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는 ‘자연신학’을 부정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에밀 브루너와의 자연신학 논쟁에서 바르트는 ‘아니오(Nein)’라고 강력하게 거부했다. 자연신학이란 ‘성경 외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자연신학 논쟁은 ‘자연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부정했다면, 바르트는 ‘죽은 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르트는 죽은 개나 러시아의 관현악단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부정한다고 했다. 브루너는 자연에 계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바르트는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있음(ist/to be)’과 ‘발생(werden/become)’의 차이이다. 항상 자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브루너의 주장을 배격하고, 하나님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자기 계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발생하는 계시는 자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Gottes Wort)이다. 은폐된 것을 드러내고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 바르트의 계시 이해이다. 필자는 역할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촉매제를 구도화한 것으로 이해했다.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부정했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존중한 신학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브루너는 합리적으로 신학(확정적)을 전개했고, 바르트는 신비주의(불가지론적)로 신학을 전개한 것이다. 브루너는 동정녀 탄생과 같은 합리적이지 않은 성경 내용을 확실하게 거부했고, 바르트는 인정도 거부도 하지 않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Ubi et quando visum est Deo)”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거부하고, 성경 무오성도 거부한다. 그러나 자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발생할 수 있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했다.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이 바르트 신학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성경의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을 오류가 있는 가르침으로 규정했다(KD., I/2, 583). 바르트에 의해서 무오성(Inerrancy, 無誤性)과 무류성(Infallibility, 無謬性)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무오(無誤)와 무류(無謬)는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무오’라는 단어는 신학전문용어이고, ‘무류’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있는 용어이다. 실수(失手)와 오류(誤謬)는 상당히 큰 의미 차이가 있다. 오류는 논리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papal infallibility는 교황 무류설로 번역한다. 무류(Infallibility)는 발생 후 전개 과정에 관한 사안으로 볼 수 있고, 무오(Inerrancy)는 발생 전 단계에 관심을 둔다. ‘성경 무오’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제작되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성경 무류’는 성경은 계시 문서이지만 후에 하나님이 발생시킨 계시에 오류가 없다는 개념이다. 개혁신학은 무오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부족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성도의 세움은 은혜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 바르트는 무류(Infallibility)한 성경과 신문, 자연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시점에 세운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성경 무류에서는 반드시 성경이 무오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 무오에서는 해석자의 능력이 아닌, 성경의 저자께서 붙드시는 은혜에 부착하도록 한다. 개혁신학은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고백하며, 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 정진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만이 절대자이기 때문에 바른 해석보다 하나님의 흔듦이 더 긴요하게 필요하다.
바르트에게 성경은 오류가 있음과 없음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만약 바르트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오류가 있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하신다면 성경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행위’와 ‘문서인 성경’을 비교할 수 있겠는가?
개혁신학은 왜 성경 66권으로 신학을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바르트의 불가지론적 주장에 함몰되기 쉽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톰 라이트가 하였다. 에베소서는 바울 서신이 아닌 것으로 분류될 때도 있지만, 톰 라이트는 바울 저작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런데 라이트에게 있어서는 에베소서의 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단일 계획(God's single plan)이란 거대 도식(schema) 아래서는 그런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에게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르트의 삼중 계시는 계시자(revealer, 성부), 계시(revelation, 예수 그리스도), 계시 내용(being revealed, 성령)으로 통상 이해한다. 성부를 ‘창조자(Creator)’로, 성자를 ‘화해자(Reconciler)’로, ‘성령’을 ‘구속주(Redeemer)’로 제시한다. 바르트의 가장 큰 변경은 구속주를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령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구자도 그 변이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구속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은 구속주가 될 수 없다. 바르트는 구속주를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령으로 바꾼 개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개인의 의견을 따를 것인가, 공교회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를 고지(告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