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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기독교

형람서원 2024. 5. 1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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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기독교

기독교는 왜 인문학을 배척해야 할까? 기독교 믿음과 인문학이 융합되면 기독교 믿음은 인문학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교회 역사의 증거이다. 그래서 인문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정통 믿음을 지키려고 하는 경향이 의외로 있다. 마틴 루터는 십자가 신학으로 중세 스콜라 체계(영광의 신학, 인간의 자유의지의 기여)를 거부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칼 바르트가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이라는 경구를 주었다고 한다. 성경과 신문이 동급이 될 수 있는 좋지 않은 표현이다. 성경은 성경이고, 신문은 신문이다. 신문을 읽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하고, 신문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신문은 성경이 아니고, 성경은 신문이 아니다. 이 떨어지지 않고 융합되지 않는 두 주제는 종교개혁 시대부터 두 왕국 이론으로 해소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성경보다 인문학을 더 좋아한다. 세상 지식은 몰라보게 변화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진리는 변화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아야 한다. 이 변화된 세상에서 인문학은 더 큰 도전이 된다. 인문학을 알지 못하면 사회 일원과 대화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인문학은 생존과 교류를 위해서 필수 항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인문학적 능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극히 제한되기 때문이고, 인간의 능력은 반복되어 유지할 수 없고, 죽으면 그 개인으로 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서관에 책이 많고, AI가 발달되어도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최첨단 AI시대에 영화 매트릭스처럼 정보를 인간의 뇌에 자연스럽게 이동시킬 기술문명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능을 버텨낼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생소한 정보를 만나면 구토 등 이상증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가는 화성에 신인류를 정착시키려는 모험을 하고 있다. 지구의 종말을 예측하는 선견자적 식견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이 화성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인간은 24시간, 365일의 공간 속에서, 공간 이동을 해도 시차의 간격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런데 24시간과 365일이 아닌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우리시대에 고도화된 지식 체계와 미디어 기술의 발달, 신인류 AI를 막은 힘은 자연재앙 밖에 없는 것일까? 인간은 스스로 자기 탐욕을 절제할 수 없다. 그런 사회 과정 속에서 사회인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좀 더 체계화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한 손에 들려야 할 신문은 기독 지성인이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교회에서 지원하는 인문학적 교육은 너무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성경 교육에도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익힌 인문학적 소양, 자기 전문 지식을 함께 교류하면서 형제를 도우며 인문학적 식견을 증대해야 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 존재와 인식(기하학)이고, 만유의 구주에 대한 지식이 함께 세워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인문학은 자기 덕의 증진이고 이웃에 대한 배려이며 복음 전도를 위한 기본 전제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자기 영혼 믿음의 정진이고 영생의 기쁨이며, 하나님을 알아가며 복음을 전도할 능력이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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