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리를 오해했다(00) 교리를 모르면서 교리를 싫어함
한국교회에서 교조주의(Dogmatism, 敎條主義) 혹은 독단주의(獨斷主義)를 '교리(敎理)'라고 평가하며, "교리가 교회를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신학생, 목회자들이 "조직신학이 교회를 망친다"고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조직'을 '폭력조직'의 이미지에 연결시켜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 이제는 조직신학을 너머 “신학이 교회를 망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모든 말은 자유하지만, 학문에서는 그 개념을 정확히 알고 사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설립된 공법(公法) 기관이기 때문에, 반드시 법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교회의 공법성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다. 국가의 공법과 교회의 공법은 개념이 전혀 다르다. 국가는 자연법에 근거한 기관이고, 교회는 신 존재에 근거한 기관이다. 국가는 인간의 안정된 생활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고, 교회는 신의 섭리에 의한 신적 기관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ubi et quando visum est Deo)을 기뻐하는 인간이 모임이다. 사도 바울의 기쁨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다(빌 1장). 아버지의 기쁨은 아들이 주인이 되며 그의 백성이 하나도 잃지 않고 회복되는 것이다. 그 일은 오직 복음이 전파될 때에만 발생하는 특별한 일이다. 멜랑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5항, 1530년)에 ubi et quando visum est Deo(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합당한) 장소와 때, where and when it pleases God 혹은 where and when God has seen fit)를 표현했다. 마틴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명시적으로 지시했고, 멜랑톤은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때와 장소를 가진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관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은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복음에 집중했다. 그런데 17세기 후기 종교개혁 신학은 인식론에 근거한 이해 중심을 추구했고, 이러한 사조에 반발해서 다양한 실천을 추구하는 조류들이 발생했다. 18세기의 마지막에 등장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19세의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 의해서 유럽 사회는 이성중심사회가 되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 박사는 헤겔의 사상을 “절망선(Line of Despair)”으로 규정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유, 묵상할 때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 안에서 해야 할 것을 제안한다. 교회를 벗어나서 수행하는 하나님 사유는 교회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가치를 양산한다. 교회의 범주를 벗어나려는 경향은 많이 있었지만, 16세기 재세례파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대륙에서는 경건주의,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주의에서 중립적인 패턴이 형성되었다. 경건주의(Pietism)는 17세기 루터파 교회가 사회에서 안정화되었을 때에, 안주화된 교회를 개신교 정통주의(루터파)에 대한 비판으로 형성되었다. 청교도주의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로 시작된 종교개혁을 완성시키는 목표을 위한 다양한 의견들이었다. 그래서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청교도주의에는 자연스럽게 교회 밖의 요소들이 유입되었다. 교회를 벗어나 합당하게 하나님을 사유하려는 노력의 귀결은 유니테리언(Unitarianism)으로 된다. 유니테리언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와 소시니안(Socinianism)에서 연속되어 나온 산물이다. 누구도 세르베투스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그와 같은 유니테리언에는 우호적이고 거부의식이 없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외부의 가르침이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명료한 가르침을 세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명하게 세워지는 개혁을 해야 한다. 합당한 가치나 질서를 세우는 개혁은 사회개혁운동과 차이가 없고, 반드시 교회를 부정하는 형태로 귀결된다.
루터주의는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조약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일 등 유럽 북부 사회에서 안정화되었다.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에 정착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루이 14세는 평화 공존 협정인 낭트 칙령(Edict of Nantes, 1598년)을 폐기하는 퐁텔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 1685년)으로 위그노들을 추방했다. 결과로 약 20만 명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로이센(독일), 스위스 등지로 망명했다. 스위스에서는 칼빈과 베자가 설립한 제네바아카데미(1555년)는 18세기경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tini, 1623-1687)의 아들 알퐁스 튜레틴(Alphonse Turrettini, 1671-1737)는 헬베틱 협화공식(Formula Consensus Helvetica, 1675년)에 서약을 폐지하며(1706년, 1725년 완전 폐지), 계몽된 정통주의(Enlightened Orthodoxy)로, 이성, 관용, 보편성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으로 전환되었다. 알퐁스 튜레틴은 유니테리언은 아니었지만, 정통신학에 합리적 이성을 결합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는 칼빈파의 가르침이 유지되지 못했다. 21세기, 2000년에 스웨덴이 국교를 포기했고, 2012년에 노르웨이에서 루터파의 국교 지위를 폐기되었고, 2017년에 완전 분리되었다.
자유주의는 기본 정신은 교리를 벗어나, 합리적 이성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정리하려고 한 시도이다. 우리는 자유주의의 시작을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선구자)로 제언한다. 그런데 자유주의 옆에는 신령주의가 항상 함께 있다. 1900년대에 형성된 오순절주의는 합리적 이성이 아닌 주관적 경험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한다. 자유주의와 신령주의는 모두 교리를 거부하고, 교회와 관계없이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그려낸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이미지를 좋아한다. 100년을 지내면서 교회는 교회 밖에 좋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진리처럼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교리'에 대한 거부 의식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더한 것은 교리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 교리가 교회를 망친다고 상상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알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인격적이다. 알지도 모르면서 싫어할 수 있는데, 그 때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리를 모르면서 교리를 싫어하면서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합리주의(자유주의)와 신령주의(신사도주의)는 거대한 영지주의의 아류이다. 현대영지주의는 고대영지주의와 다르다. 고대영지주의는 이원론적 구도, 선과 악의 구도였는데, 현대영지주의는 일원론적 구도 선과 악을 구도화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판단한 규범, 이단을 판단한 규범인 교리를 극도로 혐오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자연 본성적 인간도 시대정신이 거부하는 교리를 자연스럽게 거부할 수 밖에 없다.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문제이다. 그래서 깨어있지 않은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자연스럽게 교리를 거부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교리는 이단을 배격하고 교회를 지킨 내용이다. 그런 교리를 그리스도인이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재세례파는 역사에서 많은 실수는 했는데, 대표적인 실수는 전쟁을 싫어하는 미명 아래서 유럽을 진격하는 이슬람을 환영한 것이다. 16-17세기는 교회 규율을 싫어하는 부류가 자연스럽게 교리를 부정했을 것이다. 당시 교회 규율과 교리를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교회 규율과 교리는 동일하지 않다. 교리를 교회가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적용해서 통제나 억압한 역사가 있다. 교회는 부당한 사례에 대해서 반드시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래서 부당한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부당하게 인지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에게 받은 위해를 교리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교회 지도자가 교리를 부당하게 적용해서 한 사례이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의 무지와 독단으로 인지해야 한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인 교회 지도자가 아닌 교회의 기본이며 필수인 교리에 향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제 교리가 교회를 억압한다거나, 교회를 무너지게 한다는 표현은 하지 말자. 교리는 교회를 세운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교리 위에 교회를 세웠다. 복음과 교리가 동일하다. 복음주의는 좋아한다면 교리주의도 좋아해야 되지 않을까? 복음주의는 성경본문과 복음전도에 전력한다. 교리주의는 성경본문과 신학사유를 좋아한다. 복음주의와 교리주의에서 성경본문을 취급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는 개인의 주관적 성향 혹은 컨텍스트(context)에 관심이 많고, 교리주의는 역사적-문법적 해석과 성경본문(text)에 관심이 많다. 복음주의가 복음이 아니고, 교리주의가 교리가 아니다. 결국 교회는 교리에 근거해서 선포되는 설교에 관건이 될 것이다. 교회에는 설교를 할 줄 아는 목사와 설교를 들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한다. 웅변이나 좋은 사색이나 상담이나 강론이 설교가 아니다. 교회의 설교는 복음이어야 한다. 죄인이면서 의인인 설교자의 입에서 복음이 나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교리에 대한 상당한 강도의 훈련을 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설교를 위해서 '교리사'(고대교회 교리사)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요구했다.
설교는 개인의 확신이나 경륜이나 식견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천상의 주께서 위탁하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설교가 있어야 교회이고, 그 설교를 들어야 그리스도인이다(계 1-3장). 그 설교는 반드시 교리 체계에 근거해서만 산출된다. 교리 훈련이 없으면 교리 체계를 세울 수 없다. 교리 체계가 없으면 개인의 경험이나 확신, 식견을 성경에 빗대어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감동적인 경험이나 확신으로 설교에 감동한다면 결국 도긴개긴일 뿐이다. 교리 없는 그리스도인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구도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교리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안에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수덕(修德) 종교가 아니라 진리 종교이다. 기도훈련, 명상훈련, 봉사활동 등을 통해서 종교심을 유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종교심, 믿음은 오직 진리를 인격적(지식)으로 수납해서, 인격적(의지)로 세워 인격적(행동)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지식이 있으면 의지가 발생하고 의지(정서)에 근거해서 행동하게 된다. 지식이 없는 의지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지식만 있는 지식은 헛된 사색이다. 그리스도인의 지식(아는 것)은 믿음이고 사랑이다. 그 지식이 교리이다. 교리가 없으면 믿을 수 없고 교리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께서 주신 교리를 사랑하라. 그 교리만이 교회를 세운다. 그 교리가 선포되는 설교를 사모하라. 그 설교가 여러분 영혼의 유일한 양식이다. 헛된 양식을 먹고 배부르다고 착각하지 말고, 참된 양식으로 배부르라. 참된 양식은 달지 않고 쓰겠지만, 그 쓴 맛이 생명이고 달 것이다. 그 쓴 맛 가득한 교리를 깊게 간직함으로 단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심장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쓴 교리없이는 꿀같은 진리가 나올 수 없다.
형람서원 고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