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신학&개혁신학

제2 스위스신앙고백서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

형람서원 2013. 7. 2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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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스위스신앙고백서와 불링거(Heinrich Bullinger)

Zwingli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불링거(1504-1575)는,
...
독일계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학자이자 목회자였다.
Aargau의 Bremgarten에서 태어나, 네델란드와 Corogne에서
교부신학과 스콜라신학을 공부했으며, Luther의 저술들과
Melanchton의 "신학대전(Loci communes)"에 심취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Zwingli와 만나 동료가 되었고,
Bern종교회의(1528)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Chapel과 Bremgarten에서 사역하다가, Zwingli의 뒤를 이어
1531년 12월 9일 Zurich의 수석목사가 되었다.

그는 서신교환으로 유럽 각지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탁월한 학문적 이해와 신앙적인 삶은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매우 모범적이었다. 특히 영국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은 특별한데,
메리여왕의 통치기간(1553-1558)에 있었던 대대적인 박해를 피해
많은 영국의 개혁자들이 그의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박해가 끝나
영국으로 돌아가 종교개혁을 이끌면서, 불링거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인격도 매우 훌륭하여, 이단자였던 Sozino에게도 관대하게 대해
그의 이단적인 사상을 버리도록 힘썼다.

말년의 불링거는, 자신의 가까운 동료들의 잇다른 죽음(Bibliander,
Proschauer, Peter Martyr, Pelikan, Gesner, Calvin, Hyperius)과
아내를 비롯한 세자녀의 죽음에 이어, 자신마저 흑사병과 싸워야 했다.
은혜로 흑사병의 병고에서 나온 불링거는 다시 교회와 학교로 복귀해
죽는 날까지 성실히 사역을 감당했다.

로마카톨릭교회가 트렌트종교회의를 열어 자신들의 교리를 확정하자,
가장 믿을만한 동료였던 Geneva의 Calvin의 도움을 얻어 30년에 걸친
작업 끝에 1562년 제2스위스신앙고백서(제2헬베틱고백서라고도 함)
를 완성하였다. 이 고백서는 불링거의 말년에서야 Peter Martyr에게
처음 보여주었으며, 자기가 죽거든 Zurich시장을 통해 공개해 줄 것을
당부하는 글을 동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고백서는 불링거의 사망 이전에 빛을 보게 되었다.
독일 팔츠의 경건한 선제후 Fridrich 3세의 명으로 제작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1563)"의 공표로 인해
루터파로부터 난처한 입장에 놓이자, 불링거에게 도움을 요청(1565)하여,
보다 분명하게 변호할 고백서를 제작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불링거는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필사하여 보내주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회의 이전에
독일어와 라틴어로 출판되도록 하였다.(1566년 3월 12일)

제2 스위스신앙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나오기 전까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와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되던 신앙고백서였다.
너무 간략한 "제1스위스신앙고백서", 성찬과 예절에 치중되었던 "쮜리히
신앙고백(1545)", "쮜리히신조(1549)", "제네바신조(1552)"의 부족함을
채우고 개혁교회 신앙의 전반적인 부분을 다룬 신앙고백서가 필요하였다.
이 신앙고백서가 발표되자, 그때까지 개혁교회이면서도 개혁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던 Basel이 합류하게 되었으며, 헤센영주 Philip을 비롯한
개혁영주들의 동의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1566년 아우구스부르크에 모인
루터파로부터 개혁교회는 이단이 아닌, 정통교회로 인정받게 되었다.

- 16세기 종교개혁정신을 가장 잘 담은 신앙고백서로 평가받는 "제2스위스신앙고백서"는 당시 개혁교회의 신앙과 삶을 변호하는 기능을 잘 수행하였습니다.

 

페이스북에서 김종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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