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서원 2006. 10. 5.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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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학 개론 | 교부신학 2005.01.1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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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1. 교부학과 교부 신학

 

교부학(Patrologia)과 교부신학(Patristica)이라는 두 용어는 분명히 동의어이다. 그런데 특별히 근대에 와서 현저하게 두 용어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교부학이라는 용어는 루터교 신학자 요한 게하르트(+1637)의 작품에 처음 나타나는데 교부학(1653)이라는 그의 유작에서 볼 수 있다.

 

교부 신학의 용어는 보다 늦게 그 의미가 나타났다. 교부적(patristica)이라는 형용사를 명사로 사용하면서 신학을 첨부하였다. 루터교와 가톨릭 학자들은 신학의 다양한 측면을 구별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즉 성서학, 교부학, 스콜라 신학, 상징학, 사변론 등이다.

 

그 후 교부학의 용어는 특별한 작자들의 작품들과 생애들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이제 고대 작가들의 역사와 문헌을 연구하는 경향을 뜻하는 또 다른 목표를 취하였다. 다른 말로 말해서 교부학은 성인전 연구가 아니라 교부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연구하는 고대 그리스도교의  문학 역사학으로서 교부들의 문학적, 교의적 요소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연구 범위에 대한 오늘날의 관심은 다음과 같이 확대되었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작가들에까지 교회사, 어원학(filologia), 고고학이 양립적인 인식의 도움과 함께 더욱 향상된 전체적인 작품들이 필요하다.

 

교부신학은 오직 교부학의 한 부분으로서 신학의 한 줄기인데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앙 교의의 전개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작가들의 사상과 신학(doctrine)의 중요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14세기에 신학은 성서 신학, 교부신학, 스콜라 신학, 사변신학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교부 신학의 연구없이 교부학의 연구가 불가능하다면, 다른 측면에서 오직 교부신학에 전렴한 연구가 신학적 관점에 의해서 발전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교부학이 고대 그리스도교적 그리고 교부 신학적 문학의 두 가지 역사의 관계와 함께 얼마나 인식되는가를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시 진실로 누가 교회의 교부인가를 밝혀야 한다.

 

교부 : 특별하게 권위있는 신앙의 증거로서 교회로부터 그리스도교 고대성에 대한 교회 저자로 여겨진 분

 

교부학의 황금시대 4세기 중 초반에 교부라는 말은 수용되었는데, 사람들은 ’교부들’이라는 용어를 구별하는 것이 보다 좋다는 말을 해 오던 어느 순간에 교회의 아버지라고 말하였다. 다른 면에서 이해하기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의회에 참석하여 모여있는 주교들을 교부들이라고 말한다.

 

교부는 교회 저자이다. 그는 저작물을 남겨야 하고, 보편(가톨릭) 교회에 속해야 한다. 그가 성 바실리오 같이 주교이거나 성 예로니모 처럼 사제이거나 성 아퀴타니아의 프로스페로 같이 신도라는 것이 교부가 될 수 있는 절대 필요 조건이 아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교부가 될 수 있다.

 

교부는 그리스도교 고대성에 속해 있어야 한다. 교부들은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그 교의의 초기 형성을 목격한 시대에 속해 있어야 한다. 그들은 과거 신앙의 훌륭한 증거와 전승의 고리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고대성의 한계들을 고정하기 위해 채택한 규범이 무엇이었냐는 것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서방에서는 476년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점진적인 붕괴 안에서 얼마간 살아 남았던 시대, 그리이스-로마 문화의 말기에 규범이 한정되었다. 마지막 두 라틴 교부들은 성 대 그레고리오(540-604)와 시빌리아의 성 이시도로(560-636)이다.

 

동방에서는 고대부터 중세기까지의 여정이 덜 분명하며, 8세기에 동방과 서방의 관계가 종결된다. 마지막 희랍 교부는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675-749)이다. 사실상 불행하게도 동 서방 일치 교회는 끝이 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9세기에 서로의 관계가 쇠진해지면서 미카엘 체루라리우스 시대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결정적인 분열이 11세기에 일어났다.

 

우리는 이제 교부로 인정하는 신학적인 언어로 교부에 대한 정의를 다음 네 가지 사항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정통성, 둘째 생애의 거룩함, 셋째 교회의 동의, 넷째 대성이다.

 

교회는 몇 교부들에게 박사의 칭호를 부여하는데, 그러한 특전은 그들의 작품에서 특별한 증거와 현저하게 학문적 특별함을 제공하는 사실이 있어야 한다. 서방에서는 암브로시오, 지로라모, 아오시딩, 대 그레고리오 교부가 박사로 호칭된다. 그리이스 교ㅗ히에서는 아타나시오, 바실리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그리고 크리소스토모 교부가 박사로 불려진다.

 

교부 시대는 발전과 가치에 있어서 그 일관성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동일한 교회의 역사는 교의와 내용 그리고 충분한 성숙과 기원, 과정, 그리고 결국에는 그 쇠퇴를 제공하는데 기여하였다. 다음의 시기가 다양한 역사 진행과 국면을 구별하고 있다.

 

1) 초기 (...150)

 

2) 둘째시기

 

3) 라틴적 풍류에서 신학의 탄생

 

4) 황금기

 

5) 교부 시대의 말기

 

1 : 교부

 

1. 사도 교부들

 

1.1.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

 

주님은 어떤 문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분은 기쁜 소식을 전하셨으며, 사도들에게 온 세계와 땅 끝까지 그것을 선포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순명을 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몇 사도들은 신약성서에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적고 그분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명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복음서들, 사도행전 서간들 위에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기초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의 보증과 참으로 일치하는 증인들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특별히 보여졌던 그분의 초기 전교인 세상의 복음화가 시작되었다. 1세기부터 이미 많은 교회가 팔레스티나, 아시아, 그리이스 반도, 에집트, 이탈리아, 그리고 서유럽의 갈리아, 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마지막 사도의 죽음에까지 신앙의 유산은 다른 보관물들을 많이 세우며 풍부하게 전승되어 왔다. 후손들과 사도들의 계승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지켜졌다. 이제 많은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이 자주 각각의 신도들 중에 로마에서 시작한 적지 않는 순교자와 함께 새 신앙의 증거를 드러냈다. 특별한 교회들의 같은 생활을 동반하였던 다양한 사건들은 성서의 진술에 이미 사도들의 시대처럼 그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초기 저술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들의 문학 형태조차도 그리고 교육적 목적, 종교적 내용들을 성서에서 특별하게 입수하면서 그렇게 시작하였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문학과 성서적 영감에 의한 문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더욱 공통적이지만 혹시 덜 특별한 사도 교부들의 시대에 대한 다른 정의이다. 왜냐하면 직접, 간접적으로 이 서적들의 저자들은 사도들의 생생한 가르침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모든 초기 시대는 2세기 중반까지 뻗어갔다.

 

사도들의 시대에서처럼, 우선 다시 한 번 같은 신도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발생한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예정된 서신들을 필사하는 내적인 조건들이 있다.

 

1.2. 사도신경

 

왜 교부학 교과서 서두에 사도 신경의 역사를 공부하는가? 우리는 이미 교부들이 특별하게 신앙의 권위 있는 증인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들도 역시 살았으며,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이 신앙을 받았다. 확실하게 들은 그 신앙을 전하면서 깊이 있게 하였다.

 

1) 신경의 의미

 

교종 비오 5세의 허락과 성 까를로 보로메오의 책임 하에 1566년에 간행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리서는 우리에게 신경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16세기에 신경은 다음과 같이 이해되었다.

 

≪사도들이 표현했던 신앙과 그리스도교 희망에 대한 고백은 그들 각자의 신경(symbol)에 의해 불려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모두가 취하였던 다양한 진리의 공유로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암호와 표징으로서 봉사하였기 때문인데, 그 암호와 표징은 교회 안에서 복음을 추락시키기 위해, 여기 저기에서 날뛰는 거짓 형제들과 도망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참 군인들인 그들을 손쉽게 구별하게 하였다≫(,1,2).

 

200년 경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미 이 신경 용어들로 말하곤 하였다. ≪여기 로마 교회가 배웠던 그것, 교회가 가르쳤고, 아프리카 교회들과 함께 증거로서 교환하였던 것≫(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36).

 

하여간 사도들의 신경은 그리스도인을 인식하는 징표읻. 그것은 장엄하게 ≪traditio symboli≫ 순간에 그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고스란히 신경을 전해 받았던 것과 똑같이 하느님께 신경을 고백하고 형제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것이 ≪redditio symboli≫이다. 세례식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예식에 대한 것이다. 옛 신앙의 규범(regula fidei)에서 낳고 신경의 역사를 다시 찾아내는 것은 정말로 마치 우리가 보겠지만 로마 세례 전례의 편집에 대한 연표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이제 신경(symbol) 용어, 그리고 그 의미가 매우 유사한 두 표현, 신앙의 규범(regula fidei)과 신앙 고백(professione fidei) 등 사이의 차이를 말해야 할 것이다.

 

- 신앙의 규범(regula fidei, regula veritatis)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종합하는 간결한 옛 형식이다.

 

- 보통으로 표현하는 신경(symbolo)은 역시 간결하고 세례 전례 안에서 소개된 신앙의 규범이다.

 

- 신앙 고백(professione fidei)은 세례 전례와 독립적이며 더욱 길고 더욱 상세한 신경(symbolo)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형식들의 차이는 현실적으로 항상 마지막 두가지 용어인 신경(symbolo)와 신앙고백(professione fidei) 사이에 어떤 혼동이 늘 남는다.

 

2) 로마 세례 신경의 편집

 

① 성서 본문

 

마태 28,19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비평가들은 분명한 첫 장면에서 의심스러운 삼위일체론적 세례 형식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형식은 신약 성서에서 발견하는 유일한 형식이 아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성 바오로는 "여러분 중에도 이런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느님의 성령으로 깨끗이 씻겨지고 거룩하여 졌으며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삼위 일체의 위격들 사이에 구별은 신약 성서 어디에서나 분명하지만 신학 상대적 신학이 발전되는 것은 좀 더 늦게 나타난다. 57년에 성 바오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Ⅱ 고린 13, 13)라고 썼다. 예외없이 모든 필사본들은 내용을 침해하지 않고 항상 인용하고 있는 3세기의 그리스도교 작가들처럼 성 유스티노와 성 이레네오와 같은 2세기의 그리스도교 작가들과 마태오의 유명한 본문을 구성한다.

 

사도 8, 37(그리스도론적 본문) : 필립보가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자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② 교부학 본문

 

1세기 : "살아계신 하느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뽑힌 자들의 믿음과 희망"58, 2(이 본문은 성 바실리오의 성령에 관한 연구 c. 29에서 인용되었다).

 

2세기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00년경) : Tralliani에게 보낸 편지 9. 디다케 Ⅶ, 1,3. 유스티노(155년경)의 호교론 1권 Ⅰ, 61. 13. 42 : 트리폰과의 대화 63. 85. 132. 이레네오(177년경)의 사도 설교의 해설 6; 이단을 거슬러 Ⅰ, 10, 2.

 

3세기 : 200년경 히뽈리또와 테르툴리아누스가 그들 방식으로 로마 신경을 전승하였다.

 

4세기 : 로마 교회와 함께 그의 신앙 공동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율리오 교종에게 340년 그의 편지에 루피노가 라틴말로, 앙카라의 주교 마르첼로가 희랍말로 필사하였다.

 

초기 로마 신경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에 의해서 나셨으며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 지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며, 삼일쩨에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으며,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 죄인들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

 

1.3. 로마의 클레멘스(92-101년 사이 주교)

 

1) 생애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서간의 저자이다. 그는 92년 혹은 93년에서 101년 사이에 주교였음이 확실하다. 그의 선임자들은 베드로 사도와 리노 그리고 아나클레토였다. 이레네오(140?-202?) 성인에 따르면 클레멘스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를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즉 클레멘스는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베드로와 관계를 맺었을 것이며, 바오로 사도의 스페인 여행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고, 또한 두 사도들의 순교와 네로의 박해에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클레멘스가 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매우 오래된 고대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4세기까지 많은 교회에 읽혀졌다. 그밖에 많은 작품들이 부당하게 클레멘스에게 속한다고 여겼다. 두 번째 편지(150년의 현실로, 지로라모는 그것을 그의 원작 추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와 동정녀들에게 보낸 두 편지(3세기경에).

 

2) 인격의 특성

 

편지는 클레멘스의 성격들을 알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는데, 클레멘스는 로마 시민였을 것으로 보이고, 그의 기원이 유대인은 아니엿을 것이다. 희랍적 유다이즘인 그의 문화가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그의 언어는 속도로 봐서 눈에 띄게 로마어이며 맑고 온건함으로 충만한 듯하다. 분명히 그의 언어는 그의 공적인 권위로 봐서 주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깊은 선함과 사랑스럽고 달콤한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클레멘스는 심오한 종교적인 영성을 살며,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어떤 모욕감을 주는 것 없이 영혼을 자유에로 인도한다.

 

3) 가정

 

) 클레멘스가 사도 바오로의 동료였음을 밝힐 필요가 있고,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4,3)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는가? 오리게네스(185-254)와 제자 체사레의 에우세비오(H. E. , 15)는 클레멘스의 정체를 제안했다. 일반적으로 초생 교회에서 그것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원은 진실로 같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아직 증명되지 않았고, 필립비 교회는 로마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 클레멘스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일 수 있는가? 클레멘스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활용한다. 따라서 이 서간은 클레멘스의 편지 이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혹시 이 서간의 저자가 클레멘스인가? 오리게네스와 에우세비오는 같은 질문을 하였다. "몇 사람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루가가 번역하였다고 하며, 몇 사람에 의하면 클레멘스가 번역하였다고 한다. 한편에 따르면 클레멘스의 편지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같은 전개와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면에서는 두 작품의 개념들은 그들 사이에 그것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점에 일치한다."

 

4)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의향과 주제들

 

) 서간의 동기 : 고린토인들에게 충분히 광폭한 군중이었던 것 같다. 이제 정말로 고린토 교회에 새로운 스캔들이 돌연발생하였다. 클레멘스의 편지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스캔들이 마음들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심각하였다. 무슨 일이 발생되었는가? 그러한 추문에 로마 교회가 개입하였다. 로마 교회는 권위를 가지고 그러나 특별히 대부분 부드러움과 선함과 온화함으로 말한다. 잘못한 사람들에게 떠날 것을 충고하고, 그들은 자유롭게 점잖고 고귀하게 받아들인다. 잘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형제적 교정은 온화와 겸손한 사랑의 행동이다. 클레멘스는 직접 잘못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동시에 그는 질서를 되찾기 위해 당신의 대표들을 파견하다.

 

) 서간의 시기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110년 전에 쓰여졌다는데, 이 날짜는 스미르나의 주교 뽈리까르뽀에 의해 지적된 것에 가깝다. 다른 편에서 이 서간은 네로의 광폭한 박해 다음에 쓰여졌다고 한다. 64년에 서간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하여간 이 서간은 95년 또는 96년 쯤 쓰여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정말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가이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모든 박해가 종결되었던 네르바 황제 때인 97년 혹은 98년을 선호한다.

 

) 구성 : 매우 길다. 65장으로 구성된다.

 

첫부분 : 일반적인 권고

 

1. ⓐ 질투를 선고한다(4-6), ⓑ 보속을 하다(7-8)

 

ⓐ순명, 믿음, 자비, 환대를 실천하다(9-12), ⓑ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에 겸손을 실천하라(13-19). ⓒ 상호일치에 필요한 덕목에 대한 마지막 위대한 권고이다(20-22).

 

2. 클레멘스는 수신자들의 신앙을 회복하도록 힘껏 노력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확실한 부활 때문이다(23-30).

 

3. ⓐ 신앙(31-32), ⓑ 사랑(33-35, 3), ⓒ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매우 가까운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라고 말했던 그곳이다(36, 1-3) ⓓ 변화(전이)

 

둘째부분 : 분열의 기간 동안 고린토 교회에 계획된 올바른 치료제

 

1. 하느님은 옛 법과 새 법에서 다양한 기능들 안에 있는 질서를 원하셨다. 하느님에 의해 원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새 법 안에서 안정된 이 질서는 지켜져야 한다(39-50).

 

2. 클레멘스는 분열의 책임자들에게 그들이 해야할 것을 가르친다 :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 회심과 원의적인 유배(51-58).

 

결론 : 클레멘스는 "자비와 정의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적합한 모든 덕목들을 다시 한 번 열거하면서 편지 전체를 다시 요약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였던 교부들의 모범 위에서" 이 덕목들을 실천해야 한다. 평화와 인사와 대표자들의 파견을 선언으로 편지는 끝맺어 진다.

 

5) 서간의 교의

 

P. 레브레톤은 "클레멘스의 서간은 아직 신학적 작업 또는 신학적 논쟁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시는 이미 영혼들을 비추었고, 은총의 행위 하에서 신앙은 탄생하였다"고 말한다.

 

클레멘스의 서간에서 신앙은 신적 위격들 사이와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구속,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우리의 미래적인 부활을 보증한다.

 

우리는 클레멘스의 작품에서 텩별히 분명한 교회론을 볼 수 있다.

 

교회는 하나이다(46). "우리는 하나의 몸 안에 일치하며 의식의 공동체에 의해 결합되었다(34).

 

교회는 보편적이다. "바오로 사도는 전 세계에 정의를 설교하였다(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지들을 괴롭히고 떼어내는 것입니까?(46)"

 

교회는 사도직이다. 제도는 사도들의 즉각적인 권위 위에 세워졌다(42, 1-4).

 

1.4.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07)

 

1) 이냐시오에 대한 질문. 이냐시오의 생애와 영성.

 

시리아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는 로마에서 짐승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황제 트리아누스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심한 고통과 감옥에 처해졌으며, 긴 여행 기간 동안 7개의 편지를 썼을 것이며, 그 중 6개는 지역 교회에 그리고 하나는 지역 교회들 가운데 한 주교에게 썼는데 그 주교가 스미르네의 뽈리까르뽀라고 한다. 몇가지 추론과 가정에 의하면 이냐시오는 아마도 기원이 시리아인으로 보며, 로마인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인은 짐승들에 의해 처형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대인도 아니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대인 관습과 반대 모습이기 때문이다(Magn Ⅷ Ⅸ). 일반적으로 이냐시오는 개종한 사람으로 여긴다. 이냐시오의 6개 편지들은 우리에게 2세기 초 교회 생활과 제도의 구성과 위협하였던 이단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역시 로마의 수위권을 증명하고 있다.

 

그밖에 위대한 순교자들의 불같은 마음과 바오로 사상과 자주 인용된 요한 사상이 함유한 그의 교의의 순수함을 계시하고 있다.

 

에우세비오의 교회역사(3, 22)는 우리에게 오리게네스와 함께 일치된 정보를 제공한다. 즉 이냐시오는 안티오키아의 두 번쩨 주교이고 사도 베드로와 에보비오의 직계 후계자 다음에 왔다고 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에우세비오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들의 옛 리스트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쥴리오의 연대기에 의하면 이냐시오는 240년 이후에 죽었으며, 알렉산드리오의 친구였다고 한다. 교회 역사 제 3권에는 모두 이냐시오에 대한 것이지만 정보들은 순교자들의 편지들로부터 분명하게 기원된다. 따라서 이냐시오의 편지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성은 사도 바오로와 사도 요한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원을 가진 개념으로 확대된다. 처음에는 그는 하느님과 함게 영혼의 일치에 대한 살아있는 체험을 유도하였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자신의 삶과 함께 각자의 삶을 일체화되게 하는 포부이다. 순교관은 그것을 기다리며 드물게 그러한 강조를 하며 교회의 모든 역사 안에서 재발견하는 것이 정당하다.

 

2) 서간 주제 : 순교, 교회, 반가현설과 반유대적 논쟁

 

고통스러운 여행 중에 거룩한 주교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들은 열심한 친구와 그의 걱정들을 드러내고 있다. 즉 그는 그들의 주교들과 교회의 일치와 그들의 변치않는 단결과 이단으로부터 멀어짐 등을 걱정하였다.

 

스미르네에서 쓴 편지들은 에페소인, 마네소인, 트랄리아노인, 로마인에게 쓴 네 통의 편지이다. 또한 트로아데에 쓴 편지는 필라델피아, 스미르네, 스미르네 주교 뽈리까르뽀에게 이다.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편지들의 구조가 동일하다.

 

서간의 구조

 

인사

 

- 공동체에 대한 칭찬

 

- 요청의뢰 (이단을 피할 것, 주교에 순명을 통해서 일치 안에 머물 것)

 

- 마지막 인사와 부제가 있는 지역에 파견에 대해 또는 시리아를 위한 기도 요청

 

그밖에 이냐시오의 편지에는 두 오류를 대항하여 그리스인들이 주의할 것을 말한다. 하나는 마치 에집트에서처럼 동서방 시리아에서 그리스도적 실천과 예절과 함께 유다적 실천을 섞는 유대 그리스챤이즘(Gnosticism)이며, 또 하나는 예수의 몸 안에서 객관적 현실없이 오직 환상을 보고 있는 가현설(docetism: dochein)이다.

 

)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 주교께 순명, 일치, 이단에 대한 반대, 모두에게 선함.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의 침묵

 

) 마네소인에게 보낸 편지 : 누구의 동전인가?(믿지 않는 세상의 동전인가 아니면 사랑 안에서 믿는 이의 하느님의 동전이가?), 모든 것과 공동체와 일치 안에서 일함, 예수 그리스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 트랄리노인에게 보낸 편지 : 10장에 가현설을 대항하는 활기찬 저항이 있다.

 

)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 로마인에게 애원하는 편지, 순교의 원의의 보다 좋은 표현

 

) 필라델피아인에게 보낸 편지 : 이단, 사랑, 후회.

 

) 스미르네인에게 보낸 편지 : 가현설주의, 주교와의 일치, 안티오키아에 대표 파견 기원.

 

) 뽈리까르뽀 주교에게 보낸 편지 : 스미르네의 주교는 하느님 아버지 주교,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같은 분을 지녔다.

 

3) 이냐시오 서간에서 교의 내용

 

하느님의 유일성과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강생의 현실, 구원, 아버지의 구세주 그리스도, 교회의 몸의 정수리 그리스도, 성체성사,. 교회(교회론적 제도의 세단계-주교-사제-부제를 명하였다. 순명의 어려움), 마리아의 동정성.

 

1.5. 스미르나의 뽈리까르뽀

 

1) 참고원전

 

스미르네의 성 뽈리까르뽀(69-155?)를 연구하기 위해서 필립비인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를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원천을 정리해야 한다.

 

) 뽈리까르뽀의 작품 : 필립비인에게 보낸 편지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170)가 에페소인에게, 뽈리까르뽀 그리고 스미르네인에게 보낸 3편지

 

) 공통적으로 뽈리까르뽀의 순교자 칭호로 부르는 편지는 필로멜리오의 그리스도 공동체와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스미르네의 교회로부터 내려온 텍스트이다. 성실하고 감탄할 이 편지는 순교 후에 1년이 못되서 쓰여졌다.

 

)  뽈리까르뽀의 제자, 젊은 리옹의 성 이레네오 (18년 경)의 작품들: 뽈리까르뽀의 또다른 제자 플로리아노에에게 보낸 편지, 교황 빅토레에게 보낸 편지, Adversus haereses III, 3. 4.

 

)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IV, 14 15.

 

2) 뽈리까르뽀의 순교사화

 

) 서간 장르

 

뽈리까르뽀의 순교는 스미르네의 교회가 필로멜리움의 교회와 보편(가톨릭)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교에 보낸 편지에서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모두 이 편지에서 더욱 고대적이고 아름다운 자료를 보면서 순교자들의 삶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모두 정확한 내용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순교사화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서간체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순교 행전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Acta (행적) 또는 Gesta(공적):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공적으로 적합한 구술적인 과정

 

2. Passiones(수난) 또는 Martyria(순교):증인들에 의해 구성된 이야기들 또는 신앙의 시대적 가치

 

3. Legenda martyris (순교 젼기):후대 이야기, 역사적 가치 부재

 

스미르네 교회의 편지는 다음에 오는 장르 문서들에게 분명히 하나의 모델로 남게된다. 리옹의 순교자들에 대한 고올(옛 프랑스 거주민)지방 교회의 편지와의 비교는 하나의 아름다운 시도이다. 스미르네 교회의 편지는 분명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해 우리는 볼란디스타 Fr. Delehaye Fr. Lebreton의 입장을 단순하게 알아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인전적 고대 자료인데, 모두들 주장하기를 공적(功蹟)보다 더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순교자가 알았던 시대의 이야기는 불 속에서 그것을 보았으며, 그의 몸 남은 부분을 그의 손으로 만졌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기원은 더욱 권위있는 텍스트를 원하는 것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 본문의 원천

 

독립적인 두 가지의 원천이 우리에게 뽈리까르뽀의 순교사화를 전달한다.

 

1) 교회사(IV,15)에서 에우세비오는 한가지 요약(2-7)을 우리에게 제공하며 다행히 다른 것에 대한 대부분 (8-19)을 인용보도한다.

 

2) 60년쯤 후에 400년 경에 스미르네의 사제 삐오니오(250년 순교)에게 거짓으로 지나치게한 무명작가가 뽈리까르뽀 생애 전기 안에 스미르네 교회의 완결 본문, 즉 뽈리까르뽀 성인의 순교를 삽입하였다.

 

작가에 대한 의심은 본문이 명백하게 파괴가 되기까지 같은 편지에 있었다. 에우세비오에서 인용된 초본들과 삐오니오의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서간 본문이 존중되었다고 함께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작업된 변화에 대한 보다 더 명백한 예를 확인하여 준다.

 

"그의 몸은 불에 의해 태워지지 않았다.;! 폭군들이 승리자(confector)에게 접근하여 비수로 그를 끝낼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한 마리 비둘기가 중앙에서 화형기둥에로 날랐다...." (XVI)

 

비둘기의 출현은 순수한 삽입문구이다. 생애에서 사실 이 전설적인 비둘기는 주교가 축성됬을 때 주교의 머리위에 앉았다. 위 삐오니오는 그렇게 편지에 부록을 첨부하였으며(22, 3), 필사본과 그의 전달을 거짓으로 여겨놓은 듯하다.

 

모두 알게된 필사본들은 이 부록에 옮겼으며, 하여간 분명한 것은 모두 위 삐오니오에의해 인용된 본문에서 유래된다.

 

)  편지의 저자

 

분명하게 20장의 정보를 제공한다. 이 종합적 이야기는 어떤 마르치온, 스미르네 교회늬 형제에 의해 편집되었다. 편지를 필사했던 사람은 에바리스토라고 불린다.

 

만일 뽈리까르뽀를 앞서갔던 11명 순교자를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는 요약된 사화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는 (뽈리까르뽀) 스미르네에서 순교한 12번째 순교자였다. 그는 오직 모든 사람들 보다더 기억되었는데; 어느곳에서든지,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해 말하고 있다." XIX

 

뽈리까르뽀에 대해서는 대단한 유용함이 있다는 다른 세부적인 것들이 필요가 없다.

 

) 편지의 시기

 

분석에 의해 볼 수 있는 것은 편지는 사건들이 일난 직후에 쓰여쪘다는 가정이다.:

 

- 목격증인들은 마르치온에게 이야기를 작성할 것을 맡겼다;

 

-이것은 같은 사건들에 대한 완벽한 역사라고 생각된다면,  요약된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실패한 사건들에 대해 넓게 정보를 취하도록 하였다. 순간에 우리는 우리 형제 마르치온에 의하여 간단히 그것들을 요약하였다."  XX

 

-순교 기념일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순교자의 유물을 중심으로 일치하도록 결정하였다 (c. XVIII).

 

다른면에서 말해야할 사항은 필로멜리오는 400키로미터보다 더 떨어진 곳이다.

 

결론적으로 편지는 뽈리까르뽀의 순교후 일년이 안되서 쓰여졌을 것으로 본다.

 

) 편지의 내용

 

이편지를 통해서 존경해야할 노인 뽈리까르뽀의 그렇게 흥미로운 성격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목적은 다시 옮겨진 본문의 선택을 잘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의 같은 경향으로 ’가톨릭’ 용어를 주석할 수 없다.:

 

"...필로멜리오 교회에 그리고 가톨릭교회에 속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교에게  보낸 스미르네 교회의 편지."

 

보편적(catholic)이라는 말은 편지의 다른 3가지 사항에서 사용되었다:

 

" 작은자, 위대한자, 저명한자, 모르는자를 알았던 모든 것과 땅에 흩어진 모든 가톨릭 교회를 기억하면서, 기도를 끝마쳤을 때..."  VIII, 1

 

"스미르네 가톨릭 교회의 주교, 뽈리까르뽀는 우리 시대에 사도적 에언자적 스승이며 이들 사이에 놀랄만한 순교자였다.  XVI, 2

 

"그분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드리고 우리 영혼의 구세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우리 몸과 세상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목자를 인도하신다."    XIX, 2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스미르네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그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다" (스미르네 VII, 2). 가톨릭은 이냐시오의 텍스트에서 ’보편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뽈리까르뽀의 순교록에서 그뜻은 이단들과 교회 분리주의자에 반대하여 두 번째 의미로 정통적(orthodox)으로 쓰인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스미르네의 보편 (가톨릭)교회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같은 점에서우리는 무라토리의 법에서,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작품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편지는 뽈리까르뽀의 순교와 구세주의 수난 사이를 지향적으로 병행하는 것을 소개한다;

 

"주님과 같이 뽈리까르뽀는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I, 2

 

순교자는 구세주의 뛰어남에 대한 모방자(imitator)이다.

 

"주님은 그들과 가까이 계시고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신다."II,2: I cc. 2-4는 다른 순교자들의 순교에 대한 짧은 이야기이다.

 

1.6  헤르마스의 목동 (96년 경)

 

1. 저자

 

’목동’(pastor) 책 저자에 대한 정보는 다음 두가지 원천에서 온다.

 

1)무라토리오의 정경: 교황 비오는 142-155년간 재임했다. 무라토리오의 정경에 나타난 "우리 시대와 날에 로마 도시에서 헤르마스는 ’목동’을 썼으며, 그의 형제 비오 주교는 로마의 주교좌에 계셨다."는 이 텍스트에 결과적으로 동시대 ’목동’의 편집(150년경)과 무라토리오 정경의 편집이(그후 직후 븐명히 200년 전) 이루어졌다.

 

2)목동(pastor): 헤르마스는 출생에서부터 크리스챤 노예였다. 로마에 와서 로데라는 여인집에서 해방되었다.

 

2. 작품

 

1) 시기

 

)텍스트의 주석은 96년경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환시 2, 4,3). 클레멘스는 92년과 101년 사이의 로마 주교였다.

 

)무라토리오의 정경은 비오 교황 시기인 142년에서 155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한다.

 

2)역사적 가치

 

헤르마스의 목동은 이레네오(Adv. haer. IV, 20,2), 알레산드리아의 클레멘스 (Stromates I, 29 ecc)에 의해서 성서로 간주되었다. 오리게네스는 몇가지가 작품을 평가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영감받은 책으로 여긴다. (In espist. ad Rom. X, 31 ecc).

 

아직 가톨릭인 테르툴리아노는 성서들 사이에서 ’목동’을 배치하지만(De oratine, XVI) , 그것은 몬타니스트가 되었고 광폭한 엄격주의로 간통한 성서와 간통자의 정부를 거부한다 (De pudicitia X, 11).

 

무라토리오의 정경은 편지를 요청하지만 공적 교회에서가 아니다. 성서의 ’목동’이라는 타이틀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H.E. III, 3).

 

3) 문학 장르

 

’목동’은 그야말로 이상한 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두 충분하게 변화된다. 만일 그 문학 장르가 묵시적인 장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천상 인격들의 계시는 그러나 무단 차용함이 없이 유대적인 묵시적 장르에 일반적으로 매우 가깝다. 거의 분명한 것은 표현된 계시들이 순수하게 문학적이다. 종교적으로 매우 심오한 직관을 표현하기 위해"이메지들"로 표현하고, 용서에서 죄인들의 표면은 하느님의 오직 자비 위에 세워진다.

 

4) 스타일

 

’목동’은 호감가고 읽기 쉬운 비범한 문학 작품이 아니다. 그의 기술은 단순하지만 이 단순성은 세심하지는 않으며, 혹시 몇번씩이나 서투루고 촌스럽다고 한다지만 그러나 매력에 대해 부족하지는 않다.

 

5) 구성 및 내용

 

3. 교의적 주제

 

1. 교의(신학)

 

)  회심 (paenitentia)

 

헤르마스의 지배적인 사상은 크리스챤 죄인에게 용서의 희망을 다시 주는 것에 대한 신학이다. 그의 역사적 지평에서 ’목동’을 배치하는 필요성을 말한다.

 

쓴 고통으로 2세기 교회는 그 아들들의 약함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었다.

 

)  교회

 

헤르마스의 교회론은 매우 분명하며 흥미를 끈다. 이 옛 교회가 비록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시점에서 창조물일지라도 말이다. 하는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기인한다. 땅은 항상 부패 길 안에 있으며 그 아들들의 정화가 그 것을 젋고 기쁘고 아름답게 한다.

 

그것은 지역적이며 가시적이고 통치되는 교회에 의해 성립된다. 헤르마스는 그의 사제들에게 천상 교회가 그들를 신뢰하는 책을 전달해야한다. 그리고 클레멘스는 그것을 다른 도시에 보냈다.

 

가톨릭이다: 하는아래 거주하는 모든나라들은 일치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사도적이다: 12개의 산들은(Sim IX) 내적 세상을 대표한다. 그 곳에 하느님의 아들이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되었다.

 

정화된 그것은 그의 법인 일치에로 향해야 한다.:

 

"정화된 자들은 오직 한 몸을 형성한다.... 하느님의 교회는 오직 한 몸, 한 마음, 한나의 정신,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랑(caritas)이리라.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은 기뻐하며 모든 맑은 그의 백성을 찾아보면서 그들과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Sim IX, 18, 3-4

 

바위에 탑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에 마음 속깊이 일치하며, 함께 그들은 돌 하나로 된 비위 덩어리를 형성한다.

 

1.7. 바르나바의 편지

 

1.8. 사도교부 연구의 결론

 

90 -150년 사이의 그리스도교 문학은 우리에게교회의 탄생이라는 살아있는 모습을 제공한다.

 

1) 교계제도의 강화 :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2) 박해의 위협과 순교자들의 영웅담: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스미르네의 뽈리까르뽀

 

3) 유다이즘의 위협 (바르나바), 가현설의 위협(이냐시오), 영지주의 탄생의 위협 (오디 살로몬), 초대교회의 교리교수 (디다케), 복음의 발전과 전파(빠삐아)

 

이러한 작품에 다른 작품들이 첨부될 수 있는데, 사실상 매우 다른 가르침을 종합한 것을 알아낼 수가 없다. ()의 종교는 제도적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교회의 자격과 권위는 이례적으로 다양하며, 이렇게 광범위한 장관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1 고린 12, 4-6에서 말씀하시길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초대 그리스도 교회와 접촉은 젊고살아있는 인상과 그와함께 건전하게 인도한다. 그리스도교회의 건전함

 

1)소년같은 믿음, 희망은 주님에 대한 기억, 그분의 약속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 앞에서 구원과 승리의 큰 전망이 발견되고 있다.

 

2)부패하고, 늙고, 멸망직전인 이교도 앞에서 소년과 같은 용감하고 대담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종교의 윤리적 이완주의와 반대된다.

 

3)열심하고 형제애가 좋은 신선함: 먼거리의 교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와일치하고, 결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곳에서나 그렇게 신선하고 형제적 사랑이 많은 자들로 불리운다.

 

4)소년과 같은 종교, 자비, 예배: 인종적 편견 또는 감상적 경향의 기미가 없는 활기가 차고 간결하며 강한 기도들은 계시의 위대한 원천에 충만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5)결국 기쁘고 자비로운 에너지 모습인 신선함은 근본적으로 하느님 위에 또는 미래 위에 세워졌다. 소년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자제하고, 그의 아들은 하느님 말씀의 인격 안에 진리자체를 그에게 선사하는 정복자, 절대적인 분명함, 찬란한 눈빛, 순백, 대담함을 지니고 있다

 

2. 니체아 이전 교부들

 

2.1. 희랍 호교 교부들

 

1) 2세기 희랍 교부들의 다양한 태도와 지향, 빈번한 주제

 

) 2세기의 호교론

 

2세기 그리스도교 호교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호교론은 당시에 그리스도교가 필요했던 대사회에 대한 하나의 자기 표현이며 방어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교 호교론은 이교 철학에 대항해서 필요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설명이며 전시이다. 주로 중상 모략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한다. 이방인들 편으로부터 청취를 부추기면서, 호교론은 그리스도교 인식에 대한 인수를 제안한다.

 

) 호교론의 문학 형태

 

호교론들은 강연과 대화 형태로 제시되고 있으며, 그리스 수사학 규칙을 따르고 있다. 주로 황제들에게 제공되지만, 황제들이 그것을 읽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 호교론들의 큰 주제들

 

5가지 원리로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말씀(로고스)이 나타나셨다.(즉 하느님의 옳음, 말씀)

 

 (2) 단성론에 대한 방어(monotheism)

 

 (3) 수난 - 부활의 연결(케리그마), 육신들의 부활에 대한 선포

 

 (4) 예언들의 실현화(증거들의 수집:형태적으로 해석된 성서 본문들

 

 (5) 이러한 새로운 종교의 고대성(두 가지 약속 사이의 연결:그리스 철학자들 이전의 모     )

 

2)몇 중요한 저자들의 문학선집과 내용

 

)유스티노

 

 (1)생애: 기원 후 100년경 팔레스타인 사마리아에 있는 옛 시켐,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에서 이방 그리스 식민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철학에 기울었던 시기는 약 130년경쯤이며, 135년경 에페소에서 머물었다(한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140년경에 학교를 열었다. 150년경에 제1호교론을 자성하였고, 좀 후에 부록에 제2호교론을 첨부하였다. 152-153년경에 견유 철학자 크레쉔테에 의해 공격을 당하였으며, 160년경에 트리폰과의 대화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165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2)하느님의 사업에 대한 인식에 불붙는 갈망으로 스토아, 견유학파,피타고라스파, 플라톤 학파를 거쳐왔으나 희망하던 학문적 열정의 충족을 얻지 못했다. 33세에 성서에 대한 성실한 연구와 박해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의 의연함을 보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철학자의 외투를 입은채 그리스도교를 방어, 전파 및 견고하게 하기 위해 말과 문서로, 힘과 심오한 정신적 완숙성으로 지칠줄 모르게 활약하였다.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자세히 알고 젊은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하기 위해 여행을 많이 하였다. 두 번 유스티노가 로마에 왔는데, 그곳에서 학교를 세웠을 것이며, 공적인 논쟁에서 이단 마르치온, 퀴니커 학파의 크레쉔트와 다른 철학자들과 더불어 논쟁하였으며, 그리스도교를 위한 호교 문서를 제출하였으나 그의 그리스도교적 고백으로 인해 그의 적인 크레쉐트에게 고발되어 채찍을 맞고 167년경 순교하였다.

 

 (3)저서:

 

a) Apologia prima pro christianis, 68

 

b) Apologia secunda vel minor, 15

 

c) Dialogus cum Tryphone, 142

 

 (4) 사상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많은 철학적 학식과 철저함과 단호함으로써 발전시켰는데 그의 작품들은 저작 연대 뿐만 아니라 풍부한 내용의 교리적 자료 때문에더욱 가치가 높다고할 수 있다. 특별히 원죄(대화 88, 100), 세례(1 호교론 6), 그리스도교 주일성찬(65, 67), 성만찬(66) 지옥 형벌의 영원성 등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

 

유스티노는 신학 형태를 위한 어떤 서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고찰은 도그마 형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시작하였다. 저적합한 형태들을 발견할 수 없지만 그는 예를 들어 선구자의 어려운 능력과 함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존재하는 관계를 연구하였다.

 

◆헬레니즘의 부정적인 신학에 의해 영향받았다. 즉 하느님은 이름을 갖을 수 없다. 유스티노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결국 하느님은 말씀에 구약의 신현들 속성을 부여한다. (마치 이레네오, 테르뚤리아노, 히뽈리또와 같이). 말씀은 하느님을 현시한다. 마치 아브람과 야곱과 모세에게 나타났듯이, 그렇게 유스티노는 진리에 대해 알고있다는 그 이방 철학자들에게 가르친다.

 

◆성령은 예언자적 영이다. 성서의 감도는 많은 노력으로 유스티노에 의해서 정의되었다.(1호교론 36)

 

◆그리스도교 가르침은 예언자들, 그리스도, 사도들에 의해서 온다(1호교론 33; 39)

 

◆유스티노는 사도들(1호교론 66; 대화 103)과 그들의 제자들(대화103)에 의해 쓰여진 "기억들"을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복음들’이라고 불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전승에의해서 불려졌기 때문이다(1호교론66; 대화 100)

 

◆유스티노는 마리아와 에와 사이를 비교한 첫 사람이다(대화100)

 

◆세레(1호교론 61)와 세례 후 성체성사(1호교론 61)그리고 주일(67)과 관계되는 지적들은 귀중한 가치가 있다.  현실적인 신앙은 분명하개 형성된다.

 

◆귀신학은 유스티노늬 작품에서 넓은 공간으로 발견된다. 마술,신화, 우상숭배 등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타락한 천사들 마귀들에 의해서 고용된 수단들이다.

 

마치 빠삐아와 같이 유스티노는 천년왕국론자이다. 그는 어떤 정통 그리스도교인들이이 교리를 나누지못한다는 것을알고 있다. 따라서 그에 다르면 그들의 정통성은 종합적이 아니라고 한다(대화 80).

 

 (5)결론

 

그는 그리스도교 철학자로남았다:"철학은 그리스도에게로 지나간다."그리고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 무엇 보다 먼저 그는 믿음의 사람이며 보다 겸손하고 모르는자에게 봉헌하기위해 말하는 신앙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같은 생명을 희생하는 신앙인이다.

 

)타지아노

 

)아테나고라     

 

)테오필로       

 

)디오네토       

 

 

 

2.2. 초기 이단

 

호교론자들은 이방사상과 유다이즘에 직면해 있어야 했다. 한편 그리스도교 내부 자체에서는 다양한 이단들이 사도들 신앙의 완전한 상태를 공격하면서 발생하고 있었다.

 

1) 몬타니즘은 오직 영()의 인도에 따라 새로운 예언으로서, 계시의 최고 단계로서 소개되는 사상이다.

 

2)유주론(唯主論: monarchianism)은 아버지와 아들만이 오직 두 개의 다른 작용들로만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3)영지주의는 의심없이 더욱 많이 알려진 것으로서 이단들 중에 매우 위험하고 보다 영향력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바실리데(함신부님 강의록183), 발레티노(186)

 

영지주의

 

종교 철학적 인식을 쌓기를 원하는 긴장 안에서 영지주의는 모든 신학적 인식의 기초로서 계시를 포기하였다. 또한 영지주의는 비유적인 해석을 통해서 동일한 내용을 돌연히 숨긴다. 그리고 철학적 이론과 동방 문화로부터 변질된 요소들과 함께 지켜온 것들에 대해 혼동하여 섞었다. 한편 그렇게  다양한 변천으로 새로운 철학적 체계을 풍부한 형상으로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영지주의의 형태들은 같은 시대에 이란의 영향을 폭로하는 이원론적 경향과 함께 그리고 천상세계 위에 그 특별함으로써 유대적인 묵시문학이었던 이단의 기본적인 요람인 듯 하다.

 

영지주의는 신화의 혼란스러운 다양성을 혼합하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심한 확산은 깊은 이원론의 원리로서 특별함을 드러내면서 대중적인 종교적 광대한 문학작품들(, 복음, 외경, 외경적 묵시록)을 생산하였다.

 

◆선한 하느님과 세상의 창조자 악한 조물주

 

◆선한 영()과 나쁜 물질

 

◆구세주 예수와 천상의 존재(그리스도)

 

이같은 종교는 계시를 통해서 형성된다. 이 지혜(gnosi)는 구원을 보증한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를 극복하며 그렇게 많이 확장되었다. 다른편에서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와 비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가 함께 성행하였다. 1946년 낙-함마디(북 에집트)에 있는 파코미아노 고대 수ㅗ원에서 한 도서관의 잔재들이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모두 무수히 많은 페이지로 된 48개의 영지주의 저술이 발견되었고, 그 곳이 진행중이었던 영지주의의 수많은 인식들을 관계자들에게 제공하였다.

 

리옹의 성 이레네오는 영지주의와 계시의 같은 이념을 끌어내었던 신비들의 상점의 결정적인 반대자였다.

 

2.3. 리옹의 이레네오 (140-202년경)

 

1) 생애에 대한 고대 출처

 

이레네오의 전기는 출처가 적고불분명하지만 체사레의 에우세비오의 교회의 역사에서 전래된 자신의 증거로부터 유래된다.

 

2) 생애 (함신부님 강의록 201)

 

이레네오는 모든 가능성으로 봐서 스미르네에서 135-140년경에 태어낳다. 그곳에서 그는 아직 늙은 뽈리까르뽀와 다른 몇 장로의 학교에 소년이었다. 즉 그들은 사도들의 제자들로 있었다는 자들의 학교였다.

 

3) 작품

 

a) De detectione et eversione falso cognominatae agnitionis(거짓 영지[이단]에 대한 고발과 반박):Adversus haereses

 

 (1) Detectio falsae agnitionis (고발:1)

 

 (2) Evesio falso cognitionis (반박:2-5)

 

b) Demonstratio apostolicae praedicationis (사도적 설교의 증명)

 

4) 신학사상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교의적 용어들을 첫 번째로 표현한자로서 첫 번째 진장한 신학자 그리고 가톨릭 신학의 창립자의 공헌을 세웠다.

 

(1) 신앙의 규범

 

이레네오에게 신앙의 규범은 진리에 대한 불변할 수 없는 법(canon)으로서 교회의 살아있는 신비이며 성령의 생동감있는 행동을 통해서 영원한 젊음과 변화없이 보존하는 교도권이다.

 

●성경의 정확한 해석, 동일한 신앙의 원천,진리에 대한 안정된 규범을 요청하는데, 그것은 제례 안에서 받는 신경(symbolum)으로 대표된다.

 

다른 표현으로 신앙의 규범은 교회에서 현실적으로 살아있는 교도권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연구는 어렵고도 힘들다. 로마의 교회의 가르침과 최고성, 고대성은 우선권적 사도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단의 두 대표들로부터 주요한 기원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함께 모든 교회는 동의해야 한다.

 

이러한 주제로 이레네오는 영지주의의 기초된 허구로부터 고발한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가 진리를 소유할 수 없는 이유는사도적 기원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밖에 진리와 구원은 특권과 소수들의 독점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사도들의 계승자들의 설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잇다. , 어머니 교회들과 함께 일치로 주교들의 사도적 계승의 설교를 통해서 말한다.

 

(2) 하느님과 삼위일체

 

영지주의에 반박하면서 하느님의 일치성을 강조하면서 선하며 거룩하고 조화와 아름다움을 위한 세상의 창조자이다. 한편 무질서는 죄악으로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순성과 일치성은 이레네오가 전혀 사용하지 않은 용어 삼위일체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의 정체성에 대해 참과 유일한 세상의 창조자, 말씀의 아버지를 역설하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참 하느님이며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셨다.

 

(3) 그리스도와 구원

 

그리스도론은 이레네오의 모든 신학의 중심 핵에 있다. 그의 마음은 수렴, 요약, 종합(recapitulatio) 가르침이다. 사상은 사도 바오로 (에페 1, 10)로부터 연결되지만, 이레네오는 그것들 륵히 현격한 발전을 주고 있다. 그 안에서 한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는다: 자유롭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내적 인간성의 파괴를 야기하면서 그의 머리는 자유롭게 죄를 짓는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내적 인간을 요약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새로운 아담이다. 그는 이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이지만,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동정 탄생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해있는 생명의 어떤 상황 안에서 모든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인간적 시기(인간생애의 한 시기, 시험, 고통들)를 모두 걸어오기를 원하셨다. 이레네오에게는 특수한 어법을 상통(communicatio idiomatum)하게하는 충분한 사용으로 설명하는 본질의 이중성과 인격적 단일성의 최고로 명백한 신학사상을 말하고있다.

 

이레네오에게, 궁극저인 분석에 있어서 수렴, 요약, 종합(recapitulatio)은 근원(발생)의 총체성에 대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재생이다. 다른말로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신 당신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재구성하고 회복하며, 갱신하기 위해서 당신 구원의 초기 계획을 되돌리기를 원하신다. 이 모든 감탄할 만한 구원의 계획은 계시자(rivelator)-구원자(redemptor)-신화자(deificator)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되었고 이레네오에 의해서 구원경륜(Economia)이라는 용어로 불려진다.●●●●

 

(4) 마리아론

 

이레네오는 새아담- 그리스도와 같이 새하와 마리아의 도식을 말한다. 불순명 화와와 달리 하느님께 순명하는 새화와 마리아는 하와의 변호자가되며 인간의 심중을 정의내리는 인간성의 새로운 어머니이다.

 

마리아의 신적인 어머니성에 대해 변호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어머니의 신학적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레네오는 이 특권과 그리스도의 파견 사이를 서로 조화하면서 잘 이해하였다. 또한 이레네오는 유스티노와 같이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탄생에 관해서 그는 하느님 안에서 인간들을 갱생시키는 맑은 내심을 창하함과 함께 열어놓는 순순한 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5) 성령과 영적 생명 (그리스도화, cristificatio)

 

인간은 성령을 통해서 강생하시고 -십자가상에 죽으시고-부활하신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달성하는 충만과 성장을 향해 걸어가고 완벽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적 충만과 성실성에 대한 본질적이며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이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 없이 산다는 것은 시대착오이며 자기파괴이다.

 

인간의 그리스도화 작업은 영()에 의해 맡겨진다. 왜냐하면 혼자는 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옹기장이의 손 안에 진흙과 같이 생명을 주도록 둬야한다. 만약 이 행동을 수락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걸작이 될 것이다.

 

어린이에게도 베풀수 있는 세례성사 안에서 영()의 첫째 유출로 시작되고, 부활의 담보와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인 성체성사의 힘에의해 지탱되는 거룩함에 대한 학파는 천국낙원 안에서만 완전함이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성령에 대한 순종으로 버려지고, 그의 영감의 추진력을 관대함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2.4. 히뽈리또

 

1) 히뽀리또에 대한 비판적 질문 (앞으로 연구 대상)

 

성이레네오의 제자지만, 출생이 불확실하다. 그는 로마에서 살면서 성부수난설 경향의 사베리우스지지자들과 노에투스 지지자들과 싸웠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말씀(로고스)에 대해서는 종속론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속죄 제도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입장을 위하였다.칼리스토 교황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교황 사후에 교회와 화해하고 축복된 삶과 활동으로 존경받다가 235년 순교하였다.

 

2) 로마의 히뽈리또의 작품과 신학 사상 (함신부님 강의록 304-326쪽 참고)

 

(1) 작품

 

  Philosophoumena seu omnium haeresium refutatio

 

  Demonstratio de Christo et Antichristo

 

  Contra haeresin Noeti

 

  Demonstratio adversus Judaeos

 

  주석서-다니엘서 주석,  아가서 주석

 

  강론-파스카에 대해, 유대인을 향해서

 

  연대기

 

  사도전승

 

(2) 신학 사상

 

 ) 그리스도론 : 종속론의 부패되고 약점있는 그리스도론

 

 ) 구원론: 속죄 - 구원에 대한 히뽈리또의 신학이론은 직접적으로 이레네오의 신학사상에 의존대어 있다. 그리스도안에서 수렴, 요약과 인간의 신화(神化).

 

 ) 교회론 : 제도에 관해서, 그는 이레네오의 것을 말한고 있다. 사도적 계승이 교회의 가르침의 진리를  보증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약혼자요 신부(新婦)이다. 그러나 히뽈리또는 교회를 어머니라고 전혀 부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영성적인 관점에서 교회는 그에 따르면  정의 안에서 살아가는 성인들의 사회라고 한다(다니엘서 주석 1 17) 그는 죄인들을 배제시키지 않지만 배교자들은 다르다고 한다. 사실상 그는 사기꾼 칼리스토 교황에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용서하였기 때문이다. 히뽈리또는 전형적인 엄격주의자인 듯 하다.

 

 ) 회 심 : 감동적인 말들로 히뽈리또는 적법 교황을 모든이에게, 또 보다 큰 죄인들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하는 것을 고발한다. 히뽈리또는 그에게 그의 의로움과 불화의 비유를 주장하는 것을 책망하였다. 그러나 교황 칼리스토의 잘못된 방임주위를 대항해서 극단적인 폭력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교회가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알았다.

 

3) 결론: 모든 이단들를 향해 싸우기 위해서 히뽀리또는 이레네오의 제자로서 스스로 소개된다. 그러나 스승에 대해서 그는 균형과 종합 정신을 지니지 못하였다. 히뽈리또를 통해서 유스티노에 의해 이미 밝게 놓여졌고 같은 성경에 의해 개시된 유형학(typology)이 그의 결정적인 증진을 나타냈다. 구약성서는 그리스도교의 성서이다. 그리고 이런의미에서 성서는 공동체에서 설명되었다. 구약과 신약성서의 현실은 서로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히뽀리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그 시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지속적인 걱정거리는 세상 종말의 시기였다. 몬타니즘 신봉자들은 빠라클리또의 절박한 도래를 선포하면서 조심스럽게 영()들을 드러내었다. 혹시 그것이 가까이 왔는지라는 공포가 모두를 지배하였다. 어디에 그 시간이 있으며 그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도로 이 도래와 사랑과 의망으로 기다림을 서두르느가?... 사도바오로와 묵시록의 마라나타는 디다케에서부터 취했다.

 

우리가 큰 가치있는 전례적인 원천을 사도 전승 안에서 보존하였다면 우리는 히뽈리또의 전통주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비교가실려있는데; 해박한 사제 히뽈리또는 로마에서 작성하였고, 라틴어로 카르타고에서 저술한 해박한 아프리카 웅변가와  가까웠다. 그는 천재 테르툴리아노인데, 그의 신학 사상은 힘이있었다. 그대신 히뽀리또는 그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통렬한 힘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의 박식은 표면적이며 좋지않게 비교되었다.

 

2.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신학 징조들의 출현)

 

1) 생애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분명하게 아테네에서 2세기 중엽 이교도의 양친에게서 태어났으며 이교도의 규율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그는 리옹의 이레네오와 테르뚤리아노와 동시대 사람이다. 그의 학문적 갈망은 희랍 및 에집트 학문에 만족하지 않고 매우 일찍이 그리스도교에로 귀의 하였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많은 여행을 했다(이탈리아 - 시리아 - 팔레스티나).

 

판테우스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인도로 갔으 때 클레멘스는 데메트리우수에 의해서 사제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189년에 알렉산드리아의 학파 대표가 된다. 그의 직위로소 그는 교회 학문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세웠는데 그의 문하에서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전파하는 데 모든 힘을 다 바쳤으며, 202년 셉티우스세베루스의 박해를 피해 카파도치아의 플라비아데스 지역의 자기 제자면서 감독인 알렉산더에게 갔다가 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다. 215년 경 사망하였는데 어디서 사망하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2) 작품

 

(1) Protrepticus, Exhoratio pro graecis

 

(2) Paedagogus

 

(3)            (stromata)

 

소작품

 

(4) Excertpta ex Theodoto, Eclogae propheticae

 

(5) Quis dives Salvabitur?

 

(6) 다른 작품들 안에서 볼 수 있는 클레멘스의 잃어버린 작품의 단편과 인용문들(에우세비오...) 

 

3) 사상 (영지주의와의 대화 형식)

 

(1) 그리스 그리스도교 사상

 

클레멘스가 신학에 있어서 특별함을 소개하는 자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는 그의 철학적 환경과, 그의 마음으로서 정신에 달려있는데, 그의 철학적 환경과 그의 정신은 플라톤적 열정에 의해서 끌려있었다. 클레멘스 안에서 희랍적 그리스도교 사상의 필연적인 동화와 함께 헬레니즘과 크리스챤니즘이 서로 만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인식의 이론에 대한 기능으로 고려되었다. 말씀(로고스)는 계시자 스승이다. 철학에서 그렇듯이  말씀은 신적 기원에 대한 것이다. 말씀은 오직 예비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증명이다.  더우기 과학은 최상인 신앙에로 운반한다. 지혜(인간적)의 여정은 진리의 여정을 향한 직접적인 통행로를 여는 다양한 방법들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윤리적 신비적 염려들은 역시 이성적인 연구에로 들어간다.

 

그리스도교는

 

성령에 의해 생기를 주고

 

아들에의해 재생된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도록 배워야 한다.

 

(2) 완벽한 영지

 

영지주의 이단에 맞서서, 클레멘스는 인식과 진리의 소유인 진실한 그리스도교 영지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에게 이것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본질에 대한 것이다. 때때로 철학자체는 최상의 과학이며 생명의 지혜이다.

 

클레멘스는 하여간 영지는 기초로서 매우 고귀한 윤리적 영성적 상태를 추측히는 매우 신비적인 인식이라고 한다.

 

마치 클레멘스는 -마치 이레네오에 의해 논쟁되었던 영지와 같이- 비밀스러운 전승에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입문자와 완벽한자들의 귀족정치를 위해 ’신비’라는 그의 어휘를 채운다. 그 입문자들과 완벽한자들에게 신뢰될 비밀, 즉 신적 신비들의 인식의 극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입문자들의 계급 안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은 관상과 기도이다. 클레멘스의 신비주의는 표면적이며,  본체적이지 않는 단계의 한가지 차이성임을 추측한다.  따라서 그것은 신적인 법이 아니라 인간적 사건에 일치한다. 어째거나 남는 것은 클레멘스의 사상이 희랍적 지성주의 (인간과 지식인) 위에 기초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적 상태는 내적  관상이다.  항상 하느님께 제공하는 존재이다.

 

(3) 비유적 방법론

 

클레멘스의 시대에 이 비유적 방법론은 호메로를 설명하기 위해 이용했던 스토아학파들과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의 영향 하에서 성서에 적용했던 유대인들과 일치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상적이었다.

 

2. 6. 오리게네스

 

1. 원전

 

 판필로의 호교론 1(판필로는 체사레 교회의 사제, 오리게네스의 도서책임자, 디오클레 지아누스 치하의 307년 순교함)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6

 

 제자 타우마투르고의 그레고리오의 감사 담화

 

2. 생애

 

1) 유년기. 교육: 오리게네스는 에집트 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185년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리게네스라는 이름은 ’호루스(Horus)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며 이 이름은 특별하게 에집트식으로 불려진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그의 양친으로부터 부드러운 사랑으로 그리스도교 가정 교육과 성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이 순교한 후 어느 부유한 늙은 귀부인 마트로네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어 판테우스와 클레멘스에게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2)청년이후 생애: 18세때 일반학문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였다. (함신부님 강의록 232-235쪽 참조.

 

3)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봉사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30살부터 45살까지 (215-230)스승이었다.

 

그는 그의 한 제자 헤라클라에게 교리교수를 위탁하였다. 한편 그는 신성한 과학의 예비로서 여기던 세속 문화에 대한 가르침을 보존하면서 학문 연구들 (디다스칼라이온)을 위해 하나의 학파를 세웠다:성서학. 문화에 신중한 전수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 이교도인, 이단들 모두가 허용되었다.

 

타우마투르고의 그레고리오 증언에 의하면,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어를 배우로 성서의 모든 흐름의 해석를 하며 텍스트의 엄격한 비판를 가하며, 학문적으로, 종교적으로 성서를 주석하였다.

 

4) 알레산드리아 밖의 선교들

 

오리게네스는 모든 부분에 의해서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으이 주교 데미트리우스에 의해 파견받아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대해 가르치고 토론하기 위해 여행을 많이 하였다.

 

 아라비아의 통치자 앞에서

 

 체사레아 팔레스티나에서  주교들의 요청에 관해 함께 모임을 갖고, 교회 안에서, 모임에  대해 성서를 설명하였다.

 

 안티오카 맘매아 앞에서 알렉산드로 세베루스 황제의 어머니 앞에서

 

5) 체사레 교회에서 봉사

 

오리게네스는 체사레에서 교회를 팔레스틴적 도시라는 교회의 지성적 생명의 새로운 중심으로 시작하였다. 23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게네스를 반대하는 싸움이 돌연 발생하였다.

 

싸움발생원인: 체사레의 주교들과 예루살렘의 주교들은 그를 사제로 서품하였다. 한편 그의 주교 데메트리우스는 먼저 이미 오리게네스를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고 단순히 평신도가 설교하는 것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오리게네스에 대한 서품 소식은 그것이 규정위반으로 판단하면서 더욱더 불만을 드러내었다.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의 대담함과 작품들의 풍부함 그리고 그들의 영향은 모두 불안정하게 두었다. 너무 영성적 단계에 머물면서 오리게네스는 제도에 반대하였다. 그의 보편적 명성은 질투를 만들었던 것이다.

 

데미트리우스는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오리게네스가 그의 사제직이 잃었다고 선언된 것을 질문하였다. 그는 일치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가르치는 것이 박탁당했고, 유배에 보내졌다.

 

에집드 주교들이 조금 참석한 두 번째 공의회는 그에게 파면을 선포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큰 기쁨으로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3. 작품

 

1) 성서 비판본

 

2) 성서 주석 작품

 

3) 호교 작품

 

4) 교의 작품

 

4. 오리게네스주의와 오리게네스 휴유증

 

6차 공의회 (2번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553) 11째 법령을 읽어보자.

 

" 사도로부터 이어오고, 4가지 거룩한 공의회로부터 파문되고 단죄된 아리우스, 에우노미우스, 마체도미우스, 아폴리나레, 네스토리우스, 에우티게, 오리게네스를 그들의 작품들과 모든 다른 단죄된 이단들 작품을 단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그들의 불경건 안에 죽음에 멈춰 남아있고, 위에 기억되는 이단들의 것과 비슷한 의견을 허락하고 도는 허락하였다는 자들로 모두 파문시킨다."

 

가톨릭 신학 사전은 다음을 분명하게 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단이 아니다. 그는 이단적 정신으로 단죄된 거짓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았다. 즉 현실적으로 이단정신이 그의 가르침에 가정로서 그의 작품에 있고 발견되 믿어지는 것에 동조하지 않는다.

 

5. 오리게네스 신학

 

오리게네스는 바실리데, 발렌티노, 마르치온,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를 대항하며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성서와 이성의 빛으로 세상의 지식과 철학을 유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의 심오함을 기초적으로 지향하였다. 그으이 신학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신학이 연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의 신학은 충만한 긴장과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어떤 고립된 부분을 절대화할 필요가 없다. 그대신 작품에 대해서 함께 넓은 시야를 제공하고 있다. 그외에 오리게네스는 동시에 성서 주석가이며, 특별한 신학자이며 영성가이다.

 

1) 성서 주석가

 

성서는 오리게네스의 관심의 중심이다. 성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인 생명을 살고, 신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한기초이다.

 

그의 해석의 열쇠는 그리스도이다. 사실 구약은 예언이며, 신약은 실현화이다. 신적 말씀으로서 성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로고스를 계시하며, 영원한 강생이다. 오리게네스는 신약에 대해 구약을 반대하던 마르치온니즘과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극복하고 있다.

 

인간 - , 영혼, 정신

 

관점- 자의적, 윤리적, 영성적

 

규범-초기, 진보, 완성

 

가치-준비,실천, 참 신비적

 

2) 신학자

 

(1)인간학

 

) 인간의 존재론적-역동적 구조

 

) Antropologia tricotomica

 

 pne ma (spirit. ): 마음 안에 현존하는 신적인 요소이며, 덕과 신적 인식 그리고 기도에 관해 인간이 아끼지 않는 것으로서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또한 프네우마는 성령에 대한 창조된 참여와 같은 것이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ruah와 같은 특별한 모양이다. 프네우마는 그 자체 내에 악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서 죄인들에 대한 책임성을 취하지 않지만 죄인들은 프네우마를 느슨한 상황에 놓고 있으며, 마음 위에 프네우마를 감동받게하기를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프네우마는 항상 인간 안에 남아 있으며 역시 죄인 안에도 있다(그것은 회심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psych  (anima. 마음, ): 자유로운 지향과 선택의 능력의 자리이다. 프시케는 결국 인간의 인격성을 세우고 있다. 만일 프시케가 선에로 그것을 끄는 프네우마에게 복종한다면 프시케는 영성화된다. 그러나 악에로 끄는 육에로 기울어진다면 육체의 것이 된다.

 

 s ma (corpus. ): 프시케의 갈아입기이며, 창조물화의 표징이다. 그리고 존재를 위한 무형의 세가지 신적 인격들의 본체성에 비교해 창조된 존재들의 우연성을 표현하고 있다.

 

) imago Dei

 

 현실로 협의의 의미로 하느님의 모상은 오직 말씀 - 로고스이다. 인간은 모상의 모상 또는 두 번째 모상인데 인간은 loghik s가 되면서 로고스에 의해 이 모상을 수락하고 참여하고 있다. 인간은 하여간 자체 안에 하느님과 함께 이 동종 본질성을을 지닌다. 그래서 인간은 유사함을 인식하는 유사함이라는 원리에 기초하여 모상을 인식할 수 있으며, 완벽한 닮음에 까지 시초의 신화(神化)에 의해 항상 더욱 앞장설 수 있다. (창세 1, 26 - 27) 이 모상은 퇴색될 수 없으며, 죄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

 

) 창조, 타락, 타락 이후,

 

) 종말론과 복고

 

(2) 신적 인격들

 

) 아버지: 신성의 원천 충만이며 영원한 세대 안의 아들과 성령에게 자신의 신적 생명을 통교한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초월과 비가시적, 무형하며 모든 완벽함의 원천이며 내적 외적 삼위일체적 행동성이다

 

)아들: 하느님이며 동시에 인간이다.

 

 하느님으로서 아들: 신성과 창조물 사이의 탁월함에 대한 계시자이며 중재자이다. 모두가 그 분 안에서 그 분을 통해서 창조되었다.

 

 인간으로서 아들: 선재하고 있는 지성적인 것들이 창조되었을 때 로고스는 아직 그의 강생 전에 인간본질에 일치된다.

 

) 성령: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온다. 세 번째 신적 위격으로서 다른 두 개의 모든 완벽함들을 소유한다. 성령은 예언자들의 성성자(聖性子)와 감도자이며, 카리스마들을 주시는데  왜냐면 선물들의 모든 본질이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적 구원 경륜 안에서 아버지는 모든 존재물에 존재를 선물하고 창조하는 분이다. 아들은옳음을 갖춘 모든 창조물에 대해 이성화의 원리이다. 성령은 그의 행동으로 거룩함을 주고 있다. 삼위일체는 하여간 완벽한 일치와 목적들의 일치로 움직인다.

 

(3) 마리아론

 

오리게네스는 가현설자들에 대항하여 분명히 마리아에 의해 예수님은 육을 취했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예수는 참으로 인간이다. 더 나가서 그분은 동정모양으로 잉태되었고, 그러한 기적은 그의 신성을 증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간성 사이의 참 일치(여기서 신인속성 일치가 유래된다) 때문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사실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

 

(4) 교회론

 

오리게네스에 의해 교회는 로고스의 현존에 의해 생명력있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믿는자들의 백성으로 여겨졌다. 세상에 현존하는 교회는 장식, k smos 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방인의 땅에서와 같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5) 성사들

 

)세레성사

 

)성체성혈성사

 

)회심(보속)

 

)결혼: 동정성에 대한 것에 협의적으로 일치하는 결혼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교의는 그의 위대한 신비신학의 주제들 중의 하나에 의해 우위를 차지한다. 즉 교회와 마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혼인들. 결혼은 유일하고 불가해소송이며,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허락되지 않는다.

 

3). 영성적이며 수덕생활의 스승: 오리게네스의 영성 사상 (함신부님 강의록 257-261쪽 참조)

 

(1) 교의와 영성적 주제들

 

영적 결혼, 사랑의 화살과 상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탄생과 성장, 산위로 오름, 다섯가지 영적감성들, 다른 영성적 주제들

 

(2)수덕적 가르침들

 

순교,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과 독신

 

(3)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여행

 

2. 7. 테르툴리아노

 

1. 테르툴리아노의 인격적 변화

 

1) 생애 (함신부님 강의록 350-352 참조)

 

테르툴리아노는 155년경 카르타고에서 이방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서 식민지화된 아프리카 니방의 주요 도시였다. 테르툴리아노의 아버지는 백인대장 즉 공식적인 하급장교 였다.

 

일반적으로 알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테르툴리아노는 로마에서 변호사업을 훈련받았다.

 

테르툴리아노의 개종은 (결과적으로, 그의 세례) 193년 즈음에서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38세 순간부터 그는 계속 카르타고에 머물었다.

 

그가 결혼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지로라모에 의하면 그는 사제였는가?하는 질문에 오늘날에는 의심하고 있다.

 

2) 아프리카 그리스도교의 특성

 

 아프리카 그리스도교의 기원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에게 영향을 준 아프리카 그리스도교회의 신학과 미음에 대한 공헌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 그리스도교회(테르뚤리아노, 치프리아노, 아르노비오, 락탄시오, 아오스딩)는 라틴 교회의 모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것은 서방 그리스도교의 뿌리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아프리카 그리스도교에 복음이 소개된 것은 또한 로마를 통해서였기에 사실 아프리카 교회는 로마 교회와 항상 연관을 가지면서 신학과 전례 등 여러 가지 규정과 문제에 대해 로마 교회를 기준으로 삼은 것 또한 주목할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아프리카 교회가 부정적인 의미로 로마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니시어티브가 있느냐는 물음이 나오게 된다.

 

또한 아프리카 교회는 로마 교회보다 오히려 더 먼저 전례상 라틴어를 사용했으리라 추정한다.

 

아프리카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로마 교회의 특성과 일맥상통하게 연결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복음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강조하여 신앙을 모든 것의 길잡이로 이해하여 철학과의 조화를 꾀하며 여러 가지 인간적 체계를 극복하고 시도하고 있는 클레멘스난 오리게네스를 볼 수 았으나, 반면에 테르뚤리아노와 치쁘리아노는 구체적 생활 즉 그리스도인과 이교인을 구별짓는 그 근본 생활양식을 강조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구원의 객관적 의미를 강조하고 ’로고스’ 위에 모든 신학과 이론을 전개시킨다. 그러나 아프리카 학파는 구원의 주관적 의미를 강조하여 각 개인의 구체적인 삶 그리고 구체적 행동과 실천, 다시말해서 죄를 거슬러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동-서방 신학의 특징적 차이이며 구분이기도 한 것이다.

 

3)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테르뚤리아노와 그의 중요성

 

테르뚤리아노는 이방적인 신앙과 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 그리스도인의 순진한 삶과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당당함에 이끌리어 30세 나이를 지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많은 저술을 하여 이교도, 유대인, 그리고 이단자들을 아프리카적 냉혹함으로 싸움으로써 그의 정신적 재산과 지식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였다. 202-205년 경에는 그는 타고난 엄격주의에 매력을 지닌 몬타니즘으로 넘어가 엄격한 몬타니스트 다시말해 테르뚤란파를 만들었다. 이는 5세기까지 유지되었고, 배교자와 맞먹는 완고함으로 가톨릭 교회와 싸웠다. 220(또는240) 그가 죽기 전 교회에로 돌아왔는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테르뚤리아노는 초기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시조로 평가받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그는 신학 분야에 있어서 라틴어 단어를 정착시킨 결정적인 공로자이다. 그는 명실공히 최초의 라틴 교부이며, 그에게서 아프리카 그리스도교회와 로마 교회의 신학사상이 피어난다.

 

4)작 품

 

5) 신학사상

 

(1) 신학 그리고 철학과 법과의 관계

 

첫 라틴 작가 테르뚤리아노는 위대한 사상가이며 천재였다. 그는 서양 신학적 사상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가 서양 신학의 창시자로 불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일관성있는 어떤 체계를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 균형의 부족함이 가치를 줄이고 있다. 그는 철학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다. 불의로 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 역시 현실적으로 철학이 이방사상에 오염되었고 영지주의를 도왔다고 말해야한다. 테르뚤리아노는 성서와 신앙규범의 권위를 요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고대 철학은 이단들의 족장들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철학자들이 몇번이고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였지만,

 

  ≪우리 신앙과 함께 우리는 다른 믿음들을 원하지 않는다≫

 

법적인 주제들은 법률가 테르뚤리아노의 모든 생산물들을 꾸몄다. 그는 신학자체에서 법에 이르기 까지 최고의 자리를 조화시킨다. ’하느님은 법의 저술가이며 재판관이다.  테르둘리아노의 용어학은 항상 라티 신학에 표할 것이다. 자주 쓰던 신학 용어는 ’채무, 공적, 보상, 배상(satisfactio)’ 등이다. 그는 충고와 규칙 사이 조차도 구분하고 있다.

 

(2)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테르뚤리아노의 몇가지 신학 형대들은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하다. 삼위일체론은 오직 신성에 관한 것 (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본체이며, 성령은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로부터 기인한다. 테르뚤리아노는 위격(persona)의 말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다. 말씀은 본체가 아니라 위격의 의미에서 그리고 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별을 위해서 아버지와 식별되는 다른 것이다. 성령은 세 째 위격이다.

 

오리게네스와 같이 테르뚤리아노는 종속론의 경향에 처해었다. 즉 예수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다.

 

이상의 종속론적 경향을 인정하면서도 테르뚤리아노는 신학적 어휘가 아직 정확성을 지니지 못했으며, 그것은 신학 사상의 최후 노작에서 테르뚤리아노 자신의 접근에 의해서 가능성을 제공했을 것이라는 중요한 인정을 해야할 것이다.

 

테르뚤리아노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위격 안에서 두 본체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다시 취한 정식(오직 한 위격 안에 두 본체들)이 될 것이다.

 

 (3) 마리아론

 

그는 예수의 동정 잉태를 말한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태어났다.’ 또한 마리아는 출산에서 그리고 그 후에도 여인이라고 분명히한다. (..et si virgo concepit in partu suo nupsit. De carne Christi, 23, 3; 만일 그녀가 동정녀로 잉태하였다면, 출산에서는 결혼한 것이다.).

 

육으로는 예수의 형제들이 역시 그녀의 형제들이다. 이 것은 교회의 입장이 아니라, 조금 지나서 성 지로라모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방어할 것이며 분개하게 될 것이다. (나는 떼르뚤리아노에 대해서 말할 다른 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만약에 그가 교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니라면... Adversus Helvidium, 17).

 

외경에서 초세기부터 증명된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은 성 이레네오의 논문과 같이 보존되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 역시 "마리아는 동정녀이면서 잉태하였고 출산하였다."라고 말할 것이다.

 

(4) 교회론

 

사도교회는 신앙의 은신처, 화탁(花托)이다. 교회는 계시를 수호한다. 떼르뚤리아노는 어머니의 이름을 교회에 준 최초의 사람이다. (Domina Mater Ecclesia)역시 몬타니스트에 의해 그는 교회 안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어머니(새 하와)를 본다.

 

(5) 성체성사와 뉘우침

 

성체성사의 희생적 특성이 강조되었다. 희생(sacrificio)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대에 가까이 간다. 영성체(comunio)는 마음을 위한 양분이다.

 

떼르뚤리아노는 두 번 성체성사의 유지를 언급하고 있다. 축성된 조각들이 분배되어진다. 왜냐하면 모든이가 개별적으로 자신에 의해 통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뉘우침에 대해서는 그의 두 작품 (De paenitentia,  De pudicitia)을 통해서 발전된다. 대사와 신앙에 의해서 교회에 다시 처해진 열쇠들의 능력 안에서 떼르뚤리아노는 극단적 엄격주의로 그리고 제도 교회 편에서 사죄권에 대한 단호한 거부에로 가고 있다.

 

(6) 종말론

 

떼르뚤리아노는 죽음 후에 속죄자, 고통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연옥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고). 오직 순교자들만이 공제된다. 산자들은 죽은자에게 고통의 완화, 위로를 준비할 수 있다(refrigerium). 이레네오와 같이 떼르뚤리아노 역시 천년왕국설 주창자이다.

 

2. 8. 카르타고의 치쁘리아노

 

1. 생애

 

이방인 치쁘리아노: 치쁘리아노는 아프리카 거의 확실하게 카르타고에서  200/210 년경에 태어났다. 207년에 떼르뚤리아노가 몬타니즘으로 기울어졌을 때이다. 치쁘리아노의 가정은 부유했고 교육받은 집안이다.

 

체칠리아노 치쁘리아노 타쉬오, 사제

 

사제 체칠리오의 영향 하에서 245년에 개종하였다.

 

주교 선출 (248-249)

 

테치오 황제의 박해와 14개월 유배

 

카르타고에 치쁘리아노의 귀환: 251년 봄 부활절에 돌아옴

 

흑사병이 광분할 때와 갈루스 황제 때 실제로 용기와 신뢰를 심어주었으며, 노바투스와 펠리치티무스의 분열 사건으로 인해 몇 개의 공의회를 열었으며,  교황 고르넬리오의 유배와 죽음(+253)이 있은 후 치쁘리아누스는 이단자의 세례문제로 교황 스테파노와 격렬히 싸웠으나 분열까지는 가지 않았다.

 

두 번째 유배와 카르타고에서의 순교: 스테파누스 교황의 죽음은 분쟁의 종말을 의미한다. 발레리아누스 황제 박해 하에서 스테파누스 교황은 257 8 2일 신앙을 위해 죽었고, 치쁘리아누스는 같은 해 8 30일에 케루비스로 두 번째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일년 후에는 셉티로 끌려가서 참수 되었다.(258 9 14)

 

2. 작품 (함신부님 강의록, 이형우 옮김 치쁘리아누스 참고)

 

Epistola ad Donatum

 

De idolorum vanitate, 15ch.

 

Testimoniarum adversus Iudaeos libri tres

 

Ad Demetrianum, 25ch.

 

De habitu virginum, 24ch.

 

De unitate ecclesiae, 27ch.

 

De mortalitate, 26ch.

 

De exhortatione martyrii, 13ch.

 

De lapsis, 36ch.

 

De oratione

 

De opere et eleemosynis, De bono patientiae, De zelo et livore

 

3. 그 시대에 몇가지 알려진 문제에 대한 치쁘리아노의 입장: 배교자들의 속죄와 화해, 이단자들 대한 세례

 

1) 배교자들의 속죄와 화해

 

고르넬리우스 교황이 251년 교황직에 올라있는 데 노바티아누스에게서 반립 교황으로 슬픔을 겪으면서도 대부분 노바치안과 그 편당들이 분열 책동을 하며 교회의 통일성으로 돌아온 배교자들이 문제가 되었다. 한편 치쁘리아노가 251년에 유배에서 돌아왔을 때, 역시 배교자들에 대한 매우 민감한 문제와 질문들을 해결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배교자들(De lapsis)에 관한 입장을 저술하였다. 그것은 그가 251 5월에 소집한 시노드에서 토론에 기초하여 임무를 완수해야한다는 사목적 서한의 종류였다.

 

배교자들의 질문에 대한 규정

 

"취해졌던 결정들에 따르면, 결국 가능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박해가 시작되면 사실 우리 주교들은 소집된다. 우리 주교들은 많은 수가 모였다. 우리의 신앙과 주님의 보호가 우리를 구원하였고 지켜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중용의 길을 결정하였다. 즉 우리는 배교자들에게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기 위해 지혜로운 규정, 그리고 일치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희망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리고 희망의 가능성이 비록 없으면서도 베교자 대부분은 페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배교자들은 보속을 오래하고, 고통을 통해서 부성적 관대함을 보도록 결정하었다. 우리는 네게 닥친 것을 생각하는 작품(De lapsis)의 지시에 따라 우연한 기회에 마음들과 특별한 필요들을 검토할 것이다." ( 서간 54, 6)

 

2) 이단자들에 대한 세례

 

교황 스테파누스와의 싸움은 이단자들의 세례에 대한 유효성에 대한 것이다. 고르넬리우스 교황의 후계자는 루치우스인데  루치우스 교황은 매우 짧은 기간(253-254) 동안 교황직에 있었으며, 254 5 12일 교황 스테파노가 선출된다. 255년경 어떤 신도 마뇨가 치쁘리아누스에게 제의하기를 노바찌아니즘 신봉자들의 분열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에 가톨릭 교회에 되돌아온 사람들은 새롭게 세례를 받아야했을 것이라면, 치쁘리아누스의 스승 떼르뚤리아누스에 의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교회에 돌아온 모든 이단, 모든 분열자들은 새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런데 교황 스테파누스는 이단자들의 세례에 대한 유효성에 대해 인정했다. 치쁘리아누스의 서간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치쁘리아누스가 교황을 반대하지만, 그것은 교황의 베드로좌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그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4) 신학 사상

 

(1) 교회론

 

치쁘리아누스가 251년 유배 마지막 시기에 가톨릭 교회의 일치에 대해 썼다. 그는 어머니 정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음을 잘 요약하고 있다. 교회론에 대한 치쁘리아누스의 긍정적인 공헌은 확실히 중요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언어로 말하려면서 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치쁘리아누스 성인이 주교단(collegialit  episcopale)에 대한 학자라는 점이다. 성서에 항상 기초되있는 그의 사상은 모두 사목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교회는 하나이고, 주교들의 일치가 이러한 일치성을 보증하고 있다고 한다.

 

노바지아누스의 분열이 돌연이 발생했을 때, 치쁘리아누스는 안또니오라는 한 주교에게 노바지아누스와 통교하지말고 치쁘리아누스가  주교직으로 우리 동료라고 부르는 적법 교황 고르넬리오와 일치로 남을 것을 독려하기 위해 글을 썼다.

 

로마의 사제들 부제들은 치쁘리아누스 자신에게 이전 공의회에 의해 단죄되고 배신한 주교를 신뢰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기위해 글을 쓴다.

 

(2) 로마의 수위권 (함 신부님 강의록 참고 402 -404)

 

(3) 세례

 

(4) 뉘우침

 

(5) 성체성사

 

3. 교부들의 황금 시대 (325-461)

 

이단들의 발생에 대한 분쟁과 해결하려는 교부들과 교회의 노력과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체사레아 등에서 활력이 넘치는 학문적 노력은 그리스도교 교의와 신학을 발전시켰던 교부들의 문헌의 번성기였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에우세비우스를 통해서 교회사가 정립되었고, 동방 교부들과 서방 교부들의 활약상이 대단하였다.

 

특히 동방 교부들 아타니사우스, 카파도치아 교부(니싸의 그레고리우스)들 그리고 라틴교부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조직적인 설명이 시도되었으며, 크리소스토무스와 예로니무스 성인들을 통해서 보다 광범위한 성서 주석이 이루어졌고, 마카리우스와 이레오파기타의 디오니시우스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신비학이 풍요로와졌다.

 

3.1. 동방(희랍) 교부들

 

1)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고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본질적이며 근본적으로 초기 3세기와 소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요구로 개최된 첫 세계 공의회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졔승된 시대 사이의 차이가 있다.

 

교회사의 아버지로서 유명한 에우세비우스는 그 시대의 교회, 정치적 사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전개하였으며, 그는 역사가 뿐만 아니라 역시 신학자요 주석가이며 오리게네스와 함께 고대 교회가 배출했던 최고의 철학자로 정의했다.

 

(1) 체세레아 : 오리게네스의 유산

 

체사레아에서 아마도 에우세비우스는 260 264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오리게네스는 다시 숨었을 때이고 학교를 만들어 약 20년간 가르쳤다. 거기서 오리게네스는 한가지 대단한 것은, 베리토에서 태어나고 소년 오리게네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삐에리우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판필루스에 의해서 가꾸고 풍부하게 된 도서관을 세운 것이다.

 

2체사레아에서 사제 서품된 판필루스는 오리게네스가 성서본문의 안정성과 사본들의 확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이러한 환경 안에서 전개하면서 시작한 모든 성서에 관한 어원적 연구와 도서관에 관한 작업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였다. 아같은 오리게네스의 유산에 대한 지속성 안에서 판필루스는 소년 에우세비우스를 양성하였다.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감사함이 자신을 판필루스의 에우세비우스로 부르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는 스승에 대해 3권의 생애에 관해 썼으나 지금은 유실 되었다.

 

307 11월 박해가 닥쳐왔고 판필루스는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310년 까지 수감되었다가 2 16일에 처형되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순교자 에우세비우스는 에우세비우스에 의해 도움을 받아 5권의 분량인 오리게네스를 위한 호교론을 집필하였으며 (에우세비우스도 6권을 써서 첨부하였다고 한다), 그 것들에 대해서는 루피노의 라틴어 번역본에서 첫 권이 남아 있다.

 

(2) 에우세비우스의 생애

 

265년경 필레스티나에서 태어났고 체사레아에서 학문을 습득하였고, 스승 판필루스가 순교한 후 티로로 갔다가 후에는 에집트로 가서 한 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박해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까지

 

박해를 맞아 첫 번째는 팔레스틴의 티로에로 그리고 티바이데로 피신을 갔지만, 에집트에서 에우세비우스는 발각되어 감옥에 갇치게 되었다. 그후 즉시그리스도교가 직면해있던 로마 황제의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이미 313년에 에우세비우스는 체사레아의 주교가 되었고, 339년 혹은 340년에 죽기전까지 주교좌를 떠나지 않았다.

 

아리안의 위기 초기부터 에우세비우스는 신학에서 성서 주석까지 보다 다양한 배경들 안에서 그 시대의 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보다 질적으로 단연한 대변자로서 자신의 주교좌 안으로  추방자 아리우스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역할에서 차등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 아리우스는 마치 부당하게 박해받는 망명자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떠나, 마치 오리게네스 처럼 체사레아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총주교좌의 최대권력이 학문적 신학에 대한 자유성와 시민권을 허락하려는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신학적인 쟁점 사안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성을 지녔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사벨리아니즘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두려워하여 아리우스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였으나 황제의 뜻과 니체아 공의회의 신조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에우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는 역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드로의 입장들로부터도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에우세비우스 분쟁 시작부터 니체아 공의회 직전 안티오키아 시노드(325)에서 단죄를 그렇게 당하는 아리우스를 도와주었다. 비록 에우세비우스가 체세레아 공동체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면서 결국 니체아의 정식(定式)에 서명하였지만, 여기서 에우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단죄를 피하고, 아리우스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특별히 응시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가까이에서 새로운 역할이 특별히 안티오키아(327)와 티로(335)의 시노드들과 니체아 공의회의 주교들인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지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 그리고 앙카라의 마르첼로의 증언을 통해서 즉시 니체아 공의회의 연속 관계 안으로 전환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찬미자, 에우세비우스는 자신에 대한 평판과 명성을 지녔고, 그는 왕위에 오른 즉황제 즉위 20- 30주년에 그리고 337 5 22일에 발생한 황제의 죽음후에 행한 공식적인 담화와  자신의 작품들로 황제를 찬양하였다. 그리고 2년 혹은 3년 후에 에우세비우스도 역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역사적 작품: Historia ecclesistica n. 10

 

     Chronicorum libri II

 

     De Vitaa Constatini M., Oratio de laudibus Constatini M.

 

     De martyribus Palaestinae

 

호교론적 작품

 

     Acta passionibus S. Pamphili et sociorum

 

     Praeparatio evangelica n. 15

 

     Demonstratio evangelica n. 20

 

     Eclogae propheticae n. 4

 

     Theophania n.5

 

     Adversus Hieroclem ch. 48

 

교의적 작품

 

     Contra Marcellum libri II

 

     De ecclesiastica theologia lbri, III

 

     De Solemnitate paschali

 

     De Resurrectione, De incorporali anima

 

성서 주석서 Topica

 

     Evangelici canones

 

     Quaestiones ac solutionesevangelicae

 

     크고 작은 단편 - 118개 시편, 이사야, 다니엘, 잠언, 루가복음에 대한 주석서

 

편지:     Ad Caesarienses

 

     Ad Constatiam Augustam

 

(4)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특성

 

에우세비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아리우스와 같은 입장을 취하려는 의지를 겨우 황제와 니체아 공의회의 신조에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느님의 신성과 동일하게 본체를 지닌다고 하였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결코 그 본성이 하느님과 동일하지않고 하느님의 피조물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dia tou giou genomenos)로 선언하는 교의적 작품이 있다.

 

2)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1) 생애

 

(1) 원전

 

아리아니즘에 대항하여 쓴 모든 작품 - 축일 편지, 아타나시우스의 찬양자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찬미(그러나 정확한 역사성은 그리 많이 제공하지 않는다), 루피노, 소크라테, 소조메노 그리고 테오도레토의 교회사들.

 

(2) 유아기와 청년기 교육

 

아타나시우스는 아마도 29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비그리스도교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시대의 고전 전승에 따라 일련의 문학적 양성교육을 받았으며 호메로, 데모스텐, 플라톤을 연구하였고,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4-5세기에 한 것 처럼 개론들을 사용하였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의 Praeparatio evangelica를 읽고 변증론적 이론에 숙달되었다. 다른 교부들 처럼 기본적으로 성서에 영감되었고, 희랍 교부들에게 가까우며 콥틱어를 말한다. 콥틱의 단순한 신심에 동화되고, 수덕생활에 민감했다.

 

(3) 부제에서 주교까지

 

아타나시우스 부제는 비서로서 니체아 공의회 (325)에 알렉산드로 주교와 함께 참석하였다. 그의 교회적 임무의 시작부터 그는 아리아니즘 신봉자들의 반대자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주교 알렉산드리노의 사후 (328 4 17)에 아타나시우스는 주교로 임명되었고 메리지아니즘 신봉자들에 의해서 주교좌를 점령당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급하게 6 8일에 서품되었다. 주교 축성이 성급하게 이루어진 것은 그것이 유효하지 않다고하는 계속되는 고발에 직면하게 된다.

 

(4) 주교로서의 출발(328-335)과 첫 번 째 유배 (335 117-337 11 22일 트레비리)

 

황제 콘스탄틴은 아타나시우스의 주교 축성을 알았으며, 아타나시우스가 330년 이후에 불충분한 신앙고백으로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유배를 떠났던 아리우스를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한 다음에 더욱 폭력적이고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소집하여 체사레아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공포되지 않았다(333-334). 멜리지아니스트들과 에우세비우스 지지자들의 또다른 시노드는 335년 티로에서 재소집되었고 아타나시우스에게 다른 고발들을 되풀이하였으며 그를 해임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트레비리로 아타나시우스를 유배보냈다(첫 번째 유배 335 11 7).

 

(5) 주교직에로의 복귀: 337 1122/339 4 16

 

콘스탄틴 황제가 죽은 후(337 5 22), 서방에는 콘스탄틴 2세가 새 황제로 등극되어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것을 허락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3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을 복권하는 주교들의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6) 두번 째 유배: 339 416-346 10 21일 로마에서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를 면직시켜버리고 안티오키아에서 시노드를 열어서 그를 해임하고, 그의 자리에 아리아니스트 카파도치아의 그레고리오(339)를 선출하였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떠나야했다(339 518, 2차 유배). 아타나시우스는 로마에 도착하였으며 교황 쥴리아노는 그를 받아들였고 341년에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유배를 함께 갔던 동료 마르첼로를 위해 유리하도록 의견을 말하였다.  

 

(7) 서방에 아타나시우스의 영향과 마지막 귀환

 

한편 아타나시우스가 로마에 머무는 것이 서방세계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다시말해 아타나시우스는 서방에 니체아 신앙을 전달했으며 로마에 동방의 수도생활을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두명의 에집트 수도자의 수도생활이 알려지게 되었다. 조금 후에 교부 지로라모는 로마에서 빠코미오와 안토니오(Lettera CXXVII)에 대해 처음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달한다. 342년 그는 콘스탄틴 2세 황제에게로 밀라노에 불려갔는데, 서방의 황제는 한편 그의 동생 동방의 황제 콘스탄스에 의해서 두 파의 주교들의 대단위 소집을 하도록 그길을 모색하였다.

 

한편 345년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아타나시우스의 주교좌를 차지하고 있던 카파도치아의 주교 그레고리오가 죽은후 동방의 황제 콘스탄스는 유배에 천한 사람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부르는 것을 허락하여 그는 7년의 부재기간이 지난 다음 346 1021일 알렉산드리아에로 돌아왔다.

 

(8) 10년간의 황금기: 346-356

 

이 특별한 시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아니즘 추종자들을 대항하여 호교론을 집필하는 문학작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9) 세번 째 유배: 동방의 콘스탄스 황제 치하에서 357 2 9-362 2 21, 에집트 사막으로

 

아타나시우스는 쫒겨나 자신을 숨겨야 했는데 수도자들의 충만한 터 사막에로 도망갔다. 356년 안토니오가 죽었으며 그는 아타나시우스에게 그의 외투를 남겼다.

 

(10) 주교직으로 복귀: 362 2 21-362 10 23일까지

 

(11) 네번 째 유배: 배교자 쥴리아노 황제 치하에서 362 10 24-363 9 5일까지 에집트 사막에서

 

(12) 주교직에로의 복귀: 364 2-365 105일까지

 

(13) 다섯 번째 유배: 발렌테 황제 치하에서 365 10 5-366 1 31일 사막에서?

 

(14) 주교직에 복귀와 아타나시우스의 죽음: 366 2 1-373 5 2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체사레아 교회(Caesareum)가 발화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즉시 범죄의 잘못이 있는 이방인들을 재인식하면서 교회를 재건설할 것을 지시한다. 367년 루치오는 주교의 통치력으로 점령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리안적인 해석은 즉시 추방되었다. 그후 조금씩 고요해지면서. 아타나시우스는 결국 싸움과 방어에매이지 않고 몇가지 자신의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시편을 주석하였으나 그 작품은 유실되었다.

 

366년에 다마소 교황이 로마의 주교로 선출되고 즉시 밀라노의 아리아니스트 마우쎈지오를 단죄하였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아프리카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마 주교 다마소 교황의 작품에 대해서 말하였다.

 

 다른편에서는 아타나시우스와 젊은 주교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사이에서 한가지 일치가 탄생하였다. 즉 두 사람은 동방과 서방 사이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373 5 2일과 3일 사이 밤에 운명하였는데 당시 나이 76세였고, 주교직 46년이었고 유배생활도 17년이상을 살았다.

 

2) 작품

 

(1) 교의신학적 작품

 

 Oratio contra gentes

 

 orationes contra Arianos

 

(2) 논쟁적 작품

 

 Apologia contra Arianos

 

 Apologia ad Costantium imperatorum

 

 Apologia de fuga sua

 

 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3) 수덕적 작품

 

 Vita Antonii

 

(4) 편지

 

 공적인 편지:

 

  Tomus ad Antiochenos, Epistula ad Iovianum imperatorem, Epistula ad Afros

 

 회칙 편지:

 

  Epistula ad episcopus, Epistula ad episcopus Aegypti et Lybiae

 

 교의적 편지:

 

  Epistula de synodis Arimini in Italia et Seleuciae in Isauria celebratis, Epistula de decretis Nicaenae syno, Epistula ad Serapionem, Ad Epictetum episcopum Corinthi, Ad Adelphium episcopum, Ad Maximus philosophum

 

3) 신학사상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그의 본질의 불통교성에 대한 사아상에서 출발하면서 말씀이 아버지의 본질 또는 동일 실체라는 것을 거부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구원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 본질에 있어서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심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오직 구원자이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느님 자신이시며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셨다면 아버지의 아들들인 위리를 구원하시면서 우리를 신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1) 하느님에 대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플라톤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사상에서 진행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모든 형태의 다신론과 함께 하느님에 관한 신인동형동성론 (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의 모든 형태를 거부하였다. 하느님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 부정신학적 용어러 하였다. 다시 말해서 비물질적이며, 비육적이며, 영원하고 불변적이며 단순성과 이해할 수 없는 초월자로 말한다. 그는 하느님을 만물을 통치하는 위엄있는 주님(Pantokr tor)으로 보지만 그렇게 선택된 그를 소유함에도 불구하고, 자신 스스로에 의해서 창조하시고 움직이지 않고 그의 말씀의 중재를 통해서 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과 비교해서 마치 아타나시우스 다음에 크리소스토모 처럼 주의깊은 신적 선함(philanthrop a)을 강조한다.

 

(2) 한 분이시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Deus unus et trinus: Trinitas)

 

) 아버지와 아들 (말씀)

 

말씀(Logos)은 아버지가 영원으로부터 나셨으며, 아버지의 완벽한 얼굴이고, 지혜, 하느님의 자체 능력이다. 350-351년 아타나시우스는 아버지와 함게 아들의 일치성을 가르키기 위해 니체아의 신학 용어 homoo sios를 강조하고 있었다.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낳아졌다. 낳음을 받으셨다는 뜻은 가자의 본질을 통교하는 것이다.

 

) 성령

 

자체로 분명하게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의 교리를 제시한다. 마치 아들이 말하듯이: "아버지에 대한 것은 모두 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모든 것이 성령 안에 아들을 통해서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성령은 아들의 영이다.

 

(3) 그리스도

 

영원히 아버지께 일치된 말씀은 로고스 처럼 세상이 창조한  것까지 통치한다. 그는 개별적 아들의 육신을 취하면서 탄생하였고, 그와함게 활약하며, 그리고 희생으로 봉헌한다. 인간 본질은 구원에 대한 능력이 (플라톤주의 추종자를 대항하여)있다. 말씀은 인간 영혼을 취하였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경험은 오직 깨긋하게 용어들을 본질들로 소개되고 있다. 마리아는 잉태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정이시다. 지혜는 집을 세우게 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마치 우리와 같이 자연적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로고스 안에서 그를 받아들이는데, 그는 인간을 창조한 다음 그리고 죄지은 후에 인간를 다시 창조한다. 더욱이 강생 자체는 구원적 행위이다 (이 사상은 대 레오 교황에서 다시 만난다). 사실 말씀은 우리의 육신에 결합되고 우리 육신을 거룩하게 하였다. 강생한 말씀의 삶은 우리를 위해 희생되므로써 희생으로서 드러난다 (구원). 그의 죽음으로 죽음을 없애고 악들을 이겼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사불멸을 받는다.: 우리가 하느님이 되기 위해서 그분은 인간이 되셨다.

 

아타나시우스는 조직적인 체계를 세우는 독특한 천재가아니라,성서와 전승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명백하게 계시하는 선교사와 목자의 따뜻한 품위를 가진 뛰어난 스승이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완결되지 안하았고, 그가 혼동하고 있던 것은 본질(ousia)과 위격(hypostasis)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이며, pr sopon 용어를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위격을 가리키는 어떤 용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공적은 명쾌하게 삼위일체론을 정시화해고, 위대한 견고함으로 방어와 사도의 성실성으로 그것을 가르친 것이다. 한편 안타까운 것은 아타나시우스가 당한 수차례의 유배와 싸움으로 인한 고통으로 이러한 신학이론들이 심화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카파도치아의 위대한 세 교부들에게서 보다 분명하게 용어학과 보다 완전한 정립이 이루어질 것이다.

 

3) 체사레아의 바실리오 (329-379)

 

1. 생애

 

1) 가족

 

329년에 바실리오는 카파도치아 (겨울철에 황량한 불모지역이며 현재 중앙 터어키를 말한다)의 수도 체사레아에서 테어났다. 그의 아버지 바실리오는 뽄또지방의 신 체사레아에서 웅변가였고, 어머니 에밀리아와 함께 독실한 그리스도 가정에서 생활하였다. 디오끌레지아노의 박해 동안 재산을 버리고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기 저기를 도망하면서 7년간 살아갔다. 그의 부모는 열 남매를 두었다. 다섯명의 딸 중에 마끄리나는 첫 째이고, 다섯 형제 가운데 셋은 주교들이었는데 첫 째는 바실리오이며, 후에 니싸의 주교인 그레고리오이며 세바스테의 주교 베드로이다.

 

바실리오가족의 많은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공경을 받았다.  그의 할머니 마그리나, 어머니 에밀리아, 그의 누이 마끄리나 그리고 그의 두 형제들 그레고리오와 베드로이다.

 

바실리오는 항상 건강이 안좋아 몸이 약하였다. 사실로 쉰 살을 넘지 못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2) 양성

 

바실리오는 그의 할머니로부터 첫 번째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다. 할머니는 오리게네스의 제자이며 카파도치아의 복음전파자 그레고리오 타우마투르고로 부터 전수받은 가르침을 잘 간직하였다.

 

바실리오는 체사레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마지막으로는 아테네에서 그의 학문을 마쳤다. 아테네에서 그는 칠년 동안 지내며서 이미 카파도치아에서 알고지내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아테네에서는 더구나 미래의 황제 쥴리아노를 만나기도 하였다.

 

바실리오는 참으로 사려깊고 신중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수사학의 수장자리에 올랐다.

 

3) 수덕 생활

 

 바실리오는 357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의 주이 마끄리나의 인도로 복음에 따른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마끄리나는 이미 352년부터 이리스 고개 위에 안네사의 그들의 집에있는 수덕생활자와 살아갔다. 한편 그의 형제 나우끄라지오는 다른 고개에서 노인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고 운영하였다.

 

바실리오는 두 해 동안 수덕생활의 스승들을 찾기 위해 동방을 달려가면서 여행하였다. 그것은 바실리오가 시리아, 팔레스티나, 에집트의 금욕주의자들을 찾아 생의 학문을 자신의 고유한 관점으로부터 터득하기 위해서 였다(360-361). 결국 그는 뽄또 지방에 되돌아욌고, 안네시, 황무지인 신 체사레아의 입구에서 정착하였다. 5년 동안 머무르면서 그곳에서 그의 친구 그레고리오에게 유명한 편지(Lettera II, 수덕생활을 위한 프로그램의 첫 논문)를 썼다. 그리고 그레고리오는 몇 기간 후에 그것에 편지(그레고리오의 편지, lettere 4, 5)를 첨가하였으며, 오리게네스의 텍스트(Philokalia를 함께 수집하였다. 바실리오는 몇 동료들과 기도생활과 공부, 노동을 살아가며 수도생활과 비슷하게 복음정신을 살았다.

 

4) 주교 에우세비오의 협력자

 

바실리오는 364년 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에 의해서 사제서품되었다. 그후 사람들과의 불목으로 그는 시기당하였고 결국 홀로 남게되었다. 그러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주교, 2년전 서품된 그의 친구 사제의 아버지 그리고 주교 에우세비오는 그를 체세레아로 불러들였다. 왜냐하면 진리가 위험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발렌테가 364년에 황제가되었는데 그는 아리아니즘 신봉자였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의 신봉자였던 아리안주의의 주교들에게 무엇인가를 하게할 필요를 재촉하였다. 바실리오는 교의적 논쟁과 사목적인 일에서 에우세비오의 충실한 협력자가 되었다.

 

368년 빈곤함은 카파도치아를 황페함으로 만들었다. 바실리오는 식량들을 백성들에게 특히 그리스도린들에게 보다 유대인들 어린이들에게 많이 나누어주기 위해 자신의 땅을 팔았다.

 

바실리오는 또한 체사레아의 교회에서 전례를 계혁하기도 하였다.

 

5)  주교직

 

370년 에우세비오 주교는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공적으로 바실리오에게 계승되었다. 새주교는 지속된 아리안의 위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많은 어려움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수덕적 삶을 살았다. 에우스타지오의 두 제자들이 그에게 거룩한 인도와 자기 영혼의 보존의 삶으로서 형제적 도움과 사랑 안에서 일치의 징표를 봉헌하였다.

 

372년 주의 공현축일에 유명한 대담을 하였다. 그것은 바실리오가 황제의 이름으로 니체아 신앙을 포기하고 동일본체(homoousios)의 말을 부인하기를 요구하던 비굴한 책임자에게 반대하는 동안이었다.

 

동시에 바실리오는 카파도치아를 분열로 야기하는 혼란과 근심을 체험해야 했다.

 

이러한 혼란이 있은 다음, 바실리오는 자신의 동생을 니싸의 주교로, 자신의 친구 그레고리오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34년에 바실리오는 주교의 지역과, 자선, 사랑(양로원, 수도원의 면회실, 나병 요양소)의 도시를 개원할 수 있었다. 5세기에 그것들이 바실리아데라고 불리었다. 이러한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대점하는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콘스탄틴 통치 때부터 수도에 설립된 xenod chia (손님들 위한 여관들)이 있었다. 쥴리아노는 불경건한 갈릴레인 (후에는 그리스도인으로 호칭됨)들과 대항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피난민들 그리고 손님들이었기를 원했다. 바실리오 역시 그의 신앙에 관해 중상 모략당하였다. 로마의 다마소 교황은 바실리오를 이단으로 의심하였다.

 

명백하게 그의 신앙을 방어하고 고백하기 위하여 바실리오는 성령에 관한 논문을 진술하였으며, 375년 사베스타의 에우세비오 주교와의 단절을 해소하였다. 378년 발렌테 황제가 사망하였고, 379 1 1일 바실리오도 다음의 말씀을 외치면서 "주님! 당신의 품 안에 내 영혼을 다시 맡기나이다." 하느님 곁으로 가셨다.

 

이오같이 바실리오는 자신의 고난을 인내하고 타인의 고난을 덜어주는 데 넓은 아량이 있었으며, 위대한 신학자요, 하느님 말씀을 달변으로 전하는 사람이었으며, 엄격한 금욕주의자였고, 숭고한 주교직 수행의 훌륭한 모범이요, 아직까지도 동방에 존재하는 수도원 규율의 본래적 아버지였다. 그는 결국 엄격한 고행과 자기 직책에 대한 과로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2. 작 품

 

1) 교의적 작품

 

모든 작품들이 아리안주의에 대항하여 모두 봉헌되었다.

 

) Contro Eunomio (364)

 

 말씀(Verbo)는 태어낳고 하느님의 존재는 최소한으로도 탄생과 함께 정체성이 동일하지 않을 수 없다.아버지와 함께 말씀과 아버지와 함게 성령의 동일 본체의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있다.

 

) 성령에 대하여

 

  바실리오는 성부와 함게 성자와 성령의 동일본체를 방어하였다. 그는 성령의 신성 선언에 봉헌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마치 아타나시오와 같이 그의 Quattro lettere a Serapione에서 그는 표현상으로 전혀 말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바실리오는 그렇게 같은 침묵으로 유지한다. 이것 때문에 그는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다음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모양에 허용적이었다.

 

한편 바실리오는 성령의 속성에 성화(satification, 聖化)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성령은 정말로 특별한 거룩한 지위이다. 그리고 거룩함은 성령에 대해서 독특한 역할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느님과 함께 거처하기 위해 자유롭게 봉헌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성령은 성전이라고 불리운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Discorso, XLIII, 59.

 

"성령의 덕목에 대해서 마음들이 격양된다. 약한 것들은 보다 앞에 위치한 것들이 완벽하게 된 것을 통해서 옮겨진다. 그는 모든 얼룩으로부터 정화된 것들을 비추면서 그는 그와 함게 일치(통교)를 통해서 영성적인 것을 한다." IX

 

2) 수덕적 작품

 

) Moralia 또는 윤리 규범(Regole morali)

 

이 작품은 80개 윤리계명(Regulae)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수도생활의 탁월성과, 수도자의 임무, 하느님의 심판과 신앙, 80개의 윤리규정

 

) Asceticon

 

 수도자를 위한 충고, 규칙에 반대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간 수도자들을 위한 벌칙은 물론 55개의 규칙과 313개의 좀 짧은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

 

3) 강론과 강연

 

) Homilae IX in hexaemeron (6일 창조에 대한 9개의 강론)

 

이미 저자 당시로는 찬탄할 만한 6일 창조에 대한 해설이다. 고대 세계 전체에 독특한 박물학적 오류와 동시에 많은 적합한 해설, 건설적인 권고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호화로운 묘사, 신의 지혜 및 선, 우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 Homilae XIII in Psalmos (시편을 위한 13개 강론)

 

이들 강론은 각개의 시편을 문자적, 도덕적, 유비적 의미에 따라 설명한다.

 

) Homilae XXIV de diversis (여러 주제에 대한 24 강론)

 

3. 바실리오의 수덕주의

 

성 베네딕또는 수도 규칙 마지막 장에서 바실리오 성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바실적 전승 안에서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 바실리오라고 부르고 있다.

 

바실리오의 종교사상은 그러한 수도생활(cenobitico)이다. 이러한 용어에 대한 어원적인 의미에서 수도원(monachium)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바실리오의 수도원에 대해 말하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수도원은(coenobium 수도원 공동생활, coenobita 수도자) 공동생활과 같은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우리는 바실리오의 수도생활을 monachesimus로 말하지 않고 ascetismus로 말한다.

 

1) 수도생활의 바실리오적 개념

 

바실리오는 안토니오와 빠꼬미오의 수도적 노선 위에 있지 않다. 바실리오는 정말로 ’인간은 홀로사는(monastico) 동물이 아니다.’라고 정확하게 설파한다.

 

바실리오에게 완벽함이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총체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모든 그의 수적적 여정은 사랑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는 세바스테의 에우스타지오를 따르면서 시리아적 성향의 운동을 지속하였다. 한편 이 운동은 간그라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느데, 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위압하는 정신으로서 취해쳤다. 주교들은 신랑들이 이혼하게 되는 것과 일꾼들은 모든 세상일을 포기하는 것을 옳치않게 보았다. 바실리오는 이러한 수덕운동을 조절하면서 그것을 심화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함께 일관성있게 모든 교회를 보았다.  한편 그는 강하게 그리스도교적 메시지의 종말론적 측면 위에서 보았다. 주교로 서품된 그는 형제애와 다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살아있는 연결이 되었다.

 

바실리오에게 수덕생활이란 필스적으로 수도생활(coenobita)이다. 그것은 그에게 총체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으로서 열려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사라의 두 계명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안에 요약되는 삶이다. 이 모든 것은 형제와의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일치와 통교 안에서 이뤄진다. 수도자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겸손과 봉사와 사랑 안에서 추구한다.

 

하여간 바실리오는 수덕자(asceta) monacos(solo)로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지역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리적인 의미에서 monotropos(일치된)로 이해한다.

 

바실리오에게 그리스도교인은 monastikon(혼자사는 자)이 아니라 koinonikon (일치의 사람)이다. 수덕자들에게 함께 일치한 집은 예루살렘의 초기 공동체에 대해 회복하고 갱신하는 장소이다.(사도 2, 44; 4,32).

 

공동생활 밖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밖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바실리오 성인의 수도정신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사상이다. 수덕자는 성령의 삶의 일치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그의 형제들과 실현한다.

 

2) 바실리오에 따른 순명 개념

 

순명의 서원은 종교적 삶의 심오한 요소이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어떤 본질적인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을 위해 해방(Liberty)의 의지적인 포기에 대해 분명한 요청을 드러내는가? 어떻게 바실리오 성인은 순명을 보는가?  대답은 그의 삶의 역사와 그의 모든 역사적 인간적 상황 안에서 성인의 생각의 혁명을 돌아봐야한다.

 

바실리오의 유일한 구칙은 성서읻. 복음은 그의 사상의 같은 본질이다. 완벽한 삶을 정의하기 위해, 프로그람을 설계하기 위해서 그는 복음에 그리고 오직 복음에로 달려가기를 주장하였다.

 

바실리오의 모사상은 신적 계명과 하느님의 모든 계명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계명 중의 첫 째, 본질적인 것, 즉 하느님을 향한 사랑(caritas)의 완전한 부분과 목차, 형제적 사랑(caritas)의 계명에 대한 순명정신이다.

 

만일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인이 죄에로 그를 움기는 모든 영향들을  피하기를 요구하신다면, 인간들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같은 사상을 나누는 자들에게 같은 목적의 동일한 추구로 결합되도록 그를 파견한다. 공동생활에 관한 요청은 순명에 대한 그의 신학 발전을 위해 조건들을 제시한다.

 

여기서 한가지 강조점이란, 신적인 계명의 즉각적인 결과인데, 모든이는 그의 형제들의 봉사자이다. 형제들의 봉사는 순명 안에서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바실리오는 자신에게 묻기를, 하여간 모두에게 모든 것 안에서 순명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결국 바시리오의 본문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자기 형제들의 봉사자로서 장상에 대해 말한다.

 

장상의 역할은 공동체 앞에서 선교(파견)을 해석하면서, 모든이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는 것이다. 장상의 권위는 성령론적(pneumatica)이며 항상 공동체의 선익적인 기능 안에 있는 것이다.

 

순명에 대한 사상은 구원 사업과 특별히 더욱더 선교 안에서 고려된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 이외에는 다른 원칙과 모델이 있지 않다. (죽기가지 순명 필립 2, 8)

 

바실리오의 공동생활 정신을 요약하면

 

) 수덕자는 공동생활을선택하고, 모든 이기주의와 각자의 사랑, 그리고 사랑(caritas)에 대한 모든 장애를 제거하면서 모두에게 속한다.

 

) 수덕자는 공동생활을 선택한다.  모든 것 안에서 자기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해서 해방되는 순명을 추구한다.

 

) 수덕자는 공동생활을 준비하는 순명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바실리오의 신중함은 사랑의 신중함이다.

 

4)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329-390)

 

1. 사상

 

1)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리스인이었나?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그리스도교사상에 깊은 그리스 문화를 접근시키지 않았다. 그대신 그는 그리스도교적 지평 위에 헬레니즘을 측정하고 변화하였다. 세속적 원천들의 이러한 교환이 요청되고 자각되었다.

 

"산앙은 완성되고 이성은 실현된다" PG XXXVI

 

"천상적인 성령의 지혜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옳으니, 그의 시녀에게 처럼 여기 아래의 종에게 명령한다. PG XXXVII, 1593

 

 그레고리오의 사상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천은 무엇인가?

 

) 성서: 그는 성경을 사랑하고 유년기 부터 공부하였으며 성경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 그리스도 작가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는 그레고리오의 완벽한 작가들이었다. 그러나 바실리오 처럼 그레고리오는 처음에 그들의 유형학(typology)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주석에 대한 과도에 반대하고 있다.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삼위일체 교의의 기원을 성 아타나시오에게서 찾아내며, 더우기 보다 더 세밀히 완성하였다. 한편 성 바실리오는 그의 이론의 여지 없는 스승으로  항상 남아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들

 

) 신플라톤주의: 그레고리오는 플라톤을 그리스인들 가운데 최고의 신학자로 보았다. 그는 꿀과 같은 달콤한 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빌린 주제들: 감각적 세상으로부터 해방, 죽음의 묵상으로서 삶, 하느님을 닮음, 아름다움의 관상, 신적 태양으로부터 영의 조명.

 

) 플로티노의 종교 철학: 빌린 주제들: 하느님의 초월 - 악의 본질 - 정화 - 신적 닮음 - 하느님을 향한 승천에 있어서 원의 역할 - 세상과 육의 멸시 - 하느님과 지속적인 결합(일치)의 연구 - 관상.

 

) 스토아 학파와 퀴니스코 (犬儒, 견유)학파: 빌린주제들: 죽음의 멸시, 이별, 금욕적인 윤리.

 

이러한 주제들의 닮음은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에 대해 중심이 된 그리스도교의 환원될 수 없는 기원성,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대해 이 세상의 다양한 가치들이 거절되지 않은 최종적으로 그 어떤 것, 그리고 삼위일체의 빛나는 기쁨 안에서 마감하려는 결정지워진 하나의 위격적 결합에 인간을 초대하는 이러한 모든 시각에 대해 잃어버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2) 신학자 그레고리오

 

) 신학자라는 호칭의 의미

 

정교적 전승의 다른 증언들에서 인용된 에페소 공의회 (431)에서 그레고리오는 대(great, )라고 불리운 자들과 구별이 되었다. 칼체돈 공의회 (451)는 그를 최고 위대한(最大)으로 부르며, 신학자(theologos)라는 호칭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는 참 하느님에 관한 참 교의로서 신학을 정의하였다. 같은 그레고리오에 의하면 신학자는 하느님의 사자(使者), 전령이며 연구를 통해서 관상으로 높은데에서 내려온 감도(感度) 하에서 신탁(神託)을 해석한다.

 

그러나 신학자는 존재에 대한 신성을 선포하는 자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가 그렇게 성지주일에 그리스도께 어린 신학자(oi theologoi paides)를 환호하는 어린이를 부를 것이다. 다섯가지 신학적 담화의 그의 모든 작품들에서 그레고리오는 참으로 새로움을 일으키는 연속된 발생들에 삼위일체의 교의를 상세히 발전시키면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신성을 분명함과 초인간적인 청명 그리고 특별한 표현의 선물들과 함께 선포하였다.

 

말씀의 풍요함을 조직화하면서 신학자는 신성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 먼저 관상의 역할(theoria)을 바라보고, 관찰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그는  계속적으로 그의 시선을 정화(kath rsis: 실천Praxis 또는 행동의 수덕적 요소) 하여야 한다. 참 신학자는 그의 삶과 가르침의 거룩함을 통해서 중거를 제시하는 자이다. 그의 사명은 에언직이다.

 

) 그레고리오의 신학적 특성

 

케리그마적이며 성서적이다: 그레고리오는 성서와 함께 접촉을 보존하면서 그리스도교적 메시지의 충만함을 제시하는데 염려하곤 하였다. 그는 성서와 겨우 구별되는 기초적인 신학을 원하였다. 그러나 항상 주석의 스승으로서 전승(paradosis)을 청취하기를 원하였다.

 

영성적이다:   열렬한 반성의 성장일지라도 이러한 신학은 이성적이기 보다 매우 영성적이다. 그 신학은 그레고리오의 내적 삶에 대한 심오함을 명찰하게 둔다.. 그리고 신학은 자기 관상의 증거이다. 신학은 침묵으로부터 탄생하였고, 다시 침묵에로 돌아 간다. 신학은 찬미로서 표현되고 시편가의 특색을 입는다. 이런 의미에서 오리게네스를 인용할 수 있는데, 그레고리오는 오리게네스에 의존되었으며, 에바그리오 폰티코에 대해 나지안즈인은 몇 시기 동안 영성적인 인도자였다.

 

"이 담화들은 또한 찬미의 노래이며, 그리고 여기서 모든 신학들이 있다." 오리게네스, Comm. Ps. CXVII, 14.

 

"만일 네가 신학자라면, 참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참으로 기도하면, 너는 신학자이다." 에바그리오, 기도에 대한 논술(Trattato suula Preghiera), LX, 14.

 

그레고리오는 항상 거룩함, 신비, 그리고 신적 초월에 대한 심오한 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는 지성과 말씀, 사상의 표현을 위해서 심오한 존경을 취한다.

 

이 사람의 침묵은 고행보다도, 명상보다도 더 한 것이다. 관상을 위한 조건, 침묵은 신학을 위한 조건이며, 기다림과 청취의 침묵이다. 그레고리오의 침묵은 두러움과 떨림의 침묵이며, 존경의 침묵이다.

 

"침묵 안에서, 침묵을 통하여 존경하고, 숭배하라!" Discorsi 28, 20, 29, 8, 45, 22, ecc.

 

) 그레고리오 신학의 두 가지 주요 주제

 

삼위일체 교의: ’오직 작렬하는 버림 안에서 세 원천의 맑은 빛’ 삼위일체의 교의는 그레고리오의 모든 사상의 중심이다.

 

"내가 오직 당신을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은 진실이요 또는 나의 삼위일체이다." (poema) II, I, 11.

 

아버지의 삼위일체론적 교의에 대한 영성적 영향들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거기에서 삼위일체로 있으며, 그의 광채의 유일한 빛으로 있기를 원하고 있다. 즉 혼란한 그림자들은 삼위일체의 감동으로 다시 체운다.

 

그레고리오는 P. Leozio de Grandmaison가 메시지의 구원경륜, 삼위일체 신비의 발전적 현시를 말한 것을 강조한다:

 

"... 구약은 분명하게 어두운 세상에서 아버지, 아들을 명백하게 선포하였다. 신약은 아들을 계시하였으며, 그리고 성령의 신성을 직관하게 하였다. 이제 영()은 우리 가운데 거처하시고, 보다 분명하게 계시되고 있다."

 

  "아버지의 신성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 명백하게 아들의 신성을 선포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는다. 아들의 신성이 아직 허락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성령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들에게 새로운 무게를 부과할 수 없다. 너무 지나친 영양으로부터 피곤한 사람, 또는 병든 눈으로 태양의 빛을 바라본 사람은 이미 획득한 힘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여간 단계적 고양을 통해서 단계적인 완벽함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담화(Discorso XXXI.)

 

그레고리오는 항상 한 번 고정된 성서적인 언어를 시대의 그리스 언어로 바꿀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같은 말씀들의 진행을 통해서 교의적 지속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스와 라틴인들은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들의 선언과 신학적 유비론을 느끼는 그들의 모양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신화(神 化, theosis, deificatio): 아타나시오 성인의 신학의 중심 주제는 신화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는데, 왜냐하면 인간이 신화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이어서 모든 그리스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신화와 강생의 목적과 활력에 대해서 말하였다. "빛의 세가지 분출 안에서 이해된 유일한 하느님은 그레고리오가 말하듯이, 양육되고 신화된 자신의 창조물에 통교하시고 일치하신다. 하여간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사상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육 안에서 우리의 인간적 삶을 당신의 삶으로 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구성하고 있다.

 

강생의 열매와 성령의 작업, 우리의 신화는 현양된 참여를 드러내는 십자가(수덕적 노력)에 우리의 협력을 통해서 실현된다. 골로 3, 11.

 

) 그리스도론

 

카파도치아 교부들(적어도 우리가 알아 볼 두 그레고리오에게서)의 그리스도론적 반성은 알레산드리아 학파나 안티오키아 학파에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즉 아폴리나리우스에 의해 시도되고, 그리스도의 신비의 단언으로부터 떠오른 특별한 문제들이 심오한 그리스도론적 요지의 의미있는 노력으로 많은 자치적 진술들을 드러내고 있다.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적 진술 사이에서의 연결에 관해서 특별히 하나의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강생한 말씀의 신비에 관한 적절한 어떤 형식적이며, 분명하게 복합성을 제시할 수 있는 직관들에 역할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우스의 위기로부터 자극받았더라도, 나찌안즈의 그레고리오의 그리스도론적 요지는 심오한 구원경륜의 일반적인 시각으로부터 출발하였다. , 실로 인간-하느님의 신비가 모아지고, 해석되며, 그분을 위해서 인간의 신화의 징표 안으로, 또 죄로부터 파괴된 그리고 창조 안에서 인간에 주어진 모상, 아들의 육화를 통해서 다시 세우면서 하느님이 번뇌하시는 징표로 드러 난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그 자체 안으로 취하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그를 구원하신다. 즉《Quod assumptum non est, curationis est expers: quod autem Deo unitum est, hoc quoque salutem conquitur.  구원경륜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해서 교부들에 의해 이뤄진 다소간 모든 반성들을 인도하는 뛰어난 구원론적 원리이다. 다시말해서 이것은 분명하게 고전적으로 남아서 형식화된 것이다. (Quod non est assumptum, non est santum: "물려받지 않은 것은 치료되지 않는다").

 

결국 강생은 하느님의 아들 편에서 인간의 승천(assumption)이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강생은 예수의 본질적 구성들 안에서 뿐만 아니라, 죄에서 오직 제외되면서, 역사적 상황 안에 오신 빈곤 안에서 드러난다. 강생으로 인간 본질의 승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구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완성되는 예식 거행을 통해서 참여하도록 초대되었다. 특별히 파스카 순간에,《오늘 구원이 세상에 도달하였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황천문들이 완전히 활작열렸다. 그리고 죽음이 지불되었고, 옛 아담이 해방되었으며, 한편 새 아담이 완벽함에로 도달한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이다. 갱신하시오》그레고리오는 santum Pascha Oratio 45에서 선포하였다.

 

이 점에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아들의 강생 사실에 대해서 특별히 파스카와 역사적 사건에서 모든 것이 베어나도록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기 대문에 그레고리오에게는 소위 말하는 구원에 대해 육체-신비주의 개념으로 돌리지 않는 듯 하다. 그레고리오의 시각은 말씀(Logos)편에서 인간 본질의 승천이 구원적 사건 안에서 정말로 모든 의미를 살리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권세있는 이미지에 따라 육화된 말씀이 동요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그분의 참여로 이미 명확하게 역사적 인간성의 신화를 이루고 있다.

 

나찌안즈의 그레고리오가 말하는 인간-하느님의 현실에 대한 개념에 관해서, 그분은 분명히 개별적 현실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특별히 아폴리나리우스파에 반대하여 인간적이요 신적 완벽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지성적 영혼과 몸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위해 아폴리나리우스파의 걱정꺼리를 나누고 있다. 이러한 점에 관해 나찌안즈의 조심스러움이 나타나고 있다. 그의 반성은 두 본질들 인성과 신성의 화합(mixis) 또는 융합(krasis)의 용어에로 따르는 경향으로 움직인다. 즉《새롭고 전대미문의 화합[mixis]! 또는 경탄할 융합[krasis]. 《그렇게 말하기 위해, 본질들은 섞이고, 그리고 그러한 이름들이 그들 상호간의 결합의 옳음과 상호적으로 꿰뚫고 있다》.

 

여기서 소위 말하는 특유어들의 전달(communicatio idiomatum)의 합법성이 창립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신성과 그 반대의 것의 독특함(고유성, idiomata)을 그리스도에 언급하는 가능성에 대한 적법성이다. 왜냐하면 천주의 모친(Theotokos) 용어가 마리아에 부여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또다시 유명한 편지(Ep. 101)에서 그레고리오가 클레도니오(Cledonio)신부에게 쓴 편지 두 개 중의 하나는, 그가 부재 중에서 교구를 관리하면서 《육화된 말씀인 구성적 현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세밀히 완성된 다른 것과 더 서술되고 의미있는 두기지 형식들을 우리가 다시 발견하다. 특별히 두 번째 구절에서 흥미가 있는 것은 용어적인 단계이며, 삼위일체적 신비와 그리스도론적 신비 사이의 두가지 사실의 비교이다. 두 본분을 살펴본다면, ≪다른 사람들을 속이지 마시오. 속아 넘어가게 하지 마시오. 그들이 말하는 것 처럼 주님의 사람, 또는 오히려 우리 주님, 하느님은 지성없는 사람이다라고 허락하면서... 우리는 신성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 인간이 아니셨던 같은 분(unum et eundem)과 유일하신 분을 그러나 우리 구원을 위해 결국 취하신 인간이셨고, 육체에 관한 모든 것에 의해 그리고 몸으로부터 분리된, 영원하신 하느님과 오직 아들을 믿습니다. 즉 육 안에서 고통에 민감하고, 신성에서 그렇치 않으며 육 안에서 제한되고, 영 안에서 비제한적이며, 그분 스스로에 의해서, 완성된 인간과 하느님 [ut per eundem, totum hominem simul ac Deum]이 죄의 힘 안으로 넘어졌던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다시 형성되기 위해서 천상과 지상, 가시적이며 비가시적, 그리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같은 것이다≫.

 

≪사실 본질은 두 개이다. 하느님과 인간이다. 그 두개는 영혼과 육신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두 아들들도 두 신()들도 아니다... 그것을 간단히 말해서, 현실들이 다르다. 즉 구세주는 다른 현실들로 구성된다.[aliud quidem atque aliud sunt ea, ex quibus Salvator].... 그러나 다른 두개의 존재들이 아니다 [ non tatem alius atque alius].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 현실들은 일치의 덕 안에서 오직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인간은 신화(神化)되었고, 어떤 다른 것도 이러한 진행을 명명(命名)하는 세상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삼위일체 안으로 넘어지는 것에 반대로 머무는 다른 현실들을 말하고 있다. 위격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그것들의 구분된 존재가 소유되지만 현실은 다르다. 왜냐하면 세 가지는 신성 안에서 오직 하나이다 [Illic enim alius atque alius, ne personas confundamus: non autem aliud atque aliud, quoniam tria quoad divinitatem unm atqueidem sunt

 

다른 표현으로, 삼위일체 안에서 주체들의 복수성이 취해지고, 그리고 본질의 단일성이 그렇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들의 이중성과 주체의 유일성이 취해진다.

 

3) 철학자 그레고리오

 

) 철학적 삶이란 무엇인가?

 

   그레고리오는 ≪철학적 삶≫을 마치 그리스도교적 수덕적 삶으로 부르며 실행하는 체계로서 정식화하고 축성한다.

 

성 유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참 철학적 삶으로 제시하고 있다.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에게도 철학자는 수도자이다. 그레고리오에게 수도자들의 삶은 ≪실천적인 철학≫이다. 철학한다는 것은. 즉 ≪저 높이 위에서 삶으로 조화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천사들의 삶이다. 아브람의 떠남, 산 위에서 모세의 승천, 엘리아의 승천, 세례자 요한의 삶은 철학적 삶에 대한 그러한 모델들이다.

 

) 고행

 

  고행의 절정은 화합을 위한 그리스도에게로 결합이다. 기도와 침묵의 맛과 같이 수난들에 대하여 모든 감정들의 보호와 싸움은 이러한 최종 목표에로 정해진다. 결점들에 대한 그레고리오의 독설도 전혀 마음을 약하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되살리면서 항상 끝맺고 있다.

 

 그리스도는 나의 휴식, 나의 힘이시다. 나에게 잘 달리는 것을 주신 그분은 나의 경쟁의 뛰어난 값이다. 내게 그리스도는 모든 유물의 값이시다. 나는 그 분의 십자가의 가나함을 마치 풍요로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아버지께 일치하는 위대한 끈이다.   Poema I, 2. 

 

 ) 관상(contemplatio)

 

그레고리오에게 관상은 거의 신학으로 규정하고, 그리고 관상은 영혼(anima)이다. 정화(purificatio), 순수함(katharsis)는 신학을 구성하고 표현하는 신학으로서 관상의 조건이다.

 

 약한 용기에 정확한 향기를 신뢰하는 것은 좋지않다  Poema I, II, 33

 

 신학자는 그 사람 자체가 빛이 되면서 자기 안에 취해질 수 있는 맑음(순수함)으로 있어야 한다       Discorso XXVIII, 1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란? 성령의 작용이다. 오직 그분에 의해서 하느님은 이해되고, 계시되며 참으로 계실 수 있다. 하여간 오직 맑은 성령 만이 항상 닮으면서 순수함에 접근할 수 있다 .   Discorso II, 39

 

하느님의 원의, 그의 순간적 방문의 원의가 영혼을 정화하신다. 하느님은 통교하시고, 사랑에로 열려 계신다.

 

 하느님은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포착할 수 없다   Poema I, II, 25

 

) 수도 생활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가 염려한 수덕적 삶으로서의 수도원 제도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오는 엄격하게 주변적인 것을 그려나갔다. 그의 균형 감각, 그리고 의심없이 그의 독립정신은 하느님께 축성된 모든 삶 안에 적용되면서 위대한 신축성(수용성)으로 대부분 그것을 인도한다. 시인이며 신비가인 그는  분석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수도원을 찬미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실성의 필요 안에 자신을 드러내는 고집쟁이였다.

 

 수도원은 그들의 구원의 시각으로 일치한 사람들의 함께함이다(Poema I, II, 34). 그리고 이 수덕가들은 사랑의 정신을 통해서 조화롭게 그들 사이에 일치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성전의 돌들이다. (Poema II, II, 1).

 

동정성의 찬미가 그레고리오는 가난을 사랑하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수도자들이 동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침묵의 설교자, 왕국 안에서 가난한자 그리고 그들의 가난함을 위한 왕이 되는 것이다(Discorso VI, 2). 아버지께 존경으로 복종하는 아들, 그러나 그레고리오는 수도적 순종에 대해서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순종만을 말하고 있다. 이 것이 그의 삶의 증거이다. 즉 그는 명령하지 않고, 명령받지도 않으며 사랑하였다.

 

고전연구에 정보를 주며, 수덕자는 쇠약해진 얼굴의 수도자, 고행하지 않은 수도자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순진 무구한 기쁨을 거절하는 데는 거리가 멀었다.

 

  그레고리오는 마치 최고의 자유(Liberty)의 상징이며, 기쁨의 원천으로서 수도 생활을 생각하였다.

 

4) 결혼, 동정성, 여성주의

 

) 결혼

 

  그레고리오는 결혼의 가치를 적어도 명백하게 인식하지 않았고 첫 째 시각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그가 아직 살아 있듯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의 가르침은 30년이상 확장되었는데, 그것은 일시적이고, 전통적인 발전단게로 거치면서 결정적으로 성숙한 시기에 극복되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비참하고 불쾌한 텍스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하!하고 계속되는 세기들이 퇴보를 보이는 앞에서 사상의 마지막 그의 지평 위에서 멈추고 최고 맑은 교의를 발견한다.

 

  결혼은 신적 기원이다. 즉 거룩하며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현존과 함께 결혼을 경애하였다.

 

 나는 격혼식에 임하면서 그리스도를 흉내낼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현존에 대해 결혼식을 귀하게 여겼다.      Discorso XL, 18

 

 동정성을 선호하는 자는 결혼을 찬미하는데 두려워하지 마시오.

 

         Poema I, II, 3

 

 동정성은 무엇인가 성실한 선()의 보다 낳은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위대한 가치는 없는 것이다.       Discorso XXXVII, 9

 

 남성과 여성 모두는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도록 불리었다

 

       Lettera a Olimpia 

 

 결혼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Poema I, II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교 신랑 신부의 모범들을 자신의 어머니 논나 그리고 자신의 누이 고르고니아의 모습으로서 예를 들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그의 찬사에서 우리는 결혼에 대한 미묘하고 희미한 그의 사상을 발견한다. 그가 잘 이해한 것으로는, 살아가는 수단 보다 삶의 상태가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 동정성

 

  어머니에 의해서 하느님께 봉헌된, 그레고리오는 그후 밤의 경관에서  동정성에 반하였다 (Poema I, II, 29). 그리고 그는 마치 큰 은총과 그의 생애의 큰 사건으로서 항상  두 동정녀의 꿈 을 꾸었다.

 

동정성의 찬미가들 사이에서, 그레고리오는 보다 섬세하고 열렬한 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동정녀 어머니와 함께, 신도 동정녀들은 빛에로 그리스도를 드린다

 

         Poema I, II, 29

 

 .... 세상의 건강을 위해서 .     Poema II, II, 1

 

  하느님께 봉헌된 영혼(anima) "삼위일체 위에 첫 동정녀"(Poema I, II, 1)로 그리고 천사들 위에 "하느님과 왕과 주님의 종(봉사)에 모두 공유한 원의로 부터 분리됨 없는 본질"(Poema I, II, 1)로 모델을 삼는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동정성은 모든 시기에 그리스도께 속하며, 초안(스케치)의 분명치 않은 입장이 아니라 그의 동정성 안에서 손대지 않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면서이다. "그리스도는 여성을 거룩하게 하였으며," 그리고 큰 빛에 동정성을 빛나게 했다(Poema I, II, 1).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문학에서 마리아는 동정녀에 모델로서 여겨졌으며, 특히 청원하는 보호자로서 봉헌되었다 (Discorso XXIV, 11).  이 세상에서 해방된, 동정성은 병든 세상을 해방한다 (Poema I, II).

 

  신비주의적 포부, 그리스도 홀로 사랑은 봉헌된 동정성에 그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레고리오는 그것을 기억하고 부탁하는데 피로하지 않다.

 

  그레고리오의 결혼의 용어학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부(Sposa Christi)의 영성에 대한 더 낳은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종말론적 신비주의적 주제들이 그들 사이에서 연결되었다. 즉 영원성은 내적인 길을 위한 예고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 말씀에 통교하는 것, 그를 위해 이것은 그의 영광의 상태에서 소개되고 천상적 삶을 사는 것이다.

 

) 여성주의

 

  논나의 아들과 고르고니아의 형제는 용감한 여성주의자이다.

 

 나의 어머니는 여성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를 위해 그녀는 남자들의 위에 있다 .         Sulla sua vita

 

그레고리오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완전한 동등성에 대해 주장한다. 그리고 여성의 권리들에 대한 방어자가 도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법률을 제정하는 남자들, 그래서 그레고리오는 반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작고 짧은 텍스트를 다시 취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그레고리오의 입장은 아주 정확하다. 여성에 대한 그의 충고들은 상냥하게 하고, 남성들의 결점에 대한 고백을 가르킨다.

 

  당신은 여자입니다. 남자의 교만을 방어하지 않는데 주의하시오 

 

         Poema II, II, 5

 

 여자가 자기 남편을 교육해야하는 점까지 내려올 수 있다 Lettera a Olimpia

 

사람들이 알고 있기를, 동방교회들은 간통한 신부(新婦)의 잘못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는 경우를 위해 그레고리오의 주석을 사용한다. 즉 복음이 말하고 있는,  nisi fornicationis causa. 여기 유명한 그레고리오의 텍스트가 있는데 그 텍스트에서는 더욱이 이혼을 반대하여 살아있는 저항이 나타난다.

 

모든 그리스도교 영혼에는 신적 결혼이 계획된다. 그리고 여성의 존엄성은 특별한 광채가 빛난다.

 

5) 결론

 

그레고리오는 시인, 신비주의적 사상가. 어떤이들은 그레고리오의 심리적 불안정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자들은 반대한다.

 

동방에서 그레고리오의 영향은 항상 생동감있고 감동적으로 특히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보존된다.  에바그리오 폰티코, 포티체의 디오도코, 증거자 막시모.

 

그리스 신학을 다시 취하는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모든 언급을 생략하면서 게속적으로 그레고리오가 인용하는 것에서 원칙적으로 취하고 있다. 요한을 통해서 나찌안즈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교 그리스도교에 규범으로 사용된다.

 

한편 서방에서 프란체스코 (S. Francisco di sales)는 나찌안즈를 위한 참 설교자였다. 또한 19세기에 그레고리오의 정신이 뉴만에서 다시 살아난 듯 하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뉴만은 다음의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바랐다. (성 아타나시오, 나찌안즈의 그레고리오, 성 크리소스토모, 성 암브로시오)

 

뉴먼 추기경은 자신을 위한 무덤 등록에, 역시 나찌안즈에서 직접으로 감도된 것을 나타냈다. Ex umbris et imaginibus ad veritatem.

 

5) 니싸의 그레고리오 (대략 355-394)

 

 ) 그레고리오의 사상

 

   () 신학 사상

 

  니싸의 그레고리오의 신학적 깊이는 카파도치아의 다른 두 교부들 보다 뚸어난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레고리오는 오리게네스 이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조직적으로 해설하며 설명하는 저자이다. 그는 성경을 ≪진리의 기준≫(contro Eunomio I, 10)으로서, ≪이성의 안내자≫(Id. I, 114, 126)로서 취하면서 철학과 이성에 그의 신학적 체계를 넓은 지평 위에 조직화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전승에 충실하면서 그의 신학을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좋은 것을 선언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도그마(dogmi)들의 규칙과 기준을 성서에서 취한다. 우리가 시험하지 않는 것은 이 성서의 지향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Sullanima e la risurrezione PG XLVI, 49B

 

  () 그레고리오의 신학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우리에게 나찌안즈의 그레고리오와 기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즉 그리스도에 관한 담화는 자치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있으나, 구원경륜의 내면에로 전개되고 있다. (Oratio catechetica magna, 분명하게 신학, 삼위일체[1-4]와 구원경륜 [5-40],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육화와 구원[5-32], 그리고 성사들을 통한 성화(聖化)에 대한 것이다).

 

● 삼위 일체 교의: 그는 삼위일체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신적 위격들의 식별(구별)은 그들의 관계로 유일하게 구성한다. -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통하여 진행한다.

 

● 그리스도론에 대한 교의: 두 본성들은 그리스고 안에서 섞어서 혼동됨이 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각각의 본성들의 속성들은 참으로 그들 둘에 속한다. (comunicatio idiomatum). 마리아는 인간의 어머니(anthropokos)가 아니라 천주의 모친(Theotokos)이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의 제자, 그레고리오는 그의 사상을 교정한다. 즉 영혼의 선재와 이주 이론을 거절하고 있지만, 지옥의 벌이 일시적이며, 그리고 오리게네스를 따르면서 apocatastasi(시대의 종말 때 우주적 회복) 안에서 구원 역사예 최대 결론을 바라보고 있다. 악의 창시자도 역시 회복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교의가 아니다.

 

() 그리스도론

 

어쨋거나 특별히 육화된 말씀의 형성은 그의 사상의 보편성 안에서 기초적 구원사실을 대표하는 듯 한 것이 참다운 니싸의 그레고리오의 시각이다.  사실 그는 강생의 신화적(神化的) 가치를 독특하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특별한 흥미를 일으켰다. 이점에서 그레고리오는 그렇게 개별적 인간들만이 아니라 내적 인간성을 객관화 하는 것 처럼 그리고 플라톤적인 관점에 의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듯 하다. 더 나아가 개체들은 인간의 우주적 사상으로 부터 구분하여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성을 증가시킴 없이 참여하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다루면서  진술하고 있다.《거룩한 진술에서 말하기를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불확실한 지시로 인간은 모든 인류를 가르켜진다. 사실 창조 때 이러한 과정에서 아담의 이름은 마치 계속되는 걸음들 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된 인간은 일반 인간의 이름 처럼 결정된 이름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씀은 육화하면서 의심없이 개별 인간성에 결합된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 각자 모든 인류에 역시 결합되고 그리고 내적 인간성은 그것을 신화( 神化)하면서 종류와 사상 안으로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것이 있는데, 즉 역사의 사건으로서 신화자(神化子) 육화는 인간의 사상의 실현에 대한 어뗜 타입을 만나고 있다. 죄와 쇠퇴가 들어가고 그래서 종류(種類)의 기초적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일치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완벽한 통일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승리의 순간에 자리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부 자체에서 저지르는 죄라는 붕괴가 극복되는 것이 여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길을 위해서 단언된 빠스카, 특별히 부활의 중요성이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여간 이때문에 우리 시체 위에 굴복하면서 그리고 약하게 무력해진 인간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모든 우리 본질의 죽음으로부터 부활이 있었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힘과 함께  모든 인간을 부활시키면서, 각자의 몸과 함께 우리 본질에 부활의 원리를 선사하는 그리고 죽을 조건을 건드리는 죽음에 꽤 가까이 다가와 졌다. 사실 신성을 받은 그의 육(), 부활을 통해서 신성에 함께 현양됬던 살()은 다른 본질로부터 유래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인간적 혼합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마치 우리 몸 안에서 지각하는 기관들 중에서 오직 한가지의 작동이 부분에 결합된 총체적으로 지각하는 것에 인도되는 것 처럼, 그렇게 만약 모든 인간 본질이 모두에 지나가는 한 부분의 부활, 살아있는 유일한 존재였던 것과 같이...  

 

부활은 그리스도의 인간 존재의 신비들의 총체로부터 격리되지 않은 사건이다.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사물들의 한가지 비슷한 시각 안에서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아들의 신성과 함께 개별적 인간성의 구별 안에서 결합의 현실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완결되고 현실적 인간성을 단언하는 요구를 심오하게 들어야 했었다. 그렇게 그는 승천된 인간 (스케마 Logos-anthropos)에 대해서 서둘러서 말하고 있다. 아폴리나리우스에 거슬러서 그는 새로운 논제에 대해 풍요하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영혼의 교의를 보다 더 고집이 센 방법으로 정하고 있다. 즉 구세주의 죽음은 그의 몸과 영혼의 분리라는 다른 것으로 있을 수 가 없었다.

 

단일성의 그의 개념에 관해서, 공통적으로 communicatio idiomatum의 교의에 대해 특별하고 분명한 표명이 니싸의 그레고리오에게 부여되고 있다. 모든 면에서 그의 시각은 혼합과 본질들의 화합-변형의 노선으로 움직이고 있다.

 

) 인격적 종합 (인간학)

 

● 영원한 운동 안에서 epectasi 또는 divenire:

 

인간은 divenire(...이 되다. 참고 이레네오), 움직이며 살아있는 목적과 끝이 있는 창조물, 영과 사상 그리고 본질을 대항하기(contro natura), 인간의 구성의 본질에 따라 죽음이 있는 그것을 향해 잡아당기는 변화이다.

 

이러한 목적이 있는 창조물은 자유로우며, 죄를 지니고 있다. 악은 타락한 선택이다. 그 다음, 죄에서 인간적 본질 하나가 부서진다. 인간 스스로가 그 자신 위에 저 위에 있는(수난, , 죽음), 죽은 피부막을 옮기고 있다.

 

이와같이 괴로운 그레고리오는 무한한 원의를 향해 단단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레고리오의 사상은 오직 그것을 보상할 수 있는 분은 포착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면서(estasi)-극복-, 그는 필사적으로 아름다움을 향한 여정을 걸어간다. 무한한 단계들은 그것들에로 도착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옴(estasi)에 대해서는, 자신 안에로 발전적으로 되돌아옴(instasi)이라는 내적 인간 안에 일치하고 있다. 수난들의 약탈(피부막)은 하느님께 향한 경주를 위한 조건이며, 자신 안으로 역시 돌아오는 조건이다. 외적인 옷을 다시 갈아입는 것에서 자신 안에 있는 이미지, ≪자유롭고 살아있는 풍경과 시선≫을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 강생의 응답: 새 창조

 

인간의 여정, 그의 달음질은 해낼 수 없다. 즉 ≪모래언덕은 바라보고, 앞으로 오르는 자에 따라서 계속해서 무너진다≫(Vita di Mose, PG 405C). 그러나 모든 진리 안에서 강생은 새로운 창조이다. 새 창조, 강생을 통해서 하느님은 현존이 되신다. 인간의 걸음들은 그리스도이신 바위 위에서 튼튼해 진다. 이제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바위 위에 잘 안정이 된다. 즉 모순적으로 그의 달음질(운동)과 그의 안정성은 동일한 것이다(Vita di Mose - PG 405BC).

 

창조물이 상처를 입었으며, 그래서 개방되었고, 완전히 열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에 의해 상처받고, 하느님께 비로서 열린, 인간의 마음 안에 심오하게 끼어들어 선발된 화살로서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였다. 생명이 이러한 창조물 안으로 침입하여, 말씀이 현존한다. 그의 수난을 벗어 버리는 것과 함께, 인간은 이제 그리스도, 새 창조, 새 인간을 다시 입는다.

 

인간은 자신 안으로 성장하며 발전적으로 들어가면서, 현재의 점진적 의식을 취하고 있다(여기에 니싸인의 모든 신비신학이 서있다).

 

이러한 따오르는 갈증이 항상 충족시킨다. 하느님-삼위일체의 같은 삶이 최고의 고요함인 사랑의 운동으로서 그리스도에 의해 항상 계시되었다. 항상 목마르고 항상 만족한, 하느님께 향한 그의 달음질 안에서 그녀 안으로 오시는 수락하시는 이러한 하느님, 영혼은 쉬임없이 자기 능력을 성장한다고 보며 그리고 자기 스스로 완벽함을 형성하는 그의 운동과 그의 원의 그리고 그의 정렬 안으로 하느님의 고요함을 통교한다.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강생을 통하여 변화되도록 모든 인간에게 신앙과 세례를 통하여, 그리고 각각의 세례의 현실화를 통해서 새 창조물을 그렇게 선물한다면, 인간도 역시 모든 인간적 본질에게 교회인 그의 단일성을 재발견하도록 선물한다.

 

) 신비신학 어휘에 대한 몇가지 노트

 

Parres a: 이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자주 나타난다. 의미는 하느님께 자유롭고 신뢰적인 접근이다(참고 에페 3, 12; 1요한 2, 28). 그레고리오는 이러한 총체적인 신뢰 안에서 안정적으로 다시 두는 세례의 기능 위에 요청한다.

 

당신 입의 입맞춤으로 나에게 입 맞추어 주시오(cant. 1, 2).

 

영혼은 빛의 원천에로 자신의 입을 다가가도록 원한다. 즉 그것은 세례의 성사적 입맞춤이다(조명). 동정의 영혼은 영적 삶의 원천에서 갈증을 해소하기를 원한다.

 

입맞춤은 그리스도와 일치이며, 영혼(anima) 안에 당신의 영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장소인 인간 안에서 이러한 이유는 입맞춤이 인간성에 말씀(Logos)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강생). 아마도 성 베르나르도의 경이적인 모든 강론을 다시 낭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Sermone II sul Cantico dei cantici).

 

≪입맞추는 입은 우리 살을 취하신 말씀이시다. 입맞춤된 입술들, 이 살이 승진된다≫.    S. Bernardo, Sermone II sul Cantico dei cantici, 3

 

sobria ebbrezza: 이 표현은 철학자 필론에 의해 취해진 것이다. 필론은 영의 선물, 참 지혜인 sobria ebbrezza를 이방적 지혜와 ebbrezza dionisiaca의 신비들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이 ebbrezza는 지상적인 것에서 신성적인 것에로 estasi를 생산한다≫

 

     Omelia V sul Cantico - PG XLIV, 873B

 

≪그 것은 영을 지나가는 것에서 영원한 것들에로 인도한다≫.

 

     Omel. V sullEcclesiaste - PG XLIV, 692C

 

sonno che vigilia: 깨어있고, 깨우치는 휴식: ≪예, 반대자들의 전례없고 모순적인 단일성과 혼동이 있다. "나는 잠이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깨어있다.."(Cant. 5,2)... 휴식은 몸의 조심을 멈추게 하고... 영은 자기 자신과 함게만이 살아있으며, 몸은 마치 무기력해 보이며, 마치 휴식과 나태의 종류로 처럼... 그리고 마음의 활동은 모든 순수함으로 수련된다.

 

모든 감각적인 기쁨에 잠든, 영혼(anima)은 신적인 밤샘 안에서 하느님의 현시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영혼의 밤샘을 이러한 휴식과 함게 실현하면서 합당함들을 줄 수 있다.

 

    Omel. XL sul Canto - PG XLIV, 993QCD

 

이 것은 모든 수난과 영혼의 깨어있슴의 휴식인 estasi와 고요함 그리고 헤시카즘(Hesychasm. 정적주의)에 대한 자체적 표현이다.

 

ferita damore: 사랑의 상처: 다시한 번 우리는 강생의 신비들의 잠재적인 강신(降神) 앞에 처해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은 선발된 화살, 당신의 독생자를 쏜 신적인 궁술가이다.

 

≪생명이 열리면서 내적으로 입장(入場)하면서, 마치 문과 길(통행) 처럼 상처로부터 만들어진 고통을 통한, 오 아름다운 참상과 달콤한 상처여! 왜냐하면 영혼(anima)은 사랑의 상처로부터 접촉되어 느끼기 때문이자 마자, 참상은 즉시 기쁨으로 변형된다.  Omel. IV, I sul Cantico - PG XLIV, 852B

 

이 말씀들은 주님의 말씀들의 주석이다:  ≪나와 나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저주할 것이다≫(요한 14, 23). 다른 텍스트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처를 고쳐주시는 심오한 정화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estasi와 영혼(anima)의 상처에 대한 다른 본문들, 즉 하느님 말씀에서 자신의 밖에 출구이다:

 

이것은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격한 고통에 대한 참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역시 그러한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씀의 의미일 수 있다.

 

≪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난 후, 왜 너는 그것을 치료하지 않는가?

 

  S. Giovanni Della croce, Cantico spirituale, strofa IX

 

()  결 론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신비신학적 사상가이다. 그에 대해서 풍부하고 많은 신학적인 면을 연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신학자이고, 시인이며 신비가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참 기원성은 정확하게 그가 무엇이든지 종합하는 천재성 안에 서 있다.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형제 바실리오를 ≪자신의 스승 그리고 우주의 경이함으로서≫ 생각하였다.

 

  그의 신비신학은 항상 그 방향이 모두 교의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 성사적이다. 그의 시는 말씀의 예술가인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가 쓴 자율성과 매력이 없는 시와는 다르다. 자주 니싸의 그레고리오는 그의 시가 어둡고 혼란스러운 스타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애매함과 나해함은 그의 사상의 심오함의 결과이다.

 

  그레고리오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있어서 최고 깊이가 있는 그리스 찰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에 대한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시인이다! ≪그의 사상의 분명함은 내적으로 조명되고,  하나의 신비신학적 삶이 된다≫. 그레고리오의 신비신학적 작품은 인격적 경험의 반향이다. 그리고 그레고리오는 신비신학의 참 창시자이다. 이점은 분명히 오리게네스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열매는 근본으로 이미 내용에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자 그레고리오는 항상 예기치 않고 새로운 것으로 항상 드러나고, 모든 천재 작가들은 그레고리오의 원천의 영향을 작게 축소할 수 없다.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같이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이고 또는 행정관리자였다. 바실리오는 자신의 불만족한 것을 공훈으로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실리오는 여러번 그의 형제의 솔직 담백함과 무능력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바실리오는 그의 동생에게 수도생활의 선언서를 쓸 것을 요청하였다. (-Trattato sulla Verginit -). 니싸의 그레고리오(혼인하였슴)는 역설적으로 수도자들의 영성 안애자였다. 바실리오가 돌아가신 후에, 그레고리오는 형제의 작품을 완성하는 마음을 먹었고, 수도원 조직 안에서 영성적 시각 만큼 신학적 시각으로 진행하였다.

 

6) 다른 동방 교부들

 

(1) 예루살렘의 치릴로 (313-387)

 

) 생애

 

치릴로는 313년 팔레스티나,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343년 증거자 막시모 주교(신앙 고백자, 소경, 절름발이가 됨)에 의해서 사제품을 받았다. 막시모 주교는 치릴로에게 348년 실시된 교리교육(catechesi)을 가르치는 사명을 위탁하였다.

 

막시모 주교 이후에 치릴로는 아리안니즘계의 아카이오 메트로폴리탄 주교의 동의와 함께 예루살렘의 주교가 되었다.

 

첫 째 유배(357): 아카이오는 치릴로를 주교좌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아리나계 주교를 임명하였다. 치리로는 안티오키아 그리고 타르소에로 축출되었다.

 

두 번 째 유배(359), 세 번째 유배(367)

 

) 교리 교수자의 모델

 

) 24개의 교리문답서: 세례받을 사람들(Catecumeni)에게 18 교리교수법을 실시하고 나머지는(catechesi mistagogiche)는 새로 세례받은 자들에게 행한다.

 

) 5 catechesi mistagogiche

 

 1. 사탄의 탄념과 신앙 고백

 

 2. 세례의 신비

 

 3. 견진

 

 4. 그리스도의 몸과 피

 

 5. 성찬례

 

) 교리교수의 내용:

 

 1. 원죄의 보편성(XII, 15)

 

 2. 교회의 보편성(XVII, 23, 26)

 

 3. 그리스도 안의 이중 본성(XII, 1)

 

 4. 견진성사의 효과(XXI, 3)

 

 5. 미사 전례의 실재론(XX, 3, 9)

 

 6. 성찬의 전례의 회생적 특징(XXIII, 7, 8)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정확한 표현을 하지못하여 치릴로가 아리우스주의자라고 정죄를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그의 박식하며 자연스러우며 단순한 문체때문이며, 그리스 추서록(Menologium 318)은 치릴로를 "참 사도적 교의를 위해 투쟁한 자"라고 찬양하고 있다.

 

) 성서와 전례

 

치릴로의 언어는 항상 성서이며 전례이다. 그는 예절에 대한 것 뿐만아니라 그 예절들의 설명하는 데 창시자로서 드러난다. 천국에로 돌아오는 것으로서 여겨지는 세례의 주제를 발전시킨다. 치릴로는 그리스도교 시작과 cantico dei cantici의 내용 사이의 병행성을 안정시키고 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암브로시오에 의해 발전된 주제이다. 치릴로로부터 출발하는 전례는 시리아 전례의 특색을 나타낸다. 이것은 두려움의 신비적 전례이미 일치의 신비적 전례(cantico dei cantici의 중요성)에 결합된다.

 

) 포착될 수 없는 하느님

 

치릴로는 전례적 지평에서 창시자이지만 또한 신학적 지평에서도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주제를 시작한 신학자이다. 이렇게 치릴로에 의해서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크리소스토모도의 신학도 달려있었다. 그는 동방전례의 창시자이며 mistagigia 신학의 창조자이다. 그는 카파도치아 교부들과 크리소스토모를 성격지워주고 있는 신적 존재의 절대적 초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7) 요한 크리소스토모 (+ 407)

 

) 생애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4년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369년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의 친구 바실리오와 함께 수도자로 살기를 원했다. 380년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381년에 부제서품을 받고, 5년 후에 플라비아노 주교에 의해 사제서품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398 2 26일 주교품-407)

 

첫 번째 유배(403)

 

두 번 째 유배(404-407)

 

죽음 후의 영광: 438 1월 요한의 계승자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좌에서 Martyrium di Cumana에 있던 성인의 유해를 다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에우도시아 황후의 무덤 옆에 배치하게 했다.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요한을 교회의 박사로 선언하였다. 6세기에 요한은 요한 금구(金口)로 호칭되었다. Bossuet는 아테네의  웅변 정치가(기원전 381-322) 데모스테네로 불렀다. 비오 10세 교황은 설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 사상의 몇가지 요소

 

  1. 수도생활

 

요한이 어머니 가까이에서 거의 수도적인 생활을 한다음, 다르소의 디오도로의 Asket rion을 따르면서, 그는 6년 동안 수도자였다. 그리고 수련기(noviziato cenobitico) 4년 이후 보다 더 엄격한 운둔생활(독거생활, hermitism)을 하였다. 이러한 요한의 경험이 그의 참 성소(聖召)를 계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앙인 공동체의 봉사에 사도적인 생활.

 

이점에서 그의 목표는 평신도에게 그들의 상태와 처지에 비슷한 영성을 제안하면서 그리스도 공동체의 영성적 내용을 향상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수도자들은 완벽함의 절정 자체를 첨부해야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     

 

     Adv. opp. vit. mon. III. 14  

 

서로 서로들은 하느님의 총체적인 사랑을 추구해야한다.

 

하여간 크리소스토모에게는 자유롭게 살아왔던 수도자의 가난과 동정성의 의무 가 유일한 차이점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공동체에 봉사가 요청되는 평신도의 삶 만큼 수도자에게도 동일하게 그렇다.

 

따라서 수도생활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교회 안에 절대적인 형태로 실현된 복음 정신의 가능성의 의미여야 한다.

 

수도자들은 종말론적인 표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주님의 말씀을 실현하기 때문이다(마태 22, 30). 분명히 그들의 동정성이 첫 번째 장소이다. 그러나 이 동정성은 그들의 모든 형제들을 향한 봉사 활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2. 윤리

 

요한은 윤리가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필요성을 위한 윤리가이다. 그는 유일한 목표로서 그리스도 사랑의 성장(성숙)을 지녔다.

 

  3. 평신도들의 사도성

 

크리소스토모의 사도적 열기는 성 바오로를 공부하면서 그를 이해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그리스도께 우리가 속하는 교의(혼합) 안으로 그의 근본을 발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형제들과의 연대감 안에서 그리스도께 결합된 단원, 멤버이다. ! 왜냐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도성의 의무라는 책무를 지기 때문이다. 요한이 말하기를 평신도는 "주교의 충만"이다. 그들 모두는 주교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4. 사회적 의미. 5. 성체성사의 박사  6. 노동에 관해

 

  요한은 관념적인 면보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사도적인 설교와 윤리적인 면의 활동이 두드러 졌다. 또한 신론에 대해서는 독특한 면을 발견할 수 없지만 인간학과 구원론적인 신학을 독창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윤리에서 자유와 은총의 관계를 잘 드러내고 그리스도교적 덕목을 적당한 성서의 예를 통해 구분하고 밝혀준다. 구원의 약으로서 자장 큰 찬사와 아름다운 비유를 사용하는 기도를 말하고 있다. 주석에서도 요한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 주석방법을 결합시킨다. 그럼에도 유비적 성서의미의 연구를 배제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의 결합방법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성 닐루스는 요한을 "세셰의 가장 위대한 빛"이라고 찬양했고, 펠루시움의 이시도로는 "비잔틴과 온세계 교회의 눈"이라고 칭찬하였다.

 

8)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444)

 

5세기 초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강생의 박사이다. 이러한 표현은 뉴먼의 표현에 의해 드러났다.

 

) 생애

 

 1. 주교직 이전의 치릴로

 

380년경 탄생.

 

 2. 주교직 (412-444)

 

 첫 시기 : 412-418

 

 둘째시기: 네스토리우스와의 싸움(428-444)

 

) 그리스도론 교의

 

참으로 언급된 그리스도론적 문제는 428년 보다 이전에 치릴로가 걱정하는 그 중심에 놓이지 않고 있다. 아타나시오의 교의에서 다시 보듯이, 치리로의 반대자들은 무엇보다 아리안니즘이다. 아폴리나리즘은 전혀 그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치릴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영혼의 요구를 이 시기에 역시 허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성적 입장은 이미 아타나시오의 기억과 닮았다.

 

복합적으로 말할 수 있듯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환경에 공통적인 스케마 말씀-(Logos-sarx)의 지시로 그리스도론을 움직이고 있다. 즉 육화는 마치 말씀이 육이 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존재의 모양 처럼 존재의 국면으로 생각된다. 요점은 그의 구원경륜 안에서 말씀에 관한 주의를 집중하는 말씀학 (Verbologia; Wordology)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 마지막 의미는 승천된 그분에 의해 말씀과 육 사이의 단일성의 강조 같이 알렉산드리아 정서 안으로 강하게 강조되어 남아있다. 마치 그것을 이해하고 정식화하듯이 그리고 구세주의 이중성 안에서 단일성의 문제를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육의 완벽한 단언이 이미 일어선 것 처럼 큰 흥미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사실적 배경에서 분명히 치릴로가 아타나시오적인 기원을 믿으면서 네스토리오에게 대비하기를 원할 것이라는 육화된 말씀 하느님의 유일한 본질 (mia fusis tou Theou Logou sesarkomene) 定式이 이해되야 한다. 즉 기본적인 지향은 fusis hypostasis의 상호 교환적 방법으로 실제로 사용하면서 말씀의 fusis와 함께 그리스도의 인간적 변천을 밀접하게 모으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와 네스토리오적인 것에 반대 입장으로 있는 치릴로의 그리스도론의 기본적인 논문들은 428년과 430 (II Letter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장엄하게 동의하고 읽혀졌다: 참고 DS 250-251) 사이에 치릴로가 네스토리오에게 썼던 두개 편지로부터 광범위하게 연역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430년에 치릴로에 의해서 소집된 알렉산드리아 시노드가 12개 파문들 (Dodici Anatematism)의 도출과 함께 네스토리오에게 보낼 것이다 (소위 치릴로의 III Lettera이다: 이 텍스트를 위해 참고. Migne의 편집: PG 77, 105-121; DS 252-263안에서, 네스토리오에 대해 이미 언급되었다고 말하면서 역시 단죄(anatematismi)들이 다시 운송되었다). 이러한 논문들 기본적으로 3편이다.

 

1. 결합 후에 그리스도의 hypostasis (또는 본질들)을 구분하지 말아야한다. (참고 III Anatematism, DS 254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결합 후에 유일한 그리스도 안에서 hypostasis들을 구분하고 그리고 존엄성과 권위와 권력에 대한 결합의 길을 위해서 만 그것들을 연결하며, 오히려 자연적 결합(enosis fusike)의 길을 위하지 않는 자는 파문된다》.

 

지향은 도덕적 성실성들이 그리스도의 일치의 한 개념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하느님의 단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치릴로가 아폴리나리우스로부터 유래되어왔으며 아타나시오에 대해서 다시 취했던 본질적인 결합 (enosis fusike)의 정식을 이용하였다. 육과 함께 말씀의 이러한 본질적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그 독특한 몸 안에서 거처하고 있는 인간적 영혼에 대한 비교를 사용하였다. 안티오키아적 환경에서 enosis fusike 정식이 그새에 딱 잘라 거절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신적 말씀의 자유로운 의지를 위해 결합이 된 사실을 충분히 구원한 것 같이 보지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2. 두 위격 또는 두 hypostasis (또는 본질들), 그리스도의 특유어들 사이를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느님 - 말씀의 육화된 유일한 hypostaeses (또는 natures: mia fusis》에 부여해야 한다.

 

단언은 근본적으로 직접 그리스도의 호칭들과 속성들을 설명하는 네스토리오적인 모양을 반대로 하고 있다. 인간 예수에게만 돌리는 것들이 있는 어떤 것들에 따라서, 말씀 하느님에게만 다른 것들 (마치 예를 들어 그리스도, 주님...)은 결합의 의미들이 있다. -인 속성 일치(communicatio idiomatum)를 이해하면서 치릴로의 전망을 말하는 것은 파문(Anatematisms)의 편지(소위 III Letter) 안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설명되고 있다. 《복음에서 현존하는 우리 구세주의 말씀들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두개의 다양한 hypstaeses 또는 persons에 그것들을 부여하지 않는다. 비록 두개의 다른 현실의 분리될 수 없는 결합에 의해서 결과된 것이 다시 알아진다 하더라도 사실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가 이중으로 있을 수 없다. 나머지와 같이 역시 인간은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이중적이지 않고, 그러나 두 요소들의 구성으로써 유일한... 그리고 그는 우리를 위해 의지적인 겸손으로 비우시면서, 어떤 동기로 그러한 겸손에 바쳐지는가를 말하는 그러한 면을 거부해야 했었는지? 하여간 복음 안에 있는 모든 말씀들은 한 위격(prosopon)에만 그리고 말씀의 육화된 유일한 hyposteases (hypostasei mia tou Logou searkonmene)에 관계를 맺게 한다. 사실 성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주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3. 말씀은 hypostaeses에 따라 (kath hypostasin) 그분이 취하신 육에 결합된다. (정식은 네스토리오에게 보낸 치릴로의 둘째 편지에서 그의 나타남이 드러난다[참고 DS 250-251]; 파문(Anatematism) II 에서 역시 다시 위치에 있다 [DS 253]. , 《만약 누군가가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이 hypostaeses에 따라 육에 결합되었다면..)

 

모든 가능성과 함께 kath hypostasin 표현은 치릴로가 마치 실천적으로 다른 kata fusin에 동등한 처럼 그것을 사용하였던에 의해 위격적으로 만들어 냈다. 그것은 2차 콘스탄틴노플 공의회 (553)에서 출발하여 오직 공식적으로 교의 용어로 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서있는 fusis hypostasis 사이의 치릴로적인 요지 안에서 실천적인 상호 교환성은 역시 (마치 우리가 말했듯이, 치릴로가 거의 결함에 대해서 차별없이 본질 또는 위격에 따라 말하고있다), 육화된 말씀이 누구인가에 대한 유일성의 분명한 단언이다. 그리고 매우 적게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차원들 상호 두 측의 현실을 만들고 있다.

 

미래적으로 우로는 이러한 그리스도론의 평가에 관해서 지원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이미 가치를 두었듯이 인간성과 신성, 말씀과 그의 육신 사이에 그리스도 안에서 대부분의 가치를 넘어서서  분명히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과 육 안에서 예수님 사이에서 그리고 구원적 계획과 하느님의 내적 생활 사이에서 연결을 강조하는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용어 자체로써의 부정확(특별히 fusis = hypostasis)은 분명히 어떤 단성론인 인상을 지지하고 있다. 다른 점에서, 한부분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육과 비교해서 말씀의 지배적인 기능에 대한 강조가 마치 그것 안에서 움직이는 말씀 하느님의 기구(organon)로써 예수의 인간성의 시각을 다른 것으로부터 육화된 Logos의 인간적 차원의 현실적 항구성에 대해 문제있는 단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인간성 역시 충만한 보호의 지시 안에서 음직이는 그리스도의 단일성에 대한 주제의 심오함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대신 날카로움과 함께 직관했던 네스토리오의 특별한 반성이 이 문제이다.

 

이러한 빛에서 치릴로의 입장으로 부터 만나게 된 저항들이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선견적으로 분명함의 긴 힘은 아직 모든 시점들 아래에서 만족할 만한 해결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하다.

 

3. 2 서방 라틴 교부

 

1) 프와티에르의 힐라리오

 

) 생 애

 

신분이 높은 가정 태생인 힐라리오는 320-325년 사이에 태어났다. 고향 프와티에르와 보르도(Bordeaux)에서 교육받았다. 350년에 가족들 아내와 딸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355년 직전 그의 믿음이 깊은 삶으로 인하여 성직자와 일반 신도들의 다수의 소원으로 프와티에르의 주교로 봉직했다. 그는 아리우스 추종자들에 대해 너무나 성공적으로 투쟁한 나머지 불란서의 주교들은 아리우스파와 결별하였다.

 

) 작품

 

De Synodis seu de fide Orientalium in 92 cap.: 불란서와 독일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동방 신앙 신조에 대한 평화적인 서간

 

De Trinitate libri XII: 유배생활 중에 저술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작품.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성과 함께 독생 성자의 영원한 출생론을 설명하여 아리우스 옹호자들과 사벨리우스론자들을 반대한 작품.

 

Libellius supplex I. ad imperatorem Constatium

 

Libellius supplex II. ad imperatorem Constatium

 

Libellius contra imperatorem Constatium

 

Libellius contra Auxentium

 

Commentarius in Evang. Matthaei

 

Commentarii in Psalmos

 

Tractatus de mysteriis 2

 

) 서방의 아타나시우스 힐라리오

 

  힐라리오의 저술의 중심은 그리스도론 교의 해설이다. 동방에서 아리우스에 대한 반박이 아타나시우스라면 서방에서는 힐라리오이다. 그렇다고 그가 가현설을 추종하였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강생과 양성의 가장 내면적인 동질성, 그리고 참 고난과 참된 죽음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칼체돈 공의회는 힐라리오를 강생의 신비에 대한 신앙의 교의를 결정하게 한 교부들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2)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339-397)

 

) 생 애

 

암브로시오는 340년에 트리어(Trier)에서 불란서의 근위 대장이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게 로마로 왔다. 그는 로마에서 라틴어 그리스 고전과 철학연구를 하였고, 수사학과 법률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370년경 발렌티니안 1 세 황제에 의해 북 이태리의 리구리아와 아이밀리아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아리우스파 주교인 아욱센티우스(Auxentius)가 세상을 떠난 다음, 자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투표가 그를 밀라노의 주교로추대하였다. 세례받은 지 8일 만에 주교직에 오른 것이다(374 12 7).

 

그가 필수적인 신학을 공부하며 그리스 교부와 필로(Philo)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암브로시우스가 주교가 된 이후 가장 먼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 때부터 자신은 가난하게 살았으며 쉬지 않고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도적인 열심으로 자신의 목자로서 직분을 잘 수행하였다.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품은 매우 온유하고 겸손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법을 수호하고 변호하는 일이 필요할 때는 굽힐 줄을 몰랐다. 아리우스파들에 대해 황제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양보도 없었다.

 

  전례 에식의 올바른 거행을 위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자기 교구의 전례를 중요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 것은 오늘날까지도 밀라노에 보존되고 있으며 독특한 교회 성가(cantus Ambrosianus)를 도임하였다.

 

) 작 품

 

1. 교의적 작품

 

Libri V de fide sive de Trinitate, 378: 아리우스파에 대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한 삼위일체론 저서

 

Libri III de Spiritu sancto, 380: 성령의 동일 본질에 관한 저서

 

Libri de incarnationis dominicae sacramento, 10: 주님의 강생에 관한 저서로 아리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에 반대한 저서.

 

Liber de mysteriis scil. sacramentis, 9: 새 영세자들에 대한 세례, 견진 그리고 성찬례에 대한 교육목적으로 저술한 책

 

Lbri II de poenitentia: 384년경 노바찌안파에 반대해서 저술한 저서. 교회의 죄사면권, 회개(통회) 제도의 필요성 및 선행의 공덕에 대한 중요성.

 

2. 주석작품

 

Hexa meron, 6: 바실리오를 추종하며 오리게네스로부터 온 첨부된 부분으로 되었다. 다윗 시편 해설, 22개 강연, 시편 118편 해설, 루가복음 핵설 10

 

단편들

 

De Paradiso, De Cain et Abel, Liber de arca et No , De Abraham, De Isaac et anima, De bono mortis(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훌륭한 저서), De fuga saeculi, de Iacob et vita beata, De Ioseph patriarcha, De benedictionibus Patriarcharum, De Elia et ieiunio(대부분 바실리오를 따르는 금욕의 찬가), De Tobia(여기서 고리대금업자를비판한다), De Nabuthe Iezraelite(빈자를 못살게 하는자에 대해 비판), De interpellatione Iob et David, Apologia Prophetae David ad Theodosium Augustum

 

3. 도덕적. 금욕적 작품

 

Libri III de officiis ministrorum, 391: 성직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권고

 

Libri III de virginibus ad Marcellinam: 동정의 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동정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저서, 부록(De virginitate, 20).

 

Liber de viduis, 15: 과부 상태를 천거한다.

 

Liber de institutione virginis sive de S. Mariae virginitate perpetua, 17: 마리아의 동정성에 반대하는 보노수스(Bonosus)에 비판한 저서.

 

Exhortatio virginitatis, 14: 동정성에 대한 권면.

 

Deus creator omnium, Aeterne rerum conditor, Veni redemptor omnium, Iam surgit hora tertia

 

) 신학방법론의 특징

 

암브로시우스는 교의적 주제의 그리스 스승인 바실리오로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윤리적인 면에서는 자신의 독특한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의 저서인 사제 직무론(De officiis)에서 이방적인 윤리보다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장점을 해설하고 그 안에서 개별적인 환경, 특별히 사제의 환경에 대해서 윤리적 행동 지침을 강조하고 있다. 주석적 작품에서 주로 유비- 신비적 방법이 등장한다.

 

암브로시오는 교회 행정에, 학문과 전례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수도생활을 권장하며, 이러한 것은 물론 관대한 온유함과 엄격한 고행을 수행하는 점에서 바실리오와 많은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암브로시오는 모든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의 주교들과 직분적 또는 우호적으로 교류를 활발하게 가졌다. 그의 연설의 힘과 감격적 어조로 회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암브로시오는 "하느님이 선택하신 공적인 교회의 교인이며 이단들에 반대하여 피의 위험에까지 이른 공교회 신앙(진리)의 가장 힘찬 옹호자"로 여겨졌다.

 

3) 지로라모(+419 또는 420)

 

4)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354-430)

 

작품

 

1. 철학적 작품

 

Contra Academicos, 3 386

 

De vita beata, 4

 

De ordine, 2 : 신적 세계질서를 악과 연관하여 논한다.

 

Soliloquia, 2

 

De quantitate animae

 

De magistro

 

De musica, 6

 

De dialectica, rhetorica, geometria, arithmetica et philosophia: 미완성 작품

 

2. 교의적 작품

 

De vera religione, 390년경

 

De fide et symbolo, 393년경

 

De fide rerum, quae non videntur, 399년경

 

Enchiridion ad Laurentium sive de fide, spe et caritate, 421

 

Der agone christiano, 396년경

 

Liber de fide et operibus, 413년경: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저서. 행위없이 신앙이 축복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 저술

 

De Trinitate, 15, 400-416: 성서와 인간 본성에서 추론한 삼위일체론의 논거

 

De civitate Dei, 22 , 413-427: 변증. 논쟁 부분(1-10), 교의 철학부분(11-22)으로 구성

 

3. 논쟁적인 작품

 

De jaeresibus ad Quodvultdeum, 429년경, 88(뀌드불트데우스에 이르기 까지 이단들에 관하여), Simon Magus에서 펠라지우스에 이르기 까지 이단의 특성묘사

 

마니교도에 반대하는 작품들

 

도나티스트주의에 반대하는 저술들

 

반펠라지우스 작품들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한 반론 저서

 

4. 주석적 작품

 

De doctrina christinana, 4, 397년경: 성서해석, 일부는 설교학 해설

 

구약주석 작품

 

신약해설

 

5. 도덕적 금욕적, 실천적 저서

 

Speculum

 

Liber de mendaico, Contra mendaicum

 

Liber de patientia 418 년경

 

Liber de continentia, 395년경

 

Liber de bono conjugali, 400년경

 

Liber de S. virginitate, Liber de bono Viduitatis(과부의 축복에 관한 저서)

 

De aulternis conjugiis, 2 419

 

Liber de opere monachorum, 400 년경

 

De cura pro motuis gerenda, 421년경

 

Liber de Catechizandis, 400년경

 

4. 교부들의 말기시대

 

4. 1. 동방 교부들

 

1) 증거자 막시모 (580년경-662)

 

) 생애

 

막시모는 콘스탄티노플의 가문이 좋은 가정 출신으로 580년 경에 태어났다.

 

그의 수사학과 철학적 지식의 박학함이 황제 헤라클리우스 1세에게 그를 1등 서기로 임명하게 했다. 그러나 고요함에 대한 사랑과 황실에서 온갖 술수들이 막시모를 수도생활을 하도록 하였다(630).  그러나 자신이 수도원장이었던 크리소폴리스 수도원을 떠나 633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단의지론(monotheletism)에 반대하였으며, 그 후에는 로마와 카르타고로 갔다.

 

  막시모의 주선으로 교황 마르틴(649-653) 64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단의지론을 파문하였다. 이때문에 마르틴 교황과 막시모는 진노한 황제 콘스탄스 II의 명령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오게 되었다. 교황 마르틴은 잔학한 매질로 죽었다(655). 막시모는 정통 가르침을 고수하는 이유로 옷을 벗겨 트라키아의 Byza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막시모는 유배지에서도 황제의 칙서인 티포스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여기 저기 끌려 다니며 모진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와 공의회에서 단죄받고 지방장관의 명령에 따라 채찍으로 맞았으며 혀와 오른손이 잘린 채 벙어리 상태에서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끌려 다녔으며 결국에 흑해 변두리인 Lazika로 추방되어 여기서 그가 예전에 예상했던 대로 662 8 13일 세상을 떠났다.

 

) 작품

 

quaestiones in locos scripturae difficiles

 

Expositio in Psalmum LIX

 

Lber asceticus

 

Capita de caritate, 400

 

그외 다수

 

) 신학 사상

 

막시모는 당대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 교회의 심오한 신비신학 주의자이다. 막시모의 흔들리지 않은 정통 신앙과 예리한 변증성과 심오한 사색을 통하여, 막시모는 정통 스콜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요 신비신학주의자가 되었으며 중세기의 신학에 오랜 영향력을 미치었다. 신앙과 지식,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그의 서술은 재치있으며 이들의 최고 목표는 신과 삼위일체론이다. 막시모의 대부분의 활동은 단의지론 (monothelism)과 단성론(monophysitism)적인 이러한 다른 두 가지설에 대한 반박에 헌신하였다.

 

) 그리스도론

 

이 시기에, 정교의 신학자는 고백자 막시모이다. 그의 사상의 부유함은 당시의 상황에서 정통적인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그 공적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편에서 반-단의지론적 반응이 깊숙하게 분명하게 골이 깊었으며, 다른편에서는 649년 로마 라테란 시노드에서(마씨모도  참가  했었다) 이미 제시된 그들의 입장들의 객관적 전제들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출구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신비의 시점을 대표하였다고 본다.

 

막시모적인 종합은 정확하게 동방 교회의 반성의 최고 스승들 중의 하나인 오리게네스 사상을 인격적 면으로 고쳐 읽음으로써 제시될 수 있다. 언급된 실재에 대한 교정에 의해 고백자 막시모의 입장이 심오하게 새로움으로 직관 될 수 있다. 현실(De principiis)의 오리게네스적인 시각에서, 창조된 현실의 국면들은 세가지 지평(triade)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 Stasis(모든 운동을 배제하는 관상적 참여의 부동안에서 Logika : 하느님이 그것을 생각하듯이 첫 창조의 그러한 우주이다.) ; Kinesis(죄와 함께 연결되는 운동, noes들의 넘어짐) ; genesis(창조물의 자유와 함께 연결된 지속적인 변동성 - 순환성 안으로, 더욱이 재생) 막시모에게 세가지 세계(triade)는 오히려 다른 것이다. genesis(하느님으로 부터의 기원) ; Kinesis(하느님을 향한 본질들의 운동) ; Stasis(하느님의 도달), 존재들(그리고 그들의 구체적인 실재와 그들의 역사성)의 운동은 부정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들의 목적(skopos telos)을 향해 경향을 띤 존재자체들의 본질적 차원이다. kinesis의 설명으로써 소개된 telos의 독특한 개념은 소비되는 stasis에 개관적으로 kinesis가 지향하는 순간에 의해, 그리스도교적 시각의 부정이라는 역사의 순환 개념을 극복하도록 허락하고 있다.《본질적 모든 운동[kineseos]의 시작은 운동 안에서 현실의 생산(generation : genesis)이다. 그러한 생산의 시작은 창조자로서 하느님이다. 창조물들의 본질적 생산의 목적[telos]은 무한성에 의해, 존재들의 소비 후에, 실현된 stasis 이다. 그 안에서 약하게 오고 있는 존재를 위해 움직이는 본질적 현실들의 모든 모또가 가라 앉는다. 왜냐하면 ’장소’, ’어떤모양으로’ 그리고 ’무엇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그러한 운동에로 약하게 오고 있다. 하느님을 원인적 목적(目的因) [telos] 으로써 지니는 순간으로부터 모든 모또의 용어가 두각을 드러내는 그의 편에게 자체 무한성의 것이다. 하느님은 그렇게 시작 그리고 모든 생산 [geneseos]의 목적 [telos], 그리고 존재적 현실들의 모든 운동 [kineseos]의 목적 [telos]이다》

 

Kinesis의 본질적 옳음은 막시모가 logos를 부르는 것 안에 있다. 즉 절대적 Logos 말씀을 언급하는 모든 현실의 내적 법률과 구조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에게 가치가 있다. 이것들은 마치 오리게네스와 같이 몸안에 죽은 nous가 아니라 하나의 소우주(micro cosmos)이다. 다시 말해서 우주적이며 영성적인 현실의 종합이다. 그사람 안에 그리고 그를 통해서 그의 인간적 사건 안에서 고유의 logos가 실현되며, 모든 우주는 말씀과 신화(divinization)를 향해 움직인다. 이것은 명백하게 Logos 안으로 흡수된 상태로써 이해되지 말아야 하며, 그러나 창조된 자체 현실의 충만한 실현화로써 이해되야 하며, 그것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시각안에서 창조되었다. 이 마지막 관점에 대해서 고려해야 할 것은,Quaestio LX AD Thalassium의 구절이다》.

 

모든 점에서 이것은 명백하게 결정적으로 우월하고 보다 심오한 단계에로 이동하기 위해 학파들의 대치 저편에 잘 이제는 제시된 그리스도론적 담화가 수반된다. 육화된 말씀 안에서 창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역동성과, 하느님을 향한 창조물의 운동의 종합이 실현되고 있다. 어떤 모양과 어떤 축소도 허용하지 않는 종합이다. 더욱이 강생 안에서 유한과 무한 사이의 분리 - 일치 관계의 더욱 혼란된 역사적 표현이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의 근본적이고 상호적 내재성이 모순되지 않으나, 서로의 근본적인 충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편으로 인간 본질이 그의 logos안에 충만하게 자기 스스로, 충만하게 실현되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성에서 시작되고 참여되는 Logos의 신적 현실은 그것을 향해 그의 움직임안에서 인간성과 함께 혼동되지 않고, 축소되지 않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틀안에서 막시모가 칼체돈 입장을 포착하는 방어가 모여진다. 즉 모든 축소, 특히 단성론적 타입을 반대로 해서 이다. 고백자 막시모는 그의 행동을 단활동주의(monoenergism) 그리고 단의지론( monothelism)에로 정당화 함을 증명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는 Logos의 것과 만남에 의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고유한 보다 더 심오한 logos를 실현하면서 Logos자체에 총체적으로 여유있게 되는 의미에서 최고로 해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점에 대해서 B. Studer가 주석하기를 ≪위격적 결합 위에 기초된 예수의 인간성의 완성의 개념은 마지막 결과들에 까지 고대원리를 인도하였다. "quod non assumptum - non sanatum...." 여기서 2개 본질들안에서 유일한 위격에 대한 교의는 결국 적합한 그러한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길게 활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변한 것은 하느님 스스로가 자유로운 인간으로써 나를 위해 고통당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당신을 반대해서 우리 각자의 반동을 저질렀으며,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셨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더 큰 유일성이 다양성 안에서 그렇게 실현됨에 따라서 살아있는 그리고 꼼꼼한 증명을 취했다》.

 

 2) 다마스커스의 요한 (7세기 말-754)

 

) 생 애

 

요한은 7세기 말 다마스커스의 훌륭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요한은 예루살렘의 사바 수도원의 은거처에서 공부하고 교회의 봉사에 전념하였다. 사제품을 받고 성화상 숭배를 변호하는데 많은 용기를 발휘하였다. 따라서 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 작품

 

1. 교의적 작품

 

Fons scientia: capita philosophica, de haeresibus 103 이단, espositio accurata fidei orthodoxae(물질적인 창조론-우주생성론, 인간학-, 말씀의 육화론, 구원론, 신인 찬양, 세례와 성찬, 죄와 종말)

 

De sancta Trinitate

 

2. 논쟁적 저술

 

3. 도덕적 작품

 

4. 주석적 작품

 

) 그리스 신학자

 

요한은 그리스 철학과 신학의 좋은 점들을 모아 종합한 자이다. 그는 주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에 의존했으나, 그의 박식함과 거룩함으로 그리스와 라틴 교회에서 높은 덕망을 누리었다.

 

4. 2. 서방 교부들

 

1) 대 레오 교황(440-461)

 

2) 대 그레고리오 교황 (5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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