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밖의 길(158장)은 한덕교 목사의 작사곡이다.
장영학
주기철 목사 순교 80주년의 진실
영문밖의길(158장) - 주기철 목사의 옥중시 아니다
한덕교 목사 작사(1950년 1월 2일 지음)
기독교도 연맹 가입 거부로 공산당에 끌려가기 전에 지어서 사모님에게 주신 글
“ 아버지의 사랑을 담은 시를 썼던 목사 ”생년월일 : 1889년 6월 12일출생지 : 강원도 춘성군 서면 김산리순교일 : 1950년 10월 14일순교지 : 평양시 근교직분 : 목사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한덕교는 1889년 6월 12일 강원도 홍성에서 문중 한학당을 지키는 선비 함병리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측량기사로 평양 평남도청에서 근무하였다. 일본인의 약탈적인 식민정책 등에서 오는 겨레 양심으로 번민하던 차에 서른이 넘어서 서문밖교회 김선두목사의 인도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였다. 1932년 늦은 나이에...
한 덕 교 ( 韓 德 敎 , 1889 ~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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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사랑을 담은 시를 썼던 목사 ”
생년월일 : 1889년 6월 12일 출생지 : 강원도 춘성군 서면 김산리 순교일 : 1950년 10월 14일 순교지 : 평양시 근교 직분 : 목사 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 |
한덕교는 1889년 6월 12일 강원도 홍성에서 문중 한학당을 지키는 선비 함병리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측량기사로 평양 평남도청에서 근무하였다.
일본인의 약탈적인 식민정책 등에서 오는 겨레 양심으로 번민하던 차에 서른이 넘어서 서문밖교회 김선두목사의 인도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였다. 1932년 늦은 나이에 (25회)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안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안주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는 했으나 끝까지 하지 못하고 의산 제3교회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다시 안주동교회의 청빙을 받은 50대의 한목사는 그곳에서 남은 생을 마치려했다. 공산세력의 손길이 점점 가까워오자 젊은이들을 월남시키면서 자신은 교회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인생경험이 누구보다 많았던 한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수록 감사하여 때로는 시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기도하였고 설교시간에도 작사한 시를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르기도 하는 문필가였다. 맏아들이 다리를 저는 것을 안타까이 여긴 한목사는 "영문 밖의 길"에서 "..저는 다리 고쳐주시고...."로써 아버지의 애뜻한 마음을 실어 사랑을 나타냈다.
목회자로서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수 없어 남으로 떠날 때 한목사 또한 피난권유를 받았으나 자신의 생애를 마치려는 곳임을 알고 처자식만을 떠나보내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한목사는 안주노회장을 거쳐 마지막 이북5도 연합노회장으로 기맹에 대항하여 싸웠다. 공개적으로 연합노회가 모이는 것도 어려워지더니 노회 중 1950년 1월 7일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모진고문으로 기진할 때면 기도와 스스로 작사하여 노래함으로 새 힘을 얻곤 하였다. 두 번은 예수를 배신할 수 없었던 한덕교목사는 꺾이지 않는 처절한 투쟁을 하다 공산당으로부터 총살되어 62세에 순교하였다.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내 한덕교목사순교기념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