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는 교회에서 신학을 산출하지만, "교회 이전 신학 이전에 신학"이 있다고 제시한다(28).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에 관한 말이(Reden von Gott) 있었다. 교회는 신학 이전의 신학과 전혀 다른 척도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근원과 대상이 바르게 되는 조건에서 신학은 교회에서 인정된다. 그런데 교회에 있는 신학은 잘못할 수 있는 인간이 세운 것을 구체적으로 회상해야 한다. 인간의 과업의 합당성(객관성)과 불합당성은 은혜에 대한 복종에 있다. 신학은 교회와 하나님의 집에서 수행하는 것으로 교회의 말을 수반한다.
[-> 발트는 교회 밖에도 신학이 있다고 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집’을 구분한다. ‘교회 이전에 신학’’은 발트의 독특한 개념이다. 그런데 교회 이전의 신학은 교회가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하나님의 집의 신학을 동일하게하려는 것이다.]
발트 신학 방법의 시작은 “세 동심원(drei Kreisen)”이다(29). [※박순경은 Kreisen을 ‘영역’으로 번역하였는데, ‘동심원’이라는 개념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세 동심원이 상호 교차하면서 진행한다. 새 동심원은 삼중적인 구조인데, 하나님에 관한 말과 교회 존재와 합일에 대한 물음인데, 그 중심은 기독교적 말의 규범에 있다.
발트의 신학을 ‘그리스도 일원론적“ 경향이라고 말하는 근거이다. 발트의 그리스도 중심의 전개는 이론 전개를 동심원으로 하면서, 그 중심을 그리스도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이고, ’1-30년간 살았던 예수‘로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발트는 ‘삼중적’ 전개를 신학 전개 방법으로 세웠고, ‘계시 이해’(계시의 삼중성)에서도 적용하였다. 그리고 ‘하나님’(하나님의 삼중성, Threeness in oneness)에서도 적용하였다. 삼중적 의미를 세워서 학문적 추구(wissenschaftlichen Unternehmens)를 하는데, 인간적 추구가 학문의 실천적 영역이다.[※박순경은 ‘기도’로 번역하였는데, 기도(冀圖)인데, 기도(祈禱)로 오해될 소지도 있고, 추구(追究)라는 단어로 제안한다.]
발트는 신학의 특수성이 있다고 이해하면서 거부하였다. 그래서 제 학문과 상호 작용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관한 말에서 일어나게 할 수 있기를 제안하였다. 신학은 특수한 열쇠나 문이 될 수 없음을 정의하였다(Befindet sich doch die Theologie wirklich im Besitz besonderer Schlüssel zu besonderen Türen!, KD I/1, 3) 신학의 특수성이 제거된 근거가 예레미야 31:34의 성취로 제시하였다. 발트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않음’과 ‘죄를 기억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세속 철학이 더 이상 세속 철학이나 이단(profane, pagan)이 더 이상 이단이 아니며, 기독교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이 될 수 있다(30).
[-> 발트는 세속철학, 이단 주장까지 포함한 기독교 철학 구성을 시도함을 표방한다. 이것을 위해서 신학의 특수성 즉 교회 안에 제한 규정을 제거시켰는데, 개인주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