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4. 삼중직 형태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1.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
§4. 삼중직 형태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1.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 Karl Barth / 기독교 연구 |
§ 4 Das Wort Gottes in seiner dreifachen Gestalt (89-128)
"Die Voraussetzung, die die Verkündigung zur Verkündigung und damit die Kirche zur Kirche macht, ist das Wort Gottes. Es bezeugt sich in der heiligen Schrift im Wort der Propheten und Apostel, denen es ursprünglich und ein für allemal durch Gottes Offenbarung gesagt wurde."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I/1> § 4 삼중적 형태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 교회 세움에 대한 자기 견해 => 복음 선포로 된다. 그런데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으로 되는 것(a way)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Voraussetzung, 억설(臆說))로 한다.
전제는 증명하지 않고 확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교회의 가르침(사도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개인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바르트가 세운 전제를 살펴보면 된다. 첫째 전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한다. 세움에 관심이 없고, 전제에 관심을 둔다.
교회의 선포가 신적 위임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시적인 위탁에 대한 근거를 밝히지 않는다. 왜 목사는 교회에서 선포행위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자기 믿음의 대상이 있는가? 바르트는 믿음의 대상에 관심이 없고,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인간이 선포에서 임의적인 때에 하나님의 자기객관화를 만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기객관화가 드러날 때에 대상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확정되며 확장된다.
선포하는 주체로 선포된 객체에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 진술이다. 선포된 객체를 드러낼 수 없고, 신이 자유롭게 자기를 드러내는데 대상 지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132쪽). 기독교 신학에서도 대상 지식은 많지 않고, 오직 하나, '삼위일체' 뿐이다. 선포로 신에게 복종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단하도록 하는 현상이지, 신 자체로 가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 신학에서 Coram Deo는 불가능하다.
바르트는 사건을 옷입음으로 이해했다. 신약신학에서 옷입음에 대한 연구가 많다. 그것은 성경신학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바르트가 제시한 옷입음에 연계되어 성경본문을 연구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옷입음을 사건자체로 선포가 참된 것으로 확고하게 되고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했다(132쪽). 그런데 참되고 현실화된 구체적인 정보 문장은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시의적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상 지식이 없을 때에는 자유롭게 유희가 가능하다. 바르트는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신적 현실 속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제시한다(133쪽).
menschlicher Wirklichkeit kaum verborgen, nackte, göttliche Wirklichkeit göttliche Wirklichkeit
Verkündigung - 선포
칼 바르트는 교회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로 했다($4. 삼중적 형태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1.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
2.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3.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4. 하나님의 말씀의 통일성..이다.
선포와 교회 . 그때 그때에 현존 Dasein.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가시적으로 현존한다. 성만찬에서는 실재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잇다.
바르트는 선포에서 교회로 되는 상관성이 있는 4 개의 동심원을 제시했다(127쪽, KD I/1., 90). vier konzentrischen Kreisen, 4 concentric circles
* 바르트는 두 개의 동심원(국가와 교회의 관계), 사회에서 인간이 생존하는 구조이다. 루터의 두 왕국론(Doctrine of the two kingdoms, Zwei-Reiche-Lehre)과 연결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장로교는 <그리스도 통치설>(Koenigsherrschaft-Christi-Lehre)을 견지한다.
* 서양 언어에는 '없다'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있음이 있고, 없음은 있지 않다"로 쓰인다. 유무(有無)
Existnez
Sein - 존재, 있음
Sosein - 그렇게 있음
Dasein - 여기 있음
1. 위탁, 선포의 필연성 , 신적인 위탁과 인간적 동기유발이 있다. -> 신이 교회에 선포를 위탁했다는 증거가 어디있는가? '교회'가 언제 설립(시작)되었지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가 현실적인 선포이기 위해서 선포에 주어져야 하는 분으로서 대상이다(130쪽). -> 대상은 자기객관화에 의해서 그때그때(je und je)에 진술의 대상이고자 하며, 기뻐함에 의한 대상이다(131쪽). -> 대상은 발생하는 현상이지 대상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판단이니, 이에 힘입어서 선포는 오직 현실적인 선포일 수 있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가 현실적인 선포로 되는 그 사건 자체이다. 옷입음과 조명.
선포하는 인간의 의지와 수행은 현실적인 선포에서 전혀 제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참인간이 되었고 또 전적으로 영원히 참인간으로 머물러 있듯이 현실적 선포는 모든 다른 인간적 사건들의 지평에서 사건으로 된다(133쪽).
바르트가 이해하는 예수 이해. 바르트는 '영원히 참 인간'으로 머문다고 제시한다(133쪽). 바르트는 인간 행위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발생한다고 구도했다(133-134쪽). 불순종에 있는 인간적인 것은 대립된 것으로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봉사할 때 하나님의 현존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창조자 능력의 탁월성은 하나님의 의지로 진행한다(134쪽).
새로운 사건(neues Ereignis), das Ereignis des Sprechens Gottes selber in der Sphare menschlicher Ereignisse, das Ereignis des bevollmachtigten Vikariates Jesu Christi. 새로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적인 대행 사건으로 된다(134쪽, KD, I/1., 97).
성찬의 신비.. 빵과 포도주.. 그대로 있는 빵과 포도주에서 갖는 성례전의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르트의 그리스도의 전권적인 대행 사건으로 현존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제의 직무 능력, 교회의 능력potestas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변화에 대해서 쯔빙글리처럼 기념설을 견지하는가? 루터파의 공재설, .. 그러한 신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복음 이해와 깊은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의 신비에 머물면 안 되지만, 침묵의 신비로 가지 않으면 기독교의 신비를 이룰 수 없다(고경태). 행동과 신비, 칼빈은 경험을 강조했다. 행동과 신비(헛된 사색의 경계선)를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