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 기독교 역사

1912년에 설립된 총회, 2024년 109회 총회....

형람서원 2024. 7. 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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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교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출범하며, 7인의 목사를 임직했다. 그리고 1912년에 총회를 구성했다.

역사적인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가 1912년 9월 1일 상오 10시 30분에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에서 개회됐다. 총대는 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모두 221명이었고, 당시 교인 수는 12만 명에 달했다. 초대 총회장에 한국 목사가 아닌 언더우드가 선출된 것은 그의 공로와 지도력의 결과이지만, 당시 ‘105인 사건’으로 한국인 지도력이 대거 투옥된 상황에서 교회와 총독부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창립총회는 새 고퇴를 사용했다. 이 고퇴는 요한계시록의 7개 교회와 총회산하 7개 노회를 상징하는 7가지 다른 나무조각들로 만들었고, 그 위에 세 개의 은고리를 둘렀다. 창립총회에서 전도국은 전도주일을 지킬 것과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청원했고 제2회 총회에서 중국의 산동 지역에 중국어로 사역할 수 있는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등 3인의 선교사 파송을 결의했다. - 통합 측 역사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 기간은 9월이다. 그리고 2024년 총회 회기는 113회가 아니라 109회이다. 1912년부터 지금까지 4년의 회기 공백이 있다. 참고로 고신 교단은 총회 회기가 '74회'로 같지 않다(1951년을 기점으로 세움). 총회 기간에 공백이 있는 것은 우리 역사에 있는 과오와 우리 역사의 아픔을 증거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194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31회 총회"를 강제해산하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시켰다. 최덕성 박사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1943년 출범)은 한국 기독교의 배교 전력의 한 단면으로 평가했다.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개칭했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통리는 채필근이었다. 1945년 7월 19일 일제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통합시켰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순일본기독교'라고 하는 신생 종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다(최덕성).

한국교회의 교회당 안에는 이동식 신사(神祠)를 설치하고 예배 중에 그것을 향하여 참배를 했다. 예배 도중에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는 황거요배를 하기도 했다. 교회 대표자가 예수보다 천조대신이 더 높다는 진술서에 서명했고, 성경을 편집하여 유대교적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구약성경을 버리게 했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를 공격한 이단 마르시온주의와 여러 면에서 일치한다.(최덕성)

우리는 교단의 부패와 배교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총회 횟수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면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해산하면서 남쪽을 중심으로 <남부대회>를 소집했다. 이 때 감리교는 감리교 재건을 위해 퇴장했고, 남부대회는 장로회 총회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46년 장로파 교회의 각 노회가 복구되었고, 1946년 6월 12일에 서울에서 남한 지역을 중심으로 총회가 소집되었다. 1946년 남부 총회에서 27회 총회에서 결의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다. 그리고 1946년 총회 회기를 1942년의 31회를 계승한 32회로 결정했다. 즉 1943, 1944, 1945년의 총회 회기가 개최되지 않은 공백을 인정한 것이다.

1947년 33회, 1948년 34회, 1949년 35회이고, 1950년에 36회가 되어야 하는데 전쟁으로 개최되지 못했다. 그리고 1951년 개최된 총회가 36회 총회가 되었다. 1951년 총회는 고신 교단이 분리되는 아픔의 역사이다. 1952년은 기장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유산은 고신이 소유하게 되었고, 신학의 자유로움은 기장 교단이 소유하게 되었고, 1960년대 선교사들의 재산은 통합 교단이 소유하게 되었다. 합동 교단은 교단 분리의 충격을 이기기 위한 기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합동 교단과 역사가 유사한 대신 교단(1961년 김치선 박사 중심으로 설립)은 백석과 교단 합병(2019년) 과정에서 많은 분열을 가졌다. 대신 교단은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인 김치선(남대문교회) 목사가 1948년 8월 설립한 "대한신학교"가 교단의 모태다.

2024년 장로회 총회 횟수를 109회기로 세운 교단은 1912년에 시작한 장로회 총회의 횟수인데, 4년의 공백이 있는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즉 1912년에 시작되었으며, 113회되어야 하는데, 109회 총회의 미스매치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 역사에 있는 치욕과 아픔이다. 역사는 치욕과 아픔 그리고 영예까지 모두 소유한다. 치욕은 버리고 영예만 취하는 역사 의식은 교회사의 자세로는 부당하다. 교회사는 좀 더 엄격하게 치욕을 더 깊이 포용하며 회개하며 다시 반복되는 치욕의 역사를 겪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형람서원 고경태

https://www.reformednews.co.kr/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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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기사 내용에 특정된 개인이나 관련 교회가 반론을 요구할 때 재반론을 조건으로 허락할 수 있습니다.>≫ 총회 ... ˝정통성, 법통성을 훼손하지 말라˝

일제는「조선예수교 장로회 제31회 총회」(1942)를 끝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대신「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은 교구제도를 두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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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저널 -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르포르만다는 유유미션이 운영하며 예수구원 복음전파, 영혼선점, 교회개척 사역자 양성에 주력한다 brea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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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기사 내용에 특정된 개인이나 관련 교회가 반론을 요구할 때 재반론을 조건으로 허락할 수 있습니다.>≫ 총회의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3년 공백기

일제시대 신사참배 모습 © 리폼드뉴스일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제31회, 1942)를 해산시키고 그 대신 모든 교파를 합친“일본기독교교단”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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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규칙(1943)은 한국교회가 단순히 변절하거나 훼절한 것이 아니라 배교한 사실을 일부 확인시켜 준다.

\제3조: 본 교단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조선반도에서 복음주의 기독교회 설립은 명치 초년 내지 및 만주로부터 포교받은 것을 발단으로 하여 명치 17년 이후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교파수 20여에 이르렀으며, 그 중 최대의 교파는 조선예수교장로회로 교회 수 3,000개, 신도 수 30만 명을 갖고 있다.

소화 16년(1941) 12월 8일 황공하옵게도 대동아전쟁 선포의 대소환이 발하자 우리들 황국신민은 일억일심, 총력을 기울여, 팔굉위우의 건국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반도내의 각 교회도 적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 하는 것을 최대 급선무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그 교의신학, 성서해석, 교회조직 및 의식습관 등에 있어서 종래의 사상 태도를 깨끗이 청산하여 순일본적기독교로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하여 그 명칭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이라 칭하리고 하고 각 지방의 대표가 소화 18년(1943) 5월 5일 경성(서울)에 모여, 새롭게 교단 규칙을 제정하여 직역 봉공, 종교 보국에 매진하는 새로운 발족을 하기로 하다.

제6조: 본 교단의 생활강령은 아래와 같다.

1. 황국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각각의 분을 다하여 신도(臣道)를 실천화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

2. 교의를 받들어 주일을 지키며 공예배에 참석하고 성찬에 참여하며 교회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

3.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국풍을 중히 여기며 경건의 수행을 쌓고 가정을 깨끗이 하여 사회 풍교(風敎)의 개선에 힘쓴다.

위 책은 소화 18년(1943) 10월 7일 경성(서울)에서 발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관식(金本觀植)이다. 발행장소는 경성의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본부이며, 인쇄는 평양에서 했다.

위 문서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은 한국교회가 역사적 기독교, 정통신학에 기초한 신앙을 버리고 신도기독교라는 이단으로 개종하여 배교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들 황국신민은 일억 일심, 총력을 기울여 팔굉위우의 건국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고, 반도 내 각 교회도 적성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 하는 것을 최대급선무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도 그 교의신학, 성서해석, 교회조직 및 의식관습 등에 있어서 종래의 사상태도를 깨끗이 청산하여 순일본적기독교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하며... 직역봉공 종교보국에 매진한다. 황도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신도를 실천하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 경신숭조의 국풍을 중히 여기며, 사회풍교의 개선에 힘쓴다."

<기장 교단 역사에서>

1800 -
1879년 3~8월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등 4인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로부터 세례받음.
1879년
서상륜(徐相崙)이 만주에서 존 로스(John Ross)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성서 번역에 참여함.
1883년 4월29일
이수정(李樹廷)이 일본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녹스(G. W. Knox)로부터 세례받음.
1883~1884년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의 전도로 황해도 장연군 송천에 최초의 장로교 신앙공동체(소래교회의 전신) 성립
1884년 9월20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連) 내한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 목사 내한
1887년 9월27일
언더우드, 한국인 세례교인 14명으로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 전신) 설립
1888년 12월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 제임스 기일(James Gale) 목사가 개인자격으로 입국
1889년 10월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s)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 양(Miss Mary T. Davis) 내한
1892년 11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테이트(L. B. Tate, 崔義德) 목사, 전킨(W. M. Junkin, 全緯廉) 목사, 레이놀즈(W. D. Reynolds, 李訥瑞) 목사 내한
1893년 1월28일
장로교회 치리기구 준행 선교부 공의회(장로회 선교부 공의회) 조직, 선교정책으로 네비우스 방법 채택
1893년12월
캐나다장로회 노바스코셔 출신 맥켄지(W. J. Mckenzie) 목사 독립 선교사로 내한
1895년 3월
장로교 찬송시(찬송가) 발간, 솔내교회당 완공함
1895년
맥켄지(W. J. Mckenzie)선교사가 솔내에서 급서하자, 캐나다장로교회가 감동을 받고 한국선교에 전력하다.
1897년 4월 1일
언더우드, 「그리스도신문」 창간
1898년 9월27일
캐나다장로회 의료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具禮善) 목사, 푸트(W. R. Foote, 富斗一) 목사, 맥래(Duncan M. McRae, 馬具禮) 목사 내한하여 함경도지역에서 선교활동
 
1900 -
1901년 5월15일
평양에 「연합장로회신학교」 설립(장로회 4개 선교부 연합)
1901년 9월
「장로회 합동공의회」(4개 선교부 선교사와 한국인 장로 회원) 설립, 평양에 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설립 결의.
1905년 9월15일
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 조직(회장 언더우드)
1907년 6월20일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배출(徐景祚, 邦基昌, 梁旬伯, 韓錫晋, 宋麟瑞, 吉善宙, 李基豊)
1907년 9월17일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독로회) 조직(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8명, 한국인 회원 40명), 신학교 졸업생 7인을 목사로 장립, 이기풍 목사 제주도 선교사 파송 결의.(목사 47명, 장로 53명, 예배처 984처소, 세례교인 17,890명, 원입교인 21,482명)
1908년 9월
제2회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서울 연동교회) 개최. 장로회 만국총회 총대 파송 결정.
1909년 9월
제3회 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평양신학교) 개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해삼위)에 최관흘 목사 선교사 파송 결의. 기관지 「예수교회보」 발행 결정.
 
1910 -
1910년 9월
제4회 예수교장로회 조선로회(평북 신천군 염수동교회) 개최. 백만구령운동 개시 결의.
1911년 9월
제5회 예수교장로회 조선로회(대구 남문안교회) 개최. 7개 대리회를 7개 노회로 개편하고, 1912년 9월 총회로 모이기로 결의.
1911년 10월15일
전라노회 조직(전주 서문밖교회)
1911년 12월 4일
경충노회 조직(서울 신문내교회)
1911년12월 8일
황해노회 조직(봉산 모동교회)
1912년12월 6일
경상노회 조직(부산진교회)
1912년 1월18일
평남노회 조직(평양신학교)
1912년 1월29일
함경노회 조직(원산 상리교회)
1912년 2월15일
평북노회 조직(선천남교회)
1912년 9월
제1회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평양, 경창문안 여성경학원) 개최. 노회수 : 7 노회(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평남, 평북, 황해). 회원수 : 목사 96인(한국인 52, 외국인 44) 장로 125인
1913년 9월
제2회 총회(서울, 소안동교회) 개최. 중국 산동선교 결정.
1915년12월 7일
장·감 연합으로 「기독신보」 창간
1916년 9월20일
경남노회 조직(부산 일신학교)
1916년12월27일
경북노회 조직(대구 남성교회)
1917년 2월13일
산서노회 조직(강계 남장태교회)
1917년 9월17일
전남노회 조직(목포 양동교회)
1917년10월10일
전북노회 조직(전주 서문밖교회)
1917년11월20일
함북노회 조직(북간도 용정교회)
1918년 3월20일
장로회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 창간
1918년 3월26일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조직
1918년 3월27일
함남노회 조직(함흥 신창리교회)
1918년11월27일
의산노회 조직(의주, 의주교회)
1919년 1월16일
장·감 연합으로 예수교서회에서 찬송가 발행
1919년 3월 1일
3·1독립운동 개시(길선주 목사, 유여대 목사 등 독립선언서 서명 민족대표로 참여, 총회장 김선두 목사 평양에서 독립선언식 거행하다 체포되어 옥고)
1919년10월
제8회 총회(평양 서문밖교회) "만국장로회 연합협의회"에 대표파견 결의
 
1920 -
1921년 1월 6일
평양노회 조직(평양신학교)
1921년 4월16일
남만노회 조직(통화 대모자교회)
1921년 9월
제10회 총회(평양 장대현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회규칙」발표
1921년12월20일
경안노회 조직(안동 옥리여성경학원)
1922년 2월 2일
안주노회 조직(안주 건인리교회), 평서노회 조직(진남포 비석리교회)
1922년 9월
제11회 총회(서울 승동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공포
1922년10월 2일
순천노회 조직(순천 남성경학당)
1924년10월24일
장로회, 남·북 감리회, 장·감의 여섯 선교회, 「성서공회」, 중앙기독교청년회 연합으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설.
1925년 6월
캐나다 장로회, 감리회, 조합 교회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통합. 캐나다 연합교회와 선교협력관계를 계속하기로 함
1928년 9월 9일
「여전도회연합회」 창립. 총회개최
1928년 9월10일
장·감 합동 신정 찬송가 발행.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권) 발간
1929년 9월
제18회 총회(서울 새문안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수정헌법 공포
 
1930 -
1932년10월13일
경성노회 창립(서울 신문내교회)
1934년 9월
제23회 총회(평양 서문밖교회). 선교50주년 희년 기념. 장로교 전용 신편 찬송가 발행
1934년10월
선교50주년(희년)기념대회(평양 숭실전문학교)
1938년 9월
제27회 총회, 신사참배결의 시행. 「평양 장로회신학교」 신사참배 문제로 폐쇄.
1939년 3월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 조직(서울 김대현 장로 중심)
1939년 9월
제28회 총회(신의주 제2교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결성. 「조선신학교」설립 인가,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 총회 직영으로 재 개교 결의.
 
1940 -
1940년 2월 9일
평양신학교 총독부 인가, 재개교(4월 11일).
1940년 3월24일
평양 산정현교회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강제 폐쇄
1940년 4월19일
「조선신학원」개원(서울 승동교회, 초대학원장 김대현장로, '금필헌' 미화 30만달러 희사)
1940년11월10일
조선장로교 중앙상치위원회 설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곽진근의 담화와 함께 조선예수교장로회 혁신요강 발표.
1942년 4월29일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와 연합으로「기독교신문」창간.
1943년 5월 5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설립(통리 채필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실천요목 발표.
1945년 7월19~20일
일제의 압력으로 감리교 구세군 등과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조직. 통합
1945년11월27~30일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개최(서울 정동교회)
1946년 6월
남부 총회(서울 승동교회).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취소 결의.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의
1947년 4월
제33회 총회(대구 제일교회). 조선신학교 학생 51명, 김재준 교수에 대한 진정서 제출.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 파견 결의.
1948년 8월10일
「조선신학교」, 정규대학 인가(경남 진정률 장로 문중 임야 565,830평 희사)
1949년 4월
제35회 총회(서울 새문안교회).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 장로회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가결.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합동 위원회 조직.
 
1950 -
1951년 4월
「조선신학대학」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칭
1951년 5월
제36회 계속 총회(부산 중앙교회). 조선신학교 직영 취소 결의.
1952년 4월29일~5월2일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에서 다음 사항을 결의
1.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 목사 안수 안하기로
2. 김재준 목사를 목사직에서 제명 지시
3. 제36회 총회시 성경축자 영감설을 부정한 조선신학교 교수 서고도 목사를 심사키로
4. 각 노회에서 위 두 교수의 사상을 찬성 지지하는 자는 처벌키로
1952년 5월
제37회 총회에서의 불법 결의에 항의하는 호헌대회를 소집하여(대구) 총회 불법결의 철회 요청.
1952년 9월18일
총회 직영 총회신학교 설립(대구)
1952년 9월
대구 남산교회에서 호헌대회 개최 '성명서' 발표
1953년 4월
제38회 총회(대구 서문교회). 전북노회, 충남노회 총대 회원권 박탈
1953년 6월10일
제38회 호헌 총회(서울, 한국신학대학)를 소집하고 선언서를 발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 ‘청년회 전국연합회’,‘여전도회 연합대회’ 새역사 시작
1954년 3월
[한국신학대학 대학원] 설립인가·개설
1954년 4월
[한남신학교] 설립 개교
1954년 6월
제39회 총회(서울 한국신학대학). 총회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
1955년 5월
제40회 총회(서울 동부교회). 캐나다 연합교회와 협력관계 수립
1956년 5월
제41회 총회(서울 성남교회). 부목사, 女장로 제도 채택
1957년 5월
제42회 총회(청주제일교회)
1957년 7월
회보 제1권 제1호 발행(발행인 구연직)
1957년10월
[한국기독교연합회](KNCC)에 가입, [한국기독교세계봉사회](KCWS)에 가입
1957년
높으뫼 농장(이리농장) 설립(기독교농촌개발원 전신)
1959년10월
[동남아기독교협의회](EACC)에 가입
1959년11월
[세계장로회연맹(WARC)]에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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