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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트 불트만의 신학

형람서원 2007. 11. 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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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영식

루돌트 불트만의 신학

 

1. 불트만은 신약성서 학자이지만 단지 성서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현대신학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서의 말씀을 현대인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할 때, 성서의 신화적 언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주도면밀하게 고민하여 “신약성서의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 des Neuen Testaments) 또는 “실존론적 해석”(Existentiale Interpretation)이라는 해석방법론을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단순히 신약성서 해석학이 아닌, 성서해석학으로서의 신학 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2. 무엇보다 예수의 메시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언설이 신화론적이라는 점을 문제 삼는다. 그가 이를 문제 삼았다는 점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이미 계몽주의 이후로 신화적 언어로 서술된 신약성서의 내용과 예수상을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여 제거해 버리고 신약성서의 내용 중에 윤리적인 부분만을 중요하게 취급하려는 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신화적인 부분을 덜 중요하거나 비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적인 언어로 서술된 부분에 신약성서의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음을 지적하고 이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내고자 한다.

 

3. 또한 그는 신학의 중심주제인 하나님 언설을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의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의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과 연관시켜 이해하고자 한다. 즉, 하나님 언설로서의 신학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에 대한 언설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진리 역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진리라고 보았다.

 

비신화화의 문제에 대해

 

비신화화를 나는 신화론적 언설들 또는 문헌들을 그 실제내용(Wirklichkeitsgehalt)에 따라 문제시하는 해석학적 절차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전제된 것은 신화는 분명 하나의 실재(Wirklichkeit)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128)

 

두 가지 방식의 실재이해

이제 불트만은 실재 또는 현실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이 두 가지 방식은 상호 변증법적으로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재는 여기서 이중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실재라고 할 때, 객관적으로 보는 방식 안에서 표상된 세계의 실재(die im objektivierenden Sehen vorgestellte Wirklichkeit der Welt)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안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으며 방향정위를 하고 있고 또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그것에 대립해서 있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것과의 연관성을 관측하고 추정하면서 이러한 실재를 통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만든다. 실재를 보는 이러한 방식은 자연과학과 이를 통해 가능하게 된 기술력에서 완성된다.”(128)

세계를 인간과 대립되는 대상으로 설정하고 관찰하고 측정하는 방식으로 그것의 실재를 파악하는 자연과학적 방식은 이미 자연과학을 넘어 역사학에서도 “실증주의적 역사주의”(129)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역사를 관찰하는 주체와 그 관찰의 대상인 역사가 상호 대립적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와는 다른 방식의 실재이해를 소개한다.

“오늘날 이러한 대립은 없다는 인식이 점점 더 관철되고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과정에 대한 인지 자체가 이미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보여진 대상에서 분리된 중립적인 봄(Sehen)이란 불가능하다.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객관적인 듯 보이는 상은 항상 보고 있는 자의 개별성에 주형되어 있으며, 이 개별성 자체는 이미 역사적이며 역사적 시간의 밖에 서 있는 사변가(Spektator)일 수만은 없다.” (129)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대의 역사이해에서 실재는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의 실재로 이해한다는 점이다.”(129)

불트만은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관찰 방식인 자연과학적 실재와 주체와 객체가 상호 무관하게 분리될 수 없는 실존적인 실재이해를 하나의 현실, 또는 실재에 대한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있는 “실존”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써 우리는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의 실재”라는 그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실존: 결단과 미래가능성

실존이라는 표현은 다른 존재자들과는 다른 인간의 독특한 존재방식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른 존재자들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걱정하며 염려하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을 지는 존재방식을 갖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때, 그는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며 새로운 미래를 현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트만은 “결단”(Entscheidung)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적 존재는 객관적으로는 보는 방식 안에서 인지되는 자연의 존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오늘날 특별히 인간적인 존재를 실존이라고 표시하곤 한다. 이때, “실존”은 마치 식물들이나 동물들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그저 놓여 있음(bloßes Vorhandensein)을 의미하지 않으며 특별히 인간적인 존재방식을 뜻한다.”(129)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적 삶은 역사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결단을 통해 인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택한 어떤 미래로 매순간 들어간다. 결단들은 어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어디에 자신의 삶의 성취를 보느냐에 따라 일어난다.” (129)

역사는 인간적 결단들의 장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보여질 때, 즉, 그 안에서 인간적 자기이해의 가능성들이 활동하는 것으로 보여질 때 이해될 수 있다. 가능성들이란 현재적인 자기 이해의 가능성들이며 또한 이것들과 하나될 때만 참으로 인지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나는 역사에 대한 이런 해석을 실존론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해석자의 실존질문에 의해 움직여지며 역사 안에서 매순간 활동하는 실존이해를 질문하기 때문이다.”(130)

불트만에게서 인간은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자기이해”의 존재방식이다. 즉 인간은 매순간 자기 자신의 존재이유를 물으며 자기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떠맡으며 과거의 자신과의 연관성 안에서 현재의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존재방식은 “실존”이라고 불리워진다. 실존인 인간에게 역사란 저 밖에 놓여 있는 그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기존재를 실현해 가는 장으로 이해된다. 인간은 “결단”을 통해 과거로부터의 자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의 자기를 현재화하며, 이런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는 역사적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존재의 가능성을 실현하지 못하고, 즉 실존하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일반화된 세계와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 머물고자 할 수도 있다. 즉, 인간에겐 “본래적으로 또는 비본래적으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있다.(130)

“본래적으로 인간적인 존재가 실존이라고 한다면, 즉 실존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떠맡아야하며 스스로에 대해 책임적이어야 한다면, 본래적 실존에는 미래를 향한 개방성 즉, 매순간 사건이 되는 자유가 속해 있다.”(130)

인간은 본래적으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가능적 존재이며 이런 의미에서 미래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실재는 그의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실재는 항상 그 앞에 놓여 있기에 사람들은 미래적으로 존재함(Zukünftigsein)이 인간이 서 있는 바로 그 실재라고 말할 수 있다.”(130)

 

신약성서의 비신화화

이제 다시 두 가지 실재이해로 돌아가 보자. 하나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실재이해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에 중점을 둔 실존론적 실재이해의 방식이다. 여기서 불트만은 두 가지 방식이 하나의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상호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지만(132),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실재이해의 방식은 실존론적 이해를 위해 역사의 주변정황만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인 듯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저 밖에 놓여 있는 역사적 사건과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이 아니라, 그것에 담겨진 실존적인 의미파악이다. 관찰하는 인간실존과의 연관성 없는 객관적인 사실설정은 그에게 무의미한 것처럼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객관적 사실성과 실존적 의미성의 구분은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역사학자나 자연과학자에게 신화적인 표상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현대인에게 이해될 수 없는 과거의 것으로 처분될 뿐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세계는 내적 연관성 안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지, 이 연관성 밖의 어떤 초자연적 힘의 개입에 대해 언급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역사학자나 자연과학자에 의해 세계는 이미 비신화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불트만은 성서의 세계상, 즉 신화론적 세계상을 단순히 제거해 버릴 것이 아니라, 이 신화론적 세계상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신화론적 사유는 그러나 순박한 방식으로 저 세상의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객관화하였다. 그것의 본래적인 의도와는 달리 신화적 사유는 초월적인 것을 공간 안에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그리고 인간의 능력에 대해 수량적으로 능가하는 것으로 그의 힘을 표상했다. 비신화화는 이에 대해 신화의 본래적인 의도를 유효화시키려고 한다. 즉, 인간의 본래적인 실재에 대해 말하려는 의도를.”(134)

신화적 언설들은 실제로는 인간존재의 본래성을 드러내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데, 그 표현방식을 글자 그대로 따라가면, 이 세상 밖의 어떤 초월적인 힘들이나 신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 놓여 있는 한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마치 그것들이 실제로 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오해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즉, 마치 이 세상이 있고, 또 신들의 세상이 있는 듯이 생각되거나 세상의 많은 일들이 저 세상의 힘들에 의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싶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트만에 따르면, 신화적 언어들은 인간실존의 자기고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초월적 행위는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어떤 세계 내의 현상이 아니며 자연과학이나 역사학이 증거할 수 있는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자신의 실존 안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통해 생명을 얻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이와 함께 자신의 삶이 전개되고 있는 자연과 역사도 역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지 고백으로서만 진술될 수 있을 뿐이며 결코 일반적인 진리 또는 자연과학적이거나 역사철학적인 이론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의 세상적인 사건으로 객관화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구원자라는 문장은 단지 인간의 실존적 자기이해 안에서만 자신의 적법한 근거를 갖는다.”(135)

따라서 신학의 중심주제인 하나님도 역시 어떤 객관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여전히 신화론적인 사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신화론에서 벗어난 자연과학과 역사학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언설은 비록 그 자체가 신화론적 표상을 따르고 있지만, 실제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언설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세계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위와 맞부딪힌 우리의 실존에 대해 말함으로써만 그의 행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135)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세상과 그의 역사에 종말을 설정하셨다. 이러한 파라독스는 또한 어떤 역사적 사건은 동시에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36)

불트만에게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도 이 사건의 의미성에 부딪힌 인간실존에 대한 언설로 풀이될 수 있다. 우리는 위의 문장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이 종말론적 사건인 것은 그 사건이 인간실존에게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결단은 과거적 자기이해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실존, 새로운 존재로의 태어남을 향한 사건이기에 종말론적이다. 이 종말론적 사건은 오늘날 설교를 통해 일어난다.

“그리스도 사건은 마치 다른 역사적 사건들처럼 “기억”을 통해서 현재화될 수는 없다. 이것은 선포를 통해서 현재화된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선포는 그 자체로 종말론적 사건이다. 그 안에서, 말을 건네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매순간 현재한다. 즉, 매순간 내 실존 안에 있는 나를 만나는 사건으로서 현재한다.”(136-7)

 

참된 걸림돌- 하나님의 말씀

불트만은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지만, 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초월적이며 유일회적인 계시사건인 그리스도에게 한정되어 있는 반면, 불트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여기서 인간의 실존적 결단을 이끌어내는 설교의 말씀으로 이해되고 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단지 성서의 중심내용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으며, 계몽주의시대의 비신화화 작업이 윤리적인 내용 외의 다른 어떤 초월적인 요구들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제거해 버렸던 것과는 달리, 현대인을 격앙시킬 수 있는 참된 걸림돌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비신화화는 설교가 인격적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분명히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신화화는 잘못된 걸림돌을 제거하고 참된 걸림돌, 바로 십자가의 말씀에 주목하게 한다.”(157)

“성서의 신화론적 세계상과 관련된 근본적인 과제와 의식적인 비판은 진정한 걸림돌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안전성에서 밖으로 나오도록 부른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걸림돌이다. 자연과학적 세계상은 인간이 세계와 그 자신의 삶에 주도권을 소유하도록 유혹한다. 인간은 자연법칙들을 알고 자연의 힘을 자신의 계획과 의지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그 자신의 안전성과 그 자신을 위해 설정해 놓은 자랑스런 안정성에서 떠나라고 그를 불러낸다. 그 말씀은 세계와 자연과학적 사유의 저편에 있는 하나님께로 인간을 부른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참된 그 자신이 되도록 부른다. 인간의 그 자신, 즉 자신의 내적 삶, 그의 인격적 실존은 가시적인 세계 저편에 그리고 합리적 사유의 저편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인격적 실존으로 있는 그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며, 인간이 피안을 망각하는 한, 그를 사로잡아버리는 근심과 불안, 그리고 세계로부터 그를 자유하게 하신다.”(Jesus Christus und die Mythologie, 158, 159)

앞에서 보았듯이 불트만은 성서의 중심내용을 인간의 인격적 중심과 만나게 하는데 그 궁극적 관심을 두고 있다. 그에게 성서는 여러 다른 역사적 문서들처럼 역사비평이라는 학문적 접근을 통해 당시의 언어와 사유에 대한 해독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는 단지 여타의 역사적 문서처럼 과거사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성서를 읽는 것은 어떤 역사적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나 형이상학적인 호기심을 만족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인간의 삶, 나의 실존을 새로운 미래적 가능성으로 돌진하게 하며,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자기이해의 늪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삶의 동력이다. 바로 성서 안에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는 비신화화라는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려 할때, 우리의 관심은 무엇인가? 분명 성서는 역사적 문헌이며, 우리는 역사연구의 방법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서의 언어를 연구해야만 하며, 편집자의 역사적 자리라든가 그와 같은 것들을 연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참되고 진실된 관심사인가? 과거의 역사적 시점을 재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를 그저 역사문헌으로 읽기만 한다면, 성서는 그저 이것을 위한 ‘자료’ 구실을 할뿐이란 말인가? 아니면 성서는 자료 이상의 것인가? 내 생각으로는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는 성서가 우리의 현재적 상황 안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듣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과 영혼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듣는 것이다.”(Jesus Christus und die Mythologie, 167)

 

하나님 언설로서의 신학의 가능성

신학은 하나님 언설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이 신학의 제1주제이며 과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직시한다면, 신학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학자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우리가 20세기의 신학을 신 중심적 신학과 인간 중심적 신학으로 양분할 때, 신 중심주의인 바르트와는 달리 불트만의 신학은 인간중심주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중심적 신학도 신학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데, 불트만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항상 인간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진정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즉, ‘하나님’에 대한 언설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언설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과 무관한 추상적 사변이나 무의미한 잡담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삶, 실존적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von Gott)을 ‘하나님에 관해 논하는 것’(über Gott)으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즉 그렇게 하는 순간에 그 논의의 대상인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즉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에 관해 논할 때, 즉 하나님을 사유의 한 대상으로 삼고서 그것에 대해 이리저리 살피고자 한다면, 어떤 한 관점을 가지고 그로부터 중립적으로 하나님 질문을 제기하여 하나님의 실재성과 그의 본질을 논구하면서 그것을 내가 거부하거나 또는 그것이 명백하다고 보일 때는 수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때는 전혀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 즉, 모든 ‘무엇에 관한 논의’는 논의되어지는 것 밖에 있는 어떤 한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밖의 어떤 한 관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말하는 자의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도 참이 되는 그런 일반적인 문장이나 일반적인 진리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26)

 

학문과 신학

불트만은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에서만 가능한 신학의 과제를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사랑에 관한 논의’의 차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사랑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사랑의 언설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실제로 사랑이란 이렇게 논의할 수 있도록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도 논의의 대상으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불트만에게 신학의 주제인 ‘하나님’은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명제로서 그 진리를 서술하고자 하는 학문(Wissenschaft)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에게 하나님 언설로서의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하나님의 실재성을 부인한다는 점에 학문의 어떤 무신론이 놓여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이 하나님의 실재성을 학문으로서 주장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문장들, 즉 일반적인 진리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연히 그것이 보편타당할 때만 의미를 가지는 그런 문장들로 말한다는 것, 말하는 자의 구체적인 상황과는 무관하게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말하는 자가 이렇게 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그 자신의 실존의 사실적 실재성 밖에 세워두며 또한 하나님의 사실적 실재성 밖에 자신을 세워 두는 셈이 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것에 대해 말하게 된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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