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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란 무엇인가?

형람서원 2024. 4. 2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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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란 무엇인가?

현상학과 현대철학

2003, vol., no.21, pp. 12-296 (285 pages)

발행기관 : 한국현상학회 서동욱 1

초록

예언으로부터 사람들은 대개 앞날에 대한 ‘지식’을 기대한다.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이러한 기대는 얼마나 자주 용서할 수 없는 배신감으로 이어졌던가? 아마도 이러한 배신감은 예언으로부터, 예언이 줄 수 없는 것(지식)을 사람들이 기대했기 때문은 아닐까? 예언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글은 예언은 지식으로는 성립하지 않으며, 스피노자가 말하듯 오직 도덕적 목적만을 지닌다는 것을 밝힌다. 그런데 예언이라는 것은 예언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nabi(말하는 자)’가 알려주듯 ‘말함’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말해진’ 예언의 목적이 도덕성이라면, 그 도덕성은 말해진 것의 원천인 ‘말함’으로부터 부여되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예언은 레비나스가 하듯 말함의 차원에서 궁극적으로 해명되어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말하는 행위’로서의 예언은 어떤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왜 예언자의 말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인지 해명하는 일을 핵심과제로 삼는다.

‘豫言’과 ‘預言’ - 성서한역과정을 중심으로 살펴 본 ‘예언’의 한자어 -

Understanding or Misunderstanding of the Word 豫言/預言 : A Critical Evaluation of the Meaning of 豫言/預言 in the Context of Bible Translations in East Asia

가톨릭신학 약어 : 가톨릭신학

2020, vol., no.37, pp. 179-221 (43 pages)

발행기관 : 한국가톨릭신학학회 조동원 /CHO,Dong-Won 1

초록

본고는 ‘豫言’ 혹은 ‘預言’으로 표기되는 ‘예언’의 한자어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담고 있다. 고전한문에서 ‘豫’와 ‘預’는 그 의미와 발음이 같은 통자(通字)로서 “미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고문에서 ‘豫言’과 ‘預言’은 같은 의미, 즉 “미리 말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이는 ‘예언’에 상응하는 서구어 ‘prophecy(προφητεία)’와 실질적으로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豫言’과 ‘預言’이 실제로 같은 의미의 단어라는 사실은, 숱한 한국과 중국의 옛 문헌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중국과 더불어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일본에서는 특이하게도 ‘預’라는 한자어가 “미리”가 아닌 “맡기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용례는 이미 헤이안(平安) 시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장원(莊園) 영주(領主)는 장원의 잡다한 일을 위임하고 ‘맡긴’ 관리를 두었는데, 이 관리 혹은 관직을 ‘預’라 불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預’가 “맡기다”라는 의미로, ‘豫’(‘予’)는 “미리”라는 의미로 구별되어 사용되었다. 19세기 무렵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서 한역(漢譯)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한역성서는 일본과 한국의 자국어 성서 번역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브릿지만-컬벗슨 역본(1859)은 ‘prophet’을 ‘預言者’으로 옮겼고, 이 번역은 최초의 일본어 성서 완역본인 메이지 역본(1887)과 이후의 여러 한국어 번역본(국한문 혼용), 특히 개신교 측의 번역본에 그대로 이어졌다. 원래 한역성서의 ‘預言’은 고문에서 통용되던 의미, 즉 “미리 말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預’라는 단어를 “맡기다”라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일본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預言’을 (일반적인 ‘豫言’과 구분되는) “말씀을 맡기다” 혹은 “맡겨진 말씀”으로 해석하기 시작하였고, 현대 일본어에서 이는 하나의 표준 어법으로 굳어졌다. ‘豫言’과 ‘預言’에 대한 그러한 ‘이해’는 몇몇 학자들에 의해 한국의 그리스도교 담론 안에도 수용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원래 고문 안에서 ‘預’가 ‘豫’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 ‘오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의미와 사용에 있어서 생겨난 이런 혼란은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이른바 화제한어(和制漢語)라 불리는 일본식 한자 사용이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預’는 특히 금융 용어들을 중심으로 “맡기다”라는 의미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에 비해 “미리”라는 의미는 대체로 ‘豫’에만 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통시적(通時的) 혹은 언어사적(言語史的) 관점에서 ‘豫言’과 ‘預言’의 구별은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교 ‘예언’의 독창성과 독특함을 강조하여, 이에 따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豫言’과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의 ‘預言’을 구별하고 재해석하는 시도는 가능하겠지만, 이 역시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후속 연구에서 더 깊이 있게 다뤄져야 할 주제일 것이다.

This research traces the origin of the understanding or misunderstanding of “prophecy” in its Korean word “예언”, which was in its turn originated from the Chinese word “豫言” or “預言”. “豫” and “預” had been used almost as the same in Classical Chinese, usually meaning “beforehand”. It follows that those two words, “豫言” and “預言”, are not practically distinct from each other, signifying “telling beforehand”, which corresponds precisely to the original meaning of “prophecy(προφητεία)”. There can be found many texts that show such identity between “豫言” and “預言” in Classical Chinese, both in China and Korea. However, in Japan, which can be counted as another member of the Chinese character cultural sphere, “預” has been used as other meaning than “beforehand”. As early as in the Heian(平安) Period, “預” began to be adopted for indicating a government office or a person responsible for that office, to whom was “entrusted” the care for the Manor(荘園). As a result, “預” came to have the meaning of “entrust” in the Japanese language, while “豫”(or “予”) was being used as the same, that is, “beforehand”. Around the 19th century, some Christian missionaries began to translate the Bible into Classical Chinese, whose works will be eventually providing some critical norms for future translations of the Bible both in Korean and Japanese language. Among those translations in Chinese, the Bridgman-Culbertson Edition(1859) is worthy to point out, for it explicitly used the word “預言者” for the translation of “prophet”, which seems to have been accepted by the first Bible in Japanese(Meiji Edition, 1887) and even by various editions of Korean translation in the Protestant Churches. In the original Chinese translation, “預言” conveyed the same meaning as in Classical Chinese, that is, “tell beforehand”. However, since the usage of “預” in the Japanese language had already been changed, some Japanese began to think that “預言” meant “entrusting (divine) word” or “divine word entrusted”. It led to a decisive distinction between “豫言” and “預言” in contemporary Japanese language usage. Such interpretation or misinterpretation of “豫言/預言” was adopted by some authors in Korea, mainly caused by a confusion of the original meaning and usage of “預” in Classical Chinese. It is highly possible that this is an ‘unfortunate’ consequence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during which the usage of “預” as “entrust” seems to have been adopted in the Korean language. We can conclude without much difficulty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豫言” and “預言” cannot be justified at least in a dimension of diachronic linguistics, because such understanding is based on a misunderstanding of Classical Chinese. Although we can think of some possibility of a new interpretation of “豫言/預言” by focusing on some new and original aspects of Christian “prophecy”, there remain other problems unsolved, which are to be examined more fully in future works.

예언(豫言)이란 무엇인가?

‘예언’에는 ‘예언(豫言)’과 ‘예언(預言)’이 있다. 어떤 신학자가 두 단어를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을 보고, 두 단어를 구분해야 하는지를 한학자(漢學者)에게 질문했다. 그 한학자는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라고 했다. [참고. 예(豫, 미리 예), 예(預, 미리 예) 예금(預金), 예산(豫算), 予(예)+상(象)과 혈(頁)이 결합하여 만든 문자이다]

우리는 통상 ‘예언’을 ‘미래의 일을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영어에는 prophecy와 prediction가 있는데, 성경에서는 prophecy를 사용한다. 이것은 ‘신탁(神託)’인 ‘oracle’과는 다른 행위인 것 같다. 신이 말한 것을 전달하는 단어가 prophecy와 oracle이고, 우리말에서는 예언(豫言)과 신탁(神託)으로 구분하고 있다. 신(神)에게 무엇을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전부 예언(預言)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신탁(神託)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언과 신탁을 명료하게 구분해야만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탁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사용하는 학자들도 있을 것인데, 일상적인 예언을 사용하지 않은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prophet’를 ‘선지자(先知者)’로 번역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예수 이전에 나타나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을 예언한 사람”로 정의한다. 개신교에서만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정의한 것 같다. 구교(천주교)에서는 ‘예언자’로 사용한다. 개역개정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 모두 ‘선지자’로 사용한다. 고전 14:32에서 제시한 “예언하는 자들”은 일반명사가 아니다. 행 21:9에서 네 딸은 예언하는 자(did prophesy)로 행 21:10에서 아가보는 선지자(a certain prophet)로 제시했다.

우리 시대에 신사도 운동에서는 (자칭, 타칭) 사도가 부활하고 있다. 그런데 ‘선지자’는 부활하지 않는데, ‘예언자’가 부활하고 있다. prophecy을 행하는 prophet인데, ‘선지자’가 아닌 ‘예언자’이다.

우리는 국어사전의 의미를 잘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구약 시대 ‘예언’은 “예수 이전에 예수의 강림과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큰 뜻(구원)에 관한 것이다. 신약 시대에 예언은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아가보 선지자가 기근을 예언했고(행 11-27-28), 빌립의 네 딸과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받을 것을 보아서 예루살렘에 가지 않도록 권면했다. 전자의 예언은 이방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을 부조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었고, 후자는 사도 바울을 붙잡았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신약성경의 예언은 구약 시대와 다른 점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다는 명령이 없는 것이다. 아가보는 성령으로 말했고(행 11:28), 성령이 말씀한 것을(행 21:11) 말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성령이 하신 말씀을 거역한 것인가?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려고 고의로 행동했는가? 예루살렘 교회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울에게 지도했고, 바울은 지도를 따라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행 21:26).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의 예언이 ‘개인적 예언’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한 부분만을 본 것이다. 바울도 그 부분을 동일하게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 자신이 갈 것을 확신했고, 서바나까지 이를 것을 확신했다. 다만 그 방법을 알지 못했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였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진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복음이 땅끝까지 가는 경륜을 본 것이고, 그 경륜의 부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은 것이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있다는 예언의 유형은 무엇인가? 고난의 상황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고난의 상황이 아니라 고난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고난을 피할 길을 알려주면, 듣는 자는 맹목적으로 피할 길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고, 혹 따르지 않더라고 꺼림칙한 마음을 지우지 못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예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예언의 유형은 과거의 죄를 사유(赦宥)하는 행위까지 있다고 한다. 과거의 죄를 알아 지적하고 회개를 종용하며, 예언자로 안수기도로 사죄(赦罪)를 행할까? 또 어떤 예언의 유형은 아들 낳고 딸 낳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아들을 딸로, 딸을 아들로 바꾸는 능력까지 행하는지는 모르겠다. 예언으로 대학이나 취업의 합격 불합격 여부를 미리 알려주기도 한다고 한다. 불합격을 합격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성경은 선지자나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신 13:1-5).

‘그리스도인’이 행하면 모두가 선(善)이 되는 것인가? ‘자칭 그리스도인’은 한국 교회 안에는 없는가? ‘적그리스도’는 666을 이마에 보이도록 새겨 놓았을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주의 은혜의 도리를 겸손하게 증거해야 한다. 겸손은 자기경험이 아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기경험이 중요하지만 자기경험은 주관이고 검증할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은 자기객관화의 오류일 것이다. 혹 유익이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잠간의 유익, 일시적 유익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2,000년 동안 변하지 않았고, 2,000년 동안 거짓 유형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다양화 되었을 뿐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하기 때문에 옳다는 견해를 주의하고 부정하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자며 구원의 탈락가능성을 주장으로 오용할 것이 아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룸은 자기부정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객관화시키지 말자. 객관화된 복음 문장을 더 많이 창안해서 규모있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추상적인 문장에 배부르지 말고,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문장으로 지식을 이루자.

예언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잡히고 이해되고 파악되는 생명의 말씀이다.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무지하고, 예언을 무시하면 백성이 방자하다. 거짓 예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참 예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방언기도 용례가 없듯이, 예언기도 용례도 없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거룩 세움을 목표로 한다.

선지자는 주의 예언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백성을 훈련시켰고, 언약의 땅에서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 백성을 책망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오신 뒤에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했고, 신약시대에 선지자는 사도의 사역을 돕는 역할을 했다. 사도의 주 임무는 복음 전파와 구제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언은 개인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개인적 예언’이라는 표현은 ‘성경 한 본문’에서 모든 설교자들의 설교가 다름에 대한 정당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설교를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동일한 성경 본문을 설교할 때는 다르게 설교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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