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 고경태의 박사논문 요약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
고경태의 박사논문 요약
서 론
본 논문은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 연구”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이다. 그래서 모든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개진해야 한다. 존 칼빈도 자기의 신학의 체계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해를 개진하고 있으며, 칼 바르트도 자기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를 개진하고 있다. 두 신학자는 기독교의 신학의 사상을 결정하고 방향성을 제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 신학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 연구는 기독교의 이해에 결정적인 내용을 제시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 이해가 있으며, 어떠한 것이 진정한 기독교를 이룰 수 있는지를 가름할 수 있게 된다.
본 논문의 목표는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이 갖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신학의 비교 연구에서 서로의 상관성을 두고 연구하였다. 그러나 상관성의 연구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교 연구는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최초로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를 비교하였고, 두 신학자의 이해가 전혀 다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의 방대함으로 본 논문에서도 두 신학자의 전체의 이해를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I, II, III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를 전개하고,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 II/2권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첫째는 삼위일체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와 역할, 둘째 예정론(선택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교리에 근거하여 신학함을 원칙으로 한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이 교리는 325년 니케야 공회의를 필두로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의의 교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451년 칼케톤 공회의의 그리스도의 양성 이해를 바른 교리로 수납한다. 이러한 신학자로 미국의 메이첸을 참고하였다.
니케야 신경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시금석이다. 니케야 신경에 어긋난다는 진술과 이해방식은 기독교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메이천은 아래와 같이 니케야 신경의 이해에 근거한 주장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위대하시지만, 하나님보다 못하시다고 주장했던 자들을 교회는 파문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파문은 선하고 옳은 것이었다. 그러한 의견의 차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거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almost God)는 없다. 그런 사상은 신성모독이다.
니케야 신경의 형성에 시작이며 결정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에서 교회와 교회가 되지 못함의 분별의 기준이 수립된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 양성 교리이다. 이 양대 교리는 보편교회(The Holy Catholic(Universal) Church)의 교리이다. 종교개혁 신학에서 이신칭의를 기독교 교리 포함하여, 로마교회와 개신교회의 구별점으로 삼았다. 보편 교회의 교리는 2대 교리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것은 2대 교리가 정당하게 세워지면, 필연적 귀결에 이신칭의도 세워지며, 예정론 등 기타 파생되는 교리들이 연결된다. 기독교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2대 교리에 대한 명백한 정체성을 밝혀야만 한다. 이 양대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해, 특히 “주 예수”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본 론
본 논문은 먼저 칼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를 제시하였다. 먼저 칼 바르트는 인간 상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동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가 제시하는 예수는 오직 인간 예수에서 시작함을 밝혔다.
둘째,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삼일성”을 주장하면서, 381년 콘스탄니폴리스 신경에서 2위격 성자에 대한 재해석을 집중적으로 제시하였다. 칼 바르트가 신정통주의 신학을 이룸은 381년 공회의의 내용을 재번역함임을 천명하기 위함이다. 그는 교회의 교리를 재해석 번안함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을 세웠다. 자유주의 신학은 교리에 대한 의문과 회의 그리고 부정을 하였지만, 교리를 직접적으로 재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직접 교리의 문안을 재해석함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을 제시한 것이다.
이 때에 필연적으로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재해석이 제기되었다.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의 동일본체(homoousion)를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을 재해석하고 부정하였다. 이것을 위해서 바르트는 삼위일체가 종교사학파적인 발전에 의한 산물이기 때문에, 현대에 재해석의 정당성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발달된 문화와 문명의 조명 아래서 고대 교리의 재해석을 제시하였다. 삼위일체의 재해석과 다른 이해의 정립은 교회 근간을 파괴하고 제거하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셋째, 칼 바르트의 선택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를 제시하였다.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자로 제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발트는 창조주, 화해주, 구속주로 삼일성을 제시하였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가 2위격의 화해주이다. 성령이 구속주이다. 전통적인 신학에서 구속주를 예수로 믿었던 것을 성령으로 전환시킨 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의 성령 이해의 독특함이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 부합되지 않는다.
칼 바르트는 화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서 스스로 유기되는 것을 선택한, 선택하는 하나님(Electing God)으로 제시하였다. 그 선택에 모든 사람이 포함되는 보편구원론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선택한 하나님으로 숭앙되는 것의 도식처럼 보이지만, 결국 인간에 불과한 숭고한 선택을 한 것이 바르트의 견지이다. 인간 예수는 아무리 높아지고 하나님이 된다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독교 진리를 견지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제시이다.
칼 바르트의 신학의 개진의 뒤로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를 개진하였다. 역사적으로 존 칼빈이 선대의 인물이지만, 본 논문의 목적이 칼 바르트의 신학의 문제점을 밝히는 일임으로 칼 바르트를 선두에 놓았고, 후미에 존 칼빈의 신학을 제시하였다.
2)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먼저 칼빈에게 자연신학의 문제에 대한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논쟁에서 두 신학자가 모두 칼빈에 대한 바른 이해가 되지 못함을 제시하였다. 바르트가 브루너의 자연계시의 주장을 거부했지만, 바르트의 신학의 내용에는 브루너보다 더 과격한 자연계시의 가능성의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시는 특별계시 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구도이다. 바르트는 자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개방시키며, 그것이 자연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의 부패와 해결책을 제시하여 바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취득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철저하게 성경과 고대 교리에 입각하여 신학을 전개함을 밝혔다. 칼빈은 중세로마교회가 고대교회의 교리와 행위를 떠난 교회임을 수 없이 비판하였다. 그는 성경과 교리에 입각하여 신학을 하였으며, 또한 목회 사역을 하였다.
둘째,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해에서 정확히 고대 교회의 이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1000년 동안 침묵하던 삼위일체 교리를 기독교 신학의 바른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 삼위일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를 얼마나 명확하게 제시하는지를 제시하였다. 또한 인간의 본성의 부패를 치료하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역할을 바르게 제시함으로 성경의 구원의 진리를 신학에서 개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451년 칼케돈 공회의에 부합되는 명확한 이해임을 제시하였다.
셋째, 칼빈의 예정론은 바르트의 선택론과 다름이 신학 주제에서부터 다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난 선택에 중점을 두는 바르트와 다르게, 그의 예정론은 비밀한 경륜 속에 있는 예정에 중점이 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이중예정은 칼빈이 어거스틴의 예정을 구체적으로 체계화시킨 예정론이다. 이 칼빈의 예정 이해가 17세기 초엽 네델란드에서 5대강령(TULIP)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후기에 결정된 TULIP처럼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예정의 신비를 전하는 것이며 성도의 확실한 구원의 보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시대의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큰 위로의 메시지라는 것이다.
결 론
많은 신학자들은 Barth가 기독교 정통 신학을 새롭게 도약시킨 공헌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Barth가 진정한 정통 신학의 공헌자라면 Barth의 신학의 풍미로 정통 신학이 풍성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Barth의 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기독교에서 정통 신학이 풍성해진 열매는 없다. Barth의 신학의 왕성해지면 정통 신학과 Calvin의 신학은 부정된다. Calvin과 Barth의 연관성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양자의 신학의 내용이 전혀 다른데, Calvin과 Barth의 신학적 연계성을 두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바르트가 제시한대로 정통 신학과 - 어거스틴과 칼빈 - 전혀 다름으로 진술하는 것이 바르트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될 것이다.
Barth의 신학의 내용은 어느 부분에서도 Calvin을 계승했다고 볼 수 없다. 첫째, 바르트와 칼빈이 신인식을 하는 수준과 방법에서도 전적인 차이가 있다. 먼저 인간의 상태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는 한계성을 갖은 인간이다. 이 한계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있는 인간 본성이다. 선지자, 사도, 그리고 나사렛 예수까지 한계성을 갖은 인간이며, 참 인간이다. 이 인간이 행하는 하나님의 관한 언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계시의 증인들의 기록, 그리고 Kanon에 근거해서 선포되어지는 인간의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발생한다. 이 발생으로 “죄인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 확정된다. 이 성경적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으로 바르트가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동참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에로 동참하는 인간 앙양이 이루어지는 것이 선택론의 귀결이다. 그러나 칼빈의 인간 이해는 전적 부패로서 도저히 신지식에 이를 수 없는 절대 절망의 상태이다. 절대절망은 바르트와 동일한 규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교만이 있는 상태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고,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구속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 칼빈은 이 인식의 도움으로 “성경”을 제시하며, “성령의 내적 조명”을 제시한다. 성령의 내적 조명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통해서 신자에게 내주하게 됨으로 신지식을 위해서는 구속주를 아는 것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비록 구속주를 아는 지식이 기독교강요 II권에 등장한다할지라도, 실재적으로 선행한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한 뒤, 창조주를 아는 지식과 구속주를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부패와 무능을 해결하는 의사로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다. 바르트와 칼빈의 논리 전개와 내용이 얼마나 다른지를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두고 비교한다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Barth는 Calvin이 이해하는 전통적 삼위일체 방식과 기독론 이해 방식은 두 신을 설정하는 우상숭배라고 결론짓는다. 말씀에 대한 개념, 성찬, 각 개념들에게서 Barth의 신학은 오히려 Luther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Calvin과 Barth의 비교 연구는 상이점에 대한 연구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며, Barth와 Luther의 유사성에 대한 연구 과제를 낳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의 정도는 있지만,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인정하지 않는, 아리우스, 슐라이에르막허와도 동일한 기독교 사상이라고 평가될 수 밖에 없다. Barth는 아리우스, 이스마엘, 에서, 이스라엘, 가룟 유다는 작정 안에 있는 자로 제시하지만, 정통 신학의 삼위일체(동일본질) 우상숭배로 배격한다. 이에 대해서는 Van Til의 제시와 일치한다.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이끈 20세 최고의 신학자로 정평되어 있다. 그리고 정통신학을 부활시킨 공로자로까지 평가되는 지극히 기독교 신학자이다. 또한 칼빈과 연결되어 신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구체화시킨 신학자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바르트가 자유주의를 거부한 이유는 신학의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윤리 문제에서 비롯된 계기에서 윤리를 수정함에 그치지 않고, 신학을 재편성하는 길로 들어간 우발적인 신학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가 슐라이에르막허의 자유주의 신학을 부정했다고 하지만, 신학의 내용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함께한다. 그러나 칼빈의 내용에 대해서는 - 성경 이해, 삼위일체 이해, 그리스도 양성 이해 - 인정되는 부분이 전혀 없다. 바르트의 제시로는 칼빈을 존경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제시하였다. 그렇다면 바르트와 칼빈을 연결할 수 있겠는가? 바르트를 정통 신학을 떠난 자유주의 신학의 완성자, 삼위일체 교리를 참조로 삼은 슐라이에르막허의 신학의 맹점을 극복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변개한 삼일성의 교리로 완성시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바르트의 선택론에서는 인간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제시한다. 그래서 예수는 Electing God으로서 모든 백성을 선택하게 된다. 이 개념에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 차이를 제시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모든 인간의 표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가장 충실히 순종한 인간 예수로서 죽음까지 순종하는 것이 신적 행동임으로 Electing God이 된다. 그리고 선택된 인간으로 모든 사람이 유기됨을 십자가에서 계시한다. 그러나 십자가가 부활이 됨으로 유기가 극복되어짐을 계시하는 Elected man으로서 예수이다. 바르트는 인간의 유기를 대신 감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마엘(Ismael), 에서(Esau), 사울(Saul), 가룟 유다(Iscariot Judas)는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실재적인 유기의 효력은 없다. Calvin의 예정 이해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하심이다. 아들이 선택한 백성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로 인도함이 예정이며, 선택된 백성들이 주(主) 앞에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Calvin에게는 성경의 제시대로 이스마엘, 에서, 사울, 가룟 유다등은 유기된 자로 명시적으로 제시한다.
Barth는 폐지되어야 할 종교를 “깨부술 우상숭배(fabrica idolorum)” 혹은 “히드라(the Lernaean hydra)”로 제시하며, 볼테르의 표어와 동일하게 Ecrasez l'infame!를 외친다. 바르트가 폐지되어야 할 유일한 적으로 생각하여 대항하고 깨부셔야 할 대상은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동일본질로 믿고 있는 정통 신학뿐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통 신학의 신성 이해를 두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기독교 유신론인 삼위일체 교리는 참으로 사탄적 종교로 규정된다. 즉 바르트의 Numinose를 신성으로 인정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실체의 신성 이해를 견지하는 것이 칼빈의 신학의 내용이다. 칼빈은 그의 당대의 교회의 교리를 모욕하는 무리들에게 강한 거부의 독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니케야 공회의의 제시대로 저주의 선언을 하는 것보다 약한 독설일 것이다. 바르트의 종교의 폐지의 주장과 칼빈의 독설은 서로가 화합될 수 없는 저주이다. 칼케돈 공회의에서는 씨릴과 네스토리우스의 두 진영 중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씨릴의 견해를 인정했다. 비록 네스토리우스의 의견이 칼케돈 공회의에 반영되었지만 정죄 받았다.
그러므로 본 논물의 최종 결론으로 칼 바르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 특별히 신성 이해에 대한 신학적 연속성 혹은 어떠한 개연성을 두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바르트와 칼빈의 신학은 근거가 전혀 다른 신학으로서 두 신학자의 동일선상에서 연관지으려는 것은 부당하다. 바르트의 신학과 칼빈의 신학을 연결시키는 것은 바르트의 지적대로 화합될 수 없는 것이며, Ecrasez l'infame!되어야 할 것이다.
칼 발트와 죤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연구 = (A)comparative study on the understanding of Jesus Christ of Karl Barth and John Calvin
https://www.riss.kr/link?id=T11334096
- 저자 고경태
- 발행사항 서울: 총신대학교, 2007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총신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조직신학전공 2007
- 발행연도 2007
- 작성언어 한국어
- 주제어 조직 신학[組織神學]
- KDC 232 판사항(4)
- DDC 232 판사항(21)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xi, 397 p.; 26 cm
-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p. 382-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