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 성경

[형람성경] 에베소서 3장: 복음의 영원성과 보편성으로 설립된 교회의 정진

형람서원 2024. 9. 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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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성경] 에베소서 3장: 복음의 영원성과 보편성으로 설립된 교회의 정진

에베소서 3장: 1-13절, 하나님 은혜의 경륜

[1절]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너희 이방인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가 된](KJV, NASB) 나 바울은. * 본래 원어는 Τούτου χάριν ἐγὼ Παῦλος(For this reason I, Paul,)인데, 우리 번역에서는 주어를 뒤에 놓았다.

‘이러므로(For this reason)’라는 말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과 화목되며, 유대인과도 한 교회를 이룸에 대해서 제시했다. 이방인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죄사함, 성령으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을 이루어 간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가 되었다고 소개한다(the prisoner of Christ Jesus for the sake of you Gentiles). 도저히 맞지 않는 의미이지만,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의 종 바울의 헌신을 알 수 있는 표현이다.

ὁ δέσμιος τοῦ Χριστοῦ Ἰησοῦ를 the prisoner of Christ Jesus로 번역하는데, RSV(바른성경)는 a prisoner for Christ Jesus로 번역했다. 개역개정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로 두 구절을 한 구절로 묶어서 번역했다. "너희 이방인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죄수", 문자 번역이 좋겠다(위 김효성 번역 참고).

[2-4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恩惠)의 경륜(經綸, 오이코노미아)[경영, 계획, 직무]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ἠκούσατε).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In reading this, then, you will be able to understand my insight into the mystery of Christ,). * 경륜, οἰκονομία, management of household affairs, stewardship, administration, KJV - dispensation(경륜의 대체어로 번역했는데, 세대로 번역하기도 한다: 두에렝스, 1599제네바 - dispensation),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김효성). 그것은 구약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만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방인도 파악할 수 없었다. 구약시대에도 이방인들의 구원은 암시되어 있었다(창 12:3; 시 117:1). 그러나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은 아무도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큰 은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비밀이었다.

놀라운 비밀을 유대인의 교사였던 사울도 알지 못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을 암기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방인 구원에 대한 여호와의 경륜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적 정략으로 이방인들을 포용했다.

하나님의 계시로 사울이 파악하게 되었다. 사울은 탁월한 천재 지성으로는 계시의 비밀을 파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고 파괴하려고 했다. 메이천 박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은 사람으로 회심 전 사울을 꼽았고, 그 역사적 예수를 아는 지식이 있었지만 교회를 파괴하는 데 가장 앞섰다고 지적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베드로 사도가 최초로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10장).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은혜의 구주가 되신다고 증거한 내용을 읽는 자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는 사실과 그가 깨달은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이었던 대한민국 민족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복이며 특권이다. 이 일을 시작하신 이는 주 하나님이시고, 이 일에 수종한 사람은 주의 종들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주의 종으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믿음에 담력과 헌신과 희생에 대해서 두려움없이 나갈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읽으면(In reading this), 그리스도의 비밀(the mystery of Christ)에 대해서 자기의 통찰력(my insight, 내가 깨달은 것)에서 명철(understand)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πρὸς ὃ δύνασθε ἀναγινώσκοντες νοῆσαι τὴν σύνεσίν μου ἐν τῷ μυστηρίῳ τοῦ Χριστοῦ, // prout potestis legentes intelligere prudentiam meam in mysterio Christi: <> 사도 바울은 자기가 파악한 그리스도의 비밀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5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God’s holy apostles and prophets)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in other generations)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τοῖς υἱοῖς τῶν ἀνθρώπων)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그러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것은 사람의 전달력이 아닌 성령의 계시로 된다(5절). 전달자의 깨달음과 성령의 계시(it has now been revealed by the Spirit)가 있어야 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께서 계시하셔서 비밀을 파악한 것처럼, 듣는 자도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비밀을 파악할 수 있다.

여기의 ‘선지자들’은 2:20과 4:11에도 나오는 선지자는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 구약시대 선지자와 신약시대 선지자는 권위와 역할에서 차이가 있다. 구약시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주신 신탁(orcle)에 순종해서 제한적으로 수행하고, 신약시대 선지자는 성령께 계시를 받음과 함께 주어진 말씀에 의지해서 해석하는 직무를 수행한다. 사도들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먼저 구약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받고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곧 이방인들에게도 함께 주신 은혜의 복음 진리는 바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으로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의 진리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셨던 진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계시된 교회의 세계성의 진리 곧 교회가 유대인들만의 교회가 아니고 또한 이방인들도 참여하는 교회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에 암시된 바는 있지만(창 12:3; 22:18; 시 117:1; 사 45:22), 밝히 드러나 있지는 않았던 바이었다. 그 사실은 구약시대에도 여호와께서 제사장 나라 삼으심으로 계시하셨지만, 깨닫지 못했다.

ο υιοs του ανθρωπου(the Son of Man), τοῖς υἱοῖς τῶν ἀνθρώπων, the sons of men

[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in the promise in Christ Jesus)가 되고 함께 지체(members together of one body)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의 내용을 다시 말한다. 즉 그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방인들 편에서 볼 때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비밀이 계시된 신약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특권을 누린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기업을 이어받는 자들이 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고, 또 함께 복된 약속 곧 부활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the gift of God’s grace)을 따라 내가 일꾼(a servant / minister, διάκονος)이 되었노라.

사도 바울은 주께로부터 이 복음을 받았고 이것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 그가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된 일이었다. 바른 직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받는다. 인위적인 직분은 덕을 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은혜로 부르시고 은혜로 세움을 받은 자마다 그 동일한 은혜의 역사하심을 따라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the boundless riches of Christ)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복음을 위해 바울을 택하신 것은 바울이 남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단지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실수를 깊이 회개했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회개하고 겸손해진 자를 들어 쓰신다. 그는 교만한 자는 쓰지 않으시고 도리어 물리치신다. 자신을 크게 여기는 자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울에게 바로 이런 은혜가 임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었다. 겸손한 봉사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하며 그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름과 영광에만 관심을 둘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결국 그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될 것이다.

[9-11절] 영원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통사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계획, ἡ οἰκονομία τοῦ μυστηρίου, the administration of this mystery]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Byz, UBS)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His intent was that now, through the church, the manifold wisdom of God should be made known to the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realms, according to his eternal purpose that he accomplished in Christ Jesus our Lord).

‘영원부터’라는 말은 ‘오랜 시대 동안’(NASB)이라는 뜻이며 ‘감취었던’이라는 말에 걸린다.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이라는 말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수종드는 선한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피조물들은 심지어 하나님 곁에 있는 선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회 곧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하여 그 천사들에게도 하나님의 깊고 넓은 지혜가 알려진다.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영원하신 뜻대로 된 것이다. 창세 전 곧 영원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셨다(엡 1:4).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전의 의논을 상상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 전의 의논과 작정대로 온 세상에 충만한 이 구원의 일이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복음 안에서 우리 모두가 받은 은혜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속죄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마서 5:1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또 히브리서 10:19의 말씀대로, 우리는 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지성소](KJV, NIV)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고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깨달았다면, 고난의 현실을 인해 낙심치 말아야 한다. 고난은 항상 있는 것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주의 종들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옛날부터 주의 종들은 항상 고난과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을 고난 중에서도 지키시고 도우시고 위로하셨다. 성도의 고난과 핍박은 그에게 부끄러움이 아니고 영광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사도들이 쓴 신약성경은 이방인들도 구원의 복을 누림을 밝히 증거하였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됨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을 얻었고 지금도 그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한다. 참된 헌신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러다 고난을 받을지라도 낙심치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다(8절).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려면,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3장: 14-21절, 바울의 기도와 축복

[14-15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이라는 말씀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family)’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며, 하늘에 있는 가족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영광 중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고, 땅에 있는 가족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늘에 들어간 이들은 승리하여 안식을 누리고 있고, 땅에 사는 우리들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져 있다. 모든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이름이 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스스로 시작하였거나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가 친히 이루시는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바울은 단지 에베소 교인들의 의지에 호소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의 선한 결심이나 노력은 마땅히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의 생활이다.

[16절] 그 영광의 풍성(his glorious riches)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바울의 첫 번째 기도 내용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소서라는 것이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는 뜻을 포함할 것이다.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심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권면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신다. ‘속사람’은 ‘중생한 영혼’을 가리킨다고 본다. 중생한 영혼들에 심겨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려는 새 성향은 더욱 자라고 강건케 되어야 한다.

중생한 성도들의 영혼들은 늘 죄성의 도전을 받는다. 중생한 성도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아직 연약하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육신의 연약’이라고 표현하였다.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不淨)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8:3-8,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중생한 자에게도 남아 있는 이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은 중생한 사람의 속사람에게 도전한다. 이것은 사람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의 도전이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들에게 이런 연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셔서 지식과 믿음, 의와 선과 진실에 굳게 서게 하시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갓난아이 같아서 자라가야 한다. 히브리서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영적 어린아이 곧 기독교의 초보적 교리의 확신을 겨우 가진 성도들과, ‘단단한 식물을 먹는’ 영적으로 장성한 자 곧 의의 말씀을 체험하고 선악을 분별하며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성도들을 대조시켰다(히 5:12-13). 또 히브리서 6:1-3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2에서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함으로 자라가야 할 것을 가르쳤고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했다(3:18).

[17-19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ταῖς καρδίαις)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ἐν ἀγάπῃ)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to grasp how wide and long and high and deep is the love of Christ)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그들 속에 거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러나 성도는 그와 연합되어 있음을 믿음과 순종으로 표현해야 하며 체험해야 한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과 같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늘 계심을 믿어야 한다.

바울의 기도의 세 번째 내용은 사랑 가운데 굳게 서서 그 사랑을 온전히 알아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랑은 하나님의 크신 구속(救贖)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희생시키셨다(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구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확실히 믿고 그 사랑 가운데 확고하게 서야 한다.

바울은 또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그 넓이’란 그 사랑이 각 민족, 각 나라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주어짐을 보이며, 그 ‘길이’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그가 끝까지 사랑하심을 보이며, 그 ‘높이’란 그의 자기희생적 사랑의 고상함과 가치를 보이며, 또 그 ‘깊이’란 그의 사랑의 심오함, 곧 사람의 머리로 다 측량할 수 없고 사람의 가슴으로 다 느낄 수 없는 그의 긍휼의 사랑을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그것은 자신을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것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몸과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었다. 누가 그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있겠는가?

[20-21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to him be glory in the church and in Christ Jesus throughout all generations, for ever and ever! Amen.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넉넉히 주시는 하나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약 1:5)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을 영원히 돌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실 수 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이기고 온전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둘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신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을 항상 인정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셋째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더욱 알고 사랑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한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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