예혁명의 영향으로 1690년에 장로교 정치가 회복됩니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를 국교화함에 따라 스코틀랜드 국가교회(ECS,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합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707년에 통합법(Treaty of Union)의 시행으로 정치적으로 완전한 통합체를 이루었으나 스코틀랜드의 신앙과 정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1711년에 의회가 1690년 이후로 장로나 지역의 지주들에게 국한시켰던 성직수임권을 감독교회파 지주들이나 왕실 자체에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스코틀랜드 교회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스코틀랜드국가교회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게 되는 일이 세 번이나 발생하게 되는데, 맨 처음의 이탈은 1733년의 ‘분리’(Secession)이고, 두 번째는 1761년의 ‘안도’(Relief), 그리고 가장 규모가 컸던 세 번째 이탈은 1843년에 발생했던 ‘분열’(Disruption)3)입니다.

 

성직수임권은 1874년이 되어서야 스코틀랜드국가교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교회들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면 단순히 성직수여권에 관한 입장 차이만 가지고 나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신학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 국가나 교회의 권위와 개인의 양심의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들은 또 다른 문제들로 인해 다시 분리되거나 합쳐지기도 하고, 또 국가교회로부터 이탈되었던 교회들이 다시 국가교회로 돌아오는 일들도 여러 번 발생하였습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국가교회를 포함하여 크게 5개의 교파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2011년의 통계를 기준으로 할 때 스코틀랜드 국가교회에 속한 사람이 170만 정도로 가장 규모가 큽니다(스코틀랜드 전체 인구의 32%).1)4)나머지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26,000명 정도가 되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교파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5)(Free Church of Scotland)입니다.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 14,000명 정도가 되고 연합 자유교회(United Free Church of Scotland)에 속한 사람이 약 6,000명입니다. 1851년의 통계를 보면 국가교회에 속했던 교인 수가 76,000여명이던 시절에 자유교회와 연합 장로교회에 속했던 교인의 수가 2배 가까이 되는 14만 명에 달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계몽주의와 세속화,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 등의 영향으로 교회들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워드 목사님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다양한 문제들이 교회에 도전해 올 때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력 있게 대처해 나가지 못한 결과들이 오늘날 스코틀랜드 교회의 힘을 약화시킨 요인의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교회들이 분열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때로는 교파들이 자신들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타협적인 자세로 일관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로 인해 하나가 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사로부터 배운 교훈

 

짧게나마 스코틀랜드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서 첫째로 느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하신 은혜와 권능으로써 그 당시 사람들의 부족과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쓰셔서 그분의 교회에 맡기신 복음을 영국 땅에 보존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150여 년 전에 그들 가운데 선교사로 부르신 사람들을 통해 이 한국 땅에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6) 둘째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던 시절에 하나로 유지될 수 있던 교회들이 오히려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자 하나됨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분열되어 나간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셋째로,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됨을 유지하면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각해 나가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워드 목사님이 강의를 마치면서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한 방어책으로서 제안한 다섯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와 동일한 길을 걸었던 교회의 선배들이 역사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므로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적는 것으로써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첫째, 교회법을 제정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명백한 규칙을 만들어서 이것을 철저히 공부할 것.

둘째, 교회법 수정 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규칙들은 전체의 의사를 물어서 결정할 것.

셋째, 의견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극복할 것.

넷째,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합의를 해 나갈 것.

다섯째, 사랑 안에서 진리로 연합시키는 성신님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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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조항은 1618년, 스코틀랜드 퍼스 지역에서 총회가 열렸을 때 통과되었기에 퍼스 5개 조항이라 불린다

2) 엄밀히 말하면 웨스트민스터 회의에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3) 이 분열의 여파로 호주에서는 워드 목사님이 속해 있는 동호주장로교회가 1846년에 세워지게 되었다.

4) 국가교회에 속한다고 응답한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은 6.9%에 불과하므로 상당수가 명목 상 신자에 불과하다.

5)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2000년에 다시 두 개의 교파로 분리되는 아픔을 겪었는데, 이 두 교파 모두 스코틀랜드 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와 함께 ICRC에 가입되어 있다.

6) 최초로 한국어 성경을 번역한 존 로스(John Ross)는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현재는 연합 자유교회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소속 선교사이다.

 

 

 

[종교개혁500주년 특집논단] 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신자들인 언약교도들의 순교(노영상목사)

관리자.

2017년 순교신학과목회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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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신자들인 언약교도들의 순교

노영상/ 전 호남신학대학교 총장, 한국기독교학회 회장

 

1.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얼마 전 스코틀랜드에 관한 뉴스를 보고 이전 2014년 5월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에 참석했을 때의 열띤 논쟁이 생각났다. 영국(영연방)에서 스코틀랜드를 독립하자는 의견에 대한 논쟁이었다. 글래스고우대학교의 신학부 도그 게이(Doug Gay) 교수의 발제가 있은 후 총회 총대들의 심도 깊은 토론이 있었다. 글래스고우대학교는 장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있었던 필자의 동기 김철영 교수가 졸업한 곳이다. 이 토론은 영국 전체에도 중요한 것이어서 영국의 BBC 방송에서 방영을 하였었는데, 당시 맨 앞 중에 앉아 있었던 저의 모습도 BBC 화면을 통해 보이기도 했다. 토론 후 도그 게이 교수와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며칠 후 그 대학을 제가 방문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도그 게이 교수는 그 말을 듣고 그 대학 방문 시 자기 후배 교수에게 학교를 잘 설명해주라는 말도 전해, 며칠 후의 글래스고우대학교의 방문이 보람이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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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스코틀랜드교회 총회 참석 시

대회장인 에든버러대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

최근의 스코틀랜드에 관한 뉴스는 이런 것이었다. KBS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영국 정부에 독립 주민투표 승인을 공식 요청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3월 31일 영국 의회와 스코틀랜드의회의 분권 법규에 의거해 스코틀랜드의 독립 주민투표 시행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에게 전달했다. 앞서 스코틀랜드의회는 지난 28일 스터전 수반에게 영국 정부에 독립 주민투표 승인을 공식 요청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발의안을 찬성 69표, 반대 59표로 통과했다. 스터전은 서한에서 브렉시트 협상과 관련해 자치정부들의 목소리가 크게 무시되고 있고, 타협을 위한 모든 시도도 거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터전은 "총리가 스코틀랜드의회 의지를 거부할 아무런 합리적 이유가 없는 것 같은 만큼 총리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메이 총리는 "지금은 제2의 독립 주민투표를 논의할 때가 아니다"며 거듭 거부 입장을 확인했다. 특히 메이 총리는 지난 27일 스코틀랜드를 방문해 "내 입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한편, 지난 2014년 9월 치러진 스코틀랜드 독립 주민투표는 찬성 45%, 반대 55%로 무산됐다.” 지난 번 브렉시트를 위한 국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 주민의 62%가 EU 잔류를 원했던 반면, 영국 전체로서는 EU 탈퇴에 대한 찬성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저런 불만으로 스코틀랜드는 영연방 탈퇴를 위한 국민투표를 허락해줄 것을 메이 총리에게 요구하였으나, 얼마 전 부결된 투표도 있었고 해서, 재차 이 문제에 대한 허락을 해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지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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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메이 총리와 스코틀랜드의 스터전 자치정부 수반

2014년 스코틀랜드에 가서 보았던 분위기는 대개 다음과 같다. 스코틀랜드의 중산층 이상의 국민들은 영국에 속해 있는 것을 원하고 있는 반면, 중산층 이하의 국민들은 영연방 탈퇴를 원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세금을 내고 의무를 다해도 돌려받는 혜택은 적고 영국 정부에 대한 통제권이 없으므로 자신들의 정부를 따로 구성하고 싶다는 게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을 원하는 이유다. 특히 스코틀랜드 영내에 있는 북해 유전을 통한 이익이 스코틀랜드의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많은 부분 잉글랜드가 그 수익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에도 불만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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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영국은 남부의 잉글랜드, 북부의 스코틀랜드, 서부의 웨일즈, 서쪽 섬인 북아일랜드로 구성되어 있는 연방 체제다. 잉글랜드의 수도는 런던이고, 스코틀랜드의 수도는 에든버러, 웨일즈의 수도는 카디프, 북아일랜드의 수도는 벨파스트로서 서로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종교에 있어서도 구성 분포가 같지 않다. 잉글랜드는 성공회 신자들이 지배적이며,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장로교도가, 웨일즈는 가톨릭교도가 더 많은 편이다. 영국의 약 5,700만 명의 인구 중 주요 인종은 앵글로색슨계이며, 웨일즈와 스코틀랜드는 켈트계가 중심을 이루고, 북아일랜드에서는 북쪽 3개 주는 스코틀랜드계가, 남쪽 3개 주에서는 켈트계가 주민의 절반을 이룬다. 이런 인구학적 구성이나 종교 면에 있어서의 차이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에 대한 요구의 밑바닥에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영국의 4개 국가들은 월드컵 경기에 따로 출전하고 있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경기를 할 때면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오히려 프랑스를 응원할 정도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유럽 대륙의 나라들보다 더 소원한 점이 있다. 우리는 이 같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원한의 기원을 맬 깁슨과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유명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에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13세기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억압과 지배를 받아온 시대를 배경으로 다뤘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사망한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어 귀족들은 서로 왕위를 차지하려고 싸워 내정이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잉글랜드의 왕 롱생크와 스코틀랜드의 자유를 갈망한 윌리엄 월레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스코틀랜드를 호시탐탐 노리던 잉글랜드의 왕 롱생크는 협정을 제의했고, 당시 그들에게 맞설 힘이 없었던 스코틀랜드는 그의 협정에 응하였으며, 그 일이 윌리엄의 아버지인 말콤과 형인 존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어렸던 윌리엄은 아무 것도 못한 체 삼촌을 따라 타지에서 검술과 지혜를 쌓았고, 성인이 된 뒤 고향을 다시 찾게 된다. 고향에서 그의 어릴 적 첫 사랑이었던 머론을 만났지만 당시 프리마 녹테라는 법의 부활로 인해, 첫 날밤을 지주에게 뺏기기 싫었던 윌리엄은 비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결국 윌레스 역을 맡은 깁슨의 처참한 죽음으로 마치게 되는데, 우리는 이 영화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들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대사가 되어 있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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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포스터

이에 있어 스코틀랜드 교회가 잉글랜드 교회로부터 받은 박해와 순교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625 당시 북한의 인민군에 의해 야기된 남한 기독교인의 순교를 살피려면, 북한 공산당과 한국 근대사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스코틀랜드 교회가 받은 대단위의 박해를 파악하려면 이러한 양 지역 사이의 전 역사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2.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창시자 존 녹스(John Knox, 1513?-1572)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전적으로 존 녹스의 공헌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본래 가톨릭 사제였으나, 칼뱅주의를 추종하여 장로교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든 장본인이다. 칼빈은 제네바라는 시에서 개혁교회의 씨를 뿌리는 데에 성공했다면, 녹스는 한 나라를 장로교화한 신학자였던 것이다. 이하 위키피디어 등에서 소개된 존 녹스의 종교개혁에 대한 인터넷 자료들을 기본으로 해서 정리해보았다. 녹스는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신부 서품을 받았다. 1545년까지 고향에서 공증인 일과 롱니드리의 더글라스 가문과 오미스턴의 코크번 가문의 가정교사일 을 하던 중 순회 설교자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를 만나 종교개혁사상을 알게 된다. 그 후 위샤트의 지지자가 되어 그가 설교할 때면 검을 들고 호위하곤 했다. 녹스는 위샤트가 세인트 앤드류에서 화형당한 뒤 시민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수비대를 조직하여 왕실과 교회 당국에 항거하는 등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세인트 앤드류 성이 종교개혁자 손에 들어가자 왕실과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녹스와 수비대원들은 세인트 앤드류를 방어하면서 가톨릭을 옹호하는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1547년 7월말 경 세인트 앤드류 성이 점령되었고 녹스를 포함한 수비대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녹스는 프랑스로 잡혀가 갤리선의 노예로 노를 젓는 형벌을 받았다. 이후 녹스는 1549년 초반 개신교에 호감을 가졌던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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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녹스의 초상

잉글랜드에 피신해 있던 녹스는 헨리 8세의 자녀들인 에드워드 6세에 이어 메리 1세(메리 튜더, 블러드 메리)가 즉위한 후 개신교 신자들을 박해함에 따라, 프랑스의 디에프, 스위스의 제네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대륙을 전전하였으며, 피신 중 특히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우리가 눈 여겨야 할 점은 녹스는 유럽에 피신해있던 중 제네바에서 칼뱅을 만나게 되며 개혁에 대한 많은 것을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1556년부터 1559년까지 2년 반 동안 녹스는 제네바에서 영국인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를 하였는데, 이 기간 중 그는 칼뱅과의 많은 만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후에도 제네바의 신교도들

이 그를 다시 초청했던 것으로 보면 그곳에서 목회를 잘했던 것 같다.

1559년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스코틀랜드 개신교회의 상황은 전반적으로 고무적이었으나, 스코틀랜드의 섭정 메리(Mary of Guise, 메리 귀즈, 1515-1560)는 프랑스 왕실의 엄호를 받으면서 여전히 친 가톨릭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후 신교도들과 구교도들의 전쟁인 종교전쟁(1559-1560)에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도움으로 신교도들이 승리하자, 녹스는 1560년 7월 19일 세인트 자일 대성당에서 프랑스군 퇴각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8월에는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1560년 그에 의해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ch Confession)를 작성했다.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존 녹스는 1561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고, 장로와 집사는 1년마다 선거를 통해 세우며 목사는 장로회에서 공개 심사 후 회중에 의해 선발한다고 정했다. 마을 교회에서는 어린이 교육을 시행하며, 교구마다 고등 기독교교육 기관을 세워 교회가 공교육에 앞장서게 했다. 또한 교회 재산은 목사 생활비와 빈민 구제, 그리고 교육에 사용하도록 지침을 정하여 서민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가 한 사회를 위한 노력 가운데, 서민들을 위한 공교육을 강화하였다는 것에 필자는 상당한 눈길이 간다. 칼뱅이 장로교회의 신학을 정립하였다면 녹스는 장로교회의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에 많은 공헌을 한 신학자였다. 오늘의 장로교회의 당회, 노회, 총회로 구성된 민주적 체제는 그의 노력에 의해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후 1562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Stuart, 1542-1587)은 구교의 교황정치를 회복시키려고 하였으며, 이에 대해 녹스는 강력히 저항함으로 스코틀랜드를 구교로부터 지켰던 것이다. 필자는 종교개혁자 녹스가 목회하였던 에든버러의 세인트 자일 대성당(St. Giles Cathedral)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교회 부목사의 안내로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는데, 이전 개혁자의 뜻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대성당을 방문한 후 필자는 그 건물 몇 십 미터 아래에 위치하여 있는 녹스의 목사관도 방문하여 녹스가 추진한 개혁의 면모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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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가 목회하였던 세인트 자일 대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

3.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성도들인 언약교도들의 순교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자신의 앞선 왕이었던 메리 1세(Mary Tudor, 블러디 메리, 1516-1558)의 가톨릭 옹호에 반대하여, 영국 성공회를 든든히 세운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섭정 메리 귀즈의 딸인 가톨릭교도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으로부터도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1567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메리 여왕은 퇴위하였고, 신교도인 그녀의 아들이 즉위하여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즈음 1568년에 메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로 몸을 피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증손녀인 그녀는 엘리자베스를 승계하여 영국의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거의 20년 동안 엘리자베스에 대항하는 일련의 가톨릭의 음모들에 연루되었다. 1586년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려는 바빙톤(Anthony Babington)의 음모를 후원했다가 이듬해에 참수됐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잉글랜드의 메리 튜더 여왕, 스코틀랜드의 섭정 메리 귀즈와 메리 스튜어트 여왕 등의 세 명의 메리가 있음을 알고 이를 구별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존 녹스는 그의 종교개혁을 하며 스코틀랜드에서 메리 귀즈에 이어 메리 스튜어트와 대치하게 되는데, 그러한 상황은 메리 스튜어트의 잉글랜드 피신으로 어느 정도 종식되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녹스의 종교개혁엔 세 명의 메리가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박해의 어려움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신자들을 소개하려 한다. 특히 언약교도들의 순교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아래 부분 스코틀랜드의 순교자 언약교도들에 대한 설명은, 김준범의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역사와 신앙”을 요약한 것이다.

녹스의 주도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신속하게 종교개혁 법안들을 세워 공포하였고, 스코틀랜드 사회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듯하였다. 스코틀랜드 교회와 의회의 신속한 종교개혁 작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561년 8월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 19살의 나이에 스코틀랜드 여왕의 신분으로 스코틀랜드에 돌아오게 된다. 강한 가톨릭 신봉자였던 메리는 프랑스 왕이었던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되어 홀로 돌아온 것이다. 메리는 귀국하자마자 맞은 첫 주일에 자신이 거하고 있던 홀리루드(Holyrood) 궁의 예배당에서 가톨릭 미사를 거행하도록 명함으로써 의회의 종교개혁 법안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또한 국왕의 이름으로 녹스를 소환하여 군주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했다. 메리 여왕은 1567년까지 7년 동안 녹스를 올무에 빠뜨려 처단하고 스코틀랜드에 가톨릭을 다시 회복시키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녹스와 교회를 보호하셨고, 오히려 메리는 치정과 살인에 연루되는 등, 부도덕한 생활로 인해서 반란군에게 항복하고 죄수의 몸이 되어 에든버러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메리 스튜어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 그녀의 갓난아기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나이가 어려 여러 귀족들이 섭정했다. 어린 제임스 6세가 1603년에 스코틀랜드와 함께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제임스 왕은 명실상부한 대영제국 전체를 관할하는 왕이 되었다. 제임스 6세는 어린 시절에는 장로교 교육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어머니 메리 여왕의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였다. 그는 대영제국의 왕으로서 종교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접근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것들은 양보하여도 감독제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가톨릭의 감독제도가 왕권을 보호하는데 유리하고, 장로교회의 민주화된 교회 체제는 의회 민주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강한 독립심과 애국심으로 뭉쳐있었기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들을 세속의 왕이 관여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극도로 거부하였다. 당시 교회의 머리를 교황(가톨릭) 또는 왕(성공회)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로교회의 교인들은 그에 반대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와 통치를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1625년 제임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찰스 1세는 선왕의 정책을 보다 강화하여 왕권을 공고히 하고 대영제국을 성공회의 감독제도 하에 두려고 했다. 이런 찰스 1세의 국교 정책을 반대하여, 장로교회의 교리와 예배와 제도를 지키려는 성도들의 대표들인 목사들과 귀족들과 지주들이 1638년 2월 28일 에든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Greyfriars Kirk, 커크란 스코틀랜드 말로 교회를 뜻한다.)에 모여, 이른바 ‘국가언약(National Covenant)’ 문서에 서명하면서, 이 언약을 죽기까지 신실하게 지킬 것을 서약하였다.

이 서약서는 곧 여러 개로 복사되어 전국에 배포되었고, 곳곳에서 복사된 서약서에 서명하는 서명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언약교도(covenanters) 혹은 스코틀랜드 언약교도라는 말은 바로 이 국가 언약서에 서명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따른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이 이 언약에 서명한 이유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찰스 왕가에 의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간섭받는 것에 대한 그들의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람 비록 그가 왕이라고 하여도, 그들은 교회의 영적 수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영적 수장이 되시며 머리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해 11월에 있던 장로교회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국가언약’을 재천명하고 이를 끝까지 지키기로 결의했다. 찰스 1세 왕은 당황하였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했다. 언약교도들은 전쟁을 원하진 않았지만, 성공회를 강요하는 찰스의 군대를 바라만 볼 수는 없었기에 군대를 조직하여 찰스의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은 언약교도의 승리로 끝났으며, 찰스 왕은 복수의 칼을 갈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 1세는 언약교도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서는 전쟁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잉글랜드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잉글랜드 의회에는 청교도 신자들이 정계로 진출해 대거 포진해 있었기에 찰스 왕은 부담을 느껴서 오랫동안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부득불 의회를 소집해서 전비를 충당해야 했었다. 그러나 소집된 의회는 찰스 1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의회는 왕의 전쟁 계획을 찬성하지 않았던바, 왕은 의회마저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군사들을 이끌고 의회로 진입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내전이 시작되었고,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던 의회파는 스코틀랜드 언약교도들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언약교도들은 대영제국 안에서 장로교회를 국교로 하는 종교의 통일이 없이는 결코 평화가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의회파와의 협상을 통해 ‘거룩한 협약과 언약(또는 엄숙동맹과 언약, 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을 체결하였다. 언약교도의 지도자인 알렉산더 핸더슨(Alexander Henderson) 목사가 1643년에 초안을 작성하고 스코틀랜드 총회에서 인준한 이 서약서에는, 잉글랜드에서는 성공회를 폐지하고, 아일랜드에서는 천주교를 없이 하며,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의 국교로 통일한다는 일종의 합의 문서였던 것이다.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와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종교적인 합의와 통일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영국 의회가 나서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고 스코틀랜드의 언약교도들에 속한 목회자 4명과 장로 2명을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표로 초청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의회파의 수장이었던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개신교 사상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장로교회가 아닌 회중교회 신자였었다. 그리하여 그는 장로교인들을 배제하였으며 독립파를 편애하여 스코틀랜드인들과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찰스 1세가 처형당하자 언약교도들은 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찰스 2세는 화란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인으로서 왕이 되면 ‘국가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약속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화정치를 하고 있던 크롬웰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크롬웰과 스코틀랜드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졌다. 강력한 크롬웰의 군대는 1651년부터 10년간 스코틀랜드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잉글랜드가 엄숙동맹과 언약을 지키지 않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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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의 초상

크롬웰이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드디어 찰스 2세가 1660년에 스코틀랜드 언약교도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으로 복귀하였을 때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 교회의 기대와 약속을 저버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성공회 감독주의 정책을 펴 나갔기 때문이다. 찰스 2세의 강압은 곧 탄압으로 이어졌다.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많은 언약교도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할 것은 서약했던 ‘국가 서약’에 끝까지 충실했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성도들은 옥외 들판으로 나가 그곳에서 설교하고 예배를 드렸다. 어떤 옥외집회에는 7000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그런 예배 시에는 보통 3-4명의 설교자들이 동시에 설교하고, 성찬에 참여키도 하였다.

이때를 가리켜 스코틀랜드 교회사에서는 “죽음의 시간(killing time)”이라고 부른다. 1679년 보스웰(Bothwell)이라는 곳에서 정부군에 크게 패배한 언약교도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전쟁에 임했다가 대패하고 만다. 그 전투에서만 1200명이 사로잡혀서 에든버러로 끌려오고, 그중 400명은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마당에 투옥되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는 언약교도들이 처음으로 ‘국가언약’을 한 곳이고, 그들이 피 흘리기까지 믿음을 지킨 언약교도들의 중심된 교회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많은 언약교도들이 옥살이를 하고 재판을 받은 후,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은 교회 아랫길을 따라 내려가서 그라스마켓(Grassmarket)이라는 이름의 거리에서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옥에 갇히거나 대부분 노예로 팔려나갔다. 1661년부터 1688년까지 찰스 2세와 그의 아들 제임스 2세에 의해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은 어린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0-20,0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의 피 흘림이 없었다면 장로교회와 그 유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 교회 마당에는 지붕이 없고 담도 없이 창살뿐인 감옥과 언약교도들의 무덤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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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마당에 있는 순교한 언약교도들의 무덤들

필자는 2014년 5월 에든버러에 머무는 중에 이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저녁 즈음에 방문하여서 그런지 스산한 느낌이 있었다. 이곳에서 장로교회를 신봉하는 수많은 언약교도들 곧 하나님께 자신의 신앙을 약속한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숙연해졌었다. 그들이 갇혔던 지붕이 없는 감옥들 하며, 그 당시의 역사를 쓴 비석에 써있는 비문을 읽으며 당시의 박해가 어떠하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 다시 에든버러를 방문한다면 이곳을 먼저 가보고 싶다.

이러한 잔인한 핍박은 1689년 화란의 윌리엄 오렌지 공이 영국의 왕위에 올라 종교 관용령을 선포함으로써 끝나게 된다. 하나님은 언약교도들을 특별한 섭리로 도우시고 보호하셔서 그러한 핍박 가운데에서도 오늘날까지 교회와 신앙의 순결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셨다. 모든 풍랑이 끝난 뒤 169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장로교회를 회복시키고 총회를 소집시켰다. 스코틀랜드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장로교회의 예배와 정치가 회복되었던 것이다. 1707년 5월 1일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한 의회와 한 왕실로 연합되었고, 이때부터 영국에는 성공회가 국교로,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가 국교가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전 세계 장로교회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4.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인 언약교도들이 지키려고 했던 핵심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민주적 교회 체제와 백성을 생각하는 민족자결의 국가였다. 그들은 교황이나 한 국가의 왕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계층적 감독제도를 원하지 않았다. 오직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시며, 우리는 그만을 경배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함을 장로교회 교인들은 믿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민주적 교회제도에 대한 신념은 영국에서 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적 체도를 확립하는 일에 큰 일조를 하였음은 물론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의 민주국가 체제는 영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이런 민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는바, 그러한 노력은 장로교회의 민주적 정신에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의 절대주의 국가의 왕들이 주장한 ‘왕권신수설’은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왕은 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인민은 저항권 없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정치 이론으로, 시민의 저항이 높아가는 단계에 나타나 절대주의를 보강하는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이용되었었다. 이런 ‘왕권신수설’과 같은 논리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 그런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북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다 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국민이 그 권력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17세기 당시의 언약교도들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와 국가의 주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그의 통치 하에 있는 평등한 백성들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영국의 명예혁명, 권리장전의 공포 등 영국의 민주화 운동은 이런 언약교도들의 정신이 구현된 것으로, 이를 위해 수만의 언약교도들이 피를 흘렸던 것이다. 영국을 입헌국가로 그리고 의회민주주의의 국가로 세운 것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영국의 시민혁명 과정은 피를 흘림이 없이 이룩되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영국의 역사를 넓게 보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 주장이라 생각한다. 기실 영국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의 순교를 통해 민주국가를 이룩한 나라로서, 우리는 이런 현대사에 기여한 그들의 피와 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녹스의 민주적 교회 정체 체제의 기원을 칼뱅에서 찾을 수 있다. 학자들은 칼뱅의 사상을 평가하며,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와 자유시민사회로서의 민주국가 형성에 이바지한 종교개혁자로서 평가한다. 곧 장로교회의 정신은 교회를 개혁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며,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을 생각하며, 그들이 말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적인 공헌에만 착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우리에게 선포한 자들일 뿐 아니라, 새로운 교회와 국가의 정치제도를 성경 말씀에 비추어 선포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민주적 교회 체제와 정치체제는 오늘의 우리도 고수하여야 할 중요한 유산이라 생각한다. 우리 교회의 주인은 교권을 가진 사람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이 교회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우리는 영원한 교회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올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이 해를 맞아 그의 이신칭의 교리만을 언급해서는 안 되며,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드러나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이상과 그들이 만들었던 교회의 헌법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장로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 후손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전 언약교도들이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과 민주화된 교회와 국가 제도를 선물하였듯, 우리도 국민들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그들이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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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 있는 파넬, 칼뱅, 베자, 녹스의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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