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노아(1)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창세기 6장)
제 5 장 노아(1)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창세기 6장)
우리는 창세기 11장까지 개략을 보았다. 아담와 여자(하와), 그리고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과 에노스이다. 아담의 7대손 에녹과 10대손 노아 그리고 그의 세 아들, 셋과 함과 야벳까지이다. 창조에서 우리의 환경까지 이르는 홍수와 바벨까지가 11장의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 노아는 아담과 우리 사이에 중요한 원조이다.
노아는 가인의 문화가 팽배하던 시절에 살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창 6:9)였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후회스러워 할만큼(창 6:6) 타락한 시대에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았다. 그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창 6:8). ‘은혜’는 히브리어로 “헨(חֵן)”인데 일차 의미는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 그리고 “값없이, 공짜로”의 의미이고, 좀 더 확장하면 “까닭없이, 이유없이”가 된다. 은혜는 조건없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인데, 1차 의미는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영어에서는 favor(grace, pleased, mercy)로 번역하고 있다.
1. 노아 : 라멕의 아들
노아는 에녹, 므두셀라, 라멕의 아들로 아담의 후손이다. 노아 시대는 아담의 후손(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이 살았다(창 5:2). 노아의 증조부는 에녹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 동안 동행했는데, 그의 나이 252세 때에(창 5:21과 25절; 므두셀라 187세)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을 보았다. 성경 연대기로 보면 에녹이 승천할 때 라멕의 나이는 113세였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창세기 5:29을 깊이 생각해 볼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믿음을 예단할 알 수 있다.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고 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의미가 있다(창 5:29).
믿음의 조상들은 타락한 가인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라멕은 경건한 후손으로서 첫째 탄식하는 삶을 살았다. 라멕의 탄식은 에녹의 탄식과 같다. 기간테스(Gigantes, 네피림)가 등장해서 인류가 번영하며 활발했지만, 믿음의 눈에는 탄식할 모습이었다. 세상이 의인에게 고난을 주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생활 양식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의 탄식에서 믿음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인생들은 다 범죄한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되었는데, 회개하지 않고 그 죄악을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일어나는 탄식, 그 슬픔은 믿음의 한 모습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 밖에 없다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마 7:7). 구원을 받아 그 길로 돌이켜 가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구원의 진리를 침묵할 수 없다. 지금의 고난이 죄값에 의한 것이라는 탄식과 죄속에서 부패해가는 세상에 대한 탄식은 믿음의 모습니다.
그러나 라멕이 슬픔과 탄식에서 끝나지 않았다. 에녹도 모두에게 자기가 받은 은혜를 전했고, 라멕도 노아도 그랬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했다고 했다(벧전 3:18-20). 죄악된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서는 것과 함께 죄에서 구원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저주받은 인간일지라도 구원은 가능하다. 여호와는 첫반역한 아담에게,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다(행 16:31, 롬 10:13).
둘째, 라멕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회복과 안위를 믿었다. 창세기 5:29에서 "라멕은 아들을 낳고....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는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안식과 위로이다. 라멕은 참 안식과 위로는 하나님으로 오는 것을 믿었다. 세상이 풍요와 향락으로 기쁨을 만끽할 때에,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는 고통을 받지만 오직 주 하나님의 위로와 안위를 기대하며 인내했다. 라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아들 노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회복의 시대가 올 것을 믿었다. 예표론으로 배치한다면 노아는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볼 수 있다. 예표는 완전하지 않다. 예표의 실상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하시다.
2. 노아 시대의 환경 : 죄악이 관영한 시대
노아 시대는 홍수가 임박한 시기로 부패된 수준을 상상할 수 없다. 원리적으로는 오늘이 내일보다 덜 부패되었다. 창 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천사는 영적 존재로 성관계를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의 질문, 천국에서 누구의 부인이 될까?라는 것에서, 부활도 천사도 믿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마 22장).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과 여성의 성관계로 반신(半神, demigod) 아이들(半神半人)이 출생했다. 그들은 사회에서는 사생아이지만 영웅이 되었다. 예수님은 어떤 성관계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당대의 영웅이 아니라 신성모독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세상 영웅 구도와 전혀 다른 구도이다. 천사와 성관계를 하는 구도는 세상 영웅화 구도이다. 성경은 영웅화 구도가 아닌 십자가 구도를 세운다. 어찌하든 천사와 인간의 성관계는 부당하다.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아벨의 거룩한 계대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이 사람의 딸, 가인의 무리와 연합한 것은 부패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가인의 딸, 사람의 딸은 왜 아름다울까? 그것은 그들이 남자를 호리기 위한 치장했기 때문이다(잠 7장). 음녀에게 넘어가는 것은 탐심과 음심이다. 셋의 후손의 타락으로 세상은 타락이 가득하게 되었다. 창 6:5,6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탄식(the LORD regretted)은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해 하나님께서 탄식했고,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고 심히 좋"았는데, 그 아름다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창조주의 경륜을 파괴하는 신성모독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파괴한 하나님의 세계를 충분하게 회복시킬 수 있다. 그 회복하시는 방법은 세계를 심판하고 사람 노아, 그리고 그의 가족으로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3. 노아 :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는 어떻게 그런 시대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오직 창세기 6:8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이다. 그가 그 시대에 의인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호의(favor,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베푸신 호의는 절대주권이며 오직 은혜이다. 그러나 타락한 시대,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결코 작은 고통이 아니다. 그 고통을 극복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설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붙드시지 않으면 안된다. 순교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붙드심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붙드시면, 어떤 부패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간다.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경건하게 설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다. 그것이 결코 노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노아가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심판 중에 구원을 얻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호의였다. * 참고로 히브리어 '헨'(LXX, χάριν: 중국어 蒙恩)인데, grace(KJV)는 은혜, favor 다수 영역은 호의로 번역했다.
제6장 노아의 방주와 홍수
노아가 방주를 축조할 동안 얼마나 큰 핍박과 모욕을 당한 것은 사도 베드로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고통받는 성도들에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행실을 권면할 때, 구약의 노아를 비유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에 노아가 당했던 핍박이나 비방과 같은 것이다.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에 고통이 동반된다. 믿음의 사람의 인내의 모범이 위로와 격려를 한다(히 11장). 노아는 500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당대에 므두셀라와 라멕이 생존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과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방주를 건조했을 것이다. 노아 시대의 지구 환경은 예측할 수 없으며 방주의 규모도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단 노아 당시의 자연 환경은 지금의 환경과 같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람의 수명이 같지 않고, 첫 창조 상태와 지금 창조 상태가 동일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노아의 방주
노아의 방주(方舟, ark)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림자(모형)이다. 방주는 홍수 심판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그래서 방주를 교회로 연결하기도 한다. 방주의 크기는 규빗이라는 단위로 보는데, 일반적 규빗(cubit)은 성인의 팔 길이, 약 45 Cm이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사람의 크기는 더 컸을 것으로 예측하기 때문에 현재 추정하는 길이보다 더 큰 규모의 방주가 되었다고 예측할 수 있다. ※ 한자 舟(주)는 사용 용례가 없이 폐기되지 않고 존재한 어휘라고 한다. 船(선)은 《說文解字》에, “船 舟也 (선 주야)(船은 배이다.)”라고 했다. 舶은 '배 박'이라는 한자로, '큰 배(船)', '선박(船舶)' 등을 뜻한다. 航(항)은 물의 힘을 견디며[亢] 떠서 흘러가는 배[舟]를 이른다.
창 6:16에 보면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는 명확한 번역이 아니다. ‘지붕(roof, NIV ESV)’과 ‘창문(window, KJV)’이 교차로 번역되었다. ‘문(door)는 일치된 번역인데, 방주 어느 위치에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가장 높은 곳(3층)에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희보 박사는 문은 한 개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연결했다(김희보). 노아의 방주의 문은 하나님께서 닫으셨고, 홍수가 마친 뒤에는 노아가 열고 나왔다.
아무리 홍수가 넘치는 무서운 심판의 날에도 그 방주 안에는 평안과 안식이 있었다. 2,000년에 세상의 종결이었고 안식이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평안과 안식의 예표로 볼 수 있다.
홍수가 그치고 물이 정돈되면서 방주는 아라랏 산에 7월 17일에 걸렸다(창 8:4). 그날은 곧 이스라엘의 니산월 17일이다. 즉 유월절을 지난 3일만의 날이었다(출 12:6). 그렇다면 그날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일한 날이다. 그날은 초기부터 새로운 부활의 세계가 시작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노아의 방주의 규모는...
방주는 얼마나 큰 것이었기에 그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양식들을 실을 수 있었을까? 창 6:15에 보면, 길이는 300 규빗이요, 넓이는 50 규빗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 규빗이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18피트가 된다. 그것을 계산한 어떤 학자에 의하면(J. P. Free), 그 배의 크기는 약 4,300 톤 가량일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2,500 톤급의 배라면 어떠한 큰 바다라도 항해할 수가 있다고 한다(김희보). 그렇다면 방주는 오늘날 큰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배들의 갑절의 크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노아는 자기의 마음대로 그렇게 큰 배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준행한 것이라"(창 6:22)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큰 배가 되어야만 그 많은 동물들과 그것들이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땅위의 짐승의 종류는 2,000종이요, 새는 약 6,500 종류라고 한다. 방주의 그러한 크기라면 그러한 동물들과 그것들의 40일간의 양식은 충분히 싣고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공룡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있기 때문에 합리적 이성으로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류의 기억력은 제한적이고 왜곡된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차축시대(Axial Age; BC 8세기에서 BC 3세기까지)를 제언했는데, 차축시대에 세계의 지성들이 출현했고(부처, 공자, 소크라테스) 그 이전 시대에서 명확하게 시간을 규정하기 어렵다.
3. 홍수의 심판은 역사적 사실인가?
그래서 노아의 홍수 사건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명확하게 세울 수 없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심판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요, 고대 신화의 하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학계에서 상당히 많다. 땅 위에 큰 홍수의 심판이 있었다는 홍수설화는 창세기의 기록과 비슷한 내용으로 전 인류에 나타난 공통의식이다. 고대 바벨론에도 그런 전설이 있었고, 애굽과 인도와 중국에도 있다. 물론 우리 한국에도 홍수설화는 있다. 우리의 홍수설화는 <장자못전설>, <남매혼설화>, <고리봉전설> 등이 있다.
창 8:5에 보면 방주가 아랏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말씀한다. 아라랏 산은 튀르키예에 있는 산(높이 5137m)으로 추정한다. 그 산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알메니아에 위치해 있다. 지금도 그 지방 사람들은 조상 때부터 그 산을 지방말로 "쿠히 누흐(Kuhi Nuch)"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뜻은 바로 "노아의 산"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을 보아서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건으로 추론할 수 있다.
노아의 방주에서 짐승을 태우기 등에 대해서 상상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짐승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방주 안에 들어간다(창 7:6-12). 노아와 가족이 먼저 들어갔고(7절),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갔다(9절). 모두 들어간 후에 홍수가 일어났다(10-12). 방주에 들어가자 마자 홍수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모두 들어간 후에 문이 닫히지 않았다. 칠일 후에 문이 닫힌 것으로 볼 수 있다(창 7:4, 10).
성경에 7일을 제시한 것을 한 번 살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7은 완전수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인류를 향해서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이고, 7일 동안 참으셨다. 홍수가 일어날 자연적 징조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만 방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날은 여전히 맑아 있었고 낮의 해는 솟아올랐을 것이며 밤의 별도 총총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노아를 비웃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를 가리켜 끝까지 "의를 전파한 노아"(벧후 2:5)라고 했다. 즉 노아는 마지막까지 여호와의 경륜을 모든 사람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전달된 노아의 복음을 거부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순종한 것이고,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다. 노아의 때와 마지막 때가 같다. 다만 노아의 때는 물의 심판이었지만, 마지막 때의 심판은 불의 심판이며, 완전한 날 새하늘과 새땅이 열리는 시대가 될 것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그와 같으리라"(마 24:37-38).
제 6 장 믿음의 조상으로서 노아
노아가 어떻게 의인이 되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을까? 그 비결은 오직 하나, 히브리서 기자의 제시처럼 '노아의 믿음'이라 했다(히 11:7). 믿음의 힘은 위대하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대상은 같지만, 내용과 강도는 같지 않다.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보게도 하고 허물 많은 자를 불러 완전한 자가 되게도 하며 하나님과 멀리 떠난 자를 불러 저와 동행하는 자가 되게도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이다. 믿음의 최후 완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루어진다. 노아의 증조부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승천케하셨고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자기 가족과 더불어 방주에 들어가 생명을 구원받았다.
노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가? 히브리서 11:7절에 나타난 노아의 믿음은 다음과 같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상속자(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믿음의 사람으로 믿음의 상속자로서 귀한 위치에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믿음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이렇게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경고]란 곧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미한다.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말은 그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었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고, 믿음대로 행동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역접 관계를 말할 수 있다. - 실재는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일반적 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사도 바울은 말씀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모두 듣지만, 모든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수용하여 행동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호의를 입은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듣고 순종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권면했다(계 2-3장). 신약의 사도 베드로는 큰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눅 5:4, 5절에 보면, 어부 베드로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했다. 사도 베드로가 특별한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곧 말씀에 의지하여 움직인 사람이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그렇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이 말씀은 험한 바다에서 파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 떨고 있는 선원들에게 외친 말씀이다. 선원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믿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이하게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은 없다.
사도 바울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고 환난 중에 건지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것이 참 믿음이요 큰 믿음이요 큰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대로 움직였다. 참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2.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는 믿음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를 가리켜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다. 노아는 보지 못한 일을 꼭 보는 것처럼 믿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 중의 하나이다. 고후 5:7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방주를 지을 때 세상은 그를 비웃었다. 어리석은 자라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홍수의 징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홍수가 나기까지는 비라는 말도 또한 홍수란 말도 없었다. 홍수에 대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홍수의 경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를 경고한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꼭 그대로 믿었다. 사람들은 다 보이는 현실, 매일 경험하는 세상 일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내세의 일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보이는 사람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못 믿는다. 보이는 육신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참 믿음이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임을 믿는 믿음이다(고후 4:18). 노아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 보이는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다.
3. 노아의 믿음은 실행이 따른 믿음이었다
노아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창 6:9-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택함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들은 말씀을 순종한다. 행함 없는 믿음은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위인들의 믿음은 놀라운 모습을 갖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벨도 믿음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믿음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말씀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창세기 4장을 해석하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타났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말씀을 따랐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믿음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민족을 저버리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행동을 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에 의한 놀라운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 행동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복된 것이다. 노아가 수행한 방주의 건조, 언약을 받음도 복되고 놀랍지만, 그에게 있는 믿음이 복되다. 믿음의 사람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약 1장). 지혜를 받음으로 주 예수를 믿으며 믿음의 담력으로 주의 말씀을 받아 순종할 수 있다(계 1:3).
4. 인내가 있는 믿음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것이고, 방주를 짓는 일 자체도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인내와 희생은 결코 작지 않다. 희생은 물질의 희생, 시간의 희생, 노력의 희생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에게 많은 조롱과 참견을 참아야 한다. 희생을 견디는 인내가 함께하는 것은 믿음의 담력이다. 믿음은 영적인 일인데, 그 일이 표출될 때에는 육체의 몸에 나타나는데, 언제나 인내와 희생이 함께한다. 아벨에게는 순교의 피가 따랐고,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친척과 본토와 재산을 포기하는 희생을 수행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했다. 보이지 않는 홍수를 보는 것처럼 방주를 지었고, 보이지 않는 홍수에 방주는 건조하는 노아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5. 자기의 가정을 구원한 믿음
"그는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다(히 11:7).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믿음이란 개별적이란 점이다. 믿는 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도 따라서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깊이 배워야 하는 진리 하나는 곧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는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가정이 구원받았다. 가버나움의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믿음은 그 딸의 병을 고쳤고, 백부장의 믿음은 그 종을 고쳤다. 노아의 믿음은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 부모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말씀이다. 부모가 잘 믿으면 불신앙의 자녀들도 돌아온다. 어머니의 기도를 잊지 못해서 돌아오는 탕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믿음의 신비는 알 수 없다.
제 8 장 홍수 후의 노아의 실수(창세기 9장)
믿음의 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예표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 믿음의 사람인 노아도 탁월한 믿음과 순종으로 의인이지만 실수가 있다. 그 실수를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이 겸손이고 덕이고 위로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당대의 의인인 노아도 실수를 했다.
노아가 범한 실수는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몸이 되었는데,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보고 조롱한 것이다(창 9:22).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의 두 아들 셈과 야벳은 그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옷을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 아버지의 하체를 가렸다(창 9:23). 노아의 실수였고, 노아의 실수로 말미암아 조롱했던 노아의 후손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누가 조롱했는지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노아는 작은 아들 함을 꾸짖었고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창 9:26). 이것은 그에게 큰 실수였다.
출애굽기 20:26에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드러날까 함이라" 했음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번제단에 올라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번제단의 층계를 오를 때에 사람들이 그 아래서 그의 하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술! 노아가 범한 실수의 근원은 술이었다. 성경에 ‘술’이란 말이 맨 처음 나온 곳이 바로 말씀이다. 술이란 말이 처음 나온 거기에 당시의 의인이라고 했던 노아의 실수가 있다. 그가 술을 어떤 동기로 마셨던지, 그 결과는 부끄러운 실수이다. 술은 노아 홍수 이전에 사람의 아들과 딸들이 탐닉했던 음료일 수 있다.
한국 교회 윤리에서 술은 매우 민감한 요소이다. 술(酎)과 음료(飮料), 탕(湯, 국물)의 차이는 민감하다. 알코올이 있는 음료를 술(酎)이라고 하는데, 현행 국내 주세법상 알코올 함량이 1% 미만인 경우 주류가 아닌 '음료'로 구분한다. 알코올 함량이 1% 미만일 경우 비알코올, 알코올이 전혀 없을 경우 무알코올 음료에 해당한다.
1.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
인간은 누구나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그만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노아에게서 발견한다. 그는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순종하며 방주를 지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그만 하나님께서 금하는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창 9:2). 자기를 다스려 일평생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도들에게는 세 가지의 원수가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즉 마귀, 세상(세속주의) 그리고 자기의 육의 욕망이라고 했다(약 4:1-7). 그런데 가장 이기기 어려운 것은 자기의 욕망이다. 세상은 피하여 벗하지 않으면 되고(약 4:4), 마귀는 대적해 싸우면 된다(약 4:7). 많은 기도와 수양이 필요하다. 일평생 싸워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넘어짐에는 신앙 생활의 경륜과 관계가 없다. 노아는 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홍수 심판을 겪어낸 은혜의 사람이었다. 노아는 술취함으로 실수를 범했다.
2. 항속적인 승리는 없다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는 전부가 노아의 신앙의 승리의 기록으로 꽉 차 있다. 그러나 9장 끝 무렵부터는(20절 이하) 그의 실패를 말씀했다. 그가 한 번 실패한 그 후에는 성경의 특기할 만한 그의 기록이다. 그가 한 번 실패한 그 후에는 성경에 특기할 만한 그의 기록이 없다. 노아는 수 많은 역경을 이겨낸 믿음의 사람이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가 있었고, 그의 실수는 인류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사람은 승리할 때 주의해야 한다. 승리할 때 승리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승리가 또 다른 승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승리일지라도 다음은 실수나 실패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항상 겸손으로 서야 한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에서 겸손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2-13).
3. 노아의 실수는 노아의 실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실수가 왜 창세기 말씀에 있을까? 그것은 노아의 실수에 노아의 불완전성과 함께 가나안에 대한 계시가 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창 9:25), 가나안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신 7:1-2). 노아의 실수에서 얻을 교훈도 중요하지만, 성경은 윤리적 교훈을 목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아들의 실수에서 화를 내지 않고 저주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자기 실수에 부끄러움 때문인지 자기 손자 가나안을 저주했다. 누구에게나 실수가 있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불량한 사람이었지만, 사무엘은 두 아들을 사사로 세웠다(삼 8장). 다윗도 삼손도 작은 실수 큰 실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의 실수를 범한다. 믿음의 사람들의 실수는 실수가 아닌 회개와 회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의 복을 계명을 거부하는 자에게 3대의 저주를 선언하셨다. 천대와 삼대가 아닌 회개와 회복을 주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 가나안이 심판을 받을 행동을 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다. 다만 가나안의 죄가 명확하게 무엇인지 나타나지는 않는다.
다만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의 그루터기에 이스라엘을 접붙히지 않으셨다. 그러나 돌감람나무는 참감람나무에 접붙히셨다. 거룩한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오직 말씀 위에 세워야 한다. 가나안의 첫성 여리고는 떨면서도 성문을 개방하지 않았고, 가나안의 일곱족속은 여부스 족속을 진멸하기 위해서 연합군을 형성했다. 두려우면 항복할 것 같은데 두려워도 항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굴종을 원하지 않으신다. 여호와께 순종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형람서원 고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