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투레틴의 칭의"R.C.스프로울의 서문 중에서
Shinji An 5시간 ·
"프란시스 투레틴의 칭의"
R.C.스프로울의 서문 중에서
1."교회를 서거나 넘어지게 하는 신조" 이 말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아마도 생소할 것이지만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에 대한 마틴 루터의 평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 교리에 대한 그의 평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말은 칭의론은 하나의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교회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2.여기에서 루터는 칭의를 “교회를 서거나 넘어지게 하는 신조”라고 부른다. 칭의는 단지 교회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교회의 본질 또는 존재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교리가 없으면 교회는 넘어지고 와해되어 폐허로 변하고,참된 교회이기를 그치게 된다.
3.이 교리는 모든 교리의 머리이자 모퉁이돌이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탄생 시키고,자양분을 공급하여 양육하며,세워나가고,보존하며,지켜내 준다. 이 교리 없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단 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4.칭의 신조에서 떠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상 숭배자다.왜냐하면 이 신조가 제거되었을 때에는,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거룩함 등등이 그 정점에 달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신앙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그런 신앙 속에는 오직 오류와 위선과 불경함과 우상숭배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5.칭의 신조는 온갖 종류의 교리들에 대하여 주인이자 왕이며 주이고 통치자이며 재판장이다.
6.칭의 신조가 사라지면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도 동시에 사라진다.
7.그러므로 기독교의 의를 떠난 사람은 그리스도를 떠났기 때문에,자신의 행위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8. ‘솔라 피데’를 거부하는 것은 복음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고,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칭의의 유일한 근거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9.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필요한 공로와 의가 설령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도우심을 받는 경우에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외부에서 발견되는 “우리 밖에 있는”(라틴어로 extra nos)의,즉 원래 그리스도 자신에게 속해 있는 의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전가되는 의다.
10.나는 16세기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의 죄인의 상태와 관련해서 그 어떤 독특하거나 특별한 것을 보지 못한다. 나나 루터에게나 외재적인 의가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11. “이신칭의 교리는 16세기에는 중요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거나 “당시의 칭의 논쟁은 모두 오해로 빚어진 것으로서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고,이제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도 모든 것을 잘해 나갈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한 발언이나 정서는 “평화가 전혀 없을 때 평화,평화라고 외쳐서” “딸 시온의 상처를 표면만 살짝 치료해” 주고 근본적인 치료를 외면했던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처방과 다를 것이 없다.
12.칭의론이 무너질 때,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도 함께 무너지고,따라서 루터가 말했듯이 교회 자체도 무너진다.
13.이렇게 종교개혁의 칭의론과 관련된 여러 측면들을 둘러싼 온갖 논쟁들이 난무하는 지금,프란시스 투레틴의 방대한 저서인 [변증신학강요]에서 칭의론 부분을 발췌해서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14.우리의 문화는 모든 합리적인 것들에 대해서 눈에 띄게 반감을 보이기 때문에,엄격하게 논리적인 방식으로 신학을 수행하는 것을 거의 불경스럽고 비영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 결과 사고는 감정에 밀리게 되고,명료성 대신에 혼란함이 들어선다.
15.교묘한 말장난으로 진리를 회피하는 비판자들을 상대로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혁신(그것을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은 필수 불가결하게 되는데,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올바른 교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공격하라는 부르심을 끊임없이 받고 있기 때문에,그런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그 원수들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복잡하고 재빠르게 돌려서 잡히지 않고 빠져 나가는 뱀들처럼 교묘한 말들을 아주 복잡하게 꼬아서 늘어놓음으로써 빠져나가려고 하기 때문에,끈질기게 추격해서 확실하고 단단하게 잡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단들이 제기한 논쟁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했을 때,불경건한 자들이 표현의 모호성을 일종의 은신처로 삼아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아주 꼼꼼하고 정확한 말들과 표현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빈
16.교회사는 고의적인 모호성이야말로 이단의 피신처라는 것을 증언해준다.
17.투레틴의 가장 큰 강점은 아마도 그의 예리한 지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것들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구분하는 일에 있어서 대가였다. 정확성은 명료성을 산출해내었고,명료성은 사람들의 이해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18.칭의에서 우리는 법정적으로 의인으로 선언되지만 실제로 우리 자신은 여전히 죄인이라는 개신교의 관점을 담고 있다.성화는 칭의가 이루어졌을 때 즉시 시작되지만,우리의 칭의는 선행적인 성화에 달려있지 않다.
19.로마카톨릭에서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은 믿는 자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다. 즉,어떤 사람이 내재적으로 진정으로 의로울 때,바로 그런 때에만,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롭다고 한다. 반면에,개신교에서 말하는 법정적 칭의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된 것을 근거로 해서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20.복음은 허구가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엄연한 실재로 선포한다.우리가 의로운 것으로 여겨지거나 간주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허구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의의 (허구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전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1.로마카톨릭의 교리는 복음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 내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내재적으로 의롭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나는 영원히 기다려야 한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도 사라지고,구원의 기쁨도 사라지며,나의 죄 사함도 사라지고,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그 권속에 속하게 되는 것도 사라지며,나의 더러운 옷을 가려주는 그리스도의 의의 외투도 사라지고 만다.
22.그것은 체계 전체의 차이다. 로마 카톨릭의 구원 체계 전체는 성경적인 복음과 절대로 양립될 수 없다. 프란시스 투레틴보다 이것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3.칭의의 단일성,완전성,확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