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 아브라함 창세기에서
제 2 편 구속사, 믿음의 족장들(창 12-50장)
제 1 장 아브람을 부르신 여호와(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아브람부터 시작된다. 창세기 12장부터 50장까지 족장들의 역사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애굽에서 탈출시킨 구속주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열방이 만유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한다. 아브라함은 모든 열방의 믿음의 조상이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요, 둘째는 홍수의 심판후 새 시대의 첫 조상은 노아이다. 창세기 1-11장까지 두 조상, 아담과 노아가 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이 등장하는데, 데라의 아들로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온 믿음의 사람이고 믿음의 조상이다. 11장 27-32까지 데라의 족보(톨레돗)이 있다. 데라는 우르에서 살다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32절). 데라가 언제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31절).
창세기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기록된 위인이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이다(셈의 10대손). 창세기는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 3/4인 창 12장-50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과 가족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은 12장부터 25장까지이다. 11장에서 데라의 아들로 등장해서, 24장 아들 이삭을 혼인시킨 후에 175세로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고(창 25:7), 이삭은 40세에 혼인했다(창 25:20). 년대기로만 보면 35년 동안 혼인한 이삭과 아브라함이 살았다. 아브라함은 160세에 이삭의 아들 야곱과 에서를 보았고, 15년을 그들과 함께 살았다.
1. 아브람의 시대와 환경
아브람 부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그것은 데라와 함께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창 11:31). 창 12:1, 창세기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곳이 우르인지 하란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스데반 집사의 설교 행 7:2-4에서는 아브라함을 메소보다미아에서 부르신 것으로 말씀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랐고 아버지도 함께 떠나 하란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아브람의 시간은 주전 2000년경 시대, 우르 3왕조(주전 2112년부터 주전 2004년까지 수메르 왕조) 시대로 추정한다.
성경의 연대를 살펴보면 노아의 연대가 주전 3,000년 전이요,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가 된다. 노아 연대에 근접한 시대에 바벨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바벨 시대부터 달과 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김희보).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바벨이 무너진 장소로 추정되는 곳마다 작은 탑들을 있고 그 정상에는 월신(Nanna 혹은 Sin: 난나, 수메르의 달의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다. 이러한 탑들을 지구라트(Ziggrat)이라 부른다. 뜻은 거룩한(혹은 높은) 제단이라는 말이다. 이 유물을 근거로 아브람 시대에 이미 우르 지역에 우상 종교가 크게 성행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달신은 남신이고, 태양신은 여신이다. 일본의 태양신은 아미테라스(여신)이다. 수메르에서 달신 '난나((Nanna)'는 태양신 '우투(Utu)'의 아버지다.
여호수아 24:2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정들은 열심히 우상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전 2,000년전 아브람 시대의 문화에서 우상 종교가 성행한 모습이 고고학 유물들로 발굴되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수 24:3).
아브람 시대 이전에 높은 바벨탑을 세울 만큼 당시의 건축술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람 시대에도 건축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다.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굴된 아브라함 시대(주전 2,000년전) 집터들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집들은 벌써 구운 벽돌을 사용했었고 보통 집(가정)들은 2층이 없는데 10개에서 20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살림방들은 윗층에 있었고 부엌과 빨래터 같은 것들은 하층에 있었는데 그 맨 뒷 방에는 반드시 우상의 제단을 둔 골방이 있었다. 그 시대에 우상숭배가 일상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그 밖에도 당시 아이들이 배우던 학교터에서는 기하학의 도형들과 토판에 새겨진 구구법과 그들의 상형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자료들을 감정한 결론은, 즉 아브람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방의 문화는 그 시대에 벌써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그들의 물질생활의 수준도 풍요했던 것을 알 수 있다(김희보). 수메르 문명은 인류 문명의 기원으로 본다. 성경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문명의 근원지에서 빼어내어 외로운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켰다.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암흑과 부패 시대이다. 아브람이 살았던 '우르'라는 이름의 뜻도 ‘빛’ 혹은 ‘불’이라는 뜻으로 우상 숭배와 연관된다고 많은 학자들은 제언한다. 그래서 우르는 불을 숭배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거기에서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 상황에 있는 아브람을 여호와께서 부르셨고, 아브람은 그 말씀에 순종에서 우르를 떠났다. ※ 데라를 부르셨는지 잘 알 수 없다. 아브람을 부르셨고 데라가 아브람을 따랐다는 의견이 있다.
아브람 시대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이었을까? 연대기로 보면 아브람 시대에 셈이 있었다. 셈은 600년을 살았다(창 11:11). 창세기 5장 아담부터 노아까지 모두 10명(10대)이고, 창세기 11장(10-26절) 노아의 아들 셈으로부터 아브람까지 모두 10명, 10대이다. 데라는 205세에 죽었고,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다. 데라는 70세에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았다(창 11:26). 아브람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창 12:4, 하란을 떠날 때). * Charrhan(LXX), Haran과 우르는 지정학적 거리가 크다. 아브람은 우르를 떠나 하란을 경유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갔고, 데라는 하란에 머문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살았다. 이는 아브람이 25년이 지난 뒤에 아브라함이 되고 100세에 득남한 것을 하란에 있는 데라가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데라는 35년을 더 살았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조상들의 증인으로 설 수 있었고, 노아에서 아브람까지도 수명에 많은 차이는 있지만 조상들이 증인 역할을 했다. 즉 아브람 시대까지도 구전으로 창조(반역), 심판과 홍수(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 9:28에 기록으로만 보면 노아는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다. 노아시대도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한 패악이 가득했고, 홍수 후에도 바벨로 심각한 심판, 언어 혼잡의 심판을 받았다(창 11장). 그리고 셈의 후예인 데라, 아브람은 우르 지역에서 살았다. 홍수 심판, 언어 혼잡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가인의 습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아벨의 후손도 사라지지 않았다. 구속사는 노아의 후손에서 셈의 후손 중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전환되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롬 1:12),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으로 생활 체계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 우상을 만드는 일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에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부류이다. 그 부류인 데라의 아들 아브람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부르셨다. 그 부르심이 아브람은 순종해서 우르 땅을 떠나, 하란을 경유해서 가나안으로 갔다.
2. 아브람 세겜에 도착과 첫 시험
아브람이 여호와의 부르심을 따라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다(창12:4). 75세는 우르에서 떠날 때인지, 하란에서 떠날 때인지 잘 알 수 없다. 창 12:4을 근거로 75세에 하란을 떠난 것으로 세울 수 있다.
창세기 11:31에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라고 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버지 데라 때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나안 땅과 조상의 땅 우르의 중간 지점인 하란에 머물었다. 우르에서 나일강 사이에 있는 가나안과 하란을 연결하면 초승달 모양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이라고 한다. ※ 이 용어는 미국의 역사학자 브레스테드(James Henry Brestead, 1865-1935)가 처음 사용했다.
하란에 머물었던 이유는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사도행전 7:4을 근거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 (가나안)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버지 데라가 죽은 뒤에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브람의 나이가 75세가 되지 않아 문제가 된다. 우리는 아브람이 데라를 하란에 놓고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다. 예수께서는 장사를 준비하는 제자들에게 장사를 죽은 자들에게 맡겼다(마 8:18-22). 히브리서 11:8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며..."라고 했다.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확실했지만, 족장으로서 후계자를 세우지 못했다. 아브람의 목적은 땅보다 씨(seed, offspring)에 관심이 있었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해서 알 수 없는 땅으로 이동했다. 아브람은 생존을 위해서 이동했다. 그것은 세겜에서 곧 애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 세겜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브람이 도착했을 때 가나안 땅에 심각한 기근이 있었다. 사도행전 7:5을 보면, "그러나 거기에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그에게 주지 아니하시고..."라고 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기근으로 생활이 불가능했다. 아브람은 임의로 판단해야 했다. 그의 판단은 풍요의 땅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창 12:10을 보면 아브람은 세겜에서 "애굽으로 떠나갔다". 성경에 '애굽(Egypt)'이란 말이 이 부분에서 처음 나온다. 애굽은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애굽을 살린 사람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었다. 애굽이 그 은혜를 잊었을 때에 큰 세력이 된 이스라엘은 애굽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남유다가 멸망할 무렵에,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많은 유다인들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했다. 헬라 지역에서 거주하는 유다인들이 히브리어를 잊은 후손들 때문에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주전 3세기). 헬라어 구약성경에 풍부한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가 쉽게 드러나게 번역된 것은 적지 않은 신비이다.
아브람은 애굽의 바로에게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고(창 12:11-13), 그런데 바로는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인을 추진했다(창 12:14-15). 바로는 아브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는데, 여호와께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다. 결국 아브람 일행은 애굽에서 추방되었다. 만일에 하나님의 한 보호가 없었더라면(창 12:17 참고) 그는 거기에서 아내를 잃어버렸을 것이다(창12:12-20).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셨다. 아브람은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고, 여호와는 메시아의 계보를 위해 사래(사라)를 보호하셨다.
제 2 장 아브람과 롯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세겜에 도착했을 때, 가뭄 때문에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내를 동생이라 속였고, 바로의 청혼으로 아내를 빼앗길 뻔 했다. 그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아내를 빼앗기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 애굽의 바로는 아브람에게 많은 물질을 주었고, 다시 빼앗지 않았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올 때 재산이 더 많이 증가되었다. 아브람에게 많은 물질 때문에 자기의 의지처인 롯과 헤어지게 되었다.
창 13:1-2에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게 되었다. 은금만 아니었다. 많은 가축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브람은 318명의 군인이 있는 집단이었다(창 14:14). 아브람에게 증가된 물질은 사랑하는 조카 롯과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롯도 규모있는 족장으로 보인다. 창 13:7에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그들의 소유가 많아서....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느니라" 말씀했다. 풍부해진 물질로 말미암아 아브람과 룻이 갈등하고 헤어졌다. 아브람에게 큰 근심이요 슬픔이었다. 아브람의 상속자가 될 조카 롯이었는데, 롯이 삼촌과 경쟁 관계에 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다.
(창 11:27, 28). 아브람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를 아들처럼 여겼을 것이다. 75세의 아브람에게 조카 롯은 조카이며 아들이었을 것이다(창 12:4). 그런데 많아진 재물로 인해서 갈등이 발생했다(창 13:7). 생존을 위해서 떠났는데, 생존을 위한 재물이 증가하자 원하지 않은 분리가 발생했다. 의지처를 잃은 아브람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물은 그 소유자에게 많은 근심으로 찌르는 것이다(딤전 6:10). 그럼에도 재물에 대한 집착이 피할 수 없다. 재물이 많아지면 싸움과 분리가 발생한다.
아브람은 롯과 작별할 때에, 창 13:8,9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조카에게 제언했다. 그런데 조카 롯은 장유유서의 법이 아닌 먼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땅을 선택했다. 창 13:10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본즉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더라" 이것은 롯의 소돔과 고모라를 보았을 때에 매우 흡족했다. 롯이 본 땅은 광야의 환경에서 초록 들판이 있던 지역으로 보인다. 롯이 바라 본 그 땅고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애굽 땅과 같다"고도 했다. 롯의 마음은 풍성한 애굽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아브람도 그 땅이 마음에 들었지도 모른다. 그러나 먼저 조카 롯이 선택해서 아브람은 반대편 광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큰 충격은 척박한 땅이 아니라 조카 롯이 자기 곁을 떠난 것이다.
롯이 선택한 땅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다. 창 13:13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다. 롯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가는 세속적 신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롯은 택자의 한 유형인데(벧후 2:7),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모습이 그대로 있는 유형이다.
아브람과 롯은 풍성한 재물 때문에 분리되었다. 아브람은 조카 롯과 풍성한 재물에 대한 집착이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제 3 장 아브라함의 받은 약속
조카 롯이 떠난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창 13:14-15).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두번째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때 여호와께서 조카와 이별한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다. 아브람은 어떤 반응이 없이 장막을 헤브론으로 옮겼다(창 13:18). 아브람은 장막을 헤브론으로 옮겨, 마므레 상수리 나무(the sacred trees of Mamre)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1. 아브람과 롯이 떠난 이야기
창세기 13:14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창세기 13:1-13에서 아브람과 롯이 헤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했다. 그들이 분리된 이유는 애굽에서 나오면서 증가한 재물 때문이었다. 증가한 재물 때문에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다. 땅이 두 사람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 다툼을 본 아브람은 그러한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창13:7-8).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나선 골육 형제(삼촌과 조카)가 서로 다툰다는 것이 좋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자기 골육인 롯과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창 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목자들의 다툼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두 방안을 롯에게 제시했다. 롯과 헤어질 결심과 롯에게 선택권을 부여한 것이다. 롯의 답변은 여러가지이다. 헤어지지 않을 결심, 선택권을 삼촌에게 양보할 결심, 자기가 더 척박한 땅을 선택할 결심 등이다. 그러나 롯은 모든 변수가 아닌 아브람의 선택을 수용하고, 자기가 좋게 보이는 땅을 선택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지만 자기 지분권을 계승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소유가 증가하자 롯은 자기 소유에 만족하며 아브람과 헤어져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조카 롯을 마지막까지 보호했다(창 14장).
2. 롯이 떠난 아브람에게 주신 첫째 약속(후손과 땅) 그리고 둘째 약속
국가의 3 요소를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한다. 창세기 13:14-15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영토(땅)와 후손을 말씀하셨다. 창세기15:1에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이 등장하는데, 둘째 약속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호와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것을 계시의 점진성(Progressive revelation)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바로 전체를 보여주시지 않고 점진적으로 보여주신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는 한계에 의한 훈련이다.
아브람은 후계자가 사라진 뒤에 다시 큰 불안과 허망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후손에 대한 약속에 이어서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후손이 사라졌는데 후손에 대한 말씀과 땅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아브람의 후손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아브람은 다음 단계에 충성된 종 엘리에셀에게 후계(상속자) 계승을 생각했다(창 15:2).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지만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자기의 상속자를 롯을 생각했는데 분리가 되었을 때에,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했었다. 아브람은 자기 상속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창세기 14장은 롯이 들어간 소돔 땅에 발생한 전쟁이다.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소돔이 패배했고, 조카 롯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창 14:13).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장막에 있던 318 명, 잘 훈련된 병사들을 발병해서 롯 구출 작전에 들어갔다. 아브람은 빠른 결정과 탁월한 전략으로 연합군에 사로잡힌 롯과 소돔 왕 일행을 구출했다(창 14:16). 모든 "재물과 부녀와 친척들을 다 찾아왔다(창 14:16). 이 때에 구원을 받은 소돔 왕은 아브람에게 사례를 표했다.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창 14:21)고 했다. 그러나 소돔 왕의 제안에 대하여 아브람은 깨끗이 거절했다. 아브람이 거절한 이유는 자기 목적이 조카 롯을 안전하게 구출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의 사람의 한 특징은 자기 목적에 충실하고, 둘째 유익에 대해서 큰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다.
창 14:22-24, 아브람은 소동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했다. 아브람은 세상의 법이 아닌 믿음의 법의 사람이었다. 세상의 법은 승자독식 원칙(Winner-Take-All Market)인데, 믿음의 법은 자기 분깃을 지키며 나가는 것이다. 능력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을 하며 함께하는 것이 정의이다. 자기 범위를 넘어서는 재물에 대해서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브람은 이미 재물에 의해서 아픈 이별의 상처가 있었고, 재물에 대해서 큰 가치를 두지 않은 믿음의 상태였다.
그러나 아브람은 정당한 분깃(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 창 14:24)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예물, 십일조(창 14:18-20)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 한국 교회에 있는 십일조 규례는 한국 교회가 경제적 위용을 갖는데 큰 기여했다. 세계에서 찾기 어려운 사례이다. 모든 종교에 연보 및 기부가 있는데, 한국 교회의 성도들의 다수가 충실하게 십일조 규례를 지킴으로 한국 교회가 강력한 위용을 갖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조직이라면, 조직의 부강의 첫째 조건은 경제력이다. 그러라 교회는 법적 조직(constitutional organ) 이전에 주의 몸된 기관(organism)이다. 법 기관과 몸된 기관의 머리가 같아야 하는데, 법 기관의 머리가 몸된 기관의 머리의 말씀에 불일치할 때가 있다.
롯을 구출하고 돌아온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하셨다. 김희보 박사는 아브람이 연합군을 격퇴하면서 그들의 반격을 두려워했다고 제시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격려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이 외롭거나 두려울 때에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셨는데,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방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아브람의 두려움은 상속자에 대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끌고 밖으로 나가셨다(창 15:5).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는 표현은 임마누엘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캄캄한 밤하늘을 우러러 보게 했다. 그리고 저 밤하늘의 별을 지시하면서, 아브람의 자손에 대한 번성을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영토, 후손들이 살 거주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제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그리고 아브람은 롯과 소돔 왕을 구출했지만 그들의 영토에 들어가지 않고 헤브론으로 이동했다. 세상의 보호와 공존을 피했지만, 두려움까지 피하지 못했다. 그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상급이며 방패가 되어주셨다(창 15:1). 그리고 세번째 약속을 주셨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했었고, 계속해서 가나안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주신 첫째 약속(창 13장)과 둘째 약속(창 15장)의 차이는 영토와 후손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일단 아브람의 혈통적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다. 아브람의 후손이 거주할 영토에 대해서는 명확한 말씀이 없다. 아브람은 헤브론을 근거로 생존했다. 결국 헤브론에서 죽은 사라의 장례를 묘지를 마련했고,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가 장례되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은 12지파에 분배된 땅에서 거주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왕국 이스라엘(다윗 왕국)을 범죄함으로 상실했다.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 믿음의 후손들을 이끌기 위한 메시아의 출현으로 세상적 영토가 아닌 영적 나라를 그리고 성령의 후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었다.
제 4 장 아브람과 여호와의 상급(창 15: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다(창 15: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큰 상급(thy exceeding great reward)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의 큰 상급만이 아니라 그의 방패가 되신다고 하셨다.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건지셨다. 아브람이 시날왕 아므라벨과 그의 연합군을 쳐서 이긴 후 사랑하는 자기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을 구했다. 그리고 소돔왕과 고모라의 왕은 물론, 그들의 백성들과 재물들도 다시 찾았다(창14장). 김희보 박사는 이러한 여호와의 인정은 아브람이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의 안전망에 의존하지 않고 여호와 앞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아브람은 세상의 화려함과 풍요로움 뒤에 있는 죄악된 모습을 보았다는 것도 된다. 또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주관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브람은 인류에서 가장 번성한 우르에서 나온 위인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들어가는 것은 차라리 우르에서 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우르에서 나왔는데 그보다 못한 소돔과 고모라에서 사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아브람은 소돔과 고모라의 세상 영화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자기 양심의 상태를 고백했다. 그러한 것이 결코 유쾌하거나 안전함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러한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심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영광에 비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주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복된 모습이다(시 73:25).
히 11:24,25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하셨다. 모세도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악의 기쁨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주셔서 믿음의 지도자로 삼으셨다.
아브람의 동문서답.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에 대한 답변은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다"(창 15:2)라고 답변했다. 상속자가 될 롯이 결별되자 집안에서 가장 충성된 종에서 상속자를 세우려 했다(창 15:4). 그 아브람을 이끌고 나가셔서,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보이면서 후손의 규모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 "후손이 셀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의 내용이 아닌, 그 말씀을 하신 여호와를 믿었다고 제시했다(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갈라디아서 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했다. 그 자손이란 복수 아닌 단수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와서 비로서 [그 자손](원문은 단수로서 씨)을 그리스도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그 때 그것을 알았다. 그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 했을 때 육신의 아들만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장차 나타날 자기의 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후손들이 영적 가나안을 상속할 것을 믿었었다(히 11:13).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에서 드릴 때에 부활을 보았다(히 11:19).
창 15:5에 보면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하며 탄식하던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여기[네 자손](원문의 씨,단수)이란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단수는 외아들 이삭, 그리스도를 지시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 전체가 한 몸이기 때문에 전체를 한 단수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에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여호와께서 하신 약속과 그 내용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그 약속하신 이(여호와)를 믿는 것이다. 아브람은 특이하게 많은 후손이 이루어질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여호와를 믿었다. 창 15:1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지극히 큰 상급인 것을 믿은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께서 그 아브람과 언약을 체결하셨다(창 15:17). 이 언약에서는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감으로 체결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언약의 증표가 없다. 언약의 내용 아브람의 후손이 아브람이 밟은 땅을 줄 것이라는 것인데, 언약의 증표가 없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창세기 15장에서 시작되어 창세기 17장 할례를 행함(언약의 증표)으로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삭과 야곱이 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사됨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자기 하나님의 별칭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제 5 장 아브라함의 실수
아브람(아버지는 높으시다, 큰아버지)과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이 있다. 75세에 부름을 받았고, 99세에 할례를 받았고,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변경되었다(창 17장).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 속이는 일을 한다(창 12장, 창 20장). 아브라함의 행동은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다. 다만 미루어 추측하면 아브라함은 생활 자체가 생명을 건 일상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족의 생존을 위해서 아내를 내놓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시대에도 이해할 수 없는 문화(아내를 나그네에게 내놓는 일)가 존재한다. 아브라함의 실수에서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함께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 외에도 하갈을 첩으로 얻는 일 등 몇 실수가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아브람과 함께 하셨고, 아브람도 위기 때마다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며 순종했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갖는 실수는 믿음의 성숙에 따라서 실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람이 하갈을 첩(妾)으로 취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는 여호와의 약속을 받았었다. 그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아브람이 75세에 가나안에 들어와서 10년을 지냈지만, 조카 롯과는 헤어졌다. 아브람의 그의 종 엘리에셀로 상속자를 이루려고 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해석을 여자 사래가 했을 개연성이 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창 16:2).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들었다. 아브람의 씨에서 나온 아들이 상속자가 된다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미숙하게 이해한 것이다. 아브람의 실수는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자처한 이슬람이 형성되는 근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당시의 최선이다. 최선에 대해서 냉혹한 평가는 좋지 않다. 누구나 현재의 최선이 진리가 아닐 확률은 너무나 높다.
아브람의 생애는 많은 분량이 있다. 거기에서 아브람은 많은 실수를 한다. 가나안에 머물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 그래서 결국 조카 롯과 헤어지는 것 등이다. 아브람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승전에 대한 보상금도 거절했다. 아브람에게 실수는 아브람이 점점 여호와께 가까이 가게 하는 인도자였고, 여호와만을 붙들게 하는 교사였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겪은 수 많은 실수가 그를 망하게 하거나 믿음에서 후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계기가 되었고, 믿음은 성장했다.
아브람과 하갈(여종)에게 낳은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최선이었지만 실수였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된 후(할례를 받은 후)에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창 20장).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의 품 안에 들어올 사라를 취하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막으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속은 아비멜렉은 오히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을 때, 아비멜렉과 가족의 일(태를 닫음)이 해결되었다(창 20:17-18).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며 생존하려고 했지만, 여호와께서 아비멜렉 집안에 태를 막음으로 집안 모든 일에 변고가 발생했다. 이는 사라에게 태어날 아이의 특수한 성격을 지시하며, 동정녀 탄생(여인 후손의 아들)에 대한 복된 훈련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 자기 전능하심과 자기의 선하심을 계시하신다. 그럴 때 인간의 실수가 하나님 앞에 정당한 가치를 얻는 것이 아니다. 실수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면, 실수에 대한 판결은 실수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수 없이 실패하는 시도에서 합당한 판단을 받을 수 있다. 세상은 성공에 대해서만 평가하고 존중한다. 시도하는 것이나 실패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서 함께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히브리서 10:26에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심을 본다. 믿음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성품은 '인내'이다. 아브람은 10년 동안 갈 길을 모르면서도 잘 참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했지만 실수를 범했다. 아브람은 15년을 더 인내해야 했다. 99세의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방문하셔서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을 바꾸며 할례를 명령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은 아브람이나(창 17:17) 사래는 웃었다(창 18:13).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삭(비웃음)이 되었다. 다만 사라가 그 비웃음을 "다함께 웃으리라"고 의미를 바꿨다(창 21:6).
참고로 아브람이 그러한 실수를 했던 것을 옛 습관으로 분석했다(김희보). 아브람 시대에 함무라비 법전(Hamurabi Code)이 있었는데, 바벨론에 있어서는 아내된 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어 자기의 자녀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이 있었다. 함무라비의 경전 밖에도 그러한 법률의 흔적이 다른 고고학적 자료에도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방법은 지금도 세계에서는 대리모라는 제도가 합법적인 나라가 있다. 아브람은 자기가 살았던 고향,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있었던 풍속, 첩을 얻게하는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김희보).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순종까지 수행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육적 후손이 아니라 영적 후손이기 때문이다.
제 6 장 아브라함의 시련
창세기 16장은 아브람이 사래의 종 하갈로 이스마엘을 낳은 기록이다. 아브람이 결정할 때는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 후(창 16:3)이었고, 이스마엘을 낳을 때 나이는 86세였다(창 16:16). 창세기 17장 첫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99세 때의 일이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이란 할례를 받음과 그 아내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는 해이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본 후 다시금 이삭을 낳기까지 13년이란 긴 세월이 공백으로 뛰어넘었음을 본다.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동안의 아브람의 사적에 대한 정보는 없다. 아브람의 사적에는 이런 공백 기간이 있는데, 이스마엘을 낳은 후의 공백은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브람이 얻는 아브람의 자식인 이스마엘의 상속자 지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13년의 침묵은 이스마엘의 장자권이 인정되지 않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침묵은 백성에게 어둠이고, 어둠에서 빛(주의 말씀)이 있다.
흔히 히브리 사람들은 13의 수를 고난과 시련의 수라고 생각했다. 에스더 3:12,13에 보면 하만이 유다 민족을 전멸하기로 결정하고 왕이 조서를 내린 날이 [정월 13일]이었고, 그것을 집행하기로 결정한 날도 "십이월 곧 아달월 13일"이었다(이밖에도 창 14:4, 창 47:9 등도 참고). 13이란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13의 숫자를 유쾌하기 받지 않는다. "13일의 금요일"이란 제목은 공포 영화의 대명사이다.
아들을 낳은 하갈이 임신하면서부터 주인인 사래를 무시하며 갈등이 촉발되었다(창 16:3-4). 하갈에게 무시 당한 사래는 아브람에게 하소연을 했다(창 16:5). 결국 하갈은 아브람의 집에서 쫓겨났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을 방문해서 여주인 사래의 말을 듣도록 권면했다(창 16:7-11).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의 말씀을 듣고 하갈은 사래의 장막으로 들어와,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창 16:15). 집으로 들어온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듣고 여주인 사래에게 충성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가 없는 사래에게 불만이 있었고 결국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면서 추방되었다(창 21:8-21). 하갈의 눈물 어린 호소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살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활 쏘는 자가 되었다(창 21:19-20).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삭의 장막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야곱과 에서는 형제이지만 함께 장막에 거주하지 않았다. 우리의 장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장막이다.
아브라함이 얻은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 큰 걱정이지만(창 21:11), 자기 뜻대로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사래의 말을 들어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자기 아들에 대한 연민은 부정의 기본이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했던 자기의 후궁과 잠을 잤던 압살롬에 대한 사랑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의는 혈육의 정을 능가한다.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보면서 13년을 지냈다. 성경에 말씀은 없지만 하갈이 기세 등등하게 살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창 17:24, 25에서 아브람은 99세에 할례를 받았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가 되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스마엘로 양피를 베었는데 13세였고, 하갈은 하갈이었다. 참고로 유대인의 성인식, 바르 미츠바(Bar Mitzvah)는 13세(여자는 12세)에 수행한다. 우리 세례의 연령은 14세이다.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받았다. 침묵의 13년 동안 아브람은 침묵했고, 이스마엘은 성장했다. 이스마엘은 아버지와 사래의 말을 잘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종인 어머니 하갈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주인의 아들인 이삭을 조롱하다가 추방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것은 성경의 법에 맞지 않는데 아브라함은 아내의 주장을 수용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분깃을 주어 보낸 것이 아니라 추방시켰다. 매우 혹독한 벌이다.
창 17:20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고 하셨다. 이스마엘은 큰 나라를 이루었다. 성경에서 나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스스로 보존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추방되었지만 생존해서 부강한 세상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아브람의 품에서 13년을 자랐지만 아브람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존권을 제공하셨지만, 그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슐라이어마허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유일신의 종교패턴으로 묶었고, 새관점학파의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제언했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에서는 더 과격하게 종교다원주의를 신학 체계로 구축했다. 최덕성 박사는 종교다원주의를 힌두교와 기독교가 융화된 체계로 보았고, 고경태는 칼 바르트의 신학 체계를 근거로 개념이 확장된 것으로 본다.
침묵의 13년은 아브람이 99세 될 때까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로마서 4:19-21에 아브라함은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했다. 아브라함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어떤 고난이나 부당한 산물에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주의 음성을 들은 뒤에 육체의 가시를 소유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드러난 위용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약해지지 않는 믿음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자연권을 포기하지 못했다(창 17:18). 아버지가 혈육의 아들에게 갖는 집착은 결코 나쁘지 않다. 이삭도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계시를 알았지만, 큰 자인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불신앙의 씨요, 죄악의 씨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스마엘을 키우면서 그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었을까?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이스마엘은 믿음의 장막에 거할 수 있는 초청을 거부한 것이다. 이스마엘은 은혜의 맛을 보았지만,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이다(히 6:4-6).
제 7 장 아브라함과 사라(창세기 18-21장)
75세에 부름을 받았어도 늙은 아브람이지만, 99세의 아브람과 89세의 사라는 더 늙은 상태였다. 사래(사라)는 완전히 임신할 가능성이 없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잉태하는 힘이 어디서 왔을까? 히브리의 기자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히 11:11).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웃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있었다고 제시했다. 인간의 마음의 복잡성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8:10에서 두 사람(사실은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했을 때 그는 장막 뒤에서 소리를 들은 사라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하며 속으로 웃었다. 이 웃음을 어떻게 해석할까? 히브리서 11:11에 근거하면 믿지 못하는 인간의 지식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비웃음을 징계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 18:13)하며 꾸짖었다. 그는 거듭 "여호와께서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하며 사라의 행동을 꾸짖었다. 사라는 그만 두려워서 그 일을 승인치 아니하며,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15절)고 당황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명확하게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고 지적했다. 인간의 복잡성, 하나님의 성령과 인간의 소욕의 쟁투가 일어날 때(롬 7장), 인간의 소욕에 대한 책망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자기 정당성만을 외치는 것은 회개를 거부하며 회피하는 육의 욕망으로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자기방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짊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제시했다. 믿음, 그 놀라운 세계,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들이 없어 탄식하던 늙은 여인에게 주어진 이삭, 비웃음이 아니라 큰웃음이 되었다. 이삭을 낳았을 때 그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참으로 감사의 웃음이요, 기쁨에 넘치는 감격의 웃음이었다. 창 21:5,6에 사라는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라고 했다. 즉 자기의 실수인 비웃음을 만민의 기쁨으로 의미를 바꾸는 믿음의 지혜를 가졌다. 이름은 '이삭'으로 같지만 사라가 이름의 의미를 바꿨다. 지혜와 결단의 한 모습이다.
제 8 장 아브라함의 이삭(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의 아비멜렉과 조약(treaty)을 맺으며 정착했다(창 21장). 블레셋 땅에 거주했다. 그러한 일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창 2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내용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라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이셨다(창 22:2).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아들과 함께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까지 이르렀다(창 22:3-4).
어린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 브엘세바에서 사흘 길을 걸어 드디어 멀리 모리아 산이 바라보이는 지점에까지 왔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데리고 오던 두 사환에게 나귀에 실었던 나무를 내리게 한 후 하는 말이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 오리라"(창 22:5)하고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손에 들고"(창 22:6),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멀리 산길을 묵묵히 오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물을 태울 나무를 지게하고 함께 산을 올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번제를 드리려 올라갔다.
1. 시험이 있게 된 때와 환경에 대하여
창세기 22:1 "그 일 후에" 이스마엘을 보낸 후에 그리고 브엘세바에서 안정적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 쫓으라는 사라의 의견에 "깊이 근심했다"지만 거부할 수 없다(창 21:11). 사라는 이스마엘을 종의 아들로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명확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언했기 때문이다(창 21:10). 이스마엘을 보낸 뒤에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창 21:13).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죽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광야로 보냈다(창 21:14). 그리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었다(창 21:32).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합당한 생존권을 얻었고,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도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블레셋 땅에 거주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창 2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된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에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것이었다. 창 22:2과 창 22:3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에서 어떤 갈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2. 그 시험의 특별한 점
나이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시험(God did "tempt 혹은 tested" Abraham)은 매우 특이하다. 100세에 아들을 낳게하시고,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의 특별한 점은 그 아들 이삭은 [사랑하는 독자]라는 데 있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께서도 번제로 바쳐야 할 이삭은 가리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임을 특별히 강조하셨다(창 22:2). 그리고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는 방법도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과거 이스마엘 내어 보내라고 할 때는 이유를 알았다. 즉 그는 약속의 아들이 아닌 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삭은 약속의 아들인데 그를 번제(a burnt offering)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불로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이 시험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혈육에 대한 [애정의 시험]만이 아니라 그의 언약에 대한 소망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리는 [신앙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침묵 중에 순종했다. 칼빈의 문장처럼 신속하고 진지하게 수행했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주께 내 심장을 드리나이다, 신속하고 신실하게)
3. 아브라함의 침묵과 순종
창 22:3에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가지고 모리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곳으로 출발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신속했고,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였다. 그러나 아브라함 옆에는 아버지의 순종을 지지하는 아들 이삭이 있었다. 우리나라 설교자들은 아내에게 협의하지 않았음을 지목하기도 한다.
순종은 시편,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60)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혈육과의 의논하지 않았다(갈 1:15, 16). 오직 그에게는 전적으로 순종한 것인데, 이 때 아브라함의 순종의 모습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으매 의롭다함을 받았다(창 15:6). 그 의롭다하심을 받은 후에도 많은 실수를 하면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창 15:6에서 여호와를 믿음과 창 22:1-2에서 여호와를 믿음은 달랐기 때문에 순종하는 방법과 모습이 다르다.
4. 이삭의 침묵과 순종
모리아로 갈 때 아브라함과 이삭의 나이는 얼마였을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는 고령이었을 것인데, 이삭의 나이는 성경에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고, 127세에 죽었다. 즉 37세 이전이 되어야 한다. 참고로 이스마엘이 쫓겨날 때 나이는 옛날 이스라엘에서 아이의 젖을 떼는 때는, 일반적으로 3-4살 때에 실행했다(삼상 1:21-25, 2:11 참조). 3살때로 보면 이스마엘은 17세에 추방되었다. 모리아로 갈 때에 이삭의 나이는 10대(13-17세), 20대 초반, 30대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10대 나이를 피하는 것은 뗄감을 지고 갈 힘이 없는 것이고, 30대는 너무 늦은 나이라고 한다. 그래서 20대 초반의 나이로 추정해본다.
아들 이삭은 번제할 나무를 지고 걸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제물이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가는 모습과 오버랩이 된다. 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산에 올랐다. 그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여호와를 믿으며, 그가 하신 말씀을 믿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준행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여 번제를 드릴지라도, 여호와는 그 아들로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아들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야 한다.
이삭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창 22:6) 함께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있나이까"(창 22:7)라고 질문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창 22:8)하실 것이라 답했다. 순간 아브라함은 너무나 당황했을 것이고, 그 답변을 들은 이삭도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장소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도 즉각적으로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 했다"(창 22:9,10). 그 때 이삭은 아무런 반항이 없었고 그저 침묵으로 순종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순종했고, 아들 이삭도 여호와께 순종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호와를 믿고 순종했다. 믿음의 행위인 침묵과 순종은 성경 구속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많은 후손이 있을 것을 알았고, 이삭도 자기로 말미암아 많은 후손이 있을 것을 알았다. 다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실재로 아들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 아들을 능히 살리실 것을 믿었다(히 11:19). 번제로 태워 죽여도 다시 살려내실 것을 믿었다. 그 아브라함의 순종과 함께 이삭도 순종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장소이다. 그 성전과 연결된 산, 갈보리(골고다) 언덕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주 예수께서 번제, 십자자의 구속제사의 제물이 되셨다. 지금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 했던 장소에 이슬람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다. 그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하면서도 이삭을 드린 장소에 황금돔으로 모스크를 건축하고 성지화했다. 그런데 이슬람의 전설에는 그 장소에서 이스마엘이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고 한다.
번제할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르며, 그 나무 위에 누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너무나 일치하는 그림자이다.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오른 모습은 골고다를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의 예표이고, 십자가에 오르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그림자이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성전 근처 총독관저(빌라도 법정)에서 시작해서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였고, 아들 이삭은 아버지의 칼에 죽었다(창 22:10). 그 행위를 하려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불러 중지시켰다(창 22: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11절),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obeyed my voice) 하셨다"(창 22:17-18). 우리 생각에는 아브라함에 여호와의 시험에 화를 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에 깊은 착념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더 놀라운 신앙의 큰 체험은 "여호와 이레(Yahweh yir-’eh, YHWH)"이다. The LORD Will Provide(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창 22:14)는 의미이다. 즉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때를 바라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본 것은 아마도 '여호와 이레'인 것 같다. 여호와 이레를 "주께서 보았다(Κύριος εἶδεν; The Lord hath seen)"라는 의미는 70인경의 번역을 따른 것이다. Der HERR sieht, 벌케이트, Dominus videt, 두에렝스 번역에서 The Lord seeth를 따랐다. (제네바 번역) Jehovah Jireh: as it is said this day, In the mount will the Lord be seen. 제네바 번역의 해설에서는 '보다'와 '제공' 혹은 '준비되다'는 의미가 있음을 제시했다. Jehovah jireh: as it is said to this day, In the mount of the LORD it shall be seen(KJV)도 번역했는데(두에렝스와 제네바 번역과 같이 ‘보았다’), The-LORD-Will-Provide; as it is said to this day, “In the Mount of the LORD it shall be provided.”(NKJV: ‘제공되다’)로 변경했다.
형람서원 고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