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람성경] 고린도후서 2장: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의 기쁨과 슬픔은....
[형람성경] 고린도후서 2장: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자의 기쁨과 슬픔은....
[1-3절]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슬픔)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근심하게 하기를 원치 않았다. 교인들은 목사의 기쁨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1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했다.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도 바울의 기쁨이 되고 그들의 근심은 바울의 근심이 된다. 성도의 기쁨은 목사의 기쁨이요 성도의 근심은 목사의 근심이다. 또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임도 확신한다. 목사의 기쁨은 또한 성도들의 기쁨이 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다른 근심(another painful)으로 서지 않기로 결단했다(1절). 사도 바울이 근심하게 되면, 그것은 근심하게 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근심에서 상대에 대해서 인식했다. 그리고 근심하게 되면 바울과 함께 기뻐할 자들이 함께 근심하게 될 것을 염려했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배려는 절제이다. 절대로 숨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며,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기쁨이 고린도 교회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했다.
[4절]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란에서 큰 환난과 핍박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애통과 근심이 있었다. 그의 애통과 근심은 고린도 교인들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왔고 그러므로 그는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었다. 바울이 보인 근심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함에 대한 증거였다. 바울의 고통에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랑을 알아야 했다.
바울의 사역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다.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도,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말하였고 또 “너희가 일깨어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행 20:19, 31).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사도 바울의 눈물의 편지는 책망과 권면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근심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향한 그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눈물의 책망의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다. 책망은 감추인 사랑보다 낫다.
[5-6절]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희 무리를]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근심하게 한 자’는 범죄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로 인해 근심했으나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케 한 것”이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린도 교회는 범죄자를 권징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이 그 권징에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찬성했고 그 범죄자를 벌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에는 권징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의 권면을 순종했다. 그들은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사도를 통해 주신 성령의 권면을 따랐다. 그 교회는 참된 신앙고백과 순종이 있는 교회이었다.
[7-9절]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저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권징은 벌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죄인의 회개를 목표로 한다. 권징치 않으면 죄 가운데 머물 형제를 권징을 통해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이제 권징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사도 바울은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 후 그를 품어주듯이, 그는 그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오늘날도 교회는 권징이 있고 용서와 위로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참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 서로 사랑하라는 그의 새 계명을 어기기를 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새 계명에 복종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이 미움의 표현이 아니고 사랑의 동기에서 행해진 것임을 증거할 필요가 있다. 범죄하는 자를 징벌하는 교회에 그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범죄자에게 증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권면을 순종하리라고 기대한다. 아니 이 권면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순종하는 자들이기를 기대한다. 교회는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0-11절]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교회는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해벌(解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행해진다. 마태복음 18:18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범죄자로 너무 근심케 함으로 낙망케 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 할 것이다. 사탄의 궤계는 첫째, 성도를 범죄케 하는 것과, 둘째, 낙심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벌도 필요하지만 회개한 자에게 주는 용서와 위로도 필요하다. 사탄은 죄인에게 속박과 근심과 낙심을 주지만, 구주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죄로부터의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
[12-13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of Christ, εἰς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ῦ Χριστοῦ)을 전하는 사역을 했다. 주 안에서 열린 ‘문’은 전도의 문이다. 전도의 문은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된다.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주 안에서 바울에게 열렸고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한 상태에서(I still had no peace of mind, my spirit)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바울은 많은 역경 속에서 결코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the aroma of the knowledge of him, fragrance)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냄새는 향기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 곧 그리스도의 지식을 널리 알리는 향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전도자에게 이기게 하시는 것은 환란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 복음을 전도함이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이다.
구약시대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듯이”(삼하 8:6, 14),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 사역에서 그들이 항상 이기게 하셨다. 그의 사역은 고난 중에서도 항상 승리적이었다. 오늘날도 진리의 사역은 항상 승리적이다. 불순종과 죄는 실패의 원인이지만, 순종과 의는 항상 승리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의 사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5-16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the aroma of Christ)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복음을 전도하는 자)는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제사장이 향을 들고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는 향이다. 그 향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이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향기이다. 정교회는 예전에서 향을 흔드는 것으로 향을 가시화하는데, 향기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가청적인 복음의 소리이다.
그런데 이 직무를 잘 감당할 사람은 누구인가? 전도는 참으로 존귀하고 복된 직무이며 두렵고 떨리는 직무이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명과 사망을 나누고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나누기 때문이다(요 3:18). 우리는 사람의 지혜나 힘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을 감당할 뿐이다. 생명을 줄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할 전도자는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17절]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카펠루오 )[장사하지, 품질을 떨어뜨리지, 부패시키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호스 에크 데우)[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as commissioned by God, in the sight of God we speak in Christ.). * NIV에서는 in Christ we speak before God with sincerity, as those sent from God으로 번역했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많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또는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했다.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고 모든 시대에 설교자의 좋은 본이 되었다. 하나님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말고 또 하나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순전하게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ἐν Χριστῷ λαλοῦμεν) 있다고 밝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교회는 범죄자에게 눈물과 사랑의 권면과 책망과 권징을 해야 한다. 목사의 기쁨은 교인들이며 교인들의 기쁨은 목사이다. 교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바르게 살 때 그것은 목사에게 기쁨이 된다. 그러나 범죄자는 목사에게나 교인들 모두에게 슬픔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범죄자에게 권징을 내리지만, 회개하고 돌이킨 자에게는 용서와 위로를 주며 너무 낙심치 않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널리 풍겨야 한다. 예수께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의 구속(救贖)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 구원의 복음을 만방에 전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다. 우리는 이 전도의 사역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잘 감당할 수 있고 항상 승리할 수 있다.
셋째로, 오늘날 우리는 사도 시대의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시키거나 부패시키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가감하지 말고 바르고 순수하게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 읽기와 연구하기와 묵상하고 성경을 가감하지 말고 믿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디모데후서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석]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형람성경 고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