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분청사기를 보면서...
고흥군은 분청사기 문화박물관이 있습니다.
토기와 자기로 구분했습니다. 도기(陶器) : 낮은 온도에서 구운 그릇. 도자기(陶磁器) : 장석(長石)·반토(礬土)를 부수어 여기에 일정한 열을 가해만든 그릇.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도자기 연구가 왕성했으며, 가장 발달된 때는 고려시대이다.
* 해설가의 해설. 토기와 나무그릇으로 밥을 먹을 때와 도자기를 식기로 사용하는 것에 수명 차이가 있었다. 상감청자는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지만, 분청사기를 일반에게도 유통된 제품이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수명이 증가되었다.
도자기의 역사는 선사시대 토기시대에서 도자기 시대로(고려시대) 전환된다. 우리나라 도자기는 상감청자, 분청사기, 백자, 청화백자의 순이다. 도자기 가마터가 세워지려면 도자기를 제작할 흙, 뗄감, 물이 있어야 한다. 고흥 지역은 고려 몽골의 침략으로 형성된 가마터이다. 그래서인지 전라남도 지역에 광범위하게 가마터가 있네요.... 강진, 광주 무등산, 장흥...
흥미로운 정보는 가마터의 온도가 1200도가 올라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동기 용융점(Melting Point, 녹는 온도, 용융, 인위적으로 열을 가해서 녹이는 것)은 1000도 정도 된다고 합니다. 도자기의 최종 소성온도는 1,250℃에서 유약이 녹기 때문에 환원소성으로 만들 때에는 적정온도 900~950℃에서 이루어진다. 가마의 온도는 최소한 1200℃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온도에서 유약도 유리질화가 촉진되어 강도와 발색을 높이는 것이죠. 도자기는 고온에서 소성되고, 금속은 고온에서 용융이 되네요~~ 이러한 지식이 고대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청동기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합금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청동기 후에 철기를 배치시키는데, 그것은 철의 용융점이 구리보다 500도가 더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 속에 있는 구리 광물, 철 광물을 파악해서 그 원석에서 광물을 추출하는 기술이 놀라운 것이며, 그것을 합금을 통해서 주작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은 무에서 유를 창출시키는 것입니다.
도자기 가마와 용융 용광로(鎔鑛爐, 영어: Blast Furnace)는 금속가공에서 금속 및 합금을 생산하기 위한 제련을 하는 데 사용되는 공업요로다. 다른 요로(평로 등)에 비해 매우 높게 우뚝선 형태를 가지고 있기에 고로(高爐, 영어: Shaft Furnaces)라고도 한다.(위키백과) 용융로 (Melting Furnace) 어떠한 고온의 가열원으로부터 공급되는 열에 의해, 피가열체를 가열해, 용융시키는 노가 됩니다.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보면 역사의 질곡이 느껴집니다. 상감청자가 가장 탁월한 수준의 도자기인데, 더 낮은 분청사기로 그리고 백자 그리고 청화백자(靑華白磁, 청색 코발트 안료: 세조에서 시작해서 18-19세기까지 제작된 백자의 일종)로 이어지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일 제국주의가 지배할 때에 청색도료로 싸게 청화백자 짝뚱으로 우리의 고유의 자기들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고도 합니다.
해설사 선생님은 상감청자(象嵌靑瓷)에 있는 학의 날개짓과 국화꽃의 꽃잎과 배치까지 모두 정교하게 배치된 작품으로 설명했고,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그보다 더 작업 공정이 간략하게 되어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것을 분청의 방법으로 감추는 기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瓷기와 토器(도기)의 차이점은 1000도 이상에서(유약을 입혀) 구운 것은 자기이고, 이하에서 구운 것은 도기이다(어떤 자료는 1200도). 분청사기는 1350도의 고온에서 무등산 북쪽 기슭의 광주시 충효동 지역은 15세기 조선 최고의 분청사기 생산지였다.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의 쇠퇴기에서 출발한다. 청자가 원재료인 흙을 물에 개어 5 ~10%의 고운 입자만을 걸러내는 수비(水飛)과정을 거치는데 반해 분청사기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흙을 그대로 사용한다. 시간과 노동력을 줄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생산성은 크게 증대되었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흙의 재질을 따라 표면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백토(白土)를 입혔다. 연극인들처럼 두껍게 분장을 하는 셈인데 그래서 붙인 원래의 이름이 ‘분장회청사기’다. 거기에다 청자의 상감기법을 사용하거나, 꽃문양 도장을 이용해 표면에 음각한 뒤 거기에 백토를 채워 넣고 굽는 인화문 기법을 사용했다.
무등산 가마터에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하네요. 백자(白瓷)는 주로 조선에 와서 유행된 자기로 순백색의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순백색의 자기입니다. 청자에 비하여 깨끗하고 담백하며, 검소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인데 성리학의 정신이 깔려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분청사기(粉靑沙器)는 회색 바탕흙 위에 백토진흙을 바른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냅니다. 분청사기의 특징은 자유스러우면서 실용적인 형태와 다양한 분장기법 (粉粧技法), 그리고 의미와 특성을 살리면서도 때로는 대담하게 생략, 변형시킨 무늬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중에서 청색의 유약을 입힌 것을 청자(靑瓷)라고 하고, 백새의 유약을 입힌 것을 백자(白瓷), 청자 위에 백토를 발라 다시 구운 것을 분청사기라고 한다. 조선백자(朝鮮白磁)는 한국의 도자기로서 고려청자, 분청사기 이후에 출연한 도자기의 분류이다
* 참고로 많은 도공들이 왜란에서 잡혀 끌려갔고, 전국의 많은 가마들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그 후로 도자기 강국(세라믹 산업)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도자기의 근원은 임진왜란 때에 이주한 분들이 많습니다. 단순하게 끌려갔다고만 하는 것은 현재 해석에서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일본에 가서 일본 도자기 산업을 융성하게 만들지는 않았겠죠. 우리나라에서 기술자들을 천대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사회 인식이 중요합니다. 일본에는 장수기업(100년 이상 제조 기업)이 3만개 혹은 4만5천곳이 있다고 합니다. 기술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에 기술인력이 자긍심을 갖고 가업으로 승계하며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람서원 고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